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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발자취 2(운객 팔순 회고록) 3부

 

8. 회사 이야기

 

1991131일 국방부에서 전역하고 전역 기념으로 2월 중순 56일 일정으로 동남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국내 여행은 주말과 정기 휴가 시 유명 관광지를 찾아다니며 여행을 즐겼던 덕에 대부분 거의 섭렵했다. 하지만 해외여행은 처음이라 감회가 남달랐다.

소감을 간단히 피력하면, 태국은 방콕 시내 왕궁과 사원 위주로, 팟타이 해변 풍경을 관광 후 싱가포르로 이동하여 시내 공원 위주로 관광했다. 연 육교를 건너 말레이시아까지 돌아본 여행인데 처음 해외 땅과 문화를 접하면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위상과 국민성이 비교되었다. 내 눈엔 나라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데 한국을 통치하면서 개발을 담당했던 고위 공직자들의 눈에는 안 보였던 것 같아 안타깝다.

땅이 넓어서 그런지 고속도로 상하행선이 상당한 거리를 두고 건설되어 있어 역주행 차 사고는 없을 것 같다. 주택들이 2, 3층으로 지어져 있는데 1층은 주차장이다. 땅이 습해서 주차장으로 활용한다고 하는데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에 주차하니 도로변에 주차할 일이 없어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 서울의 주택가와 너무도 비교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론 우리 보다 못 살지만 신도시 개발 계획은 미래를 내다본 설계 같아 놀라웠다. 또한 대부분 자기가 사는 곳에서 근무하기에 차를 탈 일이 없으니 출근 시 교통체증도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군부대 막사 외엔 사는 데와 일하는 데가 멀리 떨어져 있어 매일 같이 출퇴근 전쟁을 해야 함이 참 안타깝다.

국가가 개발 목표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모르겠지만 싱가포르는 작은 섬나라다. 고층 아파트 위주로 집을 짓고 평지 땅은 공원으로 조성했다. 관리를 철저히 한 관계로 시원 깨끗하여 천국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우리나라의 고궁 위주의 관광지와 많은 차이가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야간 영업이 없어 퇴근하면 모두 집에 가서 가족과 식사한다. 부인의 동의 없이는 해외 출장도 못 가는 여인 천국이라고 한다. 밖에서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인근 말레이시아 조호바 시로 넘어가 술을 마시고 음주 운전을 못하니 대리운전까지 각오해야 한단다.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를 연 육교로 관광버스를 탑승하고 출입국하는데 상호인정된 상황이라 그런지 가이드가 여권만 가지고 출입국 관리소에 가서 등록하고 오니 별 검색없이 출입국이 되었다.

깉은 땅에서 철조망으로 ,이념으로 출입 차단된 한국의 현실이 안탑깝다. 

   3개국 관광을 흥미롭게 무사히 마치고 귀국하니 그간 국내에 고착된 시계가 조금은 넓어 진듯 하다. 여유가 되면 향후 1년 한두번은 해외 여행을 다녀와야 겠다고 다짐한다. 

 

   전역 기념으로 한 달 쉬고 199131일 방산국의 소개로 부산에 있는 대양 전기 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대양 전기는 선박용 전등을 만드는 회사로 국내 조선소에 선박용 전등을 납품하면서 군용 함정에 시설되는 안전증 전등과 방폭용 전등을 납품했다. 해군의 전략계획에 의거 개발되는 잠수함용 밧데리 개발회사로 선정되었다. 육군 쪽에도 사업을 확장할 목표로 방산국에서 국방 장비 개발을 담당하던 육군 장교의 추천을 요청한 터에 내가 추천되어 해군용 방산 업체에 채용된 것이다.

직함은 서울 사무소장이지만 한마디로 로비스트이고 흔히들 말하는 술 상무인 셈이다. 본사가 부산에 있어 새로운 제품을 개발 생산하기 위해서는 중앙 부처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에 필요시 서울까지 출장 다녀야 한다. 서울에 사무실을 두고 직원을 상주시켰는데 본사 연락병과 마찬가지다. 사무실에는 전화 당번 내지 차 접대하는 여직원 1명과 수도권 선박 회사 영업 담당 직원 1명이 근무하고 있다. 소장이란 직함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주로 정부 상대 연락 업무를 맡았다.

처음 입사하여 2주일간 부산에 가서 회사 운영 체제와 직원들의 얼굴을 익혔다. 회사가 분주히 잘 돌아가고 있음이 보인다. 직원이 100여 명 정도이고 건물은 두 동인데 2층 건물에 1층은 조립 생산 라인이고 2층은 사무실이다.

주 생산 제품은 선박용 전등이다. 선박의 각종 전기 장비에 대한 배선 스위치가 부착된 분전반 같은 전기 통제 판넬도 조립하는 모습이 보인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등용 철제 부품은 주물을 부어 가공하고, 협력회사에서 납품받은 유리 전구를 조립, 포장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다 있다.

젊은 직원들은 출근해서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아침 식사를 한다. 오전, 오후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다. 근무해 볼 만한 회사다. 과장급 간부들은 매일 회의를 한다. 자재 확보, 가공 출고, 수금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당일 해야 할 일과 각과의 협조 사항들을 언급하는데 마지막엔 결국 돈이다.

자재가 늦게 들어오면 가공에 문제가 생기고 품질에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영업 파트에서 판매실적이 저조하면 돈이 제때 지원되지 않아 경리과장에게 화살이 돌아가고 은행 대출에서 제동이 걸린다. 결국 사장님의 지원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회사의 전반적인 업무를 파악해 보니 연간 매출액이 100억 원 정도 되는데 왜 운영자금을 수시로 은행에서 대출받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내 생각으로 인건비와 자재 수급비를 포함하여 3개월 정도의 운영자금이 회사 통장에 있어야 회사가 잘 돌아갈 것이고 경리과장도 여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매일 매일 은행에 가서 매달리는지 참 이해하기 힘들었다. 회사 업무 파악을 마치며 사장에게 개선할 사항으로 보고했다. 업무 파악에 수고가 많았다면서 군인들이 사회를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 한다. 돈은 시간이다. 돈은 돌고 돌아야 하는데 3개월분 운영자금을 통장에 두고 썩히다니. 납품 대금이 입금되면 이를 즉시 빼서 다른데 투자해서 또 다른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사장님의 행동을 보면 철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출근하여 결재하고 필요한 업무지시 후 영업활동을 나간다. 조선소들이 대기업이고 많은 관련자들이 있으니 이들을 찾아가 인사도 하고 골프와 식사 등의 로비 활동을 한다. 퇴근 후에는 사무실에 들어와 결재가 있으면 결재하고 공장 순시를 한다. 혹시 야근하는 직원이 있으면 야근을 중지시키고 모두 데리고 나가 저녁을 사준다.

이런 식사에 나도 몇 번 불려 갔는데 식사하면 술을 마시게 된다. 서울에서 근무 중 2주에 한 번은 본사에 들어가 업무 보고를 하는데 저녁에 꼭 나를 위한 회식을 해 준다. 과장급 이상 10여 명이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는데 나를 취하게 만들려 볼 생각으로 참석 인원들은 모두 내게 술을 권한다. 간부들의 술에 답례를 하고, 사장님이 주는 잔도 사양하지 않고 받다 보면 나도 술에 취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퍼진 적도 없고, 다음날 출근을 못 한 적도 없는데 간부들은 상당수가 출근을 못 한다. 간부들은 내 음주량의 3분의 1도 안 마셨는데 술이 약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정신력에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되었다.

나도 사장님의 영업 태도를 따라 해야 한다. 그게 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근해서 본사에 일일 업무 보고를 하고, 국방부로 조달 본부로 해군본부 정부 청사로 멀리는 대전으로 대구로 인사차 돌아보고 진행 중인 업무가 있으면 처리 상황도 점검하며 관련자들과 중식을 하거나 석식 약속을 한다. 석식을 하면 술을 마시게 되니 집에는 항상 자정쯤 들어간다.

취직해서 3개월 정도는 인사차 돌아다녔다. 이어 각 군에서 추진하는 수입 장비들의 부품 국산화 계획을 알아보기 위해 각 군별로 실시하는 전시장도 방문해야 한다. 회사가 이를 개발하려면 해당 부품의 기술적인 관련 정보도 수집해야 하니 허구한 날 바쁘다. 부대에 들어가 면회를 신청하여 하사관 담당자를 3시간 이상 기다릴 땐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도 있었지만 그래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하지만 개발 가능 제품을 찾는 것은 당장 개발하는 것도 아니고 개발 승인을 받고 개발하여 시험해서 성능 입증 후 납품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당장 육군이나 공군에 납품할 대상품을 찾다 보니 육군의 시설 공사 중 조치원에 있는 탄약창에서 지하 탄약 창고가 공사 중이었다. 여기에 안전증 전등이 시공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관련 정보를 알아보니 수도권에 있는 전등회사 제품이 설계되어 있어 이를 시공할 것이라 한다.

