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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발자취 2(운객 팔순 회고록) 2부

5. 학창 시절 이야기

 

아버지는 집을 짓고 봄 농사를 준비하시는데, 어느 날 나와 친하게 놀던 동료가 학교에 간다고 했다. 그의 집은 우리 집 바로 밑에 있어 거의 그 친구 집 마당에 가서 놀았고 동네 놀이터(마을 앞 논바닥이나 다른 집 마당)에 가서 놀아도 거의 그와 놀았기에 그가 학교에 가고 나면 나는 친구가 없다.

그 친구는 44년생 학령이 되어 학교에 정식 입학하는 것이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졸라서, 학령 미달인 나(45년 생이지만 출생신고를 늦게 하여 호적 나이는 46년생)를 담임 선생님이 승낙하셔서 같이 입학하였다.

담임 선생님은 뒷동네 사는 아버지 친구와 잘 아는 사이였고, 내가 학령은 안되었지만 한 살 연상인 친구보다 10센치 정도 크고, 더 성숙해 보여 호적도 확인치 않고 학교에 다녔다.

이렇게 하여 19514월이 내 인생 배움의 길, 성장의 길이 시작되었다. 마을엔 나와 동갑내기가 4명이 더 있었지만 난 그들의 형들과 같이(5) 입학하면서 동창이 되었다. 그들은 나보다 2년 늦게 입학하면서 동갑이지만 후배가 되고 평생을 같이 놀지 못하는 사이가 되다 보니 나의 입학 자체가 내 인생의 시발점이요. 갈림길이 되었다.

 

 

. 호저 국민(초등)학교 시절

 

(1) 625 전란으로 학교가 소실되었다. 또 전쟁 중이라 미군의 도움으로 군대 천막 3동이 옛 교사 자리에 설치되어 있었다. 고학년은 천막 아래서 공부했지만, 우리는 운동장 밖 야산 경사진 풀밭을 파서 평평하게 만들고, 의자 대신 앉는 돌을 1km 거리의 강가에서 우리가 직접 들고 와 깔고 앉아 공부했다. 60여 명이 돌판에 앉아 공부했다. 가을이 되자 운동장에 천막을 추가로 설치하여 겨울을 났다. 목조 건물이 완성되면서 3학년 초에는 교실로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2) 1학년 겨울 방학 전인 듯하다. 겨울이라 마을 앞 개천에는 섭다리가 가을에 설치되어서 다리를 건너 학교에 갔다. 책가방이 없어 보자기에 책을 싸서 어깨에 둘러메고 학교에 갔다. 고학년 형들은 책보 네 귀퉁이를 얽히고 설키게 묶어서 책가방 모양이 되게 하였다. 나도 직접 만들어 자랑스런 마음으로 흔들거리며 형들 따라 다리를 건너는데 책가방이 풀리며 책이 강물에 떨어졌다.

아우! 어떻게!”

발을 동동 굴렀다. 살얼음이 얼어붙은 강물에 발을 빠져 가며 책을 건져줄 용기가 없어 모두 쳐다보고 있었다. 일행 중 이종 당숙모가 냇가로 내려가 양말을 벗고 강물에 들어가 책을 건져 주었다. 고학년이라도 겨우 열두어 살 소녀가 학교 가는 동안 얼마나 발이 시려웠을까. 지금 생각해도 고맙고 미안하다.

이종 당숙모는 나의 할머니 여동생의 막내딸인데 여동생(김해 김씨, 예천 태생일 것임)이 결혼해 살다가 남편이 전쟁 때 돌아가시고 4명의 가족이 우리 마을로 이사를 왔다. 마을 부잣집 행랑채 빈방을 빌려 살면서 큰아들이 품을 팔아 생활했다. 그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둘째 아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사범 중학교에 다니던 중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졸업 후 이어 교사로 발령받았고 주인집 딸과 결혼까지 했다. 내 책을 건져준 아줌마는 졸업 후 버스 회사에 차장으로 취직하여 원주 홍천간 시외버스 차장으로 근무하다 버스 운전사와 결혼해서 홍천에 살고 있다고 한다.

 

(3) 단짝 친구와 있었던 일

학교 수업 종료 후 집으로 오는 길 마을 앞에서 내가 친구 머리를 향해 돌을 거짓으로 던지는 장난을 하다가 실제 돌이 날아가 친구의 머리에 맞았다. 친구의 머리에 피가 흘러내리자 머리가 캄캄했다. 친구 할아버지가 친구를 끔찍이 사랑하는데, 5대 독자 손주를 때려 피까지 났으니 나는 이제 죽었구나 오금이 저려 걸음을 걸을 수 없었다. 친구 할아버지가 무섭다 보니 매일 친구 집에 가서 할머니가 떠먹여 주는 아침을 먹는 친구를 기다리다가 같이 등교하고, 하교 후 노는 시간이면 그 집 마당에서 놀아야 하는데 어찌 친구네 집에 갈 수가 있을까.

내가 너무 미안해하고 걱정을 하니 친구가 나를 위로했다. 많이 다친 것도 아니고 피가 조금 났으니 집에 가서 넘어졌다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했다. 키는 작아도 나보다 한 살 더 먹은 터라 배려심이 참 많고 고맙다고 생각했다.

 

(4) 겨울 냇가 빙판 위에서 팽이치기를 하다가 팽이가 고이는 물 입구에 빠졌다. 나는 건지러 다가갔다가 얼음이 깨지면서 1미터 깊이의 고인물에 빠졌다. 친구가 있는 쪽으로 나오려 하니 얼음이 깨지면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 갔다. 친구가 내 뒤를 가리키며 저쪽이 낮은 곳이니 그리로 나와라 일러 주어 얼음 속에 가라앉지 않고 살아 나왔다. 솜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불을 피워 놓고 이를 말리려다가 태워 먹어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뒤지게 맞았다.

(5) 국민학교 시절 소풍 시 용돈 타서 과자 사 먹는 재미, 엄마가 길게 말아준 통김밥 먹는 재미가 있었다. 운동대회 날은 키가 작아 달리기에선 맨 꼴찌만 했다.

6학년 수학여행은 30km 먼 거리를 산을 넘어 구룡사에 가서 1박 했는데 한밤에 숲의 바람 소리가 스산해 귀신 소리 같아 밤에 소변보기 무서워 친구를 깨워 같이 화장실에 가야 했다.

저학년 때 여자애들 고무줄 끊었다가 나이 많은 누나 같은 아이에게 등 터지게 얻어맞고 그녀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똥 통에 돌은 던져 복수 한 일도 있었다. 5학년 때 나무로 칼을 만들어 옆 여학생에게 돈 내놓으라 장난치다가, 그 아이가 선생님께 일러 얼굴이 퉁퉁 부울 정도로 얻어맞았으나 집에서는 말도 하지 못했다.

 

 

. 국민학교 시절 우리들의 놀이 문화

 

(1)공기 놀이: 밤만 한 돌 5개로 땅에 던져 놓고 돌 하나를 집어 허공에 띄우고 땅에 돌을 하나 잡고 허공의 돌을 잡으면 성공해서 다음에 2개 잡고 다음은 3. 다음은 4개 잡은 후 손바닥 허공에 4개를 띄우고 손다박을 한번 치고 손등에 많이 올려놓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 4개를 다 올린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음.

(2)땅 뺏기 : 사금팔이를 동전모양으로 만들거나 납작한 돌을 손가락으로 팅겨 삼각형으로 집을 확대해서 승자 결정하기.

(3)사방치기 : 사방치기는 동글 납작한 돌을 외발로 서서 밀어 차며 멀리 보내기도 하고 직사각 8단 칸을 그어 놓고 밀어내고 건너뛰며 마지막엔 머리 위에 얹어 놓고 돌아서서 상대편의 세워 놓은 돌을 넘어뜨리는 내기도 하고 5~6미터 사이를 띄어 줄을 그려 놓고 줄의 놀을 던져 맟추기도 하고 가슴에 얹어 상대편 줄에 가서 세워 놓은 놀을 맞추기 하는 놀이 등 여러 형태의 놀이를 했다.

(4)/모래 무덤에서 새 집짓기 : 여름철 강가에서나 운동장 놀이터에서 소 학년 시절 그리고 여자애들이 많이 했던 놀이인데 손 등위에 모래나 흙을 얹어 놓고 노래를 부르며 다지기를 하고 묻힌 손을 빼었을 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5)숨박꼭질 놀이 : 술레가 눈을 감고 있을 때 주변 지형지물에 숨는다. 술레가 찾으면 잡힌 사람이 다시 술레가 되는 놀이다.

(6)구슬치기 : 유리로 만든 안에 꽃문양까지 들어 있는 당시는 담아내기 (구슬치기)를 했는데 나는 구입 한 적이 없고 친구들 것을 물물 교환으로 확보했다. 부잣집 친구들은 용돈으로 구입하거나 선물로 받기도 한 구슬로 놀이를 하는데 구슬치기 놀이 방식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모형의 코스를 땅바닥에 그려 놓고 손가락으로 튕겨 각 지점에 안착시키며 코스를 누가 먼저 도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놀이도 있고 멀리 상대편의 구슬을 맟춰 명중시키면 따는 (먹는) 내기도 있다. 구슬이 많을 땐 손바닥에 쥐고 홀짝 선택을 물어 맞추면 따고 못 맞추면 잃고 하는 내기도 한다. 구슬 중 쇠구슬(볼 베어링 부속품)이 힘도 좋고 멀리 굴러가 단연 으뜸이지만 큰 공장 폐품에서 흘러 나오기는 물건이라 흔치 않아 귀한 부러움을 받는 존재였다.

(7)찜뽕 : 미국식 야구와 비슷한 운동 놀이로 투수 없이 공격수가 자기가 공을 위로 던져 놓고 내려오는 공을 나무막대로 쳐 내서 내외 야수에 잡히지 않을 경우 출루하며 홈을 많이 밟는 팀이 이기는 경기

(8)장치기 : 이 놀이는 서양의 필드하키 또는 아이스 하키를 흉내 내서 하던 놀이로 통조림이나 맥주 깡통에 톱밥이나 왕겨. 흙을 넣고 반으로 쭈그려 뜨려 필드하키 공처럼 만들어 지게 작대기로 쳐서 상대편 골에 집어넣는 놀이.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이 놀이를 안 했고 중학생 또래가 산에 땔감 나무를 하러 가다가 집결지 빈 공터에서 이 놀이를 하고 산에 오르는 것을 가을 봄에 여러 번 보았다.

(9)말타기 놀이 : 또래의 친구들이 여름철 냇가에서 수영 후 인근 바위 절벽에서 술래를 정해 말을 만들고 승자가 말을 타고 말 기수와 가위 바이 보를 해서 이기면 다시 타고 지면 위치를 교대하며 말놀이를 한다. 더러는 마당에서 함.

(10)쪼깽 빠 국 (짱껨보)놀이 : 또래의 친구들이 여름철 냇가에서 수영 후 인근 바위 절벽에서 나이 또는 키 서열대로 일렬로 바위에 앉아 술레가 차례대로 이동하며 쪼깽 빠 국(가위바위보)를 골라 큰소리로 술래가 빠 하며 내면 손바닥이 아니고 주먹일 경우 앉아 있는 상대가 같은 모양을 따라 내면 지면서 자리를 양보하며 제일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고 오래 머문 수장은 마지막에 말을 태워 준다.

(11)물 수제비 띠우기 : 강이 얼지 않는 계절에 하굣길에 강가나 연못가를 지나가다가 심심풀이 놀이로 주변에서 동굴 납작한 돌을 주어 수면에 낮게 던지면 돌이 수면 위를 튕기면서 날아가다가 마지막에 갈아 앉는데 물방울 튕기는 모습을 수제비라 하고 몇 개를 만들었나 확인하며 던지기도 하고 누가 더 많이 만들었나 내기를 하기도 한다.

 

(12)계급장 나눠 달고 병정놀이 : 종이 위에 계급장을 그려 키별로 나눠 주고 편을 짜서 계급별 직책의 흉내를 내며 적진의 병사들을 잡아 오면서 전과에 따라 승패를 결정하는 병정놀이도 했다.

(13)돼지 오줌보 축구하기 : 명절에 마을 단위로 돼지를 잡아 이웃 간에 나누어 구입한다. 대부분 명절 음식으로 쓰지만 이때 잡은 돼지 오줌보(방광)을 구경하던 아이들이 얻어 여기에 바람을 불어 넣고 고무줄로 묶은 다음 축구공 놀이를 했음.

(14)정월 대보름날 지붕 위에 올라가 소원 빌기 : 놀이라기보다 명절날 달 보고 하는 기도.

(15)겨울에 새덫(참고 2) 만들어 새 잡기 : 겨울에 눈이 오면 새들의 먹이가 눈에 덮여 먹이 찾기 힘들 때, 덫을 만들어 먹이를 먹으려는 새를 잡는 방식인데 내가 만든 덫으론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참고 2>

()새덫 만들기 1 : 싸리나무를 휘어 활을 만들고 영어 A자 모형의 나무 받침에 조이삭을 연결하는 지렛대를 설치하고 여기에 활은 거꾸로 연결하고 활줄을 지렛대에 올려 설치하고 덫 위에 집 울을 쳐 놓으면 새가 와서 받침에 앉아 조 이삭을 쪼아 먹으면 화살끈이 풀리면서 새의 목이 잡히는 덫인데 눈치 빠른 새들이 알아보고 접근을 안 했다.

()새덫 만들기 2 : 이는 삼태기를 뒤집어 세워 작대기로 받쳐 놓고 안에 왕겨와 새 먹이를 뿌려 놓고 안 보이는 데서 새가 오면 잡아당겨 새를 잡는 형식인데 삼태기 떨어지는 순간에 새들이 먼저 날아가 이도 잡아 본 기억이 없다.

()고무줄로 새총 만들어 새 잡기 : 검정 고무줄(내복용) 두 가닥에 가죽으로 고리를 만들어 Y자형 나무에 연결하여 밤 만한 돌멩이로 참새를 맞춰 잡는 새 고무총인데 이도 새가 미리 알고 도망가거나 정 조준이 안 되어 날아가 별 성과가 없었다. 이웃집 형아는 당시 흔치 않은 링거 주사액 호수 같은 노란 고무줄(현재는 아기들 기저귀 고무줄)로 만든 것인데 탄력성이 좋아 멀리 날아가 그런지 조준술이 좋은지 새를 많이 잡는 것을 보고 부러워도 했다.

또 마을의 큰 형아들은 겨울에 초가지붕에 집을 짓고 겨울을 나는 참새들을 싸리나무를 엮어 나무막대에 묶어 통발을 만들고 이를 새집 입구를 쑤시면 새가 도망가면서 통발에 걸리는데 이렇게 잡아 참새구이를 해 먹고 노는 장면들을 보았지만 우리 친구들은 그것은 안 했다.

(16)가을 들판에서 태기(태의 경상북도 방언)치기로 새 쫓기 : 가을 들판에 벼 이삭이 누렇게 영글어 갈 때쯤 들판의 새 떼들이 논에 내려앉아 벼 이삭을 씹어 영글지 않은 벼 이삭 물을 빨아 먹는데 이때 집안 학생들이나 아녀자들이 자기의 논에 새떼를 쫓는다.

