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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발자취 2(운객 팔순 회고록) 1부

 

차례

 

머리글

 

PART  회고록

1. 출

2. 뿌리를 찾아서

3. 기억에 없는 어린 시절

4. 내가 아는 6.25 전쟁과 피난 이야기

5. 학창 시절 이야기

6. 군대 이야기

7. 스쳐 지나간 여자들

8. 회사 이야기

9. 건축 이야기

10. 노후생활

11. 거래 귀신

12. 맺는말

 

< 글 내용이 많아 3부로 나눠 게시 합니다.>

 

제 1부 

 

머 리 글

나그네 인생 길에 발자취를 그리며 

 

 

해방둥이로, 빈농의 장자로 태어나 어느새 80을 맞이합니다.

 

부모님의 피눈물 나는 지원으로 열심히 공부하여 호국의 간성이 되어 충성 일념으로 소··대대장 임무를 대과 없이 마쳤습니다. 군 생활 삼분의 일은 교관으로 후배 양성에 이바지했으며 국방부에서 방산물자 개발에 일익을 담당하다, 25년 만기 전역 후에는 건축업을 하며 사회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제 노후를 맞이하여 사진을 배우고 즐기며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깨우치며 80여 년간 걸어온 내 인생의 정신적 육체적 발자취를 한 권의 책에 담고자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근면 검소하게 살면서 욕심을 버리고 베푸는 것에서 오는 것. 구름같이 왔다가 구름같이 떠나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요 진정한 의미인 것을 이제 깨닫습니다.

 

 

1. 출

 

나는 1945621(하지) 오후 5시쯤 강원도 원성군에 있는 원성 의료원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1)이 절정인 상황이어서 한국의 농촌 인심도, 경제도 어려워 산모들은 대부분 집에서 자연 분만했다. 내가 병원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집이 부자이거나 어머니가 순산이 안 되어서가 아니다. 늑막염으로 입원 중인 아버지를 간병하기 위해 어머니가 병원에 계시다가 나를 낳게 된 것이다.

운 좋게 병원에서 태어나는 바람에, 어머니도 나도 산후조리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별 탈 없이 무사하게 이 세상에 정착하게 되었다.

세계 2차 대전(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 식민지하의 우리 농촌에도 일본 경찰의 횡포가 극에 달해서(전쟁물자 징발, 학도병 모집, 정신대 모집, 독립유공자 색출 체포 등 ) 죽고 사는 것 자체가 문제였지만, 당시 상황보다는 나와 관련된 몇 가지를 얘기하고자 한다.

내가 19456월생이니까 어머니는 19448월경 나를 잉태하셨다. 당시 처녀들은 정신대로, 젊은 청년들은 학도병으로 전장으로 끌려가는 시절이었다. 두 분이 징집을 피해 결혼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1942년 봄쯤 결혼하셨다고 한다. 1917년생이신 아버지는 26, 1924년생인 어머니는 19세 때이다. 아버지는 당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삼촌 두 분, 고모 3분까지 총 9식구를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식구를 보살피고 거느려야 하기에 징집을 면제받은 것 같다. 어머니는 나이는 어려도 결혼한 상황이고 임신 중이어서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았던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1년이 넘도록 임신이 안 되자 할머니에게 다그침을 받다가, 1944년 봄에 첫딸을 낳으셨으나 두 달 만에 딸은 병사하고 말았다. 그해 여름에 다시 임신했는데 아버지가 늑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덕분에 나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무사히 살아남았다.

 

2. 뿌리를 찾아서

 

나의 성장지는 원주읍 병원에서 8km 북쪽에 있는 강원도 원성군 호저면 주산리다. 아버지 고향은 경상북도 예천군 감천면이다. 고향에서 대를 이어 살지 못한 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이조 말엽부터 일제 치하 해방까지 너무도 파란만장한 삶을 사셨다.

나는 남평 문씨 다 시조 할아버지 48대손이다. 시조의 유래는 생략하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익 조부님으로부터 24대손이다. 출생 뿌리는 고조부의 고향 경북 봉화까지만 거슬러 올라가 본다. 44대 경 고조부는 43세 고 고조부 창 할아버지가 안동(산소가 안동에 있음)에 사실 때 태어나 분가하여 봉화에 정착해 두 아들을 두셨다. 둘째 제성 할아버지는 고조부 운명 후 봉화군 계단면 국유림에 산소에 모신 후까지 사시다가 어찌 선택 채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국권 침탈(1910년 참조 2) 이후 일본인들이 임자 없는 국유지 땅을 몰수하여 관리하면서 예천군 감천면에 있는 농토의 소작농으로 고용되면서 그리로 가족들과 함께 이사하여 해방 때까지 사셨다.