설계 도면상 특정 회사 제품이 명시되었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그 제품을 주문 조립할 것이다. 하지만 가격이 싸거나 같은 값에 성능이 우수하다면 사용부대장이 변경 요청하는 것이 그리 문제 될 것 같지 않았다. 여기에 납품를 뚫어보겠다고 사장님에게 보고하여 나의 첫 사업으로 승인받아 영업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만들고 있는 여러 안전증 등과 방폭등의 모양과 가격을 보고 도면과 비슷한 것을 골라 근무하는 직원에게 얼마 받으면 되겠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한다. 가격은 영업직원이 판단해서 팔아야 한단다. 미운 놈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나쁜 근성 같아 보인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는 자기가 서울 사무소장이란 직함으로 영업했고 정부 부처에 심부름을 다녔는데 내가 들어와 자신의 자리를 뺏겼다고 생각하는지 나를 대하는 모습이 뻣뻣하다. 그럼에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제조원가가 얼마인지 얼마에 팔아야 하는지 가르쳐 주는 것은 선배로서 기본 태도가 아닐까. 그가 거절해서 본사 방문길에 사장에게 물어보았더니 사장님도 같은 말을 한다. 모든 제품의 판매 단가가 없다고 한다.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 영업직의 능력이라 했다. 현대 조선소에는 2만 원 받았는데 대우조선엔 5만 원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뒤늦게 바가지 쓴 사실을 알게 되면 차기 수주가 가능하겠는가. 상도덕을 무시한 영업정책이 이해되지 않았다. 참으로 웃기는 회사란 생각이 들었다. 이 회사 영업 정책인지 아니면 나를 골탕 먹이기 위해서 인지 아니면 가르치기 위해서인지. 내가 직접 원가를 판단하고 이익을 많이 내서 팔라는 소리인데 공직 생활에 몸이 굳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나 회사 방침이라니. 해서 회사에 내려가 일주일을 묵으며 방폭등 만드는 모든 자재 납품 단가와 이를 가공 조립하는 인건비, 생산라인의 감가 삼각비, 회사 고정자산의 이자에 법정 이윤까지 다 파악해 원가를 계산해 보니 2만ㅜ5천 원이 나온다. 내 영업 활동비까지 포함 3만 원에 납품을 하겠다고 하니 그러라고 한다.

회사 승인을 받고 지휘계통상의, 사용부대 시공업체 관련자들을 모두 만나 인사 했다. 결국 제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7천만 원 상당의 제품을 납품하기까지 7개월이 걸렸다.

영업 상담을 하기 위해선 먼저 그 사람의 고향, 학력, 가족관계, 취미 등 모든 자료를 파악해서 접근해야 원만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처음 찾아가면 커피 제안도 사양한다. 두세 번 찾아가 대화를 시작한다. 커피를 받고 식사까지 할 수 있으려면 상당히 가까워져야 한다. 주말에 테니스 치고 밥 먹고 고스톱까지 치는 사이가 되면 일이 성사시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이러다 보니 거의 매일 저녁이면 누군가와는 식사하고 술 마시고 집에는 자정이 되어서 들어간다. 결국 집 근처에서 음주단속에 걸려 운전 면허까지 취소되면서 매일 택시로 영업해야 하는 고충을 감내해야 했다.

납품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영업활동 경비를 300여 만원 썼다고 하니 수고했다는 칭찬은 하지 않고 매출금에 비해 영업경비를 많이 썼다고 한다. 속이 뒤틀렸지만 함구하고 있는데 향후 고위직에 영업활동을 하려면 골프를 쳐야 하니 골프를 배우란다. 집 옆에 있는 골프 연습장에 등록했다. 새벽 5시에 나가 한 시간 연습하고 집에 와 샤워한 후 조식하고 출근한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를 방문하고 저녁이면 식사와 술을 마시고 11시 넘어 귀가한다.

탄약창 납품이 끝나고 그들과 대화하다 보니 여름철에는 지하 동굴형 탄약고에 습기가 많아 탄약 표피에 결로 현상이 생긴다고 했다. 탄약 관리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탄약고 내에 대형선풍기를 돌린다고 했다. 누전 시 화재 발생 또는 탄약의 폭발을 방지하기 위해 탄약고에 전기 시설을 안 하다 보니 탄약고 내 출입 시는 휴대용 손전등을 지참해야 한다. 선풍기를 돌리려면 전선을 외부에서 끌어와 선풍기를 돌린다고 했다.

, 이거다. 안전증 내지 방폭 모터를 결합한 대형선풍기와 제습기를 결합한다면 지하 탄약고 용 제습기를 개발 육군에 납품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시중에 가정용 외국산 제습기가 유통되고 있어 이를 안전증 선풍기와 합쳐 습도 높이에 의해 자동 작동되는 스위치 체계를 결합한다면 탄약고 용 안전증 제습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 개발해 보자고 사장님께 시제품을 만들겠다고 보고하고 필요경비까지 사용을 승인받았다.

청계천 영등포 공구상가를 누비며 관련 부품들 구입했다. 2단 스테인레스 통 하단엔 안전증 선풍기를 2층 상단에는 일반 양철 제습기와 습도 연개 자동 스위치를 방폭용 합금통에 넣고 조립했다. 시 제품을 만들어 부산 본사로 탁송했다.

사장님께 보고 하니 놀라는 눈치다. 전기과 출신도 아닌 군대 생활만 한 예비역이 이런 전기 제품을 만들었다니. 전공이 같으면 쉽게 접근할 수 있겠지만 마음만 먹으면 돈만 있으면 전문가들을 모아 비행기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회생활을 해 온 내 인생관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이 제품을 군수사령관 앞에서 개발 제품의 성능과 안전성을 설명하고 시제품을 시험해 줄 것을 요청한 후 나는 전격으로 회사를 사퇴 했다.

사퇴 이유는 체중이 10kg(65에서55)이나 줄면서 만성 피로로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골프 연습하고 하루종일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저녁이면 술 마시며 하루 다섯 시간 정도 잤다. 그런 일상이 계속되다 보니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며 만성 피로에 걸린 것이다. 근무 시간 중 또는 누구와 만나 대화를 할 때 억지로 참고 있지만 대화가 중지되면 무의식으로 머리가 떨어지며 잠에 빠진다.

한의사를 찾아가 보약을 지으려 했다. 진맥을 한 한의사가 나를 보고 일성을 고한다.

오래 살고 싶으면 퇴사를 해서 이 보약을 드시고, 수명에 관심이 없으면 약 먹을 필요 없이 그냥 근무하시라

집사람이 곁에서 듣고 내게 퇴사를 권했다. 연금도 받겠다. 식구도 없겠다.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퇴사하란다. 이리하여 199210월 대양전기를 퇴사하였기에 여기서 대양전기 근무이력은 마치려 한다.

퇴사 이후 보약을 먹으며 몸 추스리기에 전력을 다했다. 근무 시와 반대로 밥 먹는 시간 빼고 하루 종일 20여 시간을 잤다. 6개월을 먹고 자고 먹고 자니 65kg 체중이 회복되었다.

19937월쯤 건강이 회복되니 집에 있는 것이 지루해졌다. 그렇다고 직장을 다시 찾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주간에는 증권회사에 가서 시황도 보고 증권을 배울 겸 직원의 코치를 받아 가며 증권을 팔고 사보았다. 몇 달 해보니 좀 남으면 직원 몫 덜어주고, 밑지면 물타기로 목돈 빼서 막고 결론부터 말하면 15천 까먹고 손 털었다.

이런 와중에 웅진 코웨이 정수기회사에 다니는 김00 동기생이 만나자고 했다. 정수기회사에 들어오란다. 내 영업 경험과 능력이면 우수한 사원으로 금방 승진할 수 있다고. 입사 보증금을 내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안 들면 부담 없이 언제든지 그만둘 수도 있으니 같이 근무해 보자고 적극 추천한다. 정수기 영업요령 교육장에 출석했다. 영업만 잘하면 금세 부장 승급도 되고 매출 실적에 의해 이사도 기간 제한 없이 승진할 수 있다고 했다. 강의에 매료되어 취직을 결정했다.

서울시의 수돗물은 수도국에서 열심히 정수한다고 하지만 상류부터 오염이 심하고 주변 공업지역에서는 유독수를 정화하지 않고 몰래 방류하다 보니 서울시의 수돗물을 불신하는 시민들이 많아졌다. 시민 대다수가 음용수는 생수를 구입해 마시고 일부는 주변 산골의 샘물을 퍼다가 마신다. 나도 인근 광주군에 있는 약수(샘물)를 일주일에 한 번씩 받아와 음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강의장에서 수돗물 오염 상태를 전기 분해하니 공장 오폐수나 다를 바 없다. 정수기의 물은 전기 분해해도 맑은 물 그대로이다. 정수기는 2, 3중의 정밀 필터로, 오염된 수돗물을 정수하는 제품이다. 생수로 마실 수 있는 물을 만드는 것이다. 흔히 쉽게 생각해서 수돗물을 끓여 마시면 오염된 물이 정화된다고 생각하는데 증류수는 죽은 물이라 했다. 수돗물을 끓여 식힌 후에 화분에 주면 오래지 않아 화초가 죽지만 정수기 물을 주면 화분들이 싱싱하게 잘 자란다고 한다. 식물이 살지 못하는 물이 사람에게 좋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실례 사진들을 보며 주면서 설명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수기 효과를 보고 나니 영업을 떠나서라도 정수기를 우선 구입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런 상황이면 정수기는 가정용 필수 장비이기에 어디서 건 영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937. 영업을 시작했다. 우선 친하게 지내는 군대 동기생을 찾아가 정수기의 우수성과 필요성을 설명했다. 구입을 권했지만 가격이 만만치 않아 누구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4인 가족용이라 해도 그냥 정수만 하는 소형이 30만 원부터 크기에 따라 냉온수까지 나오는 고급용은 300만 원이 넘기에 가족의 동의를 구한다 해도 큰맘 먹고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격이다. 가격이 비싼 것일수록 내게 돌아오는 이익도 많으니, 나로서는 가급적이면 대형을 권하게 되지만 서민층에선 판매가 어려울 것 같아 고객의 경제 수준을 고려해서 추천했다. 열 사람 만나 열심히 설명해 봐도 성공하기가 어렵다.