이때 머리 큰 남학생들은 왕골 잎으로 가닥을 땋고 끝에 닥나무 삼 껍질로 꼬리를 만들어 연결하고 이를 머리 위에서 돌리다가 반대로 급회전하여 돌리면 딱 하고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에 새들이 놀라 날아간다. 워이워이(새쫓기노래)하는 아녀자들의 새 쫓은 소리와 태기 소리가 가을 들판에 울려 퍼질 때면 풍요로운 황금 들판의 운치가 눈에 선하다.

(17)물놀이 : 냇물에서 여름철 수영하기, 봄철 어름 제치기, 겨울철 썰매 타기(다 아는 사실이라 설명 생략.)

(18)냇물에서 고기 잡기 : 고기 잡는 요령은 여러 가지가 있기에 사족을 단다.

일요일 놀이 삼아 시냇가 수풀에 숨어 있는 고기들을 맨손으로 잡다가 용돈을 모아 어항을 구매하고 냇가에 물살을 막아 주는 돌무덤을 만들고 뒤에 어항을 놓는다. 통상 깻묵 가루에 된장을 반죽하여 어항 속에 넣어 고기들을 유인한다. 고기밥을 어떤 것을 쓰느냐에 따라 어획량이 다르다. 잘 잡는 형님들은 그 비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고기가 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무 그늘 밑에서 책을 읽으면 신선이 된 듯 하다. 그리고 5~6개의 어항을 설치해 놓았기에 고기가 잡혔나 순찰도 해야 한다. 어항 가득 고기가 잡혔을 경우, 어항 속의 고기들이 은빛을 반짝이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하늘에 비쳐 볼 때의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번거로운 어항 말고 전문적으로 고기를 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족대를 만들거나 사서 족대로 고기를 잡는다.

우리 마을은 농촌이고 어른들은 대부분 쉬는 날이 없이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농사 일을 해야 해서 고기 잡을 틈이 없다. 친구 아버지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는데 퇴근하면 석양에 노을이 질 즈음 개울가에서 낚시로 고기를 잡으셨다. 여유롭게 인생을 사는 듯하여 어린 눈에도 멋져 보였다.

고기잡이가 전문인 사람들은 깊은 강이나 연못가에서 투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물 가득 흰비늘 휘날리며 퍼득대는 어획량이 대단해 보였지만 우리 마을엔 투망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불로소득 고기잡이가 있다. 여름철 큰비가 오고 나면 큰 강에서 상류까지 고기가 많이 올라온다. 이때를 이용해 위 상류에 사는 사람들이 고기 잡는 약(고기만 죽는 약을 제조한다고 함)을 뿌리면 고기들이 죽어 물결에 떠내려온다. 이를 알고 동네 아녀자들이 냇가로 나와 고기를 건진다. 그리고는 바로 내장을 빼내야 고기가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동생도 같이 나가 고기를 건지고 내장을 뺀다. 하지만 우리 집안에서는 민물 매운탕이든 조림이든 좋아하는 식구가 없어서 건진 고기는 이웃집에 주었다.

(19)장난감 만들어 놀기(집에서 만든 장난감들: 80여년이 지난 현세와 비교되도록 세세히 언급합니다.)

 

위 추억 외 1950년대 대한민국 농촌의 아이들이 어떻게 놀며 성장했는지에 대해서 회고록에서 굳이 세세하게 언급할 사항은 아니지만 IT의 발전으로 어린이들의 놀이 문화가 급격히 발전하는 추세이기에 먼 후일의 세대와 비교될 수 있도록 백과사전에서도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 놀이 들을 여기에 첨부하고자 한다.

 

()할아버니가 참나무 깎아서 눈썰매 만들어 주신 이야기

학교에 들어가기 전 겨울에 눈이 오면 놀이기구가 없던 시절이라, 또 집안에 스케이트를 구입 해 줄 돈도 없다 보니 할아버지가 참나무를 잘라 깎고 불에 구어 휘어서 썰매처럼 만들었다. 그 위에 송판을 박아 내가 앉을 수 있도록 해 주셨는데 이것으로 3단 묘의 공터 잔디 위에서 썰매를 타기도 하고 얼음판에서도 썰매를 탔다.

()눈이 많이 온 날 짚토메(벼 탈곡한 집단)타고 뒷산에 올라 정상에서 미끄지며 내려오다가 나무와 정면으로 부딪쳤던 이야기

초등학교 4, 5학년 때쯤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눈썰매를 타지 않고 보다 속도감을 즐기기 위해 벼를 턴 집단(최근에는 비닐로 만든 비료푸대를 사용함)을 들고 인근 뒷산 정상에 올라가 짚단을 타고 앉아 나무 사이사이 빈 공간을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놀이(당시 나만 했던 것 같음)이다. 양발로 눈을 밟아 방향을 전환하며 앉은뱅이 짚단 썰매를 타고 급경사를 내려오다가 방향 전환을 잘못해 가랑이 사이로 몸과 얼굴까지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머리를 옆으로 돌려 얼굴에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나무에 부딪힌 가슴과 배가 얼마나 아팠던지 그 후론 썰매 타기를 안 했다.

()직접 깎아 만든 팽이치기

언제부터 유래했는지 모르겠지만 1953년 휴전 후 원주읍에선 겨울 얼음판 위에서 치고 더러는 집 마당에서 혼자서도 팽이 놀이를 하는데 팽이는 시내 장난감 가게에서 기계(목가공 선반)로 깎은 팽이가 판매되고 있었다. 농촌 마을에서는 그것을 사줄 사람도 그걸 살 용돈도 없었다. 어린 나이엔 팽이를 깎을 수 없기에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죽은 마른나무를 지름 5-10cm 높이 5-10cm 크기로 잘라 팽이를 낮으로 밑을 깎아 만들어 주셨다. 팽이채는 노끈을 엮어 나뭇가지에 묶어서 사용했는데 팽이 돌리기 시합에서 힘 좋고 오래 도는 팽이는 팽이 끝에 쇠구슬을 박은 것이 좋고 더 좋은 건 상단에 폐 베아링 케이스를 끼우면 팽이에 무게가 있어 부딪치며 오래 돌기 시합에서 힘도 좋고 오래오래 돌아 팽이 중에 으뜸이다. 한 친구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선물로 시내에서 파는 자동 팽이(미제라 했음: 팽이 상단에 태업을 감아 돌려 조이고 이를 밀어내면 얼음판으로 떨어지면서 태업의 힘에 의해서 팽이가 돈다.)를 자랑삼아 갖고 놀았지만 농가에선 그냥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다.

()연 만들고 실 감기 타래 만든 이야기

겨울 놀이기구로 설 명절 전후해서 개별적으로 연날리기도 하고 더러는 연날리기 시합도 한다. 어려서는 주로 혼자 친구들과 시합 없이 높이 멀리 날리기를 하는데 어려서는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고 국민학교 중학교로 성장하면서는 내가 직접 만들어 놀았다. 직사각형 연 모양이 기본이고 오징어 연, 잠자리 연 등 여러 가지가 있고 이것도 장남감 가게에서 팔았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모두 만들어 놀았다.

()제기 만들어 차기

제기차기도 각자가 만들어 놀았는데 면사무소에서 폐지로 나온 얇은 16절지 크기의 종이를 구멍이 있는 엽전(이게 없으면 오지그릇 깨진 것을 갈아서 만듬)을 감싼 후 양 끝을 구멍으로 내보내고 이를 가위로 쪼개서 펼치면 제기가 된다. 이를 개별적으로 많이 차기 내기를 하여 진 사람이 이긴 사람에게 제기를 던져 주면 이를 힘 안 들이고 받아 멀리 차내는 놀이다. 멀리 차낸 것을 던져 준 패자가 쫓아가 되받아 차면 승자가 패자가 되어 제기를 던져 준다. 던져 준 제기를 승자가 못 받아 차거나 찬 제기를 패자가 잡으면 게임이 종료되고 다시 많이 차기를 해서 승자를 결정한다.

()딱지 접어 딱지치기 : 직사각형 종이 두 장을 접어 딱지를 만들어 상대편의 딱지를 내리쳐 뒤집히면 이기거나 먹기 내기하는 놀이

-인쇄된 딱지놀이 : 일반 용지보다 2 배 정도 두터운 종이에 그림이나 군 계급장 등을 프린트해서 가로세로 5cm 크기로 인쇄된 것을 잘라 홀수 짝수 놀이로 상대편의 딱지를 따는 놀이임.

() 바람개비 날리기

정사각형 종이 네 귀퉁이를 접어 복판으로 모아 놓고 중앙 지점을 못으로 꿰어 30cm 크기의 자루에 박아 바람 방향으로 들고 서 있으면 바람개비가 돈다. 바람이 없으면 직접 들고 달리면 달리는 바람에 의해 바람개비가 돈다. 도는 것을 보며 달리기도 하는 놀이다. 다른 방법은 대나무를 얇게 다듬고 길이 20cm 정도 크기의 중앙에 구멍을 내고 좌우에 종이 날개를 달아 바람에 날리면 뱅뱅 도는 것을 즐기는 개별적으로 만드는 놀이기구다.

() 송판으로 마차 만들어 끌어 주기

송판으로 가로 30~40cm 세로 40~50cm 크기로 자르고 앞뒤로 바퀴 축을 만들어 굵은 통나무를 톱으로 3~4cm 크기로 잘라 바퀴를 만들고 중심에 구멍을 내어 네 귀에 끼운다. 바퀴가 빠지지 않도록 못을 받으면 훌륭한 마차가 된다. 이를 마당에서 서로 교대로 태워준다.

()게다 스케이트 만들어 타기

농촌에서 돈이 없어 도회지 운동구 점에서 파는 스케이트를 살 수 없기에 대타로 송판으로 신발 바닥 크기로 자르고 밑면에는 철사 두 줄을 박고 앞부분엔 45도로 잘라낸 면에 못을 3개 머리 부분이 1cm 정도 남게 박아 놓으면 이를 얼음 위에서 걸으며 얼음 위를 긁으면 얼음 위로 잘 미끄러지며 썰매가 된다.

()미싱 실패에 톱니 바뀌 만들어 굴리기

재봉틀 실패의 실을 다 쓰고 남은 것을 양 끝에 톱니바퀴를 만들고 구멍 속으로 고무줄을 뀌어 한쪽은 손잡이 지례로 한쪽은 못으로 고무줄이 빠지거나 실패에서 헛돌지 않도록 고정해 놓고 지레를 돌려 감은 후 땅에 내려놓으면 실패가 돌면서 굴러간다. 이도 친구와 멀리 가기 또는 밀어내기 시합은 하기도 한다.

()자치기 놀이

50cm 정도 긴 나무막대와 10cm 정도 크기의 작은 막대(양 끝을 45도 각도로 자름)가 지면에 떨어지면 어느 쪽이건 공간이 생기는데 이 공간 위를 긴 막대로 치면 공중으로 뛰어오르는데 이를 다시 긴 막대로 쳐서 멀리 보내 승부를 결정하는 놀이.

 

. 설날 풍경

 

(1)마을 노인 공경하기

설날 아침이 되면 제사를 지내기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좌정하고 계시면 아버지 형제 분들이 먼저 세배를 하고 아버지 형제분들이 할아버지에게 세뱃돈을 드린다. 이어 손주들이 할아버지 내외분에게 세배를 하면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세뱃돈을 주고 이어 아버지 형제분들에게 세배를 하면 아버지 형제분들이 또 세뱃돈을 준다. 이때 받은 세뱃돈이 나의 1년 용돈이 된다. 건넛마을 큰집에 재종 형님이 장손이라 큰집에 가서 먼저 제사를 지내는데 할아버지 아버지 삼 형제 손주 일곱이 어른들은 두루마기 옷을 아이들은 설빔(설 기념으로 사준 옷)을 입고 마을 앞 섶다리를 길게 늘어서서 걸어가는 모습은 마을에 자랑거리라며 아버지가 대단히 흐뭇해하셨다. 큰집에 가서 또 재종형제들의 세배를 받고 조상들님께 제사를 지내고 음복하고 떡국을 먹고 다시 우리 집으로 재종형제 뜰까지 건너올 때는 50m도 넘는 장사진이 펼쳐진다. 우리 집에 와서 고조부 제사(큰집에서는 5대 봉사 안 한다 해서 아버지가 증조부모 제사를 모셔옴 )를 지내고 인근 산소에 성묘를 하러 간다.

성묘가 끝나면 재종형제들과 종형제들은 귀가하고 우리 형제들은 마을 어르신들 집을 방문하며 세배를 드린다. 세배를 드리고 나면 집에 있는 과자나 과일 떡국을 얻어먹은 재미도 있지만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이때부터 습관화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노인들을 모시고 있는 집에서는 순번을 정해 정월 보름날까지 마을 노인들을 초대하여 아침 식사를 제공하다 보니 아이들은 자라면서 노인들을 공경하는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노인들만 보면 습관적으로, 무의식으로도 인사를 하게 되니 이것이 어른들에 대한 경로 사상이 저절로 양성되는 사회적 기반인 듯하다.

학교에서 교육한다고 해도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제사 문화, 세배 문화가 무너지면서 노인들을 공경하는 사회적 체제도 무너진 듯 보인다. 마을 공원에 미성년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연애를 하고 고성방가를 해도 마을 어르신들이 훈계하다가 개 망신당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지금은 내남없이 못 본채 지나간다.

 

(2)쥐불놀이

정월 대보름에는 쥐불놀이를 하는데 빈 깡통에 구멍을 뚫어놓고 여기에 관솔 나무가지를 넣고 불을 질러 들판에서 빙빙 돌리고 노는 놀이인데 이웃 마을까지 들어가서 쥐불 돌리기 시합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잘못하면 싸움으로 연결되는 수가 있어 각자 마을에서 돌리며 보름날 밤을 보낸다.

 

. , 고교 졸업하기까지

 

(1)중학교에 보내 달라고 여러 날 동안 한밤에 마당가에 나와 달 보고 기도했던 이야기

우리 집은 소농가이다. 해서 중학교부터는 입학금에 월사금까지 주기적으로 적잖은 돈을 납부해야 하는데 집 형편으론 10식구 생계가 우선이기에 식량 팔아 자식들 중학교에 보낼 형편이 안된다.

아버지 동갑내기 친구가 울 집에 놀러 와서 하신 대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힘들더라도 학교에 보내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하셨고 친구는 형편상 어렵지 않겠냐고 하셨기에 집안 형편 생각해서 아버지가 나를 학교에 보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결국 농사꾼이 되어 아버지같이 소농으로 평생을 고생해야 하는데 어쩌면 좋나 걱정이 많았다.

아버지에게 애걸한다 해도 집안 형편상 안된다면 더 이상 매달릴 수도 없는 사정을 잘 아는 터라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기도 덕인지 아버지가 선생님께 진학 신청을 하셨고 원주중학교와 대성중학교 두 곳에 지원서를 냈다. 입학시험을 보고 두 군데 모두 합격하여 원주중학교에 등록했다.