증조부가 1860년생이고 큰 조부님은 1882년생이고 저의 할아버지는 1892년생으로 두 분은 봉화에서 태어났다. 일본인이 증조부를 소작농으로 고용하신 시기는 1910년 이후로 여기서 결혼까지 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큰 당숙은 1904년생이이라 봉화에서 태어나셨고 증조부가 가족을 대동하고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로 이사를 와 농장을 관리하면서 할아버지는 1915년경 예천에서 결혼, 1917년생 저희 아버지에 이어 숙부님(1924년생), 말숙(1925년생)을 출산하셨다.

이런 상황에서 할아버지가 1928년경 할머니와 자식들을 두고 가출을 하셨다. 증조부가 일본인 땅을 경작하시는 대농이라 일꾼들을 3명씩이나 고용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본인 땅이 아니라 식구들 연명에 그칠 뿐, 장래성이 없음을 인지한 할아버지는 독립을 위해 충주 쪽의 저수지 공사장으로 품팔이로 가셨던 것이다.

1929년 예천에 계시던 할머니는 13살 아버지와 3형제를 데리고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이불 봇짐을 이고 지고 예천에서 풍기 단양 충주까지 200여 리 먼 길을 걸어서 충주에서 새살림을 시작했다. 충주 공사장의 공사가 끝나고, 강원도 원성군 지정면의 저수지 공사장으로 이동하면서 현재의 고향 집 인근으로 이사를 와 원주에 정착하게 된다.

이건 추측이지만 지정면의 저수지 공사가 1935년경 끝났다면 당시로선 다른 생계 방법이 없기에 아버지 나이 19세 할아버지는 43세로 일본인들의 농토를 소작해 주며 받는 반 병작 수확량과 마을 부잣집 농사 품팔이도 하여 고모 두 분까지 7명의 식구 연명하기도 급급했을 것이다.

마을에서 성실하게 사는 아버지를 보고 믿음이 있어서인지 1945년 해방되면서 일본인이 관리하던 땅을 몰수하여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면장의 주선으로 논밭 2,000여 평의 농토를 분배(땅값 5년 분할 상환)받아 소유하게 되었다. 마을의 중농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예천군 감천면 관현리에서 머슴 3인을 고용하며 소작농을 하시던 증조부와 큰할아버지 식구들은 해방되면서 무슨 사유(본인들이 직접 농사를 짓지 않음)인지는 몰라도 한 평의 땅도 분배받지 못했다. 3형제 당 숙부님 식구들이 맨몸으로 쫓겨나 영주군 안정면에서, 중숙은 집 한 칸에 막내 당숙부는 강뚝 움막살이(6.25 피난 시 내가 직접 봄)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소작농이라고 무조건 농사짓던 토지를 다 분배해 주지는 않은 듯하다.

큰 당숙님과 당숙모님이 해방 전 관현리에서 사실 때의 농토는 큰 집 땅을 밟지 않고는 관현리에 살 수가 없을 만큼 대농이었다고 한다.

 

< 농지 개혁법: 다음 백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북한에서 토지 개혁이 시행되자 이에 대응하여, 대한민국에서도 농지 개혁하기 위하여 제정된 법률이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체제하의 자유 민주 국가이므로 북한과 같이 무상 몰수와 무상 분배는 허용되지 않아 소유자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농토에만 정부가 5년 연부 보상을 조건으로 소유자로부터 유상 취득하여 농민에게 분배해 주고, 농민으로부터 5년 동안에 농산물로써 정부에 연부로 상환하게 하는 이른바 유상 몰수, 유상 분배의 농지 개혁을 시행하였다.

이 법에 따른 농지 개혁으로 종래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어 왔던 지주와 소작인 간의 분쟁 등은 해결되었으나, 반면 지주 계급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또한 농가의 농지 소유 한도를 3정보로 제한하여 그 소작·임대차 또는 위탁 경영을 금지하고 매매도 제한하였기 때문에 농민의 영세화와 농촌 근대화의 장애 요인이 되었다. 그 때문에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으므로, 현행 헌법은 이를 참작하여 제121조에서 농지의 소작 제도는 금지하되, 농업 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한 임대차 및 위탁 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고 규정함으로써 농촌 근대화의 길을 도모하고 있다. 이 법은 총칙을 비롯하여 취득과 보상, 분배와 상환, 보존과 관리, 조정 기타, 부칙 등 6장으로 나뉜 전문 29조와 부칙으로 되어 있다. 19941222일 농지법(법률 4817)의 제정으로 폐지, 대체되었다.