군대 동기 친목회 회원으로 친목을 돈독히 유지했던 우정을 감안해서 내게 자선해 준다는 생각으로 구입을 결정해 주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대로 아니 상당히 실적이 좋은, 장래가 촉망된다는 상사들의 격려를 받았다. 영업을 하면서 어언 6개월이 지났다. 부장 승진도 했다. 하지만 군대 친구, 고향 친구, 친인척을 모두 찾아다니며 영업했기에 구입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재방문을 위해 전화를 하면 바쁘다는 이유를 대며 피하는 듯했다.

내가 판매에 성공하면 나를 회사에 끌어들인 사람에게도 차 상위 직급까지 이익의 일부가 지분으로 배당된다. 때문에 보다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선 내가 직접 팔기도 해야 하지만 유능한 영업직원을 초치하여 입사시켜야 한다. 물건 팔기도 힘든데 새로운 영업직원을 찾아 입사시키기는 더더욱 힘들다.

6개월이 넘으면서 친구들이 나를 피하는 것을 느꼈다. 내 돈 벌겠다고 친구를 모두 저버리는 꼴이 되었다. 돈보다는 친구들을 잃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199312월 년 말을 기해 웅진 코웨이 회사를 그만두었다.

 

 

9.내 팔자 내인생

 

. 학교 교육 성적 4

 

나의 학교 성적은 반에서 10% 이내로 공부를 잘하는 편이긴 하지만 인생도 4등 인생을 살지 않았나 싶다.

고교 졸업 성적은 50여 명 중 6, 경기 공전 여름학기 성적은 1등으로 유일하게 일등을 한 바 있다. 소위 임관 성적은 졸업 1개월 전 184명 중 6등이었으나 특별관찰 대상 후보생의 내무생활 성적이 반영되어 18등으로 밀리면서 군번 순서가 결정되었고 졸업성적은 36등으로 밀린 것으로 안다. 중위 진급하며 병과 전과반 성적은 32명 중 16등인데 여기서는 성적이 좋으면 교관으로 좌천된다는 말에 전방으로 보직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시험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강의 들은 것으로 시험 보았고 일과 후에는 기타 학원에 나가 기타를 배웠다.

 

대위 때 고군반에서 수업 성적은 1등이었다. 고향에 과수원 용 야산을 계약 후 월요일 은행에서 잔금을 찾아 정산하면서 원주서 대전까지 택시를 타고 왔었는데 이때 지각한 벌점을 추궁하는 바람에 4등으로 밀렸다.

육대 과정(군수관리반)에서는 역시 학과 시험 성적은 1등이었다. 하지만 진급에서 떨어졌다. 평가실장이 고교 선배였는데도 내 석차를 물으니 답을 안 해 주었다. BOQ 기거하는 동기생에게 물으니 1등은 아닌 듯하다고 했다. 마지막 종합시험을 준비하지 않고 많은 점수를 놓쳤는데도 졸업성적이 4등으로 학교장상을 받았다. 교육생이라 중앙심사에서 진급은 떨어졌어도 내가 1등이란 것을 알았다면 대통령상을 받기 위해 종합시험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이다. 1등도 하는 상황에서 주변의 도움이 없어 4등을 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 그런지 중령 진급도 4차 마지막에 걸렸다.

각 과정마다 공부는 최선을 다했지만 운이랄까 주변의 경쟁자들에게 밀리면서 4등으로 수료했다. 단독주택을 건축하면서도 4채 만에 더 이상 팔리지 않아 노년에 평생을 살고 있음도 운명적이니 이런 것들 모두가 내 인생, 내 운명인가 싶다.

 

. 술 좋아하는 인생

 

태어나 음복주부터 시작해서 농촌에서 새참 술 심부름 다니면서 주전자 빨아 마시면서 술을 익혔다. 입대해서는 춘천에서 하숙하며 밥맛을 잃고 매일 퇴근하며 소주 나팔을 불었다. 그러다가 위궤양이 와서 6개월간  술을 끊었다가 다시 마셨다. 대위 때 허리를 다쳐 치료 기간 술을 못 마셨고 전역해서 술 상무 하면서 음주 적발되어 면허 취소 받은 바 있다.

본사에 가서 임원들과 술 마시면 익일 혼자서 출근 할 만큼 술이 셌고 빈속에 술 마시고 강남 도로에서 잠을 잔 적도 있다. 마을에서 동기생과 술 마시고 한 시간 동안 어디를 돌아다녔는지 모르는 상황도 있었고, 친구 대신 술을 마셔 주다가 술에 취해 지하철역 선로에서 잠이 들어 가족이 구하게 된 이야기 등 술에 관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 등산 이야기

 

나의 공식적인 등산은 1984년 부산에서 시작되었다. 직장에 근무하며 대학원을 다녔는데 동갑내기와 친목회를 만들었다. 이들과 주말이면 경상도 일원에 여행을 다니면서 산행을 시작했다. 이들과 여행계획이 없을 때는 산악회에서 추진하는 등산에 동행하며 속리산, 지리산까지 등산한 바 있다.

1987년 서울에 와서는 주말이면 동기생 부대에 가서 테니스를 치다가 주말이면 등산회에 가입 전국의 이름있는 산은 거의 등정했다. 2000년 지리산 천황봉 등산을 끝으로 운동은 골프로 바꿨다.

 

. 나의 정서 생활 배경

 

나는 남들보다 음악을 좋아하고 꽃, 하늘의 구름 등 자연을 좋아하는 성품이었다. 어릴 적 우리 집 위치 덕인 듯하다. 마을의 형태는 동남쪽 방향에 삼태기처럼 경사진 뒷산에 3단계로 집들이 지어졌는데 우리 집은 상단에 지어져 있어 집 마당이건 마루에서건 항상 치악산 정상을 바라보며 해가 뜨고 졌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여명을 보며 자랐고 여름엔 마당에 멍석을 깔고 은하수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며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동심을 키운 바 있다.

소학교 시절은 풀피리, 버들피리를 만들어 곡은 없지만 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다. 중학교 때는 대나무로 퉁소를 만들어 나름대로 노래를 불렀고 고등학교 시절엔 고모부가 불던 하모니카를 얻어 마당가에 서서 이웃집 처녀 들으라고 연주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 악보를 보며 음악을 불렀다. 밤에는 공부하고 혼자 잠을 청하면서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명상에 잠기기를 수백 번. 시도 쓰고 인생론도 쓰고 일기와 구애 편지를 쓰며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이웃 친구 매형이 만들어 준 기타가 굽어 안 쓰는 것을 얻었다. 줄이 높아 손가락 압력을 많이 받았지만 혼자서 기초도 모르고 악보도 없이 감으로 자리를 찾아내 아는 노래 곡 위주로 연주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집에 라디오가 없었다. 이웃 선배 따라 광석(검은 돌)을 얻어 못 두 개를 벽에 박아 놓고 그 위에 광석을 올려놓았다. 높은 나무에 철사로 연결하고 광석 앞에 리시버를 연결하면 어느 방송인지는 몰라도 방송을 청취하며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고교 시절, 마을에 유선 방송 스피커가 집에 설치되면서 뉴스와 연속극 음악을 듣게 되었다.

전문대 수업차 이모 집에서 하숙을 했다. 한전에 다니시는 이모부 집에는 전축과 TV까지 있어 시간 날 때는 여기서 50, 60년대 가수들의 노래 감상했다. 나도 빨리 커서 전축을 마련해야겠다는 각오를 했다. 소위에 임관하고 춘천에서 근무할 시 월남 파병 장교들이 사 가지고 온 소형라디오를 구입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음악과 방송을 접했다. BOQ 생활을 하면서 전파상에 부탁해 염가로 전축 부품을 책상에 조립하여 전축을 만들어 음악을 감상했다.

여기서 잠깐, 내 밑에는 사격장 사격훈련 조교들이 6명 있었는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중 사교춤을 배운 조교와 탭 댄스를 배운 조교가 있었다. 나는 키가 커서 탭 댄스는 점잖게 안 보이고 나이 들면 사회적으로도 써먹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주말이면 BOQ 내 방(다른 방은 다 놀러가니 조용하고 시끄럽다 시비 붙을 일이 없기에 )으로 불러 음악 틀어 놓고 사교춤을 배웠다.

학교 분교로 보직되면서 원주 시내에 방을 얻어 밥은 작은 집에서 먹고 잠만 잤다. 퇴근하면 잠들 때까지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다 보니 전축을 너무 크게 틀었나 보다. 시끄러워 못 살겠다고 주인집 딸과 시비가 붙어 결국 이사를 하게 되었다.

중위로 진급하여 전과반 교육기간에도 BOQ에 동기생과 기거하면서 야간에 기타를 배웠다. 수료 직전 주말엔 동기생 4명과 속리산 법주사로 12일 여행 갔다. 야간에 그곳 아가씨들과 기타를 치고 노래하며 놀았다.

19699월쯤 원주에 다시 보직되었다. 중학교 동창이 운영하는 음악학원에 나가 2개월 정도 더 기타를 배웠다. 1970년 봄, 대대 작전 과장이 부대 위관 장교들을 모으더니 사교춤을 출 수 있는 장교가 있냐 물었다. 손을 들고 보니 나 혼자다. 내 직책이 경비소대장이라 물품직이 아니고, 자리를 비워도 부대엔 별 지장이 없던 터라 즉시 1군에서 운영하는 야전쾌지나 훈련장에 차출되었다. 1개월간 원주시 캐토릭 센터 강당에서 하루 8시간씩 포크댄스를 배웠다.

이때 부대 체육대회 시 응원용으로 활용할 수 있는 농악대 놀이를 배우게 되었다. , 장구, 꽹과리 연주까지 배웠는데 2주간 배운 결과 1군 관하 전 부대에서 차출된 40여 명의 동료 중에 농악 리더 악기인 꽹과리를 제대로 연주하는 사람이 나를 포함 4명밖에 안 되었다.