 

(2)중학교 때는 대장간에서 만든 칼 스케이트를 구입해 게다에 연결해서 만들어 탔고 냇가에서 고기 잡아 천렵도 했고 명절 때는 친구 안내로 친구네 떡 훔쳐다 먹기, 닭도 잡아먹은 적이 있고 고학년이 되면서는 화투도 가끔 했다. 모여서 공부하다 남의 대추 따 먹다 들켜 혼났고 이웃 마을 참외 서리도 한 번 했지만 생 참외만 따 왔고 범죄 행위라 한 번으로 끝냈다.

 

(3)중학교 입학 후 영어 첫 수업 시간에 외워 오라는 숙제를 못해 선생님에게 손등을 나무막대로 맞아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이후 암기하라는 숙제를 열심히 하다 보니 암기 실력이 향상되면서 그 후 모든 과목의 시험 성적이 좋아졌다.

2학년 생물 과목 수업 시간에 성병에 대해 수업하는데 책에 여자 생식기 그림을 짚어 가며 설명하는 선생님의 강의가 너무 우스워 많은 학생들이 웃으니 수업을 중단하고 웃지 않기를 약속받고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선생님께 빰을 여러 차례 맞고 수업은 건너뛰는 누를 범한 바 있다.

어느 날 학교에 가다가 쓰레기통 뒤지는 똥개를 쫓는다고 돌을 던졌는데 개가 으르렁거리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도망간다고 급히 돌아서며 뛰는데 바로 앞의 전봇대를 들이박고 나가 떨어져 잠시 기절하기도 했다.

10km 거리를 매일 아침 뛰며 등교하는 바람에 2학년 때 전교 10km 마라톤 대회에서 1등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진행요원의 코스 안내가 분산되면서 코스가 틀렸다고 4등이라고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죽기로 3년 동안 뛰어 다니며 3년 개근상을 혼자서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은 너무 어려서 공부의 중요성을 모르고 그냥 따라다닌 것이고 중학교부터 내가 공부하지 않으면 장래 농사꾼이 되어야 하기에 농사꾼을 면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공무원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스스로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 반 옆자리 동창이 학원을 다녀도 학교 성적은 내가 앞섰던 것은 내 집념 덕이라고 생각한다. 3학년 학급 편성 시 360명을 성적순으로 편성할 때 전교 70여 등으로 2반에 편성되었다. 원주 고교는 인문고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데 집 형편에 대학을 못 갈 것 같아 실업고 원주농고를 지원했다.

2 해석 시간 수업 중에 학생이 당구장을 드나들었다고 바른대로 대라며 선생님께 빰을 여러대 맞았다. 뒷줄의 큰 학생이 자수해서 내 죄는 규명 되었지만 자수한 학생은 세 대만 때리니 너무 억울해서 통곡을 한 적도 있다.

24H 회원들의 농촌 계몽운동을 1주간 나간 적이 있었다. 소초면 황골 구룡사 입구의 마을 이장 집에 마을 농민들을 모아 놓고 특용작물 영농기법을 강의했다. 특용작물 재배 기술은커녕 한 번도 농사지은 적이 없이 오직 책 두세 번 읽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경험 많은 농민들에게 겁 없이 강의했다는 용기는 군 생활시 강의와 브리핑에 많은 도움이 된 듯하다.

3 담임이었던 화학 선생님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또 웃는 이야기를 했고 모두들 웃다가 그만 웃으라는 경고를 못 참고 또 웃다가 역시 겁나게 맞았다.

추석을 맞이하여 마을 4H 클럽 회원들이 동민들을 위해 위문 공원을 계획했다. 나는 부자지간 퇴비 증산을 시비하다가 아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벼 수확량을 늘인다는 30여분의 단막극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키가 제일 작아 여인으로 분장하여 공연했다. 인근 자매부대 (1군 관하 통신 훈련소)에서 위문 공연까지 한 바 있었는데 대학에 진학했다면 국문학과를 지원하였을 것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다. 대학 등록금이 없는 육사에는 나이도 미달이지만 키도 신체조건에 16cm 이상 차이가 나서 지원할 생각도 못했다. 대학 등록금은 집의 논 몇 마지기를 팔아야 할 상황이라 소농(12마지기. 4마지기)에 대식구를 거느리는 아버지 입장에선 엄두를 낼 수 없는 꿈이었다. 결국 일반 대학은 못 가지만 농군은 되기 싫고 아버지의 꿈대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만 하면 면서기나 순경은 될 수 있기에 나이가 찰 때까지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아버지와 의논하여 결정했다.

여기서 잠시, 아버지는 예천서 소아 시절을 보냈고 충주와 원주로 할아버지 일터를 따라 이사를 다니면서 저수지와 중앙선 철도 공사장에서 노무자로 돈을 벌어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 가는 생활에서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그런데 같은 마을에 사는 동료들은 할아버지가 대농이라 그 집 아들들은 일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선생으로 면서기로 순경으로 취직되면서 농사일 안 해도 가족들의 생계를 어렵잖게 꾸려 가는 것을 보았다. 학교를 못 다닌 것이 못내 아쉬웠기에 자식들은 꼭 공부를 시키겠다고 다짐한 터라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농사일을 시키지 않고 계속 공부를 하게 배려해 주셨다.

우리 마을엔 나이 한두 살 차이의 동료들이 15명이 나 되었는데 힘겨루기 팔씨름을 했다. 나는 항상 꼴찌였다. 하여 운동을 하겠다고 다짐하고 나무를 잘라다가 평행봉을 뒤뜰에 만들었다. 못 쓰는 체의 둘레에 시멘트 가루를 넣어 굳혀 역기를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했다. 냉수마찰을 하면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는데 키가 크는 것을 느꼈다. 내 방 벽에 키를 재서 표시하고 보니 3개월 만에 7Cm나 자랐다. 고교졸업 시 158cm 정도였는데 1년 반 만에 175cm로 큰 것이다. 키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당시의 한국인으로서는 기네스북에 올라갈 기록이다.

1년 뒤 학교 다닐 때 제일 키가 컸던 동창을 만나면 나를 보고 첫 인사가 , 너 언제 키가 그리 컷냐였다. 다시 친구들과 팔씨름을 하여 친구들 모두를 이겼고 마을에서 힘이 세다는 옆집 군대 제대한 형과 팔씨름하여 승부를 내지 못했다. 운동 8개월 만에 친구들에게 이길수 있었던 것은 운동이었고, 성장과 건강증진에 최고란 것을 배운 경험이었다.

가을이 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 재건에 초석이 되는 기능공 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국비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경기 공업 전문하고 4학년 편입 시험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원고 출신 동창과 같이 응시하여 둘이 같이 입학했다. 여기는 등록금이 없기에 서울에 있는 친척집에 하숙비로 한 달에 쌀 다섯 말을 주기로 하고 원효로 미나리 강 옆 달동네에 있는 엄마 사촌 외당숙집 다락방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다. 쌀 다섯 말도 집에서 식구들 식량의 상당 수준이라 아버지가 부담이 되신다고 말을 하셨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들의 교과서 값도 만만치 않았다. 시골집 식구들 한 달 식량이었다. 비싼 책은 쌀 한 가마니 값을 호가하니 좀 더 수준 높은 참고서를 사려고는 생각도 못하고 학교 수업에만 충실해야 했다. 하숙비와 책값을 마련하기 위해 천호동에서 벽돌 건재상을 하는 외숙님 현장에 물주는 알바를 한 달 동안 했다. 신혼 생활 중이신 외숙의 단칸방에서 기거하기도 눈치가 보였지만 낮에 알바하고 야간에 학교에 가서 수업을 받다보면 피곤해 졸기 바쁘다. 공부를 위해 브록 공장 물주기 알바를 포기하고 서울역 부근에 있는 자전차 공장에 외숙이 소개해 줘 일바로 들어갔다. 여기서도 야간 수업이 안 되어 한 달 다니고 포기했다.

봄이 되면서 보릿고개에 봉착하자 식량이 부족한 집에서 아버지가 더 이상 뒷감당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어 19644월 자퇴했다. 반학기 수료 성적이 1등이라고, 우수한 학생이 왜 그만두냐고 담임 선생님은 안타까워 하셨다 하지만 졸업해 봐야 공돌이 되는 것인데 그만두는 것이 공무원의 길로 가는 첩경이라 생각하고 주저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 집에 내려와 아주 바쁜 농사철은 아버지도 조금은 도와드리며 공부에 전념했다.

1965년 가을에 군에서 간보 후보생을 모집한다는 방이 붙었고 여기에 응시하여 합격하면서 군에 입대 훈련을 마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되었다.

필기시험 시 IQ 테스트도 있었는데 내가 132였습니다. 보통 사람보다 10여 점 높다 했고 필기시험 합격 후 체력 검사를 했다. 달리기, 턱걸이 등의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턱걸이는 응시자 대부분이 5회에서 많아야 10회 정도인데 나 홀로 16회 하면서 시험관이 그만하고 내려오라 했다.

 

 

6. 군대 이야기

 

. 입대 이야기

 

196654일 입대차 집을 나서는 날 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덕담이다.

너는 성격이 너무 강직해. 그러면 세상에서 오히려 따돌림 받는다. 여기 네 손에 복숭아가 있어. 사람들이 사과라고 하면 너는 그들에게 기를 쓰며 복숭아라고 하겠지. 남들은 들은 체를 안 할 것이고 너만 따돌림 받는거야. 하니 너도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해서 열 사람 중 7, 8명 다수가 사과라고 한다면 복숭아임은 내 마음에 넣고 네가 착각했었나 보다 하면서 그들과 동조해야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으니 군에 가서도 이점 명심하거라.”

못자리 판에서 피를 뽑고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니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덕담이다.

이제 네가 군의 장교가 되기 위해 떠나는데 아버지가 공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살아본 경험을 이야기하면 공무원으로 평생 근무하려면 황금을 돌같이 봐야 한다. 공돈이라고 잘못 받아 쓰다간 언제 발각되어 퇴직당할지 모르니 남의 돈, 공돈은 너에게 독약이 될 수 있으니 절대 받아서는 안 된다.”

인사를 마치고 나는 원주 터미널까지 걸어갔다. 시외버스를 타고 춘천 강원도 병무청에 집결하여 인적을 확인받았다. 강원도 출신 지원자 원주 3, 횡성 1, 강릉 1, 춘천 1, 6명이 춘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하차했다. TMO서 서울 출신 일행들과 만나 기차를 타고 연무대역에 내려 군용 트럭을 타고 수용연대에 들어갔다.

늦은 시각에 도착하여 식당에 가서 배식을 받았는데 검정 보리밥에 미나리 갈칫국이다. 집에서도 미나리는 향이 싫어 쳐다보지도 않았고 갈치는 기피 음식이었다. 난생처음 대하는 음식이라 아예 한 숟갈도 먹지 않고 굶었다. 하루를 굶으니 저녁에는 배가 고파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수용연대에서 3일 후 25연대 7중대로 넘어와 강원도 동료 일행 6명이 나를 따라 1소대 1분대로 편성되었고 키가 제일 큰 제가 분대장이 되었다.

하루는 배식 후 식판을 지정된 자리에 반납했는데 식당 담당 사병이 식판을 어디다 반납했냐고 잊어버린 것 아니냐며 큰소리를 쳤다. 식사 당번 분대가 되어 식판을 잊어버렸다면서 변상해야 한다고 했다. 아니면 감방 간다고 큰소리치는 바람에 우리 분대원들은 소지한 비상금을 걷어 변상을 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되었지만 운동량이 적어서 그런지 아니면 소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그런지 입대 전 집에서 1.5정도의 밥을 먹었는데 군에 와선 군대 500cc 식기 밥을 먹어도 그리 배고픈지 모르고 넘어갔다. 입대 전 어머니께서 배곯을까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막상 이를 모르고 참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사격장에서, 각개전투 훈련장에서 나보다 먼저 입대하여 훈련 조교인 고향 중학교 동창을 만나 그날 하루는 그늘진 곳에서 편하게 하루를 보냈는데 사람을 안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친 날이다.

10주간의 훈련소 신병 훈련을 마치고 725일 토요일 광주 육군 보병학교로 왔다. 도착한 날, 중대장의 연병장 집합 명령에 우리 강원도 일행은 훈련소 편성대로 역시 1소대 1분대 그대로 집합은 했는데 김용태 동기가 내 뒤에 섰다가 나와 키가 비슷하다고 빼서 3구대로 보내면서 보병학교 소대편성에서 3구대로 밀려 나갔다. 이어 각종 보급품과 교번, 명찰 등을 부여받고 이를 정리하고 눈코 뜰 새 없이 주말을 보냈다.

728일 입교식을 했다. 비가 와서 그랬는지 연병장이 아니고 강당에서 입교식을 했다. 키가 크다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학교장이 훈시하는 동안 얼마나 잠이 쏟아지는지 다리를 아무리 꼬집어도 머리가 고꾸러지며 졸다 보니 입교식이 끝났다. 내 앞에서 학생연대장이 중대장에게 큰소리로 명령한다.

이 후보생 세밀히 관찰해서 잘라 버려!”

알겠습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한다. 이로 해서 내 후보생 시절 내무생활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저녁 점호 때면 당직사관인 구대장들에게도 다 통보된 듯 옆 동료보다 관물 정돈을 훨씬 잘했어도 관물 정돈 불량!”하면서 지휘봉으로 손바닥 머리통 등의 얼차레를 받았다.

한번은 중대장이 직접 작업병을 집합시켜 선착순으로 달려 나갔다.

너 같은 놈은 작업병으로 쓸 놈이 못돼!”

결국 작업병으로 나가지 못했다.

토요일 내무 사열 시는 구대장은 관물 정돈 위주로 조사를 하나 중대장은 군인 복무규율이나 내무규율 같은 암기력을 질문하는데 암기력이 좋다보니 중대장에게는 맞은 바 없다.

허구헌날 당하다 보니 자퇴하고 싶었지만 고향에서 나의 출세만을 기도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고 나 또한 농군이 되는 것이 싫어 눈물을 머금고 참고 참아 결국 임관까지 했다.

어느 날 유격훈련을 마치고 귀대해서 중대장의 호출로 중대장에게 불려 갔다. 급히 달려가다 보니 상의 단추 하나가 열려 있었는데 이를 보고 지적을 한다. “문기수 후보생, 유격훈련 잘 받는다고 교관들이 칭찬을 많이 하던데 아직 정신 못 차리고 있구먼.”

, 교관들이 나를 칭찬했구나. 덕분에 중대장의 정밀 관찰 대상에서 해방된 듯 했다.

수료 1개월 전쯤에는 중대장이 내게 다가와 현재 훈련 학과 성적이 6등이니 열심히 공부해서 1등을 해보라 한다. , 이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느꼈다. 내무생활 벌점을 유난히 많이 받았기에 내무생활 점수가 반영되면서 결정된 서열로 군번이 부여 되었는데 군번 순으로 18등이 되었다.

