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애송시

아름다운 시모음 (1)

 


- 용 혜 원

 

 

어머니가

남 몰래 눈물을 흘리시는

아픔 속에 자란 내가

오늘은 어버이가 된 기쁨에

눈물을 흘립니다

어른이 된 뒤에야

삶의 깊은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을

보채며 투정만 부렸던 날들이

내 얼굴을 부끄럽게 합니다

꽃밭에서 꽃을 꺾어 달라는

나를 달래시며

두고 보아야

오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시던

어머니의 마음을

자식을 키워 가며

가슴 깊이 알았습니다

어머니!

이 아들도

각박한 이 세상에서

오래도록 버틸 수 있는 힘은

어머니를 닮았나 봅니다

 

붉은 강

 

- 김 영 현

 

천리 머나먼 고향 말머리

어머니 모시옵고

혼자 낙동강 강가에 앉았습니다.

늦가을 놀은

붉게 강물을 적시며 흘러갑니다

 

붉은 강은

머언 예나 다름없이 흘러갑니다.

등뒤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립니다.

그때 문득,

어린 나와 젊은 어머니 모습

놀 속에 떠오릅니다.

치마폭이 바람에 날려 자꾸

내 얼굴을 가립니다.

치마에서 엄마 냄새가 납니다.

강가의 옥수수밭

빈 껍데기만 서서 으석입니다.

어머니·······

무릎에 턱을 묻고

나 혼자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르던

그 이름

아프게 가만히 혼자 불러봅니다.

험난함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 이 정 하

 

 

기쁨이라는 것은 언제나 잠시뿐, 돌아서고 나면

험난한 구비가 다시 펼쳐져 있는 이 인생의 길.

삶이 막막함으로 다가와 주체할 수 없이 울적할 때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구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자신의 존재가 한낱 가랑잎처럼 힘없이 팔랑거릴 때

그러나 그런 때일수록 나는 더욱 소망한다.

그것들이 내 삶의 거름이 되어

화사한 꽃밭을 일구어낼 수 있기를.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고 슬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랑한다는 것

 

- 안 도 현

 

길가에 민들레 한송이 피어나면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오직 한 사람을 사무치게 사랑한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비로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차고 맑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우리가 서로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는 나의 세상을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

 

- 안 도 현

 

가난은

가난한 사람을 울리지 앉는다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보다

오직 한 움큼만 덜 가졌다는 뜻이므로

늘 가슴 한쪽이 비어 있어

거기에

사랑을 채울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므로

 

사랑하는 이들은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랑은 싸우는 것

 

- 안 도 현

 

내가 이 밤에 강물처럼 몸을 뒤척이는 것은

그래도 괴로워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창 밖에는 윙윙 바람이 울고

이 세상 어디에선가

나와 같이 후회하고 있을 한 사람을 생각합니다

이런 밤 어디쯤 어두운 골짜기에는

첫사랑 같은 눈도

한 겹 한 겹 내려 쌓이리라 믿으면서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어 쓰고 누우면

그대의 말씀 하나하나가 내 비어 있는 가슴 속에

서늘한 눈이 되어 쌓입니다

그대

사랑은 이렇게

싸우면서 시작되는 것인지요

싸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 벅찬 감동을 그 사람말고는 나누어 줄 길이 없어

오직 그 사람이 되고 싶다는 뜻인 것을

사랑은 이렇게

두 몸을 눈물나도록 하나로 칭칭 묶어 세우기 위한

끝도 모를 싸움인 것을

이 밤에 깨우칩니다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인 것을

아버지의 가을

 

- 정 호 승

 

아버지 홀로

발톱을 깎으신다

바람도 단풍 든

가을 저녁에

 

지게를 내려놓고

툇마루에 앉아

늙은 아버지 홀로

발톱을 깎으신다

 

눈내리는 김제만경

 

- 김 용 택

 

눈이 내린다

눈내리는 김제만경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대 만나리

봉준이 앉은키보다 낮게 엎드린 산 하나

길을 트며 넘는다

이 세상 가장 낮게 드리누워

이 세상 눈을 다 맞는 김제만경이여

누가 나를 부른다

누가 나를 불러

날 부르는 소리를 따라간다

내가 어디만큼 가서

날 부르는 소리를 부를 때

눈을 더 내리고

이 세상 길들이 모두 눈에 덮여

내가 넘어온 저 낮은 산도 덮이고

그대에게로 가는 길도

아우성으로 달려오는

눈발 속에 지금 사라진다

그대에게로 가는 길도 없고

이 세상으로 가는 길도 없다

내가 자꾸 그대를 부르다가

언뜻 뒤돌아보면

내가 넘어온 산너머

산 하나가 숨는다

드러누워 이 세상 눈을 다 받는 김제만경이여

나도 이제 부를 이름을 눈에 덮고

논 한다랑지로 하얗게 숨는다

그 위에 눈이 내린다

눈내리는 김제만경이여

여기서는 모든 길을 잃을 때만

이 세상을

새로 다 만나

그대를 부를 수 있다.