 

 

3. 기억에 없는 나의 어린 시절

 

나는 태어나서 엄마 젖을 얼마 안 먹었다고 한다. 그 당시 대부분의 태아는 모유를 2, 3년 길게는 5년 이상 먹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럴 때 엄마가 인위적으로 젖에 쓴 키니네 약을 갈아 발라 아기가 젖을 안 빨도록 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조치를 안 하고도, 아니 반대로 엄마가 젖을 물려도 물기를 회피하며 10개월도 안 돼서 스스로 엄마 젖 빨기를 거부하고 젖을 뗐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요구르트나 우유 같은 유제품이 없었기에, 쌀로 흰죽을 쑤어 그 미음 물을 고모들이 내 입에 넣어 줬다고 한다. 조금 더 커서는 백설기 흰떡을 만들어 고모 둘이 교대로 떡을 입에 물려주며 먹였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를 서로 보려고 다퉈 가면서 나를 업고 다니며 놀아주었다고 한다.

나는 왜 젖을 그렇게 빨리 스스로 안 먹게 됐는지 이유는 알 수 없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려서 떡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그 후로 나는 떡을 좋아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간식으로 먹을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집의 떡이건 이웃에서 들어온 떡이고 먹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적이 없는 듯하다.

초등학교 시절 겨울 설이 지나면서 만둣국 용 가래떡을 학교에 가져가서 난로 연통에 문지르면 연통에 달라붙은 떡이 구워지면서 고소한 맛이 좋았다. 친구들이 모두 하니 나도 따라서 몇 번 먹은 적이 있지만, 중학교 이후부터는 떡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명절에 집에서 하는 떡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다. 맛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시절, 할머니는 내가 먹을 송편을 별도로(, 콩고물이 아닌 참깨 보생이 고물이나 꿀)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은 잘 먹었던 것 같다.

나는 상당히 개구쟁이였던 것 같다. 걸음마를 지나서 혼자 놀고 돌아다니면서 이웃집 호박을 그냥 지나침 없이 보는 대로 돌로 때려서 깨버리든가 아니면 나뭇가지로 찔러서 구멍을 내던가 뭐 그런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에게 혼났을 것인데 습관적으로 그런 짓을 해서 여러 번 혼났던 모양이다.

우물가는 동네 엄마들이 모여 놀이터가 됐던 장소였다. 거기 따라가서 엄마 뒤에서 놀다가 물동이 이고 집으로 가는 이웃집 아주머니 물동이를 향해 돌을 던져 물동이를 깨는 바람에 아주머니가 물벼락을 맞게 한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엄마는 난감했을 피해자에게 엎드려 사과했을 것이다. 나는 죽도록 얻어 맞았지만 그 후로도 우물 옆 빈 항아리를 여러 번 깼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엄마한테 많이 얻어맞았을 텐데 그러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기억할 수 없지만 성장해서 동네 할머니들에게 많이 듣던 말이 있다.

어렸을 때 그렇게도 개구지더니 커서는 늠름하고 점잖아졌다

어른들이 마당에서 놀고 있는 저에게 노래해 봐 춤춰 봐 하면서 자꾸 시켰다. 나는 높은 곳에 올라서서 주저 없이 노래하며 춤도 잘 추고 두 팔을 높이 쳐들며 나는 대장이다,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고 한다. 해서 그런지 커서 군인 장교가 되었다고도 했다. 이것이 어렸을 때의 일화들이다.

 

4. 내가 아는 6.25 전쟁과 피난 이야기

 

19506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북한군이 남침을 감행하여 2개월여 만에 낙동강까지 밀려갔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참전하여 928일 서울이 수복되고, 북진을 하여 1950년 말 압록강까지 처 올라갔으나, 중공군이 참전하며 연합군이 밀리면서 14일 다시 후퇴하였다. 현 휴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며 2년여간 혼전을 하다가 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상자이거나 전장에 동원되었다. 전 국민이 전쟁으로 피해를 입고 고통을 당해야 했던 전쟁이다.