429일 수료를 하였으니 만 1년 기간 중 한주가 빠진 51주 만에 임관한 것이다. 수료 후 휴가 출발을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있어 1주일을 영내 대기해야 했다. 임관 후 첫 일요일을 맞이하여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광주로 외출 외박을 나갔지만 나는 굳이 나가 돈을 쓸 만큼 절박하지 않았다. 내무반 침대에서 하루를 보내고 오후 5시경 혼자서 정문 앞 상가에 가서 막걸리나 한잔하겠다고 나가다가 당직사관과 마주쳤다. 그는 나보고 내무반으로 다시 들어가라 하면서 그의 길로 갔다. 모두 외출을 나가 20시는 되어야 귀대할 것인데 그들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들어올 것이다. 나만 내무반에서 독수공방이었다. 그러다 정문 앞 상가에 나가 막걸리 한 되를 사 마시고 21시가 조금 넘어 내무반에 들어가니 소대원들이 모두 들어와 있고 취침 점호까지 끝났다고 한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우려 하니 당직사관이 호출한다. 중대 본부로 가보니 당직사관이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빰을 때린다. 한마디 하며 때리고 한마디 하며 때리기를 반복하며 20여대 이상 맞았다. 더 이상 맞을 수 없어 때리는 팔을 잡고 입대 전에는 술을 마셨지만 훈련받을 땐 내무생활에 충실하고 술을 마신 바 없다고 했다. 이제 수료하고 모두들 외출 나가 술 마시고 들어오는 상황에서 혼자 있다가 지루해서 점호 전에 부대 앞에 나가 술 한 잔 사 먹고 온 것이 이리 큰 죄가 되냐고 물었다. 이제 또 때리면 임관 포기하고 맞짱 뜨겠다고 했다.

입대 전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당신, 아구통 한 방에 날릴 수도 있습니다.”

싸울 자세를 취하니 때리기를 멈춘다. 1년 참았으면 일주일 더 참아야지. 잘못한 것 알았으면 다음에 그러지 말라며 돌아가라 한다. 이후 내 볼은 퉁퉁 부어 있어 일주일 후 송정역에서 열차를 타기 전 중대장이 내 볼을 쓰다듬으며 군대 생활 잘하라고 위로해 주었다. 한 주만 더 참지.

임관하고 귀가 하는데 중대장이 서류 봉투를 내게만 준다. 열어 보니 고등학교 교육 성적표, 생활 기록부, 입대 시 신원 보증서다. 순간 아, 이것이 나를 구해 주었구나. 연대장의 퇴교 조치 명령 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이런 서류를 고향에서 받아 보고 또 훈련 성적을 보니 학교 훈련 성적도 우수하여 퇴교 조치를 하지 않고 졸업까지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추측이다.

 

. 사단 보직 화천 첫 외출

 

주말을 맞이하여 첫 외출을 나왔다. 같이 보직된 동기생 일행 4명이 같이 화천 읍내 주변 경관을 돌아보고 날이 어두워 우리도 식사 겸 술 한잔하겠다고 먹자골목에 들어서니 인산인해다. 길에도 사병들이 물밀듯이 돌아다녔다.

최전방 민간 통제구역 내에서 근무하다 보니 사람 보기가 힘들고 경계근무에, 훈련에 찌들린 몸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외출 외박을 나와 가능한 마음껏 즐겨보겠다는 심산들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들이 들어가서 앉을 방이 없다. 1km가 안 되는 거리라 세 번을 오가며 조금은 한산한 독방을 점할 수 있는 술집을 찾았는데 포기해야 했다. 술집의 풍경을 보니 술에 취해 마구잡이로 노는 사병들이나 이들에게 아양을 떠는 기생들의 심한 장난에 비명까지 지르며 노는 모습이 꼭 악마들의 미친 광란을 보는 듯했다.

한마디로 지옥에 온 듯하다. 망가진 인간들의 모습들, 나도 결국 저렇게 변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더 이상 화천 읍내에 머물고 싶지 않아 일행들에게 몸이 안 좋아 조기 귀대하겠다고 전하고 혼자서 7km 길을 걸어갔다. 인생의 말로, 악마 같은 모습에 실망하면서 당장 죽는 게 가장 깨끗하게 살다가는 인생인 듯 싶었다.

죽기 전에 가장 깨끗하게 살고 계신다는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어찌 생각하시는지 그들의 인생론을 듣고 싶어 길옆에 보이는 교회에 찾아 들어가니 문이 잠겨 있다.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부대로 가는 도로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허무한 인생사를 한탄하며 가는 데 시내버스가 내 앞에서 정차하더니 헤어진 동기생이 내린다. 그들은 화천 읍내의 지옥 같은 풍경에 실망하고 비탄에 빠진 나를 위로 한다고 부대 앞 술집에 가서 함께 술을 마셨다.

헛소리 개소리한다고 면박을 주면서 교대로 술을 권했다. 죽기로 받아 마셨다. 얼마를 마셨는지 어떻게 부대에 업혀 들어갔는지 보충대 내무반이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쓰린 속에 찬물을 마시고 속을 달랬다. 이 사건 이후 나는 화천 시내에 나가지 않았다.

 

 

. 첫 소대장 부임

 

2주간의 사단 신임 장교들에 대한 사단 소개 교육을 마친 후 20여 명의 동기생들은 3개 연대에 분산 보직되었다. 나는 예비 연대인 3연대로 명을 받았다. 안내 나온 트럭을 타고 화천읍에서 풍산리를 거처 연대 본부 지역으로 갔다. 그런데 포병대대 부대 막사에 지붕이 하나도 없다. 안내 장교의 말에 의하면 연초 북한군 1개 중대가 군사 분계선 안으로 들어온 것을 사단장의 명에 의거 VT신관 대포을 쏘면서 후폭풍으로 지붕들이 다 날아갔는데 아직 보수를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대 본부 인사과에 6명이 찾아 들어가 전입을 등록하고 연대장에게 전입신고를 마치니, 최종 보직 명령을 주며 늦기 전에 해당 임지로 출발하라고 한다. 나는 2대대 7중대로 보직을 받았고 대대를 경유, 중대에 이르니 3소대장이란다.

연대에서도 예비 대대에서도 예비 중대 예비 소대장으로 보직되고 보니 좋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가닥이 안 잡힌다. 연대로 보직된 동기생 6명 중 내가 키도 제일 크고 군번 순서로도 1등인데 전투지원 중대나 연대 본부에 보직되지 않고 어찌 예비 대대 예비 중대에 보직되었는지.

잠시 먼저 중대에 도착하고 들으니 중대장님도 교체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단다. 전임 중대장이 연대장에게 권총으로 머리를 얻어맞고 깨지면서 병원에 입원하여 교체되었다고 한다. 중대 식당에 병사들 용 닭고기가 보급되었고 사단에서 급양 감독을 나와 검근해 보니 보급된 양이 미달 되었다. 이유를 물으니 중대장님 위에 좋다 해서 닭똥집 몇 개를 중대장님께 드렸다고 했는데 사단 회의 시 감독 결과가 발표되면서 사단장이 연대장에게 엄하게 힐책을 했고 회의 후 연대장이 중대에 와서 중대장을 힐책하며 벌어진 사건이라고 했다.

전방이라 장교 식당이 따로 없어 사병 식당에서 중대 간부들이 별도의 식탁에서 사병들과 식사를 같이한다. 간부들은 자기 돈으로 피엑스에서 파는 마가린과 고추장, 미원을 준비해서 이를 국이나 찌개에 타서 먹는다. 중대장이 닭똥집 맛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가본데 처벌이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런 일로 해서 보급되는 사병들의 식사는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하고 육군 정량을 소대장들 입회하에 수령하고 조리까지 감독하게 되었다고 한다.

군대는 명 하나에 죽고 사는 판이다. 또 이의를 제기할 여건도 못 되니 받아들여야 한다. 중대장에게 신고를 하니 3소대장이라면서 지금 소대원들은 20km 전방 OP에 있는데 1주일 후 철수 중대로 복귀할 것이니 OP로 가지 말란다. 공연히 신임 소위가 업무 파악한다고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지뢰라도 밟아 안전사고라도 나면 안 된다고 가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소대원들이 없는 내무반에서 책을 보고 다른 소대원들과 배구도 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철수가 1주 더 연기되었고 역시 OP 부임을 반대하셔서 계속 영내 대기해야 했다. 2주 대기하니 소대원들이 OP에서 철수하여 중대로 복귀했다. 1주 뒤 경기도 운천 지역에서 대대 보전포 합동 훈련이 있어 소대원들은 휴식도 없이, 나는 소대원들과 친해질 틈도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군장을 준비해야 했다.

소대원들이 도착하여 일과 후에 그들의 신상과 애로사항들을 파악하는데 놀라운 건 고졸 이상의 학력은 소대장 외 2명이고 무학자가 4명이나 되었다. 이들에게 편지가 오면 둘이 만나 읽어 주고 답장을 써주기도 했다.

주중쯤, 해가 저물어 가는데 대대 위병소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 중대 우리 소대 김00 상병을 면회 온 아가씨가 있는데 어찌하면 되느냐는 것이다. 아니 민간 통제 지역이고 차도 없는데 화천읍에서 부대 위치를 어찌 파악했는지 민가도 없는 첩첩 산골길을 걸어서 부대를 찾아오다니 경탄스러울 뿐이다. 해가 넘어가면 어두워서 화천까지 걸어가는데도 걱정이 앞서는데 그냥 돌려보낼 상황이 아니기에 중대장님께 보고했다. 부대 아래 오두막집이 한 채 있으니 그곳에서 면회를 시키고 처마 밑에서라도 재워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며 승인을 받았다. 아가씨를 대동하고 오두막집에 걸어가는데 빗방울까지 떨어진다.

오두막집은 중대 근처의 화전민인데 방 한 칸에 임시로 기거하며 농사를 짓고 있다. 윗목에서 잠시 눈을 붙이는 것으로 승낙을 받고 부대에서 매트리스와 모포를 가져가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소대원은 부대 식사를 들고 외출 조치하여 면회를 시켰다. 다음날 연대에서 들어오는 부식 배달차에 부탁하여 화천읍까지 갈 수 있도록 조치를 했다. 소대장으로 부임 1주일 만에 소대원들에 대한 첫 봉사를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다.

화천읍까지 9km 산골길을 걸어서 찾아온 여인의 용기가 대단했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산골에서 만난 그녀를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이 앞서 그냥 이리저리 뛰었다.

와중에 소대원 하나가 전역을 한다고 해서 장래 계획을 물었다. 시골 고향 농촌에 부모님이 적은 농토의 농사를 지으며 가족을 부양하고 계시는데 아버지를 도와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모님께 효도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이 많다고 했다. 부모님을 따라 농사를 지으면 자기는 평생 가난한 농부로 살아가야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일단 먼저 부모님과 상담해 보고 반대하셔도 집을 떠나 대도회지로 가라고 했다. 거기서 운전을 배우거나 기술을 배워 도시 생활에 정착하고 난 후 그때 부모님께 효도해도 되지 않겠는가. 그러는 사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불효했다고 자책 되긴 하겠지만 현재 건강하시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10년 이상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니 그때 부모님을 모실 수 있고 그것이 정도라고 일러 준 바 있다.

훈련 준비를 마치고 대대 전체가 군 수송 트럭을 타고 5번 국도를 따라 화천 사방거리를 지나 GOP 철책선을 따라 이동 철원 김화를 지나 포천으로 넘어갔다. 이동 00산 훈련장까지 이동하는데 전방 경험이 전혀 없던 나로서는 실제 전쟁터로 달려가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철책선 옆을 지나갈 때는 적 GP에서 탄환이 날아 올 것 같아 조마조마했다.

숙영지에 도착 야영 준비를 하고 각 중대별로 대대 보전포 합동 훈련 연습을 했다. 우리 중대는 대대 예비 중대 예비 소대로서 전방을 공격하는 전투 중대를 엄호사격을 해 주는 임무를 받았다.

전쟁 상황을 정리하면, 보병학교 때 배운 FM식 공격 형태다. 새벽 530분에 공격 준비 사격을 한다. 대대 박격포, 연대 박격포와 사단의 직접지원 포병까지 가담되어 적진지에 포격을 가한다. 전방에 포격이 중지되고 6시에 전방 공격 담당 2개 중대가 공격개시선을 넘어 공격을 개시한다. 적군의 전방 초병으로부터 총탄이 날아 온다. 이는 경고성 소수의 총탄이기에 중대 화력으로 이를 제압한다. 이어 공격을 계속하여 적의 최후 저지선(우군측에선 돌격선)에 다다른다. 전차가 보병과 같이 적진에 전차포를 쏘며 공격하고 사단 포병들이 적진에 포탄을 퍼부은 후 사거리를 연장하여 적 후진으로 공격한다. 이때 보병들이 돌격 대형으로 적진을 유린하면 승전고를 울리며 훈련은 끝난다.

이때 우리 중대 기관총은 연발로 적진에 퍼붓는데 총열이 빨갛게 달아 수통의 물을 부어 식혀 가며 총을 쏜다. 하지만 총알은 적진까지 날아가지 않고 중간에 떨어진다. 이리되면 우리가 쏘는 탄환이 공격하는 우리 부대원의 머리에 낙하한다. 대대장이 노발대발하며 사격 중지 명령이 떨어지기도 했다. 급하다고 기관총을 연발로 마구 쏘게 되면 적군을 맞추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현장 경험이다. 첫날 이후 총알 낙하지점을 보아 가며 총열을 교환하고 방아쇠도 쉬어 가며 당긴다.

예비 중대라서 공격 지원 사격만 하며 전방 작전 현장을 보노라면 전쟁 영화보다도 더 정말 멋진 전투 장면이다. 이런 훈련을 준비하고 실시하며 1주일을 현장에서 숙영한다. 병사들은 취사반에서 조리한 식사를 하는데 나는 당번병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함고(반합)에 밥을 지었다며 쌀밥과 산나물 된장국을 끓여준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병사들과 같이 먹으면 되니 하지 말라 하는데 나를 보좌하는 것이 자기의 일이라고 탓하지 말고 먹으란다.

더 놀라운 것은 훈련하면 땀으로 전투복이 남루해지는데 이를 빨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리미질까지 했다. 알아보니 함고 뚜껑에 모래를 담아 불에 달구어 다렸다고 한다. 어느 날은 소대 대항 배구 시합을 해서 지고 벌주 내는 과정에서 소대장 간 막걸리 시합을 했다. 얼마나 마셨던지 인사불성이 되어 BOQ에 업혀 갔고 옷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잠들었던 것 같다. 아침에 보니 옷이 벗겨져 있고 발도 씻어 주었다. 대한민국에 이런 부인이 있을까 싶다.

1주일 만에 부대로 복귀하여 주말에 휴식 겸 부대 정비 시간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었다. 중대원들에게 사격훈련을 시키라는 명을 받고 사격장에 올라갔다. 중대원들에게 사격요령에 대해 강의를 하고 있는데 중대 서무계가 달려오더니 소대장님 전출 명령이 왔으니 어서 가방 챙겨 출발하란다.

전출이라니 보직된 지 한 달만인데 무슨 전출

아무리 고향이 원주 1군 사령부 옆이라 해도 아버지가 빽을 써서 후방으로 전출시킬 위치에 계시지도 않고 그럴 이유도 없는데 무슨 전출일까. BOQ에 올라가 옷가지를 챙겼다. 대대 보급차를 얻어 타고 연대에 도착하니 전출이 아니고 2군단 하사관학교 교관 요원으로 파견 명이 났다고 한다. 파견 명령이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파견 명령은 사단에서 하달 된 것이 아니고 1명 차출 지시에 의거 연대에서 예비 대대 예비 중대 예비 소대에 있는 내가, 공석이 되어도 부대 운용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해 차출당한 것이다.

