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창 우
1
너를 보내는 들판에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 것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 길로
2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외로움 견디며 살까
이젠 그 누가 있어 이 가슴 지키며 살까
아, 저 하늘의 구름이나 될까
너 있는 그 먼 땅을 찾아 나설까
사람아, 사람아
내 하나의 사람아
이 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간다네
- 백 창 우
그 어느 무덥던 여름 끝무렵 우리의 사랑은 시작되었습니다
서로의 빈 자리를 채워주며 함께 꿈꾸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제 우리는 한 그리움을 안고 삽니다
'그대'는 '나'이며, '나'는'그대'입니다
그대의 슬픔과 기쁨은 나의 슬픔과 기쁨이며
나의 눈물과 웃음은 그대의 눈물과 웃음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우리의 사랑은 그 빛을 더해갈 것입니다
그 어느 어둠도 우리는 이겨낼 것입니다
간다네, 이제 우리는 함께 간다네
구비구비 힘겨운 삶의 고갯길을 넘어간다네
누가 알까, 우리의 사랑
우리의 끝없는 그리움
날마다 새롭게 시작되는 우리의 사랑
그대 착한 눈 속엔 고운 미리내 흐르고
그대 어진 눈 속엔 푸른 소나무 한 그루
우리의 가난한 마음 깊은 곳엔 예쁜 해 하나 있어
늘 서로를 따뜻이 비춰준다네
간다네, 이제 우리는 함께 간다네
구비구비 아득한 삶의 고갯길을 넘어간다네
꿋꿋이 꿋꿋이 살아가려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우리의 조그만 사랑에서부터 시작된다네
살자꾸나
- 백 창 우
1
빈 들판을 달리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세월을 노래하며
살자꾸나, 우리 살자꾸나 꿈이 슬픈 내 벗들아
큰 산을 넘어가는 구름처럼 터벅터벅 온 땅을 떠돌며
살자꾸나, 우리 살자꾸나 꿈이 착한 내 벗들아
달려라 바람아, 한 세상 달려라
이 빛 저 빛 삼키며 한 숨결 달려라
하늘 높이 날으는 매처럼 묵묵히 세월을 다스리며
살자꾸나, 우리 살자꾸나 꿈이 높은 내 벗들아
2
무덤터에 춤추는 풀잎처럼 이 힘겨운 세월을 이겨내며
살자꾸나, 우리 살자꾸나 눈이 슬픈 내 벗들아
밭둑에 홀로 핀 할미꽃처럼 이 외로운 세월을 참아내며
춤춰라 풀잎아, 한 세상 춤춰라
이 빛 저 빛 어우러려 한 마당 춤춰라
바다 위로 떠오르는 해처럼 뜨겁게 세월을 사랑하며
살자꾸나, 우리 살자꾸나 눈이 맑은 내 벗들아
그래, 그런거겠지
- 백 창 우
1
그래, 그런거겠지
산다는게 뭐 그런거겠지
새벽녘 어머니의 바튼 기침처럼
그렇게 안타까운 때도 있는거겠지
그래, 그런거겠지
산다는게 뭐 그런거겠지
장마철 물이 새는 한낮의 짧은 잠처럼
그렇게 어수선할 때도 있는거겠지
아무렴 삶의 큰 들에 고운 꽃만 피었을라구
그래, 그런거겠지
산다는게 뭐 그런거겠지
2
그래, 그런거겠지
산다는게 뭐 그런거겠지
해거름 늙은 농부의 등에 얹힌 햇살처럼
그렇게 쓸쓸할 때도 있는거겠지
그래, 그런거겠지
산다는게 뭐 그런거겠지
겨울밤 연탄불이 꺼진 구들방처럼
그렇게 등이 시려울 때도 있는거겠지
아무렴 삶의 긴 길에 맑은 바람만 불어올라구
그래, 그런거겠지
산다는게 뭐 그런거겠지
너그러운 강
- 박 세 현
정선 읍내를 감아도는 조양강이