내가 전쟁 상황을 느끼고 당한 것은 1950년 가을인 듯하다. 연합군이 북진하면서 북한군을 폭격하는 상황이었다. 폭격이 어떻게 통보되었는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 남쪽 6km 지점인 원성읍은 폭격을 안 했다. 아니면 먼저 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마을 폭격은 기억난다.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이 마을 앞 강변에 하얀 이불 홑청을 깔아 놓고, 폭격이 피해 가기를 엎드려 빌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마을 남쪽이 원성군 원성읍으로 그쪽은 어찌 된 것인지 몰라도(같은 방향의 사전 폭격 소리가 없었다.) 폭격기가  인근에선 제일 큰 우리 동네만을 향해 급강하 폭격을 했다. 다다다 기관총 소리가 요란하고 마을에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꽝꽝 났다. 여섯 살 어린 나의 느낌은 머리 위에서 폭격(후에 들은 바는 쌕쌕이. 호주기라고 했음) 하는 것 같고 총탄에 맞아 죽을 것 같았다.

아이고 아버지도 못 보고 죽네. 아이고 아버지도 못 보고 나 죽네

나는 울부짖었고, 이 울음을 들은 부녀자들 모두 따라 울었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폭격이 끝났고 마을 집 두 채가 불에 타고 있었지만, 그냥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비행기가 사라지자 마을로 들어갔다. 집주인 아녀자만 발을 동동 굴렀다.

우리 집 소가 마당에 매여 있었는데,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며 죽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소를 잡아서 우리가 다 먹을 양이 아니기에 이웃에 나눠 주셨다. 우리 것은 다리 한 짝을 가마솥에 삶아 간장독에 넣고 여러 날 동안 반찬으로 먹었던 기억이 있다.

 

< 한국 전쟁 다음 백과사전 인용>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 불린다. 소련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이 38˚ 선 전역에서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국군은 북한의 앞선 병력과 무기에 밀려 한 달 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후퇴하였다. 이어 미국 주도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되었다. 유엔군의 9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자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37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인명 피해가 약 450만 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의 산업 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피난 가는 길에 대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등에 업힌 한 달짜리 여동생 그리고 나 5명이었다. 고모들과 숙부들은 어디가 계시는지 안 보였습니다.

전쟁 상황은 195114일경 중공군의 참전으로 압록강에서 후퇴하며 북괴군이 다시 서울 가까이 내려오고 있었다. 후퇴하던 유엔군이 괴뢰군이 내려와 숙영 시설로 활용 못 하도록 마을의 집들을 태워 버렸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으나 미군이 짚단에 불을 붙여 들고 우리 집 초가지붕에 불을 붙이고 옆집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물을 퍼다가 불을 끄려 하니 미군이 다시 와서 할아버지에게 총을 겨누며 영어로 쏠라쏠라 하는데, 불을 끄면 총으로 쏴 죽이겠다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불 끄기를 포기하고 방에 있던 살림만 끄집어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집이 없으니 피난을 가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첫 남침 시(여름철)는 피난을 못가고 그들의 통치를 받아 보았던 터라 집도 없고, 다시는 북한 괴뢰의 통치를 받기 싫었던 할아버지는 인근 산에 동굴을 파고 남은 식량과 살림을 묻어 놓고 피난 길에 올랐다.

후에 생각난 것이지만 미군이 우리 집에 불을 지를 때 우리 집과 옆집만 불을 지른 듯하다. 동네 부잣집들(기와집)은 대부분 그냥 있었고 초가집들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미군에게 피해를 입힌 것도 아니고 아버지가 의용군도 아니고 마을에서 미움을 받는 집안도 아닌데 이해가 안 되었다.

피난 보따리를 챙겨 할아버지가 지고 할머니와 어머니는 이불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집을 나선 듯한데, 언제 어떻게 어디로 걸어갔는지 당시의 상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기억나는 것은 단양군에 있는 남한강 모래 강바닥이다. 주변 산에는 눈이 하얗고 강은 얼어 빙판인데, 강모래 바닥에 많은 피난민들이 이불을 덮어쓰고 잠을 자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밥을 짓기 위해 어머니가 나무를 주어오라 해서 강변에 널려있는 나뭇가지들을 주어다가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 단양역을 지나고 소백산 죽령을 넘어 경상도 풍기 땅으로 내려가는 고갯길에서 할아버지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나도 눈 위로 굴러떨어진 것이 생각난다. 눈길이고 고갯길이라 어린 나는 그때까지 할아버지 지게 위에 앉아서 피난한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걸어서 희방사역 근처까지 오니 날이 어두워 어느 민가에 들어가 잠을 잤다. 여기는 피난민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고, 마을에 집이 한두 채 정도 보였는데 인심이 좋아 단칸방에서 5인이 앉아 밤을 지냈다. 다시 영주군 안정면에 중 당숙 집까지는 걸어갔다.