,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 내 인생의 팔자다. 전방 생활을 하지 않고 후방 도시에서 군대 생활을 할 수 있다니. 연대장님께 신고를 하고 부대를 나왔다. 버스 타고 화천읍에서 환승하여 춘천으로 다시 샘 밭을 걸어서 힘들게 군단 하사관학교를 찾아갔다. 인사과에 전입신고를 하면서 내 소대장 근무는 2주 만에 종결된다.

 

. 군단 하사관 학교 교관 시작

 

첫 과목으로 M1 사격술 교관의 명을 받았다. 2주간의 연구 강의 준비를 마치고 보병학교 시절 배웠던 교수법대로 강의했다. 첫 심사에서 교육과장이 아주 우수하다고 어디서 교관을 했었냐며 극찬했다. 분주한 교관 생활이 시작되었다. 기관총에, 박격포까지 담당했다. 어느 날 박격포 사격훈련 교육 중 문제가 발생했다. 예광탄은 바람의 속도를 보고 낙하지점을 판단 리드를 조정하여 포탄을 발사하는데 어느 후보생인지 풍속을 잘못 판단 예광탄이 바람에 날아가 주변 농가에 떨어졌다. 불이 났다는 소식과 이후에 국방부에서 확인 검열이 나와 사격훈련 사실을 확인하고 갔다. 국방부에서 복구비를 변상해 준다고 했다. 후보생들이 한 실수지만 내 관할이니 본의 아니게 농민에게 피해를 준 듯하여 농가를 찾아가 정중히 사과했다.

후보생들은 일등병으로 입교하여 병장 분대장 임무 수행에 필요한 화기학과 분대 전술학을 배운다. 수료 말기에는 군단 유격장에 가서 유격훈련을 받는데 내가 인솔 명령을 받았다.

부대에서 유격장까지 20km 산악(해발 700미터)에서 길을 찾으며 중대원들을 안전하게 인솔해야 한다. 하늘도 안 보이는 숲속에서 길도 방향도 식별할 수 없어 오직 지도를 보며 짐작으로 찾아가야 한다. 착오 없이 유격장에 도착했을 때의 성취감이란. 후보생 시절 독도법 교육을 잘 받았다는 사실과 운이 좋았고, 하나님이 도와주셨다는 성취감을 느낀 바 있다.

이어 춘천지역 부대에 근무하는 하사관들에 대한 보수 교육까지 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구 대장 임무까지 부여받고 주간 교육과 야간 내무생활까지 관장해야 했다. 나이가 많은 터라 관물 정돈이 엉망이다. 이를 얼차레 시키며 관물 정돈을 다그치는데 얼굴이 익혀지면서 얼차레를 모면하기 위한 늙은 선임 하사관들의 잔머리에 걸려들었다. 점호 전 술로 매수당하면서 술주 짜 주번 사관 노릇도 한 바 있다.

훈련 이야기는 여기서 마치고 사생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보병학교와 전방 부대에서의 영내 급식으로 병사들의 급식이 습관화되었기에 부대 인근 민간 하숙집 반찬이 꿀맛같이 넘어간다. 그런데 한 달을 먹고 나니 이도 진력이 난다. 해서 퇴근 시 피엑스에서 소주 한 병을 나팔 불고 하숙집에 오면 그대로 상을 물린다. 그러다 보니 주인아주머니가 식사가 마음에 안들면 나가라 해서 춘천 시내에 방을 구해 자취를 시작했다.

밥이라고는 입대 전에 친구들과 천렵하며 강가에서 고기 잡아 매운탕 끓여 본 경험이 전부다. 어머니가 밥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밥과 국을 끓이고 반찬 만들어 도시락까지 챙겨 출근했다. 일요일은 빨래하고 일주일 분 도시락 반찬 만들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총각이 어찌 그리 살림을 잘하느냐고 칭찬까지 한다. 주말에는 춘천 인근 부대에서 근무하는 동기생 2명과 영화 구경을 하고 11시 반에 집에 와도 시내에서 매식하지 않고 밥을 해 먹는 것에 총각들인데 놀랍다고까지 하셨다.

어느 주말, 하사관 보수 교육이 있었는데 내가 당직사관이다. 같이 근무하는 김영택 동기생과 같이 나와 집에서 점심을 해 먹고 부대로 들어가려는데 소양강이 생각났다. 더우니 인근에 있는 소양강에서 목욕하기로 하고 강가로 갔다. 물에 몸을 적시다 보니 강폭이 250여 미터쯤 되어 보였다. 건너갔다 오자고 동기생에게 제안했다. 그는 힘들게 뭣 하러 그러냐고 사양했지만 내가 권해서 그가 먼저 헤엄을 쳐 강을 건넜다.

, 잘 가네. 나도 학창 시절 마을 앞에 개천이 있어 여름철 물이 많으면 헤엄을 쳐 학교에 다닌 적이 있다. 그를 따라 출발했는데 반쯤 가니 팔에 기운이 없다. 쉴 겸 배영을 하니 잘 나간다. 한참을 떠내려가다가 다 왔을까 싶어 바로 엎드려 보니 150미터 이상 춘천 시내 방향으로 떠내려갔다. 강폭이 휘어지는 지점에서 강 한복판으로 밀려 들어온 셈이다. 동기생이 상류에서 손짓을 하고 있어 기를 쓰고 헤엄을 쳤다.

입이 마른다. 동기생이 있는 상류까지 겨우 가서 빠진 기운을 회복하려고 1시간 이상 쉬었다. 그런데 다시 건너갈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팬티만 입었다면 1km쯤 상류로 걸어 올라가 다리로 건너가면 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부대의 근무 시간은 이미 지나있었다. 난감하여 일단 건너기로 결심하고 출발하려는데 동기생은 금방 건너간다. , 수영 무지 잘하네. 내가 끝까지 헤엄을 칠 수 있을까. 출발은 했지만 역시 반쯤 건너가니 또 팔에 기운이 없다. 더 이상 헤엄을 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배영으로 자세를 바꿨다. 이번에는 그냥 떠내려간다고 생각하고 한참을 떠내려갔다. 고개를 드니 아까보다 훨씬 더 멀리 더 넓은 곳으로 갔다.

동기생은 1km 이상 멀리서 따라 내려오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서 있다. 방향을 잡아 한참을 헤엄치는데 팔에 기운이 떨어져 더 이상 헤엄을 칠 수가 없다. 몸이 가라앉기에 발끝을 대보니 지면에 닿지 않는다. 기를 쓰고 솟구쳐 올랐다. 열심히 헤엄을 쳐 보지만 앞으로 전진 하지도 않고 동기생은 멀어서 올 수가 없는 거리다. 그때 앞을 보니 낚시하는 사람이 보인다.

사람 살려!”

구원 요청을 하니 낚시꾼은 동행에게 요청하라며 거부한다. 동행이 내게 오려면 나는 가라앉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을 때까지 헤엄을 치는 것이다. 얼마인가를 헤엄을 치다가 포기하고 다시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런데 발이 땅에 닿는다. , 살았다. 결국 50여 미터를 걸어 나가 강가에서 도착했다. 구역질이 나고 호흡이 가빴지만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얼마를 누워 있으니 동기생이 왔다. 그의 부축으로 자취방에 와서 설탕물을 마시고 상태가 회복된 듯 해서 부대로 들어가 당진 사관 임무를 완수했다. 내 인생에 두 번째 죽을뻔한 사례다.

겨울이 되면서 날씨가 추워 밖에서 밥을 해 먹기 불편해졌다. 다시 부대 인근 다른 집에 하숙으로 들어갔다.

68121일 김신조(참고 3)가 침투하면서 군의 경계 강화 조치가 단행되었다. 전방 부대들의 경계 강화 조치의 일환으로 내가 파견 나온 연대가 GOP 연대와 임무를 교대할 것이며 이를 위해 파견 나간 장교들은 모두 원복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1년 후면 병참병과로 전과 될 것인데 굳이 GOP 근무를 해야 이유가 없다. 춘천에서 편히 살다가 GOP 올라가서 고생할 필요가 없을 듯하고 기술병과에선 GOP 경력이 필요 없기에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주말에 원주에 가서 전에 신원 보증을 해 준 원성 병원장을 찾아갔다. 사정을 말씀드리니 알겠다고 했다. 병원에 1군 하사관학교 교장 부인이 입원 중이고 남편인 교장이 밤이면 문병하여 병원에 같이 기거하고 있으니 말해 보겠다고 했다.

부대에 복귀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결국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 전출 명령이 사단으로 해서 연대까지 갔다가 파견부대인 하사관학교까지 오는데 전화나 군사 우편이 있는데도 어쩐 일인지 7일이나 지나서 받았다. 연대에 전출신고를 하지 않고 곧바로 원주 하사관학교에 갔다. 늦게 도착 된 것에 대해 인사과에서 별 문책은 없었다.

이렇게 해서 1군 하사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도 엠원 소총 사격 과목을 부여받았고 군단에서 강의하던 과목이라 연구 강의 준비를 하지 않고도 그냥 통과했다.

 

<김신조 사건>

1.21 사태는 1968121일에 북한 특수부대 소속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정부 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 31명은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지만,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리면서 청와대 습격은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이들 31명은 검문 과정에서 정체가 탄로나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해 검문 경찰은 물론 인근 민간인들까지 사망하게 됐다. 이들에 대한 소탕전이 131일까지 이어진 끝에 북한군 29명이 사살되고, 1명은 도주하였으며, 나머지 1명인 김신조는 생포되었다. 이때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이름을 따 121 사태를 김신조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21 사태 이후 대통령 경호를 강화하는 차원에서 인왕산과 북악산, 청와대 앞길까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됐다. 또한 이 사건은 향토예비군 창설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시절 잊지 못할 이야기들

 

19695월 초 병참 장교로 전과하며 전과반 교육전 11보급 대대로 전보되었다. 대대에선 2개월 뒤 입교 전출 대상이라 정규 보직을 임명치 않고 작전과에 임시보직을 주며 내가 하사관학교에서 사격술 교관을 했던터라 2개월 뒤 군단 직할부대 사격 경연대회가 있으니 전출 전까지 부대원 사격술 교육을 시켜달라고 했다.

이를 위해 부대 인근에 25미터 사격장을 새로 만들었다. 매일 부대원들의 사격술를 지도하던 중 한 병사가 오발하여 사격장 군기를 잡기 위해 그 병사의 복부를 발로 한 번 찼다. 쭈그려 앉으며 배가 아프다고 하기에 엄살을 부리는 것 같아 중대로 돌려보냈다. 다음날 출근하니 그 병사가 후송을 갔다. 보급 중대장 당번병이라 중대장의 격노한 힐책을 받은 바 있다. 열심히 가르친 결과 군단 사격대회에서 1등을 했고 전출 송별 회식에서 보급대대장의 격찬을 받은 바 있다.

196910월 전과반 교육을 수료했다. 16병참 보급대대에 전보되면서 여기에서도 나의 하사관학교 교관 경력을 고려하여 경비 중대 5분대기 소대장으로 보직되어 대대 신병 훈련소장 임무를 부여받았다. 대대 신병이 전입오면 1개월간 5분대기 소대에서 태권도, 총검술, 사격, 무장 구보에 분대 전술까지 보병 각대 전투 능력을 숙달시킨다. 중대로 복귀 보직되면 대대 전 기간병과의 훈련 격차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을 매일 같이 혼자서 전 과목을 직접 교육을 시키며 소임을 다하고 있을 때다.

19702월경, 구정에 중대에서 고향을 그리는 병사들의 회포를 풀어 주기 위해 막걸리 파티를 했다. 파티가 끝나고 간부들은 퇴근한 후 내가 당직사관이라 병사들을 취침시켰다. 30여 분 뒤에 내부반 불침번이 달려와 보고한다. 전과자 병사 2명이 곡괭이(전과 4)와 대검(전과 5)을 들고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현장으로 달려가니 누가 더 세냐고 으르렁대다 나를 보더니 둘이 머리를 숙이고 죄송하다 며, 사죄한다.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을 받고 내무반으로 돌려보냈는데 30여 분 뒤 또 싸운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 이 둘은 말로 안 되겠네. 그렇다고 술에 취한 사람을 두드려 팰 수도 없고 술에 취해 있으니 술로 다스리기가 더 쉬울 것 같아 중대 본부로 데리고 갔다. 잠들어 있는 PX 사병을 깨워 막걸리 석 되를 사다가 화해하는 조건으로 술 나팔이나 불자고 권하며 막걸리 한 되를 입 떼지 않고 원샷 하기로 내기를 걸었다. 예측대로 둘은 반도 못 마시고 기권을 불렀고 나는 완샷을 했다. 못 마신 술을 여러 번 강요하여 모두 마시게 했다. 하니 술에 취해 그 자리에 주저 앉는다. 불침번을 불러 내무반에  눕히고 재웠다.

다음 날 일과 시간이 되어 태권도 시간에 21 자유 대련 요령 교육이란 명분으로 소대원들이 구경하는 앞에서 사나이답게 도전해 보라 하면서 2명이 죽지 않은 만큼 두드려 패 결국 2명이 무릎을 꿇고 항복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이들은 신병들에게 전과자 고참 행세를 안 했다.

1970년 초여름까지 5분 대기 소대장직을 성실히 수행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킨 결과 군사령부 직할부대 5분대 소대 훈련 경연대회에서 1등을 했다. 또한  야전쾌지나 경연대회도 우승하며 원주시민들에게 시범을 보인 공로로 병참 단장의 지시로 경비 중대에서 야창 보급 중대로 보직되었다. 그런데 중대장은 내가 철저한 보병 원칙 장교라 대외기관에 원만한 창고장 임무 수행에 부적합할 것 같다고 통합 저장 과장이란 편제에도 없는 직책을 수행하라고 한다. 창고별 청소 상태, 저장관리 상태, 화차 하역 작업, 전방 추진 상차작업 등을 종합적으로 관장하는 직책이다.

중대장님의 선입견이 고맙다. 대외기관에서 물품을 얻으러 오면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이고 이로 해서 부대가 시끄러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많은 보급품을 취급하다 보면 나와 상관없이 물품을 손망실할 우려가 많고 이로해서 생돈 변상 당할까 염려되어 물품직을 기피하던 터라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품 취급도 안 해보고 부하의 착오로 결국 내가 변상까지 한 사례가 있어 글을 남긴다.

저장 과장 임무에 충실히 근무하고 있고 대위 특진 명령까지 있어 4종 소모품 창고장 직을 인수받지 않고 진급 때를 기다리는데 대대장이 호출한다. 대대장 명을 어긴다고 명령 불복종이라고 호통치며 당장 물품을 인수인계 받아 임무를 수행하란다. 현재 창고장은 선임하사가 임무를 수행 중에 있고 내가 진급되어 1주일 이내에 다른 부대로 전근 가게 되면 그가 다시 임무를 되받기 때문에 수많은 보급품을 일일이 카운트 할 필요가 없다. 두 달간 날짜만 보내며 인수인계 절차를 마치고 111일부터 정식으로 임무를 수행하며 내 도장 직인 하에 각 지원 부대에 보급품을 보급했다.