너그러운 팔과 가슴으로 사람들을 안아들인다
덕우리 애산리 북실리 숙암 백전
생탄 나전 역둔 망하 회동 벽탄으로 가기 위해
작고 큰 보퉁이를 들고 모여 선 사람들의
풀 같은 삶을 거두어들인다
아침이면 덜 걷힌 안개 속에서
새들은 재빨리 날아오르고 비봉산은
천천히 걸어내려와 읍내를 산보한다
사람들은 단지 살아가기 위해
골골에서 모여들고 다시 왔던 길로 흩어진다
풀처럼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안아주며
너그러운 강은 아침마다 가슴을 연다
아우라지호 선장
- 박 세 현
눈이 올라나 비기 올라나 흥얼거리는
아라리 가락은 강물에 되비쳐
은근한 빛으로 다시 솟아오른다
아우라지호 선장 김종규씨
장보고 돌아가는 할머니 태우고 뱃줄을 댕긴다
감자말이나 팔고 가는 여인네를 댕긴다
문닫은 광산을 떠나는 식구들을 댕긴다
낮부터 취한 객지 청년을 댕긴다
운명의 힘줄을 댕기듯 밤낮없이 뱃줄을 댕긴다
모두들 댕겨주고 싶다 인연의 줄로 댕겨주고 싶다
컬컬한 목에 막걸리 한 사발 부어나 볼까
아이들 학비라도 보태볼까 밭뙈기 밀쳐두고
사공이 되었지만 어째 이 짓도 재미가 덜하다
툭하면 군에서 떠들고 면에서 떠들고 지서에서 떠들어
사는 게 아우라지 강물에 배 지나가듯 쉽지가 않다
천금 같은 가을 햇살이 쨍쨍이며 물바닥에 가라앉고
그 위에 김종규씨가 댕겼던 무수한 뱃줄이 보인다
아버지
- 박 세 현
학교서 돌아오다 아버지를 봤어
김치밖에 싸간 것이 없는 도시락 통에서
아버지처럼 배싹 마른 젖가락 두 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내 뱃속에서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어
탄 캐느라 아버지 어깨가 처졌다는 것은 나도 알아
하지만 날로 더 기울어지는 어깨는 그것만이 아니야
엄마 잔소리도 아버지 어깨를 짓누르고 있을 거야
그래도 아버지 힘을 내야 해
아버지는 갱별 대항 씨름대회에서 두 사람을 이겼잖아
그건 아버지의 자랑이야
나도 애들에게 자랑했어
우리 아빠 천하장사라고 말이야
아버지 힘내 내가 있잖아
내가 크면 나쁜 나라 사람들을 이겨줄 거야
아버지 어깨를 무겁게 한 사람들을 혼내줄께
그렇지만 엄마는 미워하지 마라
어머니는 아버지만 사랑한다는 걸 나는 잘 알아
오늘 아침도 아버지 도시락엔 달걀 후라이 들어갔잖아
삶이 나를 속이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속아주고 있는 것인가
- 장 석 주
추악과 연민의 사이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다가
그림자 하나 드리워져 있어서
거기 당신 계실 거라고
의심 없이 믿어 버리고 말았지요
그런데 거기 헌 옷가지마냥 그림자 하나만 덩그러니 있을뿐
당신이 없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을 때
내 죽어 버리고 싶은 가슴에
미어지는 절망들만 거듭 휘황하게 꽃피어났습니다.
삶, 오 내 헛된 어머니·······
삶, 쓸쓸한 저쪽 3
- 장 석 주
엉터리 잡문 따위나 끄적거리며
사는 것
따분하다, 머리 위로 길게 구비치며 지나가는 햇빛·····
뜻 있을 수 없는 방뇨······
그리고, 길고긴 하품······
달동네 꽃동네
- 이 광 웅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생기는 것은 없고
그저 남 좋은 일만 하다가
병들고 죽어가는--
인정 넘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 부비며 모여 사는 동네이라서
그 이름도 어여쁜
우리의
달동네 꽃동네.