부대에 복귀하여 병참단 예하 각 대대의 교관 요원을 소집하여 1개월간 그들을 가르쳤다. 이어 대대 병사들은 아침 일과 전 체조 시간에 교습하면서 녹음기 앰프를 설치하지 않고 내가 음과 리듬 위주로 기타 치고 노래하며 연습했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탓할 바가 못 되니 참고 넘어가는 듯했다.

부대 내 교육이 끝나갈 무렵 1군 사령부에서 경연대회을 실시하였고 참모장의 강요로 우리 부대가 3등을 했다. 심사 결과 춤이 아닌 체조 스타일로 추는 하사관학교가 1등을 했다. 전통춤 스타일인 우리 부대를 2등 주기로 해 상장까지 써 놓았는데 시상식에 앞서 높은 사람 지시라며 2등으로 변경되었다. 상장의 2자를 칼로 긁어내고 3자로 쓰는 헤프닝. 우리 단장님이 수상을 거부하였으나 정훈 참모가 통사정해서 상장을 받아 왔다고 했다.

정훈 참모부에서 군의 정책으로 군에서도 오락 시 춤을 춘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원주시에서 시범을 보여야 했다. 전통춤 스타일이어야 한다며 우리 부대 보고 시범을 보이란다. 우리 대대가 여군 1개 소대를 지원받아 2개월 정도 연습하여 원주시 공설운동장에서 시범을 보이면서 부대 춤 선생은 끝났다.

평상 근무로 복귀하여 소대원 교육에 전념하며 주말이면 외출을 나갔다. 같이 근무하는 인사계의 사진기를 빌려 고향 친구들과 놀러가 사진을 찍고 사진관에서 인화하며 사진 찍기를 즐기기 시작했다. 197011월 결혼하며 일제 야시카 카메라를 구입해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1972년 중대장이 되어 양구에서 근무하며 고급 앰프와 녹음기 데크, 턴테이블, 스피카와 LP판을 구입해 집에서 전문적으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장비를 갖췄다. 집에서 음악 소리가 나지 않으면 내가 집에 없거나 잔다는 것이다.

1973년 중대장 시절에 왈츠곡을 작곡하여 사단 군악대에 가서 작곡 기본 형태를 배웠고 군악대장이 편곡한 음악을 군악대가 연주하는 것을 감상하면서 작곡자로서의 희열을 만끽한 바 있다. 대대장 시절에는 부대가를 작사 작곡하여 사령부 군악대에 부탁 연주 녹음하여 부대에서 일과 전후 영내 방송을 하며 부대원들에게 부대가를 익히게 했다. 국내 처음으로 악보까지 들어간 부대가 탑을 만들어 영내 공원에 건립한 바 있다. 1985년 부산 근무 시는 야간에 경상대학 관리자 과정 무역대학원을 다녔다. 동갑내기 친목회를 만들어 같이 등산 다니며 부르는 노래를 작사 작곡했는데 군수사령부 군악대에 의뢰 합창 연주한 곡을 녹음하여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노래를 익혀 같이 등산할 때마다 합창한 바 있다.

1973년 고군반 교육 수료 후 휴가를 마치고 귀가하니 녹음기와 야시카 카메라가 없어졌다. 주인집 아들 소행 같은데 직접 따질 수는 없고 경찰에 도난 신고를 했다. 집사람이 결혼 예물을 팔아 내가 좋아하는 녹음기와 카메라(렌즈 교환형 아사이 팬탁스)를 구입하여 계속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었다.

처음 음악을 감상할 때는 클래식 그것도 교향곡 위주로 들었다. 성악이 아니니 합주로 울려오는 웅장함과 멜로디의 변화, 리듬의 변화를 곱씹으며 즐기다가 몇 년 지나니 바이올린이나 첼로 피아노 독주곡이 좋아졌다. 이도 몇 년 지나니 팝송이 좋아졌고 합창이나 독창 등 성악이 좋아지지나 싶더니 40이 넘어서면서는 한국 민속 노래까지 즐겨 들었다. 그 후론 그날 기분에 따라 선곡해서 음악을 듣곤 했다. 이런 광적인 음악 감상은 1995년 분당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아파트 소음 문제에 봉착하여 전축을 통한 음악 감상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1997년 컴퓨터를 배우고 구입, 설치 하면서 컴퓨터 CD플레이어로 듣다가 USB 파일로 바뀌면서는 집보다 운전할 때 차에서 심심풀이로 듣는 것으로 변했다.

 

 

. 평생 배우며 산다.

 

학구열이 많아 그간 참 여러 과정을 배우며 세월을 보냈다.

19681군 하사관학교 교관 시절 같이 근무하는  선배 2명과 내 하숙방에서 미군 사병을 초대하여 같이 생활 회화를 배운 것부터 시작하여 기타 학원을 다닌 적이 있다. 1969년 전과반 교육 중에도 야간엔 기타 학원에 가서 기타 연주를 배웠다.

소령 때 미군 부대에서 한미 연합 작전 훈련 후 같이 훈련했던 미 수송병과 소령과 같이 다방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영어와 한국어를 서로 배우며 가르쳐 준 바 있다. 그가 귀국하면서 미 용산 캠프 들어가 미 공군 특무상사 숙소를 방문하며 주 2회 회화 공부를 6개월 배우다가 전방으로 발령 나며 그만두었다. 이후 중령 진급 후 부산에 가서는 영어 회화 학원을 2개월간 수강한 바 있다. 전역 후는 집에서 중국 교포를 초대하여 북경어를 6개월간 배운 바 있었으나 실생활에서 복습하거나 실제 활용이 안 되다 보니 다 잃어버린 상태다. 생활영어는 그나마 조금 되지만 학술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은 배운 바도 시도해 본 바도 없어 완전 먹통이다.

안산에 와서는 20102년간 드럼을 배우다가 남의 노래 반주만 하는 것 같아 내 노래를 연주하고 싶어 키보드를 배웠다. 피아노 기초를 2년간 배우며 키보드 연주를 익혔는데 사진을 배우면서 악기 배우기는 끝났다. 사진에 미치면서 키보드는 서재에 방치된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은 2년간 배웠다. 학교 수업을 수료한 후에도 사진 촬영 기법에 대한 책을 구입하여 독학으로 계속 공부를 했다. 컴퓨터고 포토샵이고 하다가 막히면 밤을 새우며 될 때까지 해결책을 찾는다. 집사람 왈 미첬다 할 정도로 주야간 컴퓨터와  출사로 배우고 익히며 전국 출사대회에 참가하며 28회의 입상으로 2018년 가을에 한국사진 작가 협회에 사진 작가로 등단했고 사진 생활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 진인사 대천명

 

학창시절 아버님께서 명절이면 차례 후 덕담으로 인생사 진인사 대천명해야 한다고 습관적으로 말씀하셨다.

애비가 배운 바 없어 이룬 것이 없고 집안에 출세한 사람도 없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형편이기에 공부를 하던 직장생활을 하던 고난에 봉착할 때가 많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네 혼자 힘으로 노력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중국 고사에 진인사 대천명이란 말이 있는데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하고 결과는 하늘의 뜻이니 결과에 승복하란 말이란다.”

이 가훈을 가슴에 품고 군 생활, 회사 생활 시 봉착된 여러 문제들을 죽기로 최선을 다해 과할 정도로 매진하다 보니 대부분의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안된 것은 하늘의 뜻으로 더 이상 괘념치 않고 승복하니 스트레스도 모면할 수 있었다.

 

 

10. 건축 이야기

 

1994년 봄이 되면서 증권 사무실을 오가며 동네 노인들과 등산을 다니며 세월을 보냈다. 안산에서 건축업을 하고 있는, 처 고종 4촌 처남으로부터 놀러 오라는 전화가 왔다. 그를 만나니 경마와 증권으로 돈 번 사람 못 보았다며 안산에 와서 집 장사를 해보란다. 자기의 경험담과 실적을 언급하며 적극 권장했다.

집 한 채 짓는데 빠르면 3개월, 늦어도 5개월이면 끝나고 운이 좋으면 등기 전에 팔릴 수도 있고 등기 후에 팔아도 6개월이면 공무원들 5년 봉급 이상은 떨어진다는 것이다. 증권에서 돈을 빼서 안산에 집터부터 먼저 사라 한다. 그리고 자기가 현재 집을 짓고 있으니 집 짓는 요령을 매일 출근해서 배우라고 했다. 처남의 충고에 믿음이 갔다. 증권에서 상당 금액을 손해 보고 빠져나와 있던 예금을 합쳐 그가 소개한 집터 한 필지를 구입했다.

집터는 밥이 많은 곳에 사야 한단다. 주변 주민들이 많이 살아야 점포와 방을 세놓기 좋고 세가 잘 빠져야 집이 빨리 팔린다는 것이다. 매일 안산으로 출근하여 처남이 집을 짓는 현장에서 같이 놀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메모를 해가며 지켜보았다.

당일 공사 일정은 무엇이고 인부가 몇 명이 동원되었고 주안점은 무엇이고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이를 어떻게 수습하는지 당일 수반되는 원자재는 어디서 어떻게 배달되는지 등등. 처남 주변에서 집을 짓는 사장들이 대부분 건축과 출신은 아닌데 어깨너머 배운 실력으로 집들을 재미있게 잘들 짓고 있다.

돈만 있으면 집을 지을 수 있겠다 싶었다. 과거의 학력이나 경력은 걱정할 필요 없이 열심히 감독만 잘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집 짓는 일에 남다른 경험이 있기에 더더욱 성취감도 있을 것 같고 재미도 있을 것 같았다.건축과 출신은 아니지만 나는 집 짓는 일에 대해서는 남다르게 많이 보았다.