임무 수행 5일 만에 116일 결혼식을 위해 휴가를 명 받고 선임하사에게 내 도장과 임무 대행을 맡겼다. 일주일만인 11일에 귀대하니 3군단 병참부로 전출 명령이 났다. 3군단 병참부는 군 인사계획에 의거 1970년 말로 해체되어 1군수 지원사령부 창설부대에 통합된다. 곧 해체될 부대에 왜 전출시켰는지 모르겠다. 2개월 근무할 보직도 애매했따. 나는 전임 부대의 물품직 인수인계를 해야 하기에 이를 위해 원주를 왕래하며 신혼을 즐겼다.

물품직 인수인계도 나의 예상대로 전임 선임하사가 다시 받았다. 1 군수 지원 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창설 요원으로 1종 보급 장교로 보직되어 사령부 1종보급 행정 근무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전임 부대의 1군사령부 감찰검열에서 내 이름으로 전방에 추진된 마닐라 로프 3롤이 망실되었으니 변상하란다. 추진 날짜가 공교롭게도 116일이다.

그날 나는 결혼차 휴가 중이라 선임하사가 임무를 대행했다고 했다. 휴가 갔다는 근거를 대라고 해서 원주 문서고를 가니 어느새 부산 중앙 문서고로 이전되었다고 한다. 일 년도 안 되었는데 어느새 중앙 문서까지 후송되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부산 문서고를 찾아가 열람하니 휴가 명령서가 있다. 이를 복사해서 감찰관에게 제출하니 임무 대행 명령을 발령하지 않은 대대장에게 죄가 있지만 일을 확대하지 말고 내 이름으로 발생 된 사건이니 내가 책임지는 선에서 마무리 짓자며 현품 배상 명령을 내렸다. 선임하사가 동해안 항구에 가서 선박용 로프를 사다가 현품 반납하면서 나의 출납 변상은 종결되었다.

197110월 급양대에서 근무하며 월동 김장 가공용 배추를 산지에서 검사 수납 불출하던 중 점심 식사가 늦어지면서 배가 고파 배춧속을 먹었다. 이것이 잘못된 듯 세균성 대장염에 걸렸다. 심한 설사병에 군 병원에 입원 1주일간 치료를 받았다.

19721121일 유신헌법 국민투표 선거일이었다. 나는 당직이라 선거를 하고 출근하겠다며 인근에 살고 있는 선임하사에게 잠시 대행을 부탁했다. 조식 후 투표하고 집을 나서는데 부대 1호 지프차가 급히 달려왔다. 정차 후 내리는 운전병의 옷이 물에 젖어있어 순간 놀랐다.

예측대로 부대 CP에 난로가 과열되어 불이 났는데 부대원들이 급한 진화를 마친 상태였다. 부대에 도착하니 주번병이 세면 차 자리를 비운 사이 난로가 과열되며 인접 현황판에 불이 붙었고 천장까지 번진 것이다. 부대원들이 화재신고 전 합심하여 물을 퍼 날라 소화하면서 심한 연기도 뿜지 않고 인근 부대에서도 모르게 진화된 상황이었다. 사무실은 물 바다가 된 상태였다.

지휘관에게 불이 났다고 전화로 보고를 하면 서울 집에서 급히 귀대하실 것이 분명하다. 일부 간부까지 불러 사고 보고와 시설복구 방안을 숙의해야 할 상황이다. 30여 명의 부대원 전원을 연병장에 모아 놓고 엄숙한 표정으로 내 생각을 피력했다.

사령부에 사고 보고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여러분들에게 달렸다. 시설복구에 최선을 다해 일요일 밤까지 예전과 똑같이 복구할 수 있다면 대대장님에게 보고를 않고 우리끼리 작업을 한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부대 간부들에게 함구해 주길 부탁한다. 이게 안 되면 먼저 대대장님과 사령부에 화재 사실을 보고 하고 책임자의 과오와 문책 여부는 나중에 부대에서 결정될 것이다. 대충 보니 합판 사다가 천장 복구 공사 하고 창문 커텐을 특별 주문하면 2일이면 충분하고 사무실에 설치된 현황판도 2일이면 충분히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복구에 수반되는 모든 경비는 내가 다 책임진다.

할 수 있겠나!”

할 수 있습니다!”

사령부, 대대장님에게 보고를 않고 우리끼리 복구하기로 다짐받고 선임하사에게 합판을 구입해 와 목공병과 천장을 작업하도록 했다. 커텐 가게에 가서 같은 색상의 커텐을 주문하고 아스테이지를 구입해 부대 차트병에게 현황판 제작 등의 임무를 분담시켰다.

일요일 저녁 모든 공사가 끝났다. 아니 큰 문제가 남았다. 상황판 소채 단지에 붙일 지도가 없었다. 이를 너무 늦게 알았다. 아니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지도는 공병 보급소에 가서 청구하여 보급받아야 하는데 일요일 밤이라 담당 창고장도 출납관도 없는 상황이다. 어찌 지도를 보급받을 수 있겠는가.

내가 직접 공병 보급소를 찾아가서 당직사관을 만나 지도를 미리 좀 보급해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택도 없는 소리 말란다. 자기 소관이라 해도 야간에는 창고문을 못 연다. 더욱이 남의 창고이고 근무 시간 외인데 내일 날 밝으면 정상적으로 청구하란다. 그렇다고 부대에 불이 나서 이를 밤새워 복구하기 위해 급히 필요하다고 말할 상황이 아니니 할 말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서 준비해 간 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주며 말했다. 내가 부대장에게 잘 보일 일이 있어 깜짝 쇼를 준비하는 것이니 행정적인 절차는 내일 밟겠다고. 설명을 들은 그는 알겠다며 지도 창고병을 불러 주었다.

창고병도 투덜대고 거절하는 것을 금일봉을 전해주며 부탁하니 내일 꼭 행정 서류를 제출하라며 지도를 보급해 준다. 도엽번호도 모르고 주요 지점만 알고 인근 지도를 검색, 20여 장이 넘는 지도를 한밤중에 창고 바닥에 깔아 놓고 후레쉬로 맞춰보며 찾아 밤새워 현황판을 완성했다.

월요일 대대장님이 출근하시며 사무실이 깨끗해진 것 같다고 하셨다.

곧 연말도 되기에 대장님 안 계실 때 대청소를 했습니다.”

, 그래. 수고했구만

이 일은 일주일 뒤 인사계가 알게 되고 대대장까지 알게 되었다. 이런 큰일을 어찌 혼자서 처리 할 생각을 했냐며 힐책 겸 나의 책임성과 추진 정신을 극찬해 주셨다.

1972121군사령부 인사 명령에 의거 21사단 병참부에 찾아갔다. 00 대위가 하루 전에 중대장 요원으로 육군본부 인사 명령에 의해 부임했다고 한다. 아직 사단사령부 인사 명령이 발령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루 사이에 두 명이 전입되다 보니 사단 인사처에서도, 병참부에서도 어리둥절이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00 대위는 육본 인사 명령으로 1군에 와서 1군 인사과에서 병참부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21사단으로 명령을 낸 것이고 나는 1군사령부 병참 참모부 인사과에서 군 인사과에 21사로 전출 보직토록 요청(병참장교 인사는 자기네 소관이라고 항의)하여 명령을 내면서 빚어진 사고였다.

00 대위가 1군에 와서 사령부 병참참모부를 먼저 방문 승인을 받았다면 나를 21사로 가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왔던 두 사람이라 한 사람은 원소속으로 돌아가야 한다. 21사단 현 중대장이 병참 참모와 의논한 자리에서 내가 1군 사령부의 추천을 받은 사람이고 급양대 근무를 마치고 온 터라 중대장 임무 수행이 훨씬 빨리 적응될 것 같다고 사단 인사참모에게 나를 중대장으로 발령 내도록 전화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중대장이 되었고 최00 대위는 원복 되었지만 나보다 선임이었는데 상당히 미안함을 금할 수 없었다.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중대원 교육은 직접 담당했다. 교육의 날 부대 간부들에게 배정한 교육과목의 교육은 그들에게 위임했지만 매일 아침 일과 시간 전 당직사관이 실시하는 과외 교육은 내가 직접 통제했다.

출근과 동시에 중대원들과 간단한 체조를 하고 10km 구보 시 내가 뒤따르며 낙오자를 다그쳤다. 귀대해서 9시까지 태권도와 총검술도 직접 지휘 감독했다. 그리고 교육의 날 사격만은 내가 직접 통제하며 수준 미달자들은 엄격 보충수업을 실시하여 합격할 때까지 시켰다. 이런 노력 덕으로 1973년 하반기 사단 직할 부대 교육 경연대회에서 우리 병참 중대가 수색대를 이기며 1등을 했다. 밥만 먹고 훈련만 하는 수색대대가 매일 쌀가마 미는 병참 중대에 사격과 10km 무장 구보에서 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수색대장이 보직해임 당했다.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어 그에게 미안했다.

이외 중대장 관리 책임인 수송부 트럭 엔진이 동파된 것을 서울에 가서 폐차 엔진을 사다 조립 후 반납하며 수습했고, 참모님 차 히타 과열로 운전석에 불이 난 것을 지휘계통에 화재 보고 하지 않고 춘천에 나가 핸들과 천막을 구입해 수리하기도 했다. 병기 중대장과 사단장님 차 내부 치장하려 새벽에 춘천 나가다가 국도에서 송아지를 치어 결혼반지로 송아지 값을 변제하기도 했고 겨울철 보급품 추진 나온 수송대대 운전병들과 우리 중대원 간 패싸움이 발생 우리 병사가 삽으로 머리를 맞아 부상을 당하면서 그 부모님께 사죄하고 치료하기까지 등등 잔사고들로 중대장 보직 1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1978년 여름 2사단 병참부 보좌관으로 근무할 때 이야기이다.

내가 병참감실 유류과에서 근무한 유류 전문가라며 1군 사령부 예하 각 사단에 유류 관리 실태를 검열하라는 명을 받고 차출되어 2주일간 검열을 다녔다. 27사단 검열을 마치고 군사령부에 귀대하여 검열 결과를 보고 하는 날 새벽 귀대 길에 비가 내렸다. 신포리 시골 비포장도로를 달리는데 차가 자주 다닌 곳은 많이 파여 있어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운전병은 도로 가장자리로 운전했다. 비가 와 길옆으로 미끄러질 것 같아 신포리 검문소를 지나며 길이 미끄러우니 천천히 안전한 길로 가라고 일러 주고 100미터나 갔을까 차가 우측으로 미끄러졌다. 운전병이 무의식적으로 좌로 급회전하니 차는 차선을 넘어 좌측 낭떠러지로 방향 전환이 되었다. 좌측은 10여 미터 급경사 낭떠러지다.

순간 뛰어내릴까 생각했는데 허리가 차에 걸려 같이 구를 것 같았다. 차내에서 구르면 벼랑 밑 밭에 거꾸로 처박히며 내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았다. 찰나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길은 운전석 의자를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은 앞 손잡이를 잡은 채 운전석 방향으로 엎드려 땅에 부딪치는 충격을 면해야 한다. 차는 360도 굴러 밭 가운데에 정상적인 자세로 안착되었다.

잠시 정신을 차리고 운전석을 보니 운전병이 안 보인다. , 운전병이 날아갔네. 일어나려 하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차 윈도가 찌그러지면서 내 몸을 덮고 있어 엎드린 자세로 뒤로 밀려 나갔다. 밭에 서서 보니 운전병이 차 옆에 서 있었다. 뛰어내렸다고 한다. 온몸이 진흙투성이었다.

방금 지나온 검문소에 가서 사고 신고를 했다. 인근 병기 정비중대에 구난 신청 지원을 받아 찢어진 천막은 재봉틀로 박고 지프차용 윈도가 부대엔 없어 춘천 시내에 나가 사다(양구에 있는 집사람에게 전화 돈을 가져 와서) 주고 정비를 마친 후 저녁에야 군사령부에 도착했다.

검열용 차는 근간 새로 보급된 차인데 천막이 찢어진 사고를 당했지만 사람은 다치지 않고 인사처와 군수처에 동기생들의 지원으로 사고 보고 없이 검열 임무를 마친 사건이었다.

대대장은 19824월에 3군 사령부 인사 명령으로 발령이 났다. 8211일 진급을 하고 4개월 만에 명령이 난 것이다. 순리대로라면 나는 사단 참모부터 나가야 한다. 그런데 동기생 송상근 중령이 전년도에 진급되어 3군 관하 28사단 참모 후임을 목표로 군사령부 군수처에 와 같이 근무 중이라 나는 순번대로 발령 난다면 1983년에 가야 될 것 같다.

1년 이상 기다리는 것은 지겨울 듯했다. 2 군수 지원사령부 15보급 대대장이 급양대장으로 가기 위해 후임을 빨리 불러 드려야 하는데 지원자가 없다 보니 나를 전입 요청한 것이다. 내가 노 하면 군사령부 인사과에서도 함부로 발령을 내지 못한다. 아니 꼭 가야 한다면 송상근 중령이 먼저 나가야 한다. 이리되면 상근 동기에게도 누가 되는 것 같고, 사단 참모를 꼭 먼저 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15보급 대대장은 옛날에 21사단 병참 중대장을 내게 넘겨준 터라 그 은혜를 갚기도 해야 한다. 결국 오케이 하면서 15보급 대대장으로 발령이 났다.

여기서 잠시, 15보급 대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보급대대이다. 10여 년 전까지만도 11 직접 지원대대와 15 일반 지원대대 2개 대대가 김신조 이후 전투병과 보강을 위해 지원병과 병력을 줄이면서 통폐합되고 최근 공병 보급 중대까지 흡수되면서 7개 중대로 한때는 병력이 1,050여 명 인적도 있었다. 경기도 동부지역에 사방 분산되어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60여 대의 차량과 병사들이 무사히 복귀하여야 맘 놓고 잠을 잘 수 있다. 사단 보급대의 규모와는 비교가 안 되기도 하지만 책임과 임무 수행이 너무 힘들어 보직을 기피하는 부대인데 이를 수락하면서 22개월간 나 또한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창고병 한두 명으로 기름 창고관리가 미흡해 불이 날까 항상 노심초사해야 했다. 생계가 어려운 방위병들이 많은데 출근을 못하는 사례가 발생 시 확인이 안 되는 방위병은 어쩔 수 없이 탈영 보고를 해야 한다. 결국 지휘부에 밉보여 감찰검열까지 받았다. 이런 과정에서 과로가 누적되어 감기가 폐렴으로 전이되고 군 병원에 입원해 사경을 헤맸다. 1주일간 치료를 받고 소생하긴 했지만 참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또한 1982년 초겨울 업무차 육군본부에 나왔다가 귀대하는데 첫눈이 내렸다. 동구능 근처였는데 앞에 가는 차가 눈길이라 서행을 하고 있었다. 운전병이 추월을 시도했다. 전방에서 근무 시 눈길에 차가 여러 번 미끄러졌던 기억이 있어 운전병에게 브레이크를 밟으면 차가 미끄러지니 브레이크를 밟지 않을 만큼 천천히 달리라고 말하는 순간이었다. 운전병이브레이크를 밟았다. 지프차는 아홉 시 방향으로 급회전하며 미끄러졌다.