겨울 강가에서
- 안 도 현
어린 눈발들아,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 안 도 현
길이 없다면
내 몸을 비틀어
너에게로 가리
세상의 모든 길은
뿌리부터 헝클어져 있는 것,
내 마음의 처마끝에 닿을 때까지
아아, 그리하여 너를 꽃피울 때까지
내 삶이 꼬이고 또 꼬여
오장육부가 뒤틀려도
나는 나를 친친 감으리
너에게로 가는
길이 없다면
어머니
- 김 남 주
일흔 넘은 나이에 밭에 나가
김을 매고 있는 이 사람을 보아라
아픔처럼 손 바닥에는 못이 박혀 있고
세월의 바람에 시달리느라 그랬는지
얼굴에 이랑처럼 골이 깊구나
봄 여름 가을 없이 평생을 한시도
일손을 놓고는 살 수 없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좋아했다
자식 낳고 자식 키우고 이날 이때까지
세상에 근심 걱정 많기도 했던 사람
이 사람을 나는 사랑했다
나의 피이고 나의 살이고 나의 뼈였던 사람.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
- 김 영 환
알고 있다네
흘러갔다는 걸, 우리 노래가
아직 미처 다 부르지 못한
아쉬움조차
자네의 손바닥,
경쾌한 스탭에 얹혀지지 못한다는걸
무대에서 사라져
빛 바랜
팜플랫이 되어야 한다는 걸
조용히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고
눈짓하는 걸
그러나 자네여
우리는 우리의 노래를
부르려 하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을 위하여
지난 겨울을 나며
우리가 부른 그 노래를
소리죽여 다시
부르려 하네
그 노래 들어주던
돌배나무 한 그루
창밖에 꽃펴 환하게 웃고 있네
* 가수 정태춘님의 글에서
유년의 뜰 1
- 박 형 준
아버지의 들판에 허수아비가 누추한 하루를 정찰한다
적막을 감시한다 해가 지다 말고
붉은 얼굴로 창호지에 어른거릴 때 아버지는
도루코 칼끝으로 발뒤꿈치의 굳은살을 깎아낸다
빛을 다 깎아내고 한참 뒤에 어두워진 마당
마음의 지문처럼 해당화가 꽃진 자리에 붉은 열매를 달아놓는다
숟가락을 꼬옥 그러쥐고 무거운 공기를 파내듯
잔가시 가득한 몸을 가리고 잎은 달그락달그락
집을 밥그릇처럼 긁는 쥐소리와 함께 확대된다
따뜻한 다리를 꿈꾸며
- 신 현 림
꽃상여 같은 가슴 뒤흔들고
오래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다
언제 무엇이 산산조각난 시계가 될지 모른다
겨울나무만큼 여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해가 기울 때처럼
발 아래 땅이 허물어지는 기분을 어찌 견뎌야 할지
삐걱거리는 다리마다 문마다
저승으로부터 울려오는 오열이 흐른다
죽음보다 뼈아픈 슬픔을 이기려는 울음소리가
창밖 강물이 깃발처럼 굽이친다
사라진 자들이
희망의 호롱불을 켜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손을 잡듯
삶을 이어주고 만나게 하는
부드러운 다리를 만들라 한다
따스해서 끊어지지 않는 다리
헤어져도 헤어지지 않는 다리를
뭐든 다시 시작돼야 한다
엄마 걱정
- 기 형 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갈 대
- 정 호 승
오늘도 내 마음이 무덤입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강가에 살겠습니다
들녘엔 개쑥이 돋고
하루하루가 최후의 날처럼 지나가도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때는
또 일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눈물을 다하고 마침내 통곡을 다하고
광야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아도
누가 보자기를 풀어
푸른 하늘을 펼쳐놓으면
먼 길 떠나는 날 이 아침에
오늘도 내 마음이 무덤입니다
삶
- 정 호 승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이 될 때가 있다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릴 때가 있다
밤이 지나지 않고 새벽이 올 때
어머니를 땅에 묻고 산을 내려올 때
스스로 사랑이라고 부르던 것들이
모든 증오일 때
사람들은 때때로
수평선 밖으로 뛰어내린다
갈 대
- 신 경 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Scrap: 30 ~50 대 위하여(詩 사랑 음악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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