6.25 전쟁 시 1.4 후퇴 때 미군이 우리 집에 불을 질렀다. 수복 후 다시 집을 지으면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1.5km 떨어진 야산에서 황토 흙을 파, 지게로 지고 왔다. 집 마당에 흙을 쌓아 놓고 200여 미터 떨어진 샘물가에서 물 지게로 물을 져 와 큰 독에 물을 받아 놓고 볏짚을 10Cm 정도 크기로 썰어서 흙더미에 얹어 놓고 물을 부어 반죽한다. 15*30Cm 정도의 나무 틀에 반죽 된 흙을 넣어 발로 밟아 다진 후 위로 송판으로 긁어 상면을 깎아 내고 마당에 줄을 맞춰 놓는다. 초벌이 마른 후 이를 뒤집어 골고루 말리면 흙벽돌이 된다.

다음으로 집터 다지기 (회 닫기라 함)를 구멍 뚫린 돌절구에 나무 심을 넣고 볏짚으로 꼰 밧줄로 매서 한 편에 네 명씩 여덟 명이 당겨 2미터 높이로 들어 올렸다가 땅에 내리면 돌 무게에 의해 땅바닥에 쿵 떨어지며 지면이 다져진다. 이 일은 주로 밤에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공동의 일로 하며 술과 부침개로 참을 먹어 가며 회닫이 노래를 불러가며 놀이처럼 일은 마친다.

이어 잔돌과 흙으로 기초벽을 만들고 이것이 마른 후 만들어 놓은 흙벽돌로 담을 올린다. 이때도 여러 사람이 합동으로 일을 하고 아버지는 미리 마음속으로 그려 놓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각 방에 적합한 문틀을 준비해 놓았다가 적당한 높이와 위치에 문틀을 좌우 지지대로 세운다. 그 위까지 흙벽돌을 쌓는다. 흙 담벽이 마른 후 서까래인 작은 대들보를 설치하고 이어 실내 지붕 용 잔 서까래를 설치한다.

수숫대 엮은 발을 친 후 여기에 다진 흙으로 방 천장 지붕을 덮는다. 이것이 마른 후 그 위로 다시 용마루와 대들보 서까래를 다시 얹어 놓고 수숫대 궁으로 이어 석가래 사이를 덮는다. 진흙을 올려 마른 후 위로 짚을 엮어 만든 영으로 덮으면 집이 된다.

이어 방바닥에 구들장을 깔고 그 위에 다시 진흙을 발라 수평을 잡아 말리면 방바닥이 완성된다. 부엌엔 아궁이를 설치하여 솥을 걸어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을 수 있도록 하면 부뚜막이 완성된다. 외형 집이 건축되고 나면 목수에게 구입한 문들을 조립하고 문 창호지를 바르면 바람을 막고 실내 벽과 천장에 도배를 하면 집이 완성된다.

19511.4 후퇴 시 피난 나갔다가 여름에 귀가해서 집 지을 때는 그냥 일곱 살이라 구경만 했다. 초등학교 6학년쯤에는 막내 고모가 부엌에서 밥을 하다가 아궁이 앞에 있는 건초에 불이 붙으면서 집이 또 소실되었다. 이때는 나도 12Km 먼 국유지에서 서까래 나무(직경 15센치 길이 6미터 크기) 두 개를 지고 걸어왔다. 아버지는 4개를 지고 새벽길, 밤길을 여러 날 저 날랐다. 흙 져오기 물 져오기에도 작으나마 힘을 보탰다. 회 다지기 흙벽돌 쌓기, 지붕 씌우기, 부엌 만들기 등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이렇게 집 짓기를 체험해서 그런지 집을 짓는다는 것이 그리 힘들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필요시 돈만 있으면 집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3년 양구에서 13개월 정도 중대장으로 근무를 했을 때는 한국동란 후 휴전된 지 20여 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군대도 많이 현대화되어 대부분의 부대 건축물이 브록크 형 건축물로 지어졌다. 사무실과 내무반으로 구분되어 숙영하며 근무할 때인데 내가 근무한 부대의 내무반도 브록크 건물이었다. 하지만 화장실, 위병소 보급 관련 창고와 사무실이 종전 당시 건축된 듯한 임시 초가 지붕형 건물이었다.

군의 건축물은 국방부에서 승인이 나야 지어지기에 공사를 하려는 부대는 먼저 국방부에 공사 승인을 받고 예산을 배정받아야 한다. 때문에 공사까지는 빨라야 3년이고 길면 5년 이상 걸린다. 이런 체제에선 1년 근무하는 보직 직책에선 건축할 생각을 못하다 보니 그냥 방치된 상태가 된 것이다.

위병소는 부대 간판이고 화장실은 병사들의 휴식처인데 여름에는 인분 물이 텅텅 튀어 오르고 겨울에는 인분 산이 항문에 닿는다. 당연히 편히 용변을 볼 수 없기에 그냥 계속 방치한다는 것은 중대장으로서 묵과할 사항이 아니었다. 정식으로 승인받아 지으려면 내가 떠난 뒤 몇 년 뒤 지어질 것이니 내가 직접 부대 자력으로 짓기로 하고 과감히 철거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부대엔 민간인 노무자가 4명이 있었다. 이들은 보급 창고에서 쌀이나 휘발유 드럼통을 싣고 내리는 일은 담당하는 임부들이다. 보급 관련 일이 없으면 창고 주변 청소도 하는 터라 이들을 활용하여 주변 강가에 나가 모래와 돌, 자갈들을 부대 트럭으로 가져오도록 했다. 부대에 납품차 출입하는 농수협 직원들에게 시멘트와 스레트를 협조받아 연병장에서 브록을 찍었다. 벽을 쌓아 화장실을 먼저 짓고 다음 위병소도 지었다.

설계도는 내가 지면에 가로세로 면적 크기에 높이 얼마, 출입문 창문 크기와 위치를 표시해서 부대 목공에게 지시하면 근사한 문틀과 창문이 만들어지고 유리만 사다가 넣으면 되었다. 사무실 공사는 면적이 50여 평 규모라 벽까지는 공사를 자력으로 했지만 지붕 공사는 상당량의 목재가 필요해 사단장님께 공사 현장을 보이고 목재 지원 요청을 하여 사단 직할부대 분기 배정 목재를 모두 우리 중대에 배정해 주시면서 지붕을 만들 수가 있었다.

와중에 국방부에서 승인된 창고 1동 공사도 있었다. 이는 조달본부 외주 공사이기에 우리가 직접 관여할 사항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용할 건물이기에 가끔 공사 현장에 가서 도면대로 공사가 되는지 확인하는 정도로 공사 감독을 한 경험이 있기도 했다.

1978년 여름에는 정부의 농촌 주택 개량사업으로 원주 고향 집이 초가 토담집에서 브록 스레트 지붕형 건물로 개축했다. 주말에 들러 도면을 보고 도면대로 공사가 되는지 확인했다. 연세 드신 부친이 도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신 것인지 문틀 자재가 비규격 제품임을 확인하고 시정조치 한 바도 있다.

1983년 대대장 근무 시에 부대 대형 창고가 국방부의 공사 인가를 받아 민간 건축업자의 도급공사가 있었다. 시설 사용 부대장으로서 몇 번 현장에 들러 설계 도면과 공사가 일치하는지를 확인하는 등 군에서 남보다는 조금 더 많은 건축에 관련된 경험을 갖게 되었다.

 

. 단독주택 공사

 

이런저런 경험으로 남다른 건축 경험이 있어 별문제 없이 처남의 공사 현장에서 같이 지내면서 일일 공사 내용을 모두 메모하며 공사 과정을 익혔다.

두 채의 공사를 지켜 보고 이미 마련한 집터에 공사를 계획했다. 건축사 사무실에서 도면을 그려 시청에서 건축허가를 받기 전에 내가 먼저 건물 단면도를 그렸다. 내가 직접 안 그려도 건축사가 그려 주지만 내가 살아야 할 집이기에 내 마음에 맞는 건축법상 최대의 면적으로 단면도를 그렸다. 1층 점포와 2, 3, 옥상까지의 계단 통로. 각 방의 크기, 출입문, 창문 크기와 배치 등의 도면을 A B C안으로 그려보고 최종안을 만들었다.

건축 형태도 건축사와 상담해서 조적조냐 철근 옹벽조냐 선택하고 홋집이냐 겹집이냐도 내가 선택했다. 옹벽 15센티에 외벽은 타일을 붙이고 옹벽 내부는 보온재 스티로폴 30mm를 넣고 내벽은 시멘트 벽돌 10cm에 미장을 하는 형태였다. 내외장 미장 두 번에 타일 두께까지 벽 두께가 32cm 이상 나오는데 단독주택으로선 최고의 건축이라고 건축단가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 했다. 팔았을 때 날림공사, 부실 공사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되고 안 팔리면 내가 살 집이라는 생각에 결정했다.

건축허가가 떨어지면 터파기 날짜를 잡기 전에 분야별 공사를 담당할 오야지(뎃방)를 만나 공사대금을 합의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목수, 설비, 전기, 조적 및 미장 분야 오야지를 3인 이상 만나 공사 금액을 합의 결정하는데 무조건 싼 가격 제시자들은 공사의 성실성에 문제가 있기에 중간값을 선택했다. 판넬, 철근, 레미콘, 목재 점포를 찾아가 납품단가 확인 및 결재 방법까지 시장조사 후 협의했다. 터파기, 23층 자재 올리기에 동원되는 포크레인 장비업체와도 단가 협약을 해야 한다. 이어 건축 시멘트 모래 자갈 철사 등등 부수 자재들은 철물점을 지정하여 당일 필요한 자재들을 적시에 납품해 줄 것과 결재 시기까지 합의해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내가 직접 해야 하지만 평생 처음 짓는 집이고 처남이 가르쳐 주는 입장에서, 처남에게 3개월 공사 감독을 위임했다. 그동안 그가 쓰던 인부들의 공사 금액으로 시공하기로 하고 나는 한 발 떨어져서 구경만 했다.