중당숙 집은 일자형 기와집이었고 안방은 중 당숙님네 가족(숙모, 3, 3세 막내아들)이 기거 하는 듯했고, 나는 어머니와 둘이 작은 방에서 기거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머니와 나 동생을 이곳까지 피난시키고 원주로 귀향하신 듯하다. 나는 당숙댁에서 소반에 차려준 쌀밥이 깔깔하여 모래 같아 못 먹겠다고, 집에서 먹던 쌀밥을 달라고 하다가 빰을 얻어맞았다.

이게 어디서 밥 투정이냐! 어렵사리 배급 받아온 쌀(안남미)인데 이도 귀한 줄 알아야지?”

1951년 봄이 되면서 동네 아이들 따라 산에서 소나무 껍데기를 벗겨 내고 속살을 껌처럼 씹어 국물을 먹었으나 한 번으로 끝났다. 옛날 임진란으로 나라가 가난할 때 이것으로 식사를 때우기도 하고 떡도 해 먹었다는데, 우리들은 심심풀이로 해 본 듯하다.

개울 강둑에서 놀다 보면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북쪽으로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 기차를 타면 집에 빨리 쉽게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당시에는 여객용 기차는 없었던 듯하다.

당숙님 댁에서 며칠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겨울에 가서 봄을 보내고 우리도 귀향길에 올랐다. 영주 안정에서 원성군 호저까지 270(108km)여리나 된다고 하는데 기차를 타는 것도 아니고, 버스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올 때처럼 걸어서 가야 했다. 28세 젊은 어머니는 한 살짜리 여동생을 업고, 이불 보따리 이고, 내 손을 잡았다. 익숙치 않은 험한 산길을 5일 이상 걸어서 가겠다고 출발한 마음이 놀랍다. 겁이 없을 리 없겠지만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가족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 옛날 할머니가 예천서 충주 계시는 할아버지 찾아 나선 것과 같은 용감한 일이었다.

이 귀향길에서 어느 길로 어느 집에서 밤을 보내고, 밥을 얻어먹으며 원성군까지 걸어갔는지 모른다. 다만 이른 새벽 어느 철교를 건너면서 무서워서 못 건너가겠다 주저앉은 내게 어머니는 빰을 때리며 다그쳤고 매에 못 이겨 철교를 건넜던 것만 생각난다.

철로에 있는 철교는 원성까지 수십 개가 넘는데, 어느 곳은 넓지 않은 계곡에 실개천이 흐르고 우측 강변에 안개가 자욱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미군부대가 있는 듯 영어 말소리와 차량들의 소음이 들렸다.

철교 건너기는 엄마도 무서웠겠지만, 길에서 만나는 미군이 더 무서워 급히 건너야 해서 나와 실랑이 칠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걸어갔는지 드디어 고향 집 앞 2km 남은 지점에서 내가 더 이상 걸을 수 없다고 주저앉더란다. 더 이상 발바닥이 부어 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그 자리에서 기다리게 하고 집에 뛰어가, 할머니를 모시고 와서 업고 가셨다 한다.

피난에서 돌아오니 아버지도 와 계셨고 불탄 집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인근 산에 있는 붉은 점토를 나르고, 동네 우물에 가서 물을 길어서 짚을 썰어 놓고 반죽해서 송판 틀에 진흙을 퍼 넣었다. 꾹꾹 흙을 밟으면서 모양을 잡아 마당에 깔아 말리면 흙벽돌이 된다. 흙벽돌 수백 장을 만들어 벽을 쌓고, 돈이 없으니 먼 국유림 산에 올라가 서까래용 나무와 굵은 대들보용 나무를 베어 30여리 지고 온다. 미리 말려 준비하고 용마루에 설치한 후 수수가지로 발을 엮어 덮고 그 위에 진흙을 개어 덮은 후 짚으로 엮은 이엉을 덮으면 외형 집이 완성된다. 방바닥에 구들용 돌은 전에 있던 것 재활용하고, 부엌 부뚜막까지 공사를 마쳐야 밥을 해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작업은 아버지와 이웃 어른들이 합세하여 작업을 하셨고, 나는 동네 아이들과 놀다 보니 집이 완성되어 있었다.

이때가 19514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