상대 차선에선 영업용 택시가 오고 있었다. 운전병은 중앙차선까지 미끄러져 들어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핸들을 우회전으로 급히 돌려 주행차선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주 오던 택시가 급제동하며 미끄러져 우리 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도로 위에 눈이 덮여 중앙차선이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 차는 우리 차선에 있는 듯하여 차를 세우고 나는 인근 헌병대에, 택시는 순경을 불러 합동 검증을 하였다. 결론은 우리 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택시가 급제동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며 우리 차에 과실이 있다고 판결했다.

사고 보고 후 운전병을 영창 보내며 법대로 처리할까 하다가 운전병의 장래를 생각하고 또 운전병이 모두 변상하겠다 해서 수송관으로 보내 합의를 봤다. 하지만 택시의 조수석에 타고 있던 처녀가 눈에 심하게 멍이 들었는데 그 아빠가 딸 시집 못 간다며 합의해 주지 않았다. 사고 보고 시기까지 놓치며 합의는 보려고 했지만, 운전병은 집에 다녀 오더니 집에 돈이 없다면 150여만 원의 합의금 중 70만 원만 가지고 왔다. 결국 어쩌지 못하고 내가 80만 원을 대납해 주었다. 사고 당시 충격으로 나도 유리창을 받아 머리가 부딪치며 상처를 입었지만 누구에게 하소연도 못하고 선탑자로서 죄를 감내해야 했다.

영내 군사 이야기는 상세히 더 언급할 수가 없기에 여기서 맺는다.

 

 

 

. 진급 이야기

 

소위로 진급하고 2년 있어야 중위 진급을 하는데 김신조 사건 이후 국방부에서 군을 확대 개편하면서 196951일 진급이 21일로 당겨졌다. 19695월 전과 되면서 전과반 교육 수료 후 병참 부대에 보직 경비소대장 직함으로 5분 대기 소대장으로 대대 신병 교육 대장을 하였다.

1970년 구정 때 병참단 부단장이 명절에 찾아오는 이 없이 서울 집에도 못 가고 외롭게 묵고 있는 여관으로 인삼주 한 병을 사 들고 놀러 갔다. 월남 파병 때문인지 군 증편 때문인지 진급 방침이 변경되었다. 중위 3년 근무한 후 진급 대상이 되고 심사(같이 근무하는 고참 중위는 7년 차인데 진급 못하고 있었음)를 통과해야 대위 진급이 되었던 것이 갑자기 진급 심사를 하면서 부단장이 병참단 중위에서 대위 진급 심사위원장이 되었다. 이분의 강력한 추천(심사위원장 권한으로 16대대 문 중위는 야전 쾌지나 3등에 원주시 시범까지, 재원지구 5분대기 소대 교육 경연에서 1등을 하는 등 병참단의 명예를 대내외에 빛내준 공이 지대하니 일단 확정하고 나머지 인원만 심사하자고 하셨고 각 대대장도 이의가 없어 우선적으로 선발되었다 함)으로 특진을 하면서 1970111일 임시 대위로 진급하였다. 중위를 단 지 1년 반 만의 진급이다. 대대에 10여 명의 중위 중 나만 특진 된 듯하다.

 

 

대위 진급 후 중대장 보직까지 마치고 뒤늦게 고군반 교육을 받았다. 소령 진급 1차 심사를 중앙 심사에서 고군반 성적을 상으로 받으면서 평정과 상훈 모두 갖춘 상태로 어느 누구에게 부탁 없이 만점으로 진급이 되었다. 197591일 소령을 달았다.

중령 진급을 위해 소령 1년 차는 우리 과에선 내가 전입(3명 중) 고참이다. 감실 내 6개 과에 많은 고참자들이 있어 과에서 1번을 받더라도 근무 평정자체를 신경 쓸 게재가 안되어 그냥 넘겼다. 2년 차 평정부터는 진급 대상은 아니더라도 1차에서 만점을 따 진급하려면 근무평정을 상으로 받아야 한다. 인원 분포와 6개 과에서 4명이 상으로 올라가기에 고참들 3개 과는 당연히 돌아가는 것이고 급식과와 유류과는 진급 대상이 안되면서 차감의 2차 평정을 받는데 급식과만 제끼면 나도 상을 받을 수 있다. 우리 과장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차감님에게 받을 수 있도록 말씀 좀 잘 드려 달라 부탁했다. 나중에 평정을 잘 받았으니 차감님께 식사 한 번 사라 해서 과장님 모시고 셋이서 식사를 했다.

소령 3년 차 보병 2사단 병참 보좌관으로 보직되었다. 중령 진급 1차 대상이 되었다. 사단에서 참모장의 2차 평정을 받았는데 상으로 주신 듯 진급과에 사단 대상자 중 만점의 점수로 진급 가망이 있는 대상을 인사참모가 알아보고 사단장님께 보고 한 듯하다. 병참감실에서 사단에 급양 감독을 나와 사단장님께 인사하는 데 사단장님이 말씀하셨다. 우리 사단에서 병참 보좌관은 확실히 진급할 것이라고. 혹시 1차에 진급되나 기다렸다. 하지만 육본 진급 방침에 1차는 정책적으로 진급 대상에서 제외하였기에 1차 진급은 건너뛰게 되었다.

계속 2사단에 근무하면서 2차 진급 심사를 받았다. 3군단에서 군단에 진급 대상 중 서열을 결정하여 육본에 보고 하는데 점수가 좋지 않은 군단 군수처에 근무하는 대상자를 내 앞 서열에 부여하고 군단장에게 보고했다. 각자 기본 점수를 확보한 서열대로 부여하라고 수정 지시되면서 내가 1번으로 육본 중앙심사에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진급이 될 것이라 기대에 들떠 있는데 낙방이다. 원인인즉 육대를 나오지 않았다고 육대 수료자에게 밀렸다는 것이다.

3군단에 근무하면서 진급을 위해선 필히 육대를 나와야겠기에 밤낮으로 공부하여 육대 군수관리 과정에 응시해 합격했다. 1980년 군수관리반 교육 중 중앙심사를 받았는데 발표 결과 또 낙방이다. 같은 중앙 심사 대상이라도 수료자가 우선이라고 송상근 동기가 진급되었다.

교육 수료 후 3군 사령부 군수처 정비과에 보직되었다. 나보다 먼저 와서 급식과에 근무하던 손준근 동기생이 경력 관리상 나와 진급 경쟁이 되지 않자 국방대학원으로 전출해 갔다.

1981년 진급 심사 기간이 되었다. 군수참모 행정실장이 진급 때인데 어찌 맥 놓고 있냐고 참모댁에 인사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찾아가 부탁을 하라고 권했는데 그에게 찾아가 부탁을 해서 진급하면 참모님 공이 되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육대도 안 가고 그는 2차이고 진급 점수관리도 좋지 않은 걸로 아는데 육대 나오고 4차이고 점수 만점인데)이 참모를 찾아가 부탁했다 해서 진급 서열이 바뀐다면 참모님 스스로 얼굴에 똥칠하는 일인데 그렇게 하시겠냐고 내 뜻을 전했다. 우리 과장님은 동기생이 육본 진급 과장이니 그에게 부탁하겠다고 하시는 것도 전화 도청이라도 당하면 오히려 청탁으로 걸려 낙방 될 수도 있느니 가만 계시라 부탁까지 드린 바 있다.

진급 심사가 발표되었다. 내가 최고참으로 1번으로 선발되었다. 누구에게도 부탁한 바가 없기에 공짜로 진급하였다고 자찬하며 찾아가 인사드릴 사람도 없기에 과원들에게 축하주를 샀다. 진급되어 15보급 대대장으로 보직되었다. 동원훈련이 있어 동원 병력이 사용할 보급품을 훈련 부대에서 보급하는데 훈련단장이 우리 부대를 방문하셨다.

내가 2사단에 근무 시 연대장이셨고 청렴결백하다고 소문까지 들은 바 있지만 우리 대장님의 추석 인사로 양주 한 병을 연대장 숙소에 전한 바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선물을 되돌려보냈던 분으로만 기억되던 연대장이 진급하여 훈련단장으로 보직되어 오신 것이다. 동원훈련 물자를 잘 지원해달라며 양주까지 건네주며 참모들과 회식하라고 격려까지 해 주심에 감사하며 차를 마시는데 내 이름을 보면서 말했다.

, 당신 작년에 진급했지? 당신, 진급 심사 시 내가 심사위원장이었어. 심사석에 앉았는데 심사가 시작되면서 당신 카드가 제일 먼저 올라오더라고. 병참 장교 중 자기가 아는 사람이 없기에 경력을 훑어보니 자기가 연대장 시절 병참 보좌관으로 같이 근무한 거야. , 나와 같이 근무했었구만. 한데 자격을 보니 4차 진급 대상에 점수가 만점이야. , 이런 만점자가 어찌 여태까지 진급이 안 되었지 하며 심사위원들에게 병참 진급 심사 여태 엉터리로 했구만요. 1차부터 4차까지 만점이면서 진급이 안 되었다니. 이 사람 진급되는 것으로 정하는데 이의 있나요? 하고 질문하니 아무도 이의가 없어 제일 먼저 골라 놓고 나머지를 심사했지.”

이 말을 듣고 다음날 고마움의 표시로 꼬냑 한 병을 숙소로 선물했더니 이도 다음날 부관을 시켜 되돌려 보내며 훈련 물자만 잘 지원해달라 하셨다.

 

 

 

7. 스쳐 지나간 여인들

 

아버님께 수십 번 들은 말씀이 있다. 남자들이 꼭 조심해야 할 것 1번이 여자고 2번이 화투 놀음이다. 여자들은 경계심을 가지고 인물만 보지 말고 성격에 가정환경까지 세밀하게 파악하고 교제를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남자로 태어나 사춘기를 넘기면서 여자에 대한 욕망도 앞서고 이로 해서 그리움에 짝사랑까지 하기 시작하여 결혼까지 나의 여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여인은 우리 바로 옆집 처제를 사모한 적이 있다. 이웃집 형 처제는 본가가 횡성인데 미용 기술을 배우기 위해 언니네 집에서 머물렀다. 원주읍 미용학원을 다니며 우리 집을 지나치는 그녀의 모습은 키는 여자로선 중키 이상이고 늘씬한 몸매에 얼굴도 가름해 보여 미녀형이다.

그녀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썼지만 마을의 도덕적 윤리가 겁이 나 발송을 못하고 찢어 버리다가 군에 입대하며 그간의 사모했던 내용을 구구절절이 써서 당분간은 남모르는 연애를 해보자는 편지를 보냈다. 훈련 중간에 휴가를 나와 그녀의 동태를 보니 미소를 지으며 인사말도 없이 지나간다.

어머니가 그간 있었던 사연을 말씀하셨다. 내가 군에 간 사이에 그녀가 어머니에게 내 군대 주소를 알려달라고 해서 그녀의 뜻을 알고는 우리 집 며느리로 받아들일 처지가 못되니 사귀기를 중단하라는 말씀과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신다. 이로써 그녀와의 인연은 나의 짝사랑으로 끝이 났다.

임관 후 춘천 시내에 근무하면서 주말이면 가끔 같이 근무하는 총각 동료들이 걸 헌팅을 했다. 하다 보니 좀 더 여자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고 데이트를 하였지만 대부분 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외모와 언행을 살펴보고 마음에 안들어 그냥 헤어졌다. 두 번 이상 만난 여자는 세 명 정도이다.

그중 첫 여자는 소양강에서 데이트하던 중에 동네 꼬마들이 보기 좋다며 농을 하니 그 아이에게 아주 험한 쌍욕을 한다. , 이게 이 여자의 현 수준이구나. 그녀의 집안 환경이나 직장 문제를 더 이상 알아볼 필요도 없을 듯싶어 더 이상 데이트 신청을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여자는 내 자취방까지 놀러 온 적이 있는데 그녀가 방에 들어오고 나서 방에 마늘 냄새가 많이 난다. 아 이 여자는 암내가 나나 보다. 집에서 김장을 담그는데 마늘을 까 주었다고 이리 냄새가 날 것 같지 않고 그녀의 체취 같다. 이 여자도 사귈 대상이 못 됨을 느끼고 다음 약속을 하지 않으며 헤어졌다.

세 번째 여자는 걸 헌팅 시 최 중위가 데려 온 여자다. 차를 마시고 헤어지는데 그녀가 내게 작은 메모지를 준다. 열어 보니 나와 더 대화를 하고 싶다고 적혀있다. 2차로 만나 최 중위는 어찌 되는가 물으니 최 중위가 가자고 해서 다방에 가긴 갔지만 조건 없이 간 것이니 누굴 사귀던 자기 마음이기에 최 중위에게 미안할 필요가 없다며 자기는 나와 사귀고 싶다고 했다.

그녀와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그녀 말로는 중대 국문학과 2학년 중퇴했으며 춘천 전화국에 교환수로 근무한다고 했다. 용모도 수수하여 평범한 여자 스타일이다.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밥 먹기를 몇 번 하다가 그녀가 서울 집으로 간다며 춘천을 떠났다. 몇 번의 편지도 주고받았는데 국문과 출신이라 그런지 필체도 예쁘고 글도 매끄럽게 잘 썼다.

주말에 서울에 가서 그녀와 종로 빵집에서 만났다. 그녀의 친구를 데리고 왔다. 자랑하려 대동했는지 아니면 자기를 지키기 위해 대동했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구경하고 밤이 되어 헤어지는데 대동한 친구의 집이 원효로라고 해서 내가 묶게 될 이모님 댁도 원효로이니 같이 버스를 타자고 했다. 그러자 자신의 집은 청량리 방향이면서도 친구에게 마음이 있는 것 아니냐며 질투에 가까운 신경질을 내면서 떠나갔다. 몇 번 만났다고 뽀뽀도 한 번 안 한 사이인데 이런 질투를 하다니. 이 여자는 질투심이 너무 강해 더 이상 깊이 들어갈 대상이 아님을 파악하고 약속 없이 헤어졌다.

얼마 후 편지가 왔다. 집에서 결혼하라고 선을 보라 하는데 어찌하면 좋냐고 묻는 내용이었다. 더 이상 교제하고 싶지 않다고 이별 편지를 쓰려고 했는데 그간의 만남으로 미안한 마음에 쓰기를 미루다가 마침 전출 명령이 떨어지며 답장을 못 보내고 원주로 왔다. 후에 같이 근무하던 동기생에게 들으니 결혼 확답을 듣기 위해 부대까지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내가 원주로 전출 갔다고 하니 자기에게 말없이 갔다는 것은 자기와 결혼할 의사가 없는 것이라며 원주 부대로 면회 가기를 사양하고 동기생 방에서 하룻밤 묵고는 갔다고 한다.