처남 방식대로 임부들의 사기 고양을 위해 각 층마다 레미콘 공사가 끝나면 성취감도 들고 인부들은 당연한 듯 회식을 기다리다 보니 모두 불러 공사장에서 개나 돼지를 잡아 모닥불 피워 놓고 회식을 했다. 건축사와 처남 그리고 부동산 사장과 2차 술판까지 벌이며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었다.

공사 기간 중 비가 오는 날은 공사가 중단된다. 이럴 때는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처남이 부동산 친구들을 부른다. 설계사, 공사 오야지들도 모여 심심풀이라며 포커를 하는데 미장이나 전기 설비 오야지들이 한두 시간 만에 20, 30만원을 잃기도 했다. 그들의 일당이 10만여 원 정도인데 하루, 아니 3일 일당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그들이 아무리 친하다 해도 나로서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몇 번 참고 구경만 하다가 그들의 잘못된 생활 태도를 나무라고 내 사무실에서는 포커를 못하게 했다.

1995년 봄에 공사가 끝났다. 건축사의 준공검사 및 준공필증을 받은 후 등기신청을 하려는데 단골로 드나들던 부동산에서 집이 팔렸다고 한다. 점포 입주도 세입자 입주 계약도 안 된 상태이지만 부동산에서 책임지고, 전월세 보증금을 공제하고 필요하다면 은행 대출까지 알선해 주는 조건이라 큰 목돈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집이 쉽게 팔렸다.

땅값, 자재비, 인건비 모두 정산하고 처남의 공사 감독비 5백만 원까지 지불하니 내게 순수하게 45백만 원의 순이익이 떨어졌다. 땅만 사고 공사비는 은행 대출을 받았는데 이를 모두 갚고 나니 그간 군대 생활 25년이 허무하기도 하다. 아니 대양전기 이사 봉급으로 계산하면 4개월 만에 3년 치 연봉이 떨어진 셈이었다.

다음 일거리를 물색하는 중에 현역 시절 병과 선배 한 분이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그는 쌀국수 공장에서 전무로 근무하고 있는데 내가 부대 근무 시 원리 원칙형으로 근무했다는 평판을 들었기에 상무 직급인 공장장으로 같이 근무하잔다.

지난날 집 짓기 전 대학원 동료가 추천한 부산의 승용차 안전백 만드는 회사에서는 보증금 2억이었고, 신문 공고를 보고 찾아간 서울 강남의 컴퓨터 학원 원장 취직에서는 5천만 원의 보증금을 요구해 사양한 적이 있었다. 내 신용도를 믿고 보증금 없이 채용하겠다고 하니 막노동하는 것보다는 공장장으로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구미가 당겼다.

공장만 원리 원칙대로 잘 관리해 주면 되고 외부 영업은 자기가 담당하겠다며 경기도 광주 오포면에 있는 공장을 보여 주었다. 쌀국수 시식을 시켜 주며 고속도로와 각급 학교, 군납을 뚫게 되면 대형 회사로 클 만한 사업이니 같이 일하자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쌀국수가 없는데 앞으로 쌀국수의 시장이 무궁하다며 메리트가 있으니 함께 근무해 보자는 것이다.

처음 먹어보는 쌀국수이지만 밀가루 국수보다는 점도가 높아 국물만 맛있으면 먹을만한 음식이다. 친구들에게 선물해도 부끄럽지 않은 라면 이상의 메리트가 있을 듯했다. 하지만 조금은 궁금증도 있었다. 공장장으로서 회삿돈을 많이 만지게 될 것인데 신원 보증용이란 명목으로 회사의 운영자금 유통을 요구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사장님도 만나보았지만, 전무하다는 구두 밀약까지 했다. 회사에서 내게 돈을 융통해 달라는 소리가 있으면 나는 그날부로 사직한다는 조건이다.

1995년 가을, 쌀국수 공장 공장장으로 취직했다.

공장엔 공장 기숙사에서 기거 중인 중국인 부부와 사장님 형 내외, 마을 부녀자 포함 15명이 근무하고 있어 인사관리엔 별문제가 없다. 국수 만드는 기계는 단순하지만 오래 사용했던 듯 조금은 낡아 보이지만 국수 생산에도 별문제 없는 듯했다.

사실 사장님 형 내외가 실질적인 공장장인 셈이다. 형님은 생산라인 전체를 확인 관리하고, 형수는 여자들과 같이 작업을 하지만 선도적 감독관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매일 같이 하루 종일 공장에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나도 영업활동을 하기로 하고 안양이고 수원이고 도서관에서의 영내 급식에 판매를 해 보았다. 생소한 식품이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고속도로 판촉 활동은 전무님이 담당인데 이미 일부 휴게실에 납품이 되고 있었다.

1996년 봄까지는 공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갔다. 정부의 양곡 정책이 변경되면서 쌀 가공공장에서 쓰는 쌀은 수입쌀로 가공하게 되었다. 국산 쌀보다 삼분의 일 값이니 사장님은 좋아하셨다. 하지만 수입 쌀로 가공된 쌀국수를 고속도로 휴게소에 납품해 문제가 생겼다. 국수를 삶으면 국수 가닥이 마다마디 끊어지는 것이다. 손님들이 국수를 먹지 못하겠다고 하여 반품시킨다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의 문제점은 없는 듯하여 안남미 쌀이라 그런 것 같다고 사장님께 보고했다. 군 출신이 뭘 아느냐고 본인이 국수 공장 사장 30여 년을 했는데 뭔 소리 하느냐며 큰소리다. 전분을 섞기 때문에 국수 가닥이 끊어질 리가 없다면서 공장의 생산공정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사장 형님도 안남미 쌀이라 그렇다고 하는데 사장님은 인정하지 않았다. 공장에선 계속 안남미로 가공을 했다. 불량은 계속 확대되었으며 고속도로 납품은 결국 끊어졌다. 차제에 오포면 야산의 구멍 공장에서 초읍 공업단지에 부지를 마련 철골 판넬 골조의 2층 공장 신축(공사비는 년 할부 결재 조건)으로 공장 이전도 했다. 이제 어엿한 공장의 형태를 갖춘 것이다.

하지만 제품 생산 판매가 부실해지고 있었다. 쌀 가공 공장에서 안남미 쌀로는 제품생산이 안 된다고 정부에 건의하여 국산 쌀을 써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사장님은 수입 쌀을 고수했다.

광주 군청 양정계에서 쌀을 받아 오는데 자금 결재가 안 되어 원자재 입고도 원활하지 않았다. 전무님이 자금을 얼마간 유통해 주어 겨우겨우 운용해 나갔다. 1997년 연초에 식사하자며 전무와 셋이 분당 일식집에서 만났다. 사장님은, 매출이 줄어 공장 운용 자금이 부족하니 내가 아는 친구들에게서 5,000만 원 정도 융통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올 것이 온 것이다. 하지만 정면으로 사직 의사를 표할 수 없기에 알아보겠다고 하고 퇴근해 전무에게 전화로 사직 의사를 전했다. 월급이래 봐야 120만 원, 1년에 1,500만 원 받았지만 건축에 비하면 허송세월한 셈이다.

1997년 봄, 안산에서 처남을 만나 대로변에 상가주택을 지을 수 있는 집터를 2억에 구입했다. 앞서 언급했던 절차대로 설계하고 이번엔 내가 직접 공사를 주도하기로 하며 인부들과 공사 금액도 협의하고 자재를 확보하고 오야지들과 공사에 관한 상의 및 감독을 해 가며 두 번째 집을 지었다. 이번엔 제때 팔리지 않아 등기까지 마치고 6개월이 걸렸다. 총공사비 4억 제하고 5억을 받았으니 1억이 남은 셈이다.

준공검사 떨어지면 결재해 주겠다고 약속했던 목수 임금이, 집이 팔리지 않고 점포 세입자의 입주가 늦어지면서 결재가 지연되자 목수 오야지가 2층 방 한세대에 1,800만 원에 차압을 걸었다. 그가 밉지만 그도 자신의 임금이 떼일까봐 한 짓이니 참기로 했다. 얼마 뒤 집이 팔리면서 제일 먼저 변재해 주었다.

일거리 찾아 굳이 회사 나갈 필요가 없었다. 1년에 한 채만 지어 팔아도 먹고 사는데 아니 몇 년 연금의 목돈이 생기니 이젠 회사 타령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길 건너 임시 건물인 1층 집을 구입해 놓고 가을까지 놀다가 집을 철거하고 1층 슬라브를 쳤는데 IMF 외환 위기가 왔다. 상가든 방이든 임대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에 공사를 중단 했다. 공사하고 나면 세도 안 빠진 상황에서 공사비, 자재비 달라고 잡아먹을 듯 보채는 고통을 참아 낼 자신이 없었다. 슬라브까지의 인건비와 자재비를 모두 결재해 주고 공사를 중단했다.

