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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시

아름다운 시 모음 (3)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A.S.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나니.

 

 

 

 

북청 물장수

 

- 김 동 환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드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북청 물장수를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취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북청 물장수.

 

성북동 비둘기

 

- 김 광 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김 수 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목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라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농무

 

- 신 경 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가난한 사랑 노래

 

- 신 경 림

 

-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 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문의 마을에 가서

 

- 고 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다다른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이 세상의 길이 신성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달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소백산맥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빈부에 젖은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끼고 서서 참으면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꽉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무덤으로 받는 것을

끝까지 참다 참다

죽음은 이 세상의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 본다.

지난 여름의 부용꽃인 듯

준엄한 정의인 듯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나면

우리 모두 다 덮이겠느냐.

 

 

 

 

우리가 물이 되어

 

-강 은 교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만월

 

- 이 시 영

 

 

누룩 같은 만월이 토감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에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 속에 숨 죽인 갈대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이 름

 

- 이 시 영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췄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우리는 누구인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대낮의 숨통을 조이는 것이

형제의 찬 손일지라도

언젠가는 피가 돌아

고향의 논둑을 더듬는 다순 낫이 될지라도

오늘 조인 목을 뽑아

우리는 그에게로 가야만 한다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부르다가 쓰러져 그의 돌이 되기 위해

가다가 멈춰 서서 그이 장승이 되기 위해

 

 

 

사평역에서

 

- 곽 재 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앗다

산다는 것이 때로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섬진강 ·12

 

- 김 용 택

 

- 아버님의 마을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리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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