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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아름다운 시 모음 (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 광 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백제행

 

- 이 성 부

 

 

잡허 버린 몸

헛간에 눕혀져

일어설 줄 잊었네.

 

고요히 혀 깨물어도

피흘리는 손톱으로 흙을 쥐어뜯어도

벌판의 자궁에서 태어난 목숨

그 어머니인 두 팔이 감싸주네.

 

이 목마른 대지의 입술 하나,

이 찬물 한 모금,

죽은 듯 다시 엎디어 흙에 볼을 비벼 보네.

해는 기울어

쫓기는 남편은 어찌 됐을까?

 

별들이 내려와 그 눈을 맑게 하고

바람 한 점

그 손길로 옷깃을 여며 주네.

 

어둠 속에서도

눈밝혀 걸어오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귀에 익은 두런거림.

 

먼 데서 가까이서

더 큰 해일을 거느리고 사랑을 거느리고

아아 기다리던 사람들의

돌아오는 소리 들려오네.

 

 

 

저문 강의 삽을 씻고

 

- 정 희 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물 속의 사막

 

- 기 형 도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단칸방

 

- 허 수 경

 

 

신혼이라 첫날 밤에도

내 줄 방이 없어

어머니는 모른 척 밤마실 가고

 

붉은 살집 아들과 속살 고분 며느리가

살 섞다 살 섞다

구비 구비야 눈물 거느릴 때

 

한 짐 무거운 짐

벗은 듯 하냥 없다는 듯

어머니는 밤별무리 속을 걸어

 

신혼부부 꿈길

알토란 같은 손자 되어 돌아올꺼나

곱다란 회장 저고리 손녀 되어

풀각시 꽃각시 매끄러진 댕기 달고

신혼 며느리보다

살갑게 돌아올꺼나

사랑한다는 것으로

 

- 서 정 윤

 

사랑한다는 것으로

새의 날개를 꺾어

너의 곁에 두려 하지 말고

가슴에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어

종일 지친 날개를

쉬고 다시 날아갈

힘을 줄 수 있어야 하리라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 서 정 주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내가 아직 못다 부른

노래가 살고 있어요.

그 노래를

못다 하고

떠나 올 적에

미닫이 밖에 해 어스름 세레나아드 위

새로 떠 올라오는 달이 있어요.

 

그 달하고

같이 와서

바이올린을 켜면서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 안 나는

G선의 멜로디가 들어 있어요.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전생의 제일로 고요한 날의

사돈댁 눈웃음도 들어 있지만

우리 님의

손톱의

분홍 속에는

이승의 비바람 휘모는 날에

꾸다 꾸다 못다 꾼

내 꿈이 어리어 살고 있어요.

 

 

임진강

 

- 신 경 림

 

 

강물이 쇠줄에 꽁꽁 묶여 있다

아가미와 사타구니에 쇠막대를 꽂고

철철 시뻘건 피를 흘린다

등가죽의 비늘이 쇠붙이와 화약의

번들거리는 독으로 뒤범벅 되어

입과 코에서 내뿜는 독한 김이

천리 안팎 풀을 누렇게 말리고

거꾸로 제 몸에 흉한 상처를 낸다

전쟁이 나던 날처럼 비가 오면

손발 묶은 쇠줄을 끊겠다 몸부림치며

온몸에 밴 독을 토해내느라

목청껏 소리를 뽑기도 한다

그러다가 미친 듯 강 밖으로 뛰쳐나와

묶인 손으로 들판을 할퀴며 운다

똑같이 쇠줄에 꽁꽁 묶여 철철

시뻘건 피를 흘리며 이 땅에 사는

가엾은 사람들을 할퀴며 운다

강변 바닥에 돋는 풀

 

- 이 성 복

 

강변 바닥에 돋는 풀, 달리는 풀

미끄러지는 풀

사나운 꿈자리가 되고

능선 비탈을 타고 오르는 이름 모를 꽃들

고개 떨구고 힘겨워 조는 날,

길가에 채이는 코흘리개 아이들

시름없는 놀이에 겨우 먼 데를 쳐다볼 때

 

온다, 저기 온다

낡은 가구를 고물상에 넘기고

헐값으로 돌아온 네 엄마

빈 방티에 머리 베고 툇마루에 누우면,

부스럼처럼 피어나는 온동네 꽃들

가난의 냄새는 코를 찔렀다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

 

- 이 성 복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

저 하늘엔 밀고 밀리는 배들,

정다운 사람들은 명절날처럼 성장(盛裝)하고

떡과 과일을 나누고

나뉘는 슬픔의 몫도 아름답다

고통 다음에 돌아와

저무는 들판을 양팔로 껴안고

저미는 벌레 소리에 머리 수그리면

마침내 괴로움이 켜 드는 불,

저 하늘엔 밀고 밀리는 배들,

착한 어버이들이 모여 앉아

맑은 술을 나누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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