그때 분당 미금아파트에 전세를 살았다. 공사를 하다가 중지하고 인근 산악회에 따라다니며 등산을 다녔다. 하지만 마냥 놀 수가 없어 1998년 봄이 되면서 컴퓨터 학원에 나가 컴퓨터를 배웠다. 용인 수지아파트로 이사하면서 1999년 말까지 1년 반 정도 컴퓨터를 배워 정보처리사 3급 자격증까지 땄다. 2급 시험도 응시했으나 시간초과 낙방했고 고사장에서 얼마나 긴장했던지 위경련이 와 고생했다. 자격증 취득해서 먹고 살 일도 아니기에 3급으로 만족하면서 인터넷에 홈페이지 만들고 관리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겨울이 되면서 IMF가 풀리는 듯 주식값이 뛰기 시작했다. 공사 금액으로 쓰기 위해 원주 고향에 사두었던 논 800여 평을 6,000만 원에 팔아 은행에 보관중이었는데 전에 증권으로 까먹은 손실 금액을 증권이 뛰면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우전자가 삼성전자로 흡수될 것이라고 공지된 시황에서 대우 전자가 매일 상종가를 쳤다.

집사람은 반대했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 보겠다고 설득했다. 분명 투자 금액의 배는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분당 증권 사무실에 나갔다. 상종가에 주문을 넣어도 좀처럼 구입이 되지 않았다. 처음 4천 원대에 들어가 16,000원으로 올라가면서 내 돈 전부가 구입되었다.

바로 그날, 대우 김우중 회장이 죽어도 대우전자는 팔지 않겠다고 했다. 삼성전자에서도 인수 안 하겠다는 공지가 뜨면서 하종가를 치기 시작했다. 과감히 팔아 버렸으면 반이라도 건질 수 있었겠지만 대통령에게 밉보여 넘어가는 것이니 분명 삼성으로 갈 것이다. 어떻든 원금이라도 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대우전자는 상장이 취소되며 감자에 감자를 거듭했다 결국 백지 수표가 된 것이다.

6천만 원이 날아갔으니 앞서 집 팔아 1억 남긴 돈은 물거품이 된 셈이다. 저축으로 부동산으로 힘들게 번 돈을 증권으로 말아 먹은 후에야 내 팔자엔 공돈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필히 땀 흘리며 힘들게 벌어야 내 돈이 된다는 것을 뒤늦게 깨우친 것이다.

속이 다소 쓰리긴 해도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공사 금액은 땅이 있어 은행에서 대출받으면 연통이 되기에 20003, IMF가 풀린 듯하여 다시 공사를 재개했다.

공사를 마치고 집을 내놓았더니 이웃에 동시에 지은 집이 5억에 팔렸다. 우리 집은 투자 금액이 5억인데 팔 수가 없었다. 같이 공사하던 사장님이 공사비 많이 들으면 집을 못 판다는 충고가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싸구려 집은 지을 수는 없었기에 이도 감내하며 내가 살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안산으로 이사를 와서 팔아보겠다고 생각하고 이사를 왔다. 하지만 팔리지 않아 지금까지 살고 있다.

좋은 친구들이 있어 첫 집은 대학원 동기가 신한은행 반포지점장으로 근무 시 5천만 원을 대출받았고, 두 번째 집은 군 동기가 상업은행 상록수지점장으로 근무 중이라 그곳에서 5천만 원을 대출받았다. 세 번째 집은 역시 군 동기 중 한 친구가 농협 상록수지점장으로 있어서 여기서 5천만 원을 대출받았다. 덕분에 결재 제때 잘해주는 현찰 사장으로 소문이 났고 이로 해서 분야별 도급공사 시, 단가 협의 및 공사 통제가 쉬웠다.

20205월 공사가 끝났지만 1층 대로변 점포도, 임대용 2층 주택들도 입주가 지연되었다. 내가 이사를 와 살면서 천천히 임대하겠다는 생각으로 수지 아파트 전세를 빼서 이사를 했다. 2층 임대용 2세대도 전세로 빠지면서 은행 대출과 모든 공사 금액까지 정산하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 아니 텅 빈 듯하다. 이제 완벽한 내 집이 된 것이다.

1층 점포는 가을이 되서 임대가 되었다. 민속주점을 개업하면서 입구와 실내 칸막이를 통나무로 인테리어 해 주면서 다른 상가들에 비해 훨씬 고급스러운 집이 되었다. 계약 시, 점포가 3개이기에 점포당 보증금 1천만 원씩 3천만 원에 월세 40만 원씩 120만 원을 불렀지만 보증금을 깎아 달라고 해서 2천만 원에 합의 계약이 성사되어 입주했다. 1층의 점포 뒤 방 한(점포 1개 크기) 칸도, 옥탑방도 모두 세가 나갔다.

집이 안 팔려 집 공사는 계속할 수 없어도 군인연금과 점포와 세입자들의 월세를 합치면 집사람과 둘이 취미생활 하면서 노년을 살아가는 데는 충분하다. 기를 쓰며 돈을 더 벌어야 할 명분도 없기에 더 이상 집 공사는 접고 노년 생활을 즐기기로 집사람과 합의했다.

 

. 내 집 장만 하기, 돈벌기

 

나의 경제관념부터 먼저 서술해야겠다.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학창 시절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납부하는 등록금과 책값 외엔 용돈이라고는 거의 받아 본 적이 없다. 소학년 소풍 갈 때 거의 껌값의 용돈을 받아 사탕을 사 먹었던 기억과 운동회날 어머니가 사주는 과자 정도, 용돈이라 하면 설날 받는 세뱃돈이 전부다.

돈은 구경도, 만져보지도 못하는 터라 나는 세뱃돈을 받으면 이를 황금같이 귀중하게 생각하여 쓰지 않고 고이고이 간직했다. 중고교 시절 20여리 통학길 중간에 있는 시내버스도 돈이 아까워 타지 않고 걸어서 다녔다. 아끼고 아끼다가 학교 주변에 있는 국화빵, 찐빵도 일 년에 한두 번 사 먹어보았을 뿐 내게 들어온 돈은 안 쓰고 오래오래 간직했다. 집안 숙부님은 원주읍에서 장사를 하셨기에 항상 돈을 만지고 있어 사촌 동생들에게 용돈을 자주 주셨다. 그래서인지 한날 같은 금액을 받은 세뱃돈이 1주일을 가지 못했다.

 

돈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다 써버리고 나면 수중에 남는 것이 없기에 안 쓰고 모아야 재산이 된다. 아버지 말씀을 공감한다. 어려서부터 절약을 몸에 익혀 온 터라 나는 첫 봉급부터 30% 적금을 시작하여 70평생 지금도 저축을 열심히 하고 있다.

첫 저축액 만기금액 3만 원을 가지고 조부님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가 산소 자리를 샀다. 여기서 잠시 한마디, 월급의 30%를 용돈으로 쓰기로 계획했는데 자제 없이 데이트하다 보니 저축액이 없었다. 집에서 한 번 돈을 받아 저축을 메운 후에는 데이트도 용돈 범위 내에서만 했다.

중위 때 저축액으로 결혼 비용으로 활용했다. 결혼 후 처음에는 처형이 하는 계에 들어가서 곗돈을 열심히 부었지만, 처형이 장사 비용으로 쓰고 부도를 내며 내 돈도 날아갔다. 이후 곗돈은 금단 시하고 오직 은행 저축만 하며 2년간 모아 100만 원으로 고향마을의 산 1만 평을 구입했다. 영관장교로 진급을 못하면 제대해서 과수원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밭이 3,000평이나 있는 야산을 구입한 것이다. 다행히 영관장교로 진급하면서, 아버지가 거리(3km)도 멀고 땅이 넓어 농사짓기 힘들다 하시며 팔라고 해서 500만 원에 팔았다.

2년 만에 투자금의 5배로 불어난 것이다. 당시 500만 원이면 서초동 집터 100평을 구입할 수 있었다. 시장조사 나간 부동산에서 사두었다가 나중에 반을 팔아 집을 지을 수 있다면서 권했지만, 아버지가 집은 나중에 준비하면 된다고 하시며 고향에 논을 사자고 하셨다. 아내까지 동의하는 바람에 재투자는 아버님께 위임했다. 이 돈으로 동생들 교육하고 빚 갚고, 여동생 시집 보내고 남은 돈으로 돈 800여 평을 사셨다.

당시 정부에서 목돈마련 재형저축상품을 권장하여 영관장교 때부터 10만 원 짜리 두 구좌를 가입했다. 1982년 봄, 3년 만기가 되어 아파트 신청 시 우선 공급 대상이 되었다. 나도 서울에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중령으로 진급되어 퇴계원으로 보직되었다. 1982년 가을, 서울 개포동에 은마 아파트가 분양된다고 하는데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해서 현장에 가보았다. 부동산에 들러 서울에 주민등록이 없는데도 아파트 구입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빨리 주민등록을 서울로 옮기고 주민등록 등본 발급할 때 이전 일자 자리에 종이를 대고 복사한 후 볼펜으로 5년 전에 이전한 것으로 가짜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면 된다고 한다. 50만 원의 비용을 쓰도록 허용해 주면 그들이 모두 알아서 처리해 주고 아파트가 당첨되면 통장 한 개당 1,000만 원의 프리미엄을 주겠다고 했다.

생각하니 이는 불법이다. 육군 중령이 불법에 동의하고 1,000만 원 받고 아파트가 당첨된 것이 발각(1년도 안 되어 과열 경쟁이 문제가 되면서 당첨자들을 정밀 조사하여 불법이 발견된 건은 모두 형사 적발되었다 한다)되면 무슨 망신일까. 이로 해서 군 생활이 문제 될 수 있을 것 같아 포기하고 귀가하다 천호동에 들려 연립 주택을 샀다. 이것도 재형저축 통장 하나로 계약금도 중도금도 잔금도 없이 모든 결재가 종료된다고 했다.