 

 

어머니1

 

- 김 초 혜

 

 

한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갈대를 위하여

 

- 정 호 승

 

눈보라가 친다 사라지지 마라

눈보라가 친다 흩어지지 마라

눈보라가 친다 길이 끊어진다

이미 살아갈 날들까지 길은 다 끊어진다

눈을 떠라 눈을 떠라 눈보라 사이로

언뜻언뜻 넋들을 내비치지 마라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눈보라 사이로

혼절한 발자국들을 남기지 마라

사랑이 깊으면 증오도 깊다

눈보라 사이로 밤열차는 지나간다

피리소리는 끊어지고 바람소리만 들린다

쓰러지지 않아야만 뿌리는 뿌리다

흙을 움켜잡고 있을 때만 뿌리는 뿌리다

갈대는 새벽에 울지 않는다

 

- 정 호 승

 

새벽 종소리가 들리는 사하촌에 첫눈이 내린다

산죽 잎새에 하얗게 내려앉은 함박눈이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어머니를 찾아가는 눈길에 붉은 피가 번진다

사람들이 손에 쥔 칼을 버리고 길을 떠난다

나는 마른 강가의 갈대숲에 나가

너를 기다리다가 다시 서서 죽는다

무심히 눈송이가 쌓인다

갈대는 새벽에 울지 않는다

강 물

 

- 정 호 승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 나 희 덕

 

덩굴이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벌들이 꽃에게로 접근하고 있다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라,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도, 우리조차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알지 못했으나

덩굴이 나무를 정복하듯이

꽃이 열매를 맺듯이

마침내 이루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의 숨은 눈을 통하여

마침내 붉은 열매가

우리를 넘어서 날아로를 때까지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 바렌찐 라스뿌찐의 소설 제목.

아버지의 등

 

- 나 희 덕

 

1

밤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업었다

인적 없는 길로하여 간호원의 집에서

주사를 맞히고 돌아오면 아버지는 우릴 보며 웃었다

금방 하늘에라도 오를 것 같던 어머니가

 그의 등 위에서 살아나고 있다고, 웃었다

숨었던 꽃이 하얗게 덩굴 위로 피어나고

얼었던 못물이 풀려 달빛에 반짝일 무렵

솔밭에서 바람은 불어와 살아 있는

내를 실어 온다며, 그는 웃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야곱의 이야기다

환도뼈가 쪼개져도 놓을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닥다리에 매달려 있는

새벽이 되자 나무로 자라 있는

그 등이 나뭇결처럼 단단해진

바위처럼 살아 있고

노래처럼 흐르는


2

그 짧은, 눈부신 밤길을

빛 하나도 없이 나는 왜 달리는가

들쳐업고 달리다보면

나의 등은

문득 거친 벼랑인 것을

거기에 날개 단 풀꽃 하나가

바람에 지쳐 우는데,

아무도 알 수 없다네

나의 등과 당신의 가슴이 만나는

수평선, 그 위로 떠오르는 별들을

별이 쏟아져내릴수록

싸움은 나의 일이 되고,

오늘도 당신을 들래들래 업고서

다리를 건너네

저만치 하얀 꽃들이 눈부신 들을

빛 하나도 없이

바람 한점 없이

다리를 건너네

 

 

북한강

 

- 박 몽 구

 

흐르는 물을 보면 안다

제아무리 싸리꽃 향기 가득 품었어도

한 자리 눅도록 지키지 않고

하얀 배를 뒤집으며

낯선 땅을 찾아가고

만지면 부서질 듯

파리한 안개꽃을 데불은 물이

그 자리에 들어와

봄을 꽃피우는 저 물을 보면 안다

하나가 목마르면 뒤에서 채워들어 와

졸졸졸 다시 굽이치게 하고

풀이 나지 않는 땅이면

하늘의 물을 불러

풀무더기 넘치게 하는

저 물을 보면 안다

저 혼자 신명에 겨워

연꽃이랑 고운 흙을 사랑하는 물은

며칠을 못 넘겨

원래의 저마다 못 지키고

썩어 다시는 꽃그늘을 잠그지 못하고

자리를 내주어 저를 뒤집어

멀리멀리 가는 물만이

새벽 바다에 닿는다는 것을

저를 버린 물만이

깨끗한 체온을 얻는다는 것을

입가에 주름 파인 얼굴 하나가

 

- 정 인 섭

 

죽기 위하여 참으로

죽기 위하여

제 몸에 불을 지르는 사람 보라고

저녁 참새떼가 나무 한 그루를

떠메어갑니다

황혼 깊숙이 죄를 감추고

바람 너머로 넋은 보내고

입가에 주름 파인 얼굴 하나가

나무 뽑힌 그 쪽으로 걸어옵니다

이때 별 하나 하늘에 나타나게 됩니다

 

 

흔들리며 피는 꽃

 

- 도 종 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옛집 지나다

 

- 도 종 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에 새털구름 떴습니다

우리 서로 다독이며 걷던 길가에 수수꽃다리 피었습니다

수수꽃다리 핀 걸 혼자 바라보는 동안 밤이 왔습니다

세월은 때가 되면 별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자리하고

세상도 꽃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피어 있는데

우리는 만날 수 없는 물줄기 되어 따로따로 흘러갑니다

겨울강

 

- 도 종 환

 

얼어붙은 강을 딸라 하류로 내려간다

얼음 속에 갇힌 빈 배같은 그대를 남겨 두고

나느 아직 살아 있어서 굽이굽이 강길을 걷는다

그대와 함께 걷던 이 길이 언제 끝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이 길을 걸어

새벽의 바다에 이르렀음을 끝가지 믿기로 한다

내가 이 길에서 끝내 쓰러진 뒤에라도

얼음이 풀리면 그대 빈 배만으로도 내게 와다오

햇살같은 넋 하나 남겼다 그대 뱃전을 붙들고 가거나

언 눈물 몇 올 강가에 두었다 그대 물살과 함께 가리라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



 

'애송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시 모음 (3)  (0) 2011.12.15
아름다운 시모음 (2)  (0) 2011.12.15
석류의 사랑 /김화순  (0) 2011.12.11
아름다운 그리움/이준호  (0) 2011.12.11
살아간다는 것은/이외수   (0) 2011.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