여기서 잠시, 앞서 언급된 동기생은 수줍은 성격이라 걸 헌팅 시 여자들에게 데이트 신청 자체도 못 해 내가 2명을 설득해서 모시고 갈 정도였다. 그런데 나와 최 중위가 전근되면서 하숙집을 떠나온 후 혼자 남은 그가 애 둘 있는 아주머니(신랑이 늦게 퇴근해서 석식 후 우리 방에 놀러 와 우리와 같이 놀았음)와 붙어 비행장 청소부로 근무하는 신랑에게 들켰다고 한다. 이후 군단 헌병대에 고소 되면서, 동기생 형이 사정을 듣고 전남 나주서 급전을 마련하여 남편이 요구하는 보상금을 주고 고소를 취하시켰다고 한다. 장교 망신시킨 죄목으로 군단장 명에 의거 불명예 파면 된 후 소식 두절이다.

다섯 번째 만난 아주머니 이야기이다.

원주 하사관학교로 전입을 와서 처음엔 부대 영내에 있는 BOQ에서 자며 영내 장교 식당에서 밥 사 먹고 옆에 붙어 있는 다방에서 차 마시고 숙소에서 전축 설치하여 음악 감상도 했다. 춤 선생 조교를 불러 춤도 배우고 낮에는 후보생 사격 교육에 전념하고 일과 후에는 BOQ와 영내 다방에서 개인 생활을 만끽했다.

그런데 다방에서 차 마시고 음악 듣고 총각이니 예쁜 레지들과 환담하려 하면 레지들이 나를 피한다. 자기들 한데 신경 쓰지 말고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 잘하라 한다. 한마디로 사격장에서 생활하다 보니 얼굴이 타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선천적으로 어릴 적부터 있는 이마의 주름 때문에 나를 늙은이로 보는 듯했다. 다방 주인이기도 한 나이 많은 마담은 나와 대화를 즐겼다. 인생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한마디로 대화가 맞았다. 모두 퇴근하고 나면 그녀와 위스키 칵테일을 즐겨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다소 연상으로 보이지만 사귀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하지만 그녀는 35세나 되는 아줌마였다.

주말에 그녀의 세부 신상을 파악하기 위해 데이트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 그녀와 만나 원주시 한복판에 있는 하천 강둑을 걸으며 막걸리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산책길 옆에 있는 술집에 들어가 교대로 막걸리를 사서 마시며 그녀도 나도 취기가 올랐다. 나는 정신적으론 흔들리면 안 된다는 다짐을 하며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혼했고 아이도 하나 있긴 하지만 남편이 양육하고 있다고 했다. 혼자 살다 보니 외로울 때도 많다고 했다. 결혼을 제안하면 술도 먹었겠다 당장 여관으로 달려갈 수 있을 만큼 내게 기댄다. 나도 그녀가 좋긴 하지만 나이 차이도 10년이나 나고 애 딸린 아줌마를 부모님들이 결혼을 허락해 줄 리가 없다. 총각이 심심풀이로 연애할 상황은 아니기에 그녀와의 데이트는 그날로 종결하였다.

여섯 번째 아가씨 이야기다.

원주에서 근무할 때다. 동네 친구 누나가 결혼 후 원주 시내에서 편물점을 했다. 서울에서 공부 중인 친구 소식을 듣기 위해 가게를 들렀는데 내 여동생 또래의 한 아가씨가 나를 반기며 딸기를 사달라고 조른다. 그녀를 데리고 과수원에 가서 딸기를 사주면서 대화하다가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키도 크고 늠름한 육군 소위의 모습에 반해 그녀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다. 나도 그녀의 밝고 명랑한 모습이 좋았다. 동생 아닌 다른 여자가 오빠 오빠 하는 호칭이 싫지 않았다. 오직 동생으로 생각하고 그녀를 대하긴 하지만 고향이라 학교 동창들과 친척, 마을 어르신들 눈에 걸리면 내가 연애한다고 소문이 날 것이다. 그러면 나나 그녀나 장래 결혼에 누가 될 것이기에 시내에서의 동행을 가급적 피했다.

다방에서 만나고 야외 시골길을 산책하며 놀다 헤어지는 정도가 점점 많아졌다. 이 아가씨가 내 하숙방에 놀러 와 밤늦게 까지 놀다 가는데 나를 겁 내지 않는다. 이곳에서 놀다 가면 스트레스가 다 풀린다고 했다. 내 방에 전축이 있고 책이 있어서인지 친구 방처럼 편히 놀다 간다.

어느 날 집에서 선을 보란다. 할아버지가 병 중이시고 죽기 전에 손주며느리 보고 싶다고 다그치며 빨리 결혼하란다. 시내에서 장사 중이신 숙부님의 소개로 횡성읍에서 장사한다는 집의 딸을 하숙집 옆 다방에서 만났다.

일곱 번째 만난 여자다. 상당히 큰 키고 얼굴색이 조금은 검게 보인다. 내 짝이 아닌 듯싶다. 하지만 미모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직설적으로 대답할 수 없어 아직 어린 나이에 계급도 낮고 결혼 생활을 영유할 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결혼하겠다고 언약만 해 주면 기다리겠다는 그녀에게 언제가 될지 모르니 다른데 시집가라 권하고 그녀를 잊었다.

1968년 가을이 되면서 부대 개편 계획에 의거 교수부 교관이 아닌 각 후보생 중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었다. 유사시 즉시 출동할 수 있도록 전투 중대로 편성하고 소대장들이 직접 소대원들을 훈련하라는 방침에 따라 학교 분교 12중대 소대장으로 보직되면서 하숙방을 원주 시내로 이전했다.

이사한 집에도 또 놀러 오는 동생에게 이제는 놀러 오지 말라고 강력히 전했다. 집에서 선까지 보는 판국에 결혼도 안 할 사이에 피차 연애한다고 오해받기도 싫고, 결혼하는 데도 약점이 될 수 있으니 오려면 결혼하겠다고 오든가 아니면 오지 말라고 하니 안 오겠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또 찾아왔다.

11월쯤 초겨울인데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부실부실 내리는 초저녁 밤. 밖은 어두운데 찾아와 오늘 자기가 몹시 우울하니 마지막으로 하룻밤만 더 쉬어 가겠다고 내 침대에 누워 잠이 든다. 책상에서 책을 읽다가 취침 시간이 되어 자려고 방바닥에 누우니 등허리가 차가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녀가 누운 침대로 올라갔다. 그녀 옆에 누워도 미동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체의 감미로움으로 남성 본능이 발동한다. 그녀의 팬티를 벗기니 가만히 있다. 해서 올라가 삽입하니 비명을 지른다.

자고 있던 주인집 딸이 나와 무섭다고 안방으로 달려갔다. 주인아저씨가 웬일이냐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 문 열고 나와 확인하지 않아 하던 일은 계속했다. 조금의 신음 소리는 있었지만 거부의 반응이 아니기에 계속하여 끝냈다. 이렇게 되어 그녀와는 오빠 동생 사이가 아닌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여자가 되었다.

일이 끝난 후 그녀가 운다. 결혼할 건데 왜 우냐고 달래 보지만 울음이 계속된다. 할 말은 없고 그녀를 끌어안고 있다 보니 잠이 든다. 아침에 날이 새며 그녀는 돌아갔고 침대를 보니 피가 흥건하다. 핏자국의 지름이 30여 센티는 되는 듯한데 첫 경험에 이렇게 피가 많이 나오나. 피도 피지만 출근해야 하는데 언제 어찌 빨아야 할지 앞이 캄캄하다. 커버를 뜯어 방바닥을 닦으니 시커먼 먼지가 핏빛을 옅게 하지만 근본적으론 감춰지지는 않는다. 출근도 해야 하고 어머니가 겨울이 되기 전에 숙소에 와서 이불을 빨아 주시겠다고 했는데 낮에 오셔서 이를 보면 어찌 생각하실지 염려스러웠다.

침대 커버를 세탁소에 맡기고 출근했다. 3일이 지나 어머니가 오셨고 세탁해다 놓은 요 홋창을 꿰매 주셨다. 음료수를 쏟아 세탁할 때도 되고 해서 뜯어 세탁까지 해 두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주인집 식구들 만나기가 죄송하고 해서 다시 숙소를 이사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긴 하지만 가급적 주말에 만나 시외버스를 타고 시 외곽 지역으로 가서 산책하며 놀러 다니다가 여관에 들러 같이 자고 일요일에 귀가하여 저녁 먹고 헤어지는 연애가 계속되었다.

1969년 봄, 중위 진급이 되었다. 5월 초 전과가 되면서 신포리에 있는 병참대대로 발령이 났다. 이어 병참학교 전교반 교육을 수료하고 다시 원주에 보직되기까지 4개월 정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편지로 그녀와의 연애는 계속되었다.

그녀와 떨어져 있던 4개월여간 거의 매일 같이 편지를 써서 보냈고 받아 읽었다. 몇 개월 만에 그녀와 만나니 임신이 되어 타 지역 산부인과에 몰래 가서 낙태시켰다고 한다. 나와 상의도 없이 결정했냐고 항의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자신의 집에서 결혼 승낙을 받을 상황도 아니고 불러오는 배로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도 없기에 어쩔 수 없이 낙태시켰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이제 중위를 갓 달고 몇 푼 안 되는 월급으로 결혼 생활을 결행하기는 시기상조 인 듯하여 그녀를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 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에서도 결혼을 서둘지 않기에 대위 진급할 때까지는 결혼을 생각지 않기로 했다.

해가 바뀌어 1970년 봄이 되면서 숙부님의 주선으로 여덟번 째 아가씨를 만났다. 다방에서 만나 통성명을 하고 보니 키는 여자 키로 중간 정도이고 얼굴은 동글 납작하고 미소를 자주 짓는다. 용모만 가지고는 괜찮은 듯했다. 중졸이란 학력을 따져 묻지는 않았고 데이트 때 통상적으로 묻는 취미며 특기며 몇 가지 물어보니 특별한 단점은 없는 듯했다. 결혼하면 살게 될 내 자취방도 보여 주며 전축을 틀어 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물으니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 없단다. 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 한 곡을 틀어 주고 그녀를 떠보기 위해 유머를 던지니 화사하게 웃으면서 내게 은근히 기대기까지 한다.

자취방엔 중학생인 남동생까지 동숙하면서 여동생이 와서 밥을 해 주며 기거하고 있었는데 여동생의 눈에는 여자가 너무 가벼워 보인다고 했다. 그냥 헤어지기도 섭섭하고 푸대접하는 것 같아 영화 구경까지 하고 그녀와 헤어졌다.

며칠 후 횡성군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갔다. 농갓집이지만 내가 오리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집이 아주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른들은 안 계시고 그녀 혼자 있었다. 그녀도 독방도 쓰고 있었는데 방에 들어가 보니 많은 살림이지만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다. 결혼한다면 살림은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두 분이라고 했다. 큰어머니가 아기가 없어 아버지가 후실을 들였고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 두 어머니 사이에서 컸다고 했다. 어머니들이 농사를 지으며 남동생 대학교 뒷바라지에 고생이 많다 했다. 어머니 두 분 사이에서 컸다면 성품이 분명 평범치 않을 것 같다. 긴 설명 필요 없고 순탄한 가정에서 크지 않았다면 생활이 어려운 상황에선 포악해질 수도 있기에 정숙한 부인이 안 될 성싶다. 중매하신 숙부님께 어머니가 둘이라서 싫다고 결과를 통보했다.

이러는 사이 숙모님 댁에서 내가 여자 친구가 있어 고의로 중매를 보이콧 놓는다고 하셨고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게 들통났다. 집안에서는 그녀를 알아볼 만큼 알아본 모양이다. 그녀 할머니가 무당이고 아가씨가 간사해 보인다며 장남 며느릿감이 안 된다고 하셨다. 어느새 어머니가 그녀를 만나 결혼을 승낙할 수 없는 이유들을 설명하시면서 헤어지겠다는 약속까지 받아 내신 모양이었다.

장남의 며느리로 명절 때마다 자주 만나야 하고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시댁에 가서 자숙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집안에서 모두 자신을 싫어하면 자기가 머무를 공간이 없으니 안타깝지만 집에서 중매하는 대로 결혼하란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니 나도 그녀의 현재를 생각하게 된다. 전엔 안 그랬는데 봄부터는 만났다 헤어질 때면 항상 언쟁이 벌어진다. 다음에 만나는 장소와 시간이 서로 안 맞고 자기의 고집을 부리고 이러다가 언쟁이 벌어지면 약속 없이 헤어진 다음 며칠 지나면 또 찾아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같이 양품점에 들어가 그녀가 쇼핑하는데 점원 아가씨에게 조금은 으시대는 듯 갑질하는 언행이 보였다. 결혼 후에 부하들에게 갑질하는 여자가 될 듯싶어 결혼 상대가 아닌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제에 그녀가 부담 갖지 말고 집에서 소개하는 대로 결혼하라고 해서 나도 책임감 없이 그러자며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작은숙모님이 중매 소식을 전해왔다. 집에서는 둘 중에 꼭 선택해서 결혼하라고 강요하신다. 이번에도 거절하면 집에선 더 이상 내 결혼을 포기할 것이니 네 마음대로 하라고 최후통첩을 하셨다. 숙모님이 알려주신 약속 장소가 단양이지만 그녀의 이미지를 알아보기 위해 직접 동네로 찾아갔다. 이웃집 여자들에게 선볼 여자의 행실을 알아보려고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이를 눈치챈 이웃 아주머니가 장모 될 분에게 전했나 보다. 장모 될 분이 나오시더니 처 고모님 댁으로 안내한다.

선보려고 온 것이 아닌데 피치 못하게 끌려가듯 처 고모님 댁으로 안내되었다. 안방에서 기다리다 보니 웃방문으로 한 아가씨가 들어온다. 키가 커 보인다. 얼굴이 둥글넓적해서 점잖은 인상이다. 그러곤 더 이상 대화를 못 했다. 얼굴이 보여야 표정을 보며 대화하는데 난 아랫목에 있고 머리 숙이고 들어온 여자는 장롱 뒤에 앉은 터라 더 이상 얼굴이 보이지도 않았다. 대화를 계속할 상황이 아니라 외모만 보고 일어 난 셈이다.

먼저 선을 본 횡성 여자보다, 애인보다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평온해 보여 결혼하면 편한 여자가 될 상 싶다. 그 흔한 학력이나 취미, 직장, 여행 같은 일반적인 대화 한 마디 못했다. 단지 답답한 성격은 아닐 것이란 느낌만 갖고 귀가했다. 단양 여자를 선택하겠다고 부모님께 보고했다.

선을 본 후 세 번 방문했어도 장인어른이 딸의 외출을 허락하지 않아 안방에서 식사만 하고 돌아와야 했다. 선을 본 후 결혼하겠다 하니 집안 어른들이 날을 잡아 일사천리 결혼을 진행 시켰다. 나는 그냥 끌려가는 듯했다. 그 흔한 영화 구경도, 다방에 가서 차 한 잔도, 시골길의 산책도 한 번 하지 못하고 결혼했으니.

오월 단오 때 선을 보고 한 달 뒤 정식으로 약혼식하고 116일에 결혼했으니 6개월 만에 세 번 얼굴만 보고 결혼하는 참 어설픈 약혼 기간이다. 멀어서 평일엔 갈 수 없고 주말에 가 봐야 외출이 통제되다 보니 가 봐야 소용없어 매일 같이 편지로 마음을 전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