통장 만기금액이 1,800만 원이니, 집 전체를 전세 놓을 경우 전세 보증금으로 1,800만 원을 받아 처리할 것이니 통장만 두고 갔다가 한 달 뒤에 인감도장만 찍어 달란다. 232평에 지하 16평 도합 48평 연립 주택인데 3,600만 원짜리 집을 내 돈 1,200만 원으로 집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귀신에 홀린 듯 했지만 주변 집들의 전세 보증금을 보니 이해가 되어 귀가했다가 한 달 뒤에 인감도장을 찍어 주고 집문서를 인수했다.

퇴계원에서 대대장 보직이 만료되기 전 주임상사가 내게 제안한다. 여윳돈이 있으면 주변의 논을 사서 여기에 닭장을 지어 전기를 끌어들이면 이를 공장용지로 활용 가능하고, 여기서 임대료를 받을 수 있기에 투자할 만하다고 권했다. 원주에도 부모님 땅이 있고 부산으로 보직되면 언제 와서 땅을 관리 할까 싶어 현장 점검 후 구입을 포기했다.

부산으로 보직되어서도 밀양쪽 전답을 알아보니 내 돈에 맞는 규모의 땅이 없다. 대부분 너무 커서 분할이 안되어 포기했다. 데리고 있는 부하 장교가 국토개발처에서 얻은 정보라며 삼척 해변이 관광지로 개발된다고 하니 지금 땅을 사두면 재미를 볼 수 있을 것이라 권했다. 둘이 현장을 다녀왔다. 10년 내 개발될 것 같지 않아 구입을 포기했다. 여긴 안 사길 잘했다. 10년 아니 20년이 지나도 개발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샀다면 묶인 돈이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우린 절대 할부로 가전제품을 구입하지 않는다. 먼저 그 제품의 필요성을 6개월 정도 심사숙고하고, 구입 자금을 먼저 준비한다. 할부 구매는 할인도 못하고 할인 수수료를 더 물기에 금하고 꼭 필요한 물건이면 그 돈을 먼저 모아서 현장에서 현금으로 최대한 깎아서 제품을 구입한다. 시기적으론 추석이나 구정 전에 점주들이 현금이 필요한 시기에 맞춰 흥정하면 많은 이득이 있다. 그리고 신혼 초 처형에게 당한 사채놀이 덕에 그 후론 평생 어느 누구와도 개인 간 돈거래를 안 하였기에 돈을 떼인 적은 없다.

부산에서 4년 근무를 마치고 87년 국방부로 보직되었다. 1982년 구입해 놓은 연립 주택의 전세금은 옆방과 지하실 방의 전세금을 올려 받아 내 돈 더 들이지 않고 이사 들어갈 수 있었다. 재형저축 통장 하나로 32평 연립주택을 마련한 사례가 된 것이다.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인근에 군 동기생이 운영하는 부동산에 들러 통장 하나의 예금을 어찌 투자하는 게 좋겠냐고 조언을 부탁했다. 당시 목포에 공업단지가 조성되고 있으니 사 두면 나중에 돈이 될 것이라 한다. 거긴 너무 멀어서 사양했다. 복무에 전념하던 중 출근하여 신문을 보니 강남 아파트가 500만 원 올랐다는 뉴스다. 강남이 오르면 강동도 오른다. 아내에게 전화를 해 친구 부동산에 가서 아파트 볼 것도 없이 매물 있으면 계약하라고 지시했다.

퇴근하여 집에 가니 매물자에게 연락이 안 되어 계약을 못했다고 한다. 내가 다시 부동산에 가서 매물을 확인하니 32평형 삼익 아파트가 5,000만 원인데 전세가 3,000만 원이니 사놓으려면 2,000만 원이면 살 수 있다고 했다. 갖고 있는 돈과 일치되어 주인과 연락을 했다. 다음 날 오후에 계약했다.

이 아파트가 1년 지나니 1억으로 올라갔다. 3년이 되니 3억까지 올라간다. 내 돈 2,000만 원 투자해서 25천만원이 남는 것이다. 전역하면서 팔려고 하니 양도소득세가 많다고 한다. 사실 방산 회사에 취직이 되어 월급을 받으니 급히 팔아야 할 이유도 없어서 보유하고 있었는데 결국 취직 1년 반 만에 회사를 사직했다.

직책이야 서울 사무소장이라 하지만 하는 일은 술 상무다. 본사에서 정부에 사업 승인 받는 일이나 납품 대금 신청하는 일 등 이에 관련된 정부 관료들과 안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밤낮으로 만나고 다녀야 했다. 술을 마시고 로비 골프를 준비하려고 새벽에 골프 연습장 나가고 하니 만성 피로가 왔고 체중이 65kg에서 53kg까지 떨어졌다. 보약을 지으려 한의원에 가니 살고 싶으면 사표 내고 보약을 먹으라 했다. 집사람이 채근하면서 사표를 냈다.

6개월을 밥 먹는 시간 외엔 잠만 잤다. 체중은 정상화되었고 놀 수 없어 다시 정수기 회사에 취직했다. 6개월 장사를 하다 보니 회사에선 인정을 받았지만 동기생을 비롯한 친구들이 나를 멀리했다. 내 돈 벌자고 친구들이 떠나가는 것은 남자가 해서는 안 되는 일 같아 사표를 냈다. 그러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안산에 살고 있는 집 장사하는 처남이 주식 하지 말고 안산에 와서 건축업을 해 보라 권한다. 주식보다 집 장사가 훨씬 메리트가 있으니 적극 추천하며 오라 한다. 해서 안산에 집터를 마련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아파트를 팔았다.

양도소득세를 세무서에 가서 상담하니 2000여만 원이나 된다. 세무사 3명을 더 만나보니 각자가 계산하는 요령은 비슷한데도 금액은 다르게 나온다. 아파트 크기를 국민주택으로 보느냐 아니면 등기 면적 32평으로 보느냐에 따라 1천만 원 가까이 차이가 났다. 집에 보관 중이던 분양 당시 광고에서 전용면적이 도면과 함께 25.7평으로 되어 있어 이를 근거 문서로 첨부 국민주택으로 신고하면서 양도세를 1천만 원만 냈다.

살고 있던 연립 주택도 15천만 원에 팔았는데 내 돈 재형저축 통장 하나 만기 1800만 원이 15천 오른 것이고 전세금 공제하고 나서도 1억이 남은 셈이다. 결국 내 재산 형성은 재형저축통장 2개가 만들어 준 것이다.

1995년 안산에 집을 짓겠다는 목표 아래 살고 있던 아파트를 당시 시세 2억 원에 팔았다. 이 돈으로 안산 도로가에 집터를 구입하여 1층 상가형 3층 단독주택을 지어 등기 전에 5,000만 원을 남기고 팔았다.

재투자를 관망하는데 전에 같이 근무한 바 있는 병과 선배가 쌀국수 공장장으로 같이 근무하자고 해서 승낙하고 6개월 정도 다녔다. 수입쌀로 국수를 만들라는 정부 지시 때문에 삶으면 국수가 조각이 난다고 반품이 되면서 거래가 단절되고 회사가 어려워졌다. 사장님은 나 보고 돈을 구할 수 없냐고 문의했다. 사실 망해가는 회사에 돈을 투자할 수 없고 입사 시 전무님과 약속한 바 있다. 사장님이 돈 이야기하면 나는 그날이 퇴사하는 날이라고 했기에 즉시 사표를 냈다.

1997년 봄, 안산 대로가 공터를 구입하여 4개월 만에 상가주택을 지었다. 등기 한 달 만에 1억을 남기고 팔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 공사를 위해 바로 길 건너 앞 개집을 한 채 구입하여 철거하고 상가주택 공사를 시작했는데 1층 슬라브 공사를 마칠 즈음 IMF가 터졌다. 불경기가 시작되면 주택 판매는 고사하고 상가와  주택에 세입자가 없을 것이니 땅값이야 내 돈으로 샀지만 건축비 염출이 안되면 빚쟁이들의 독촉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공사를 중지 했다. 그간 들어간 자재값, 인건비 모두 지불하고, 나라 경제가 다시 풀리면 공사를 다시 하기로 했다.

3년이 지나면서 IMF가 풀렸고 다시 공사를 마쳤다. 하지만 너무 공사비를 많이 투자해서 투자한 만큼 돈을 받을 수 없기에 팔기를 포기하고 내가 눌러살게 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월세와 연금으로 노후에는 생활비 걱정 없이 취미 생활하며 잘살고 있다.

 

 

. 증권 투자 야기

 

전역 시 가지고 있던 현금을 당장 재투자할 것도 아니라 그냥 두었다. 전세 보증금도 올려 받았고 전역하며 1년 치 연금도 받은 터라 또한 전역 후 취직이 되어 생활비 걱정이 없기에 은행 이자보다는 나을 듯싶어 주식에 투자했다. 조금 이익이 생기면 증권회사 직원이 자기 몫을 챙겨 달라고 하고, 떨어지면 물타기 하다 보니 12천 투자 했다가 1억 원을 날렸다.

1999년 가을, IMF가 풀리면서 증권이 회복되는 낌새가 있어 집 공사비로 쓰려고 원주 논 팔아온 돈 6천만 원을 집사람의 만류를 거부하고 투자했다. 하지만 대우전자 주식이 백지가 되면서 6천만 원, 도합 16천을 날린 상황이 되었다. 따지고 보면 아파트에서 번 돈 주식에서 모두 날린 셈이다

 

 

11. 노후 생활

 

202012월 인근에 살고 있는 군 동기생이 같이 운동을 하자며 골프를 배우자며 제안해 왔다. 그는 소령 때 전역해서 반월 공단 회사에 과장으로 취직하여 장기간 성실히 근무해 상무이사로 승급했다. 직장 영업에도 필요하고 늙어 노년의 운동은 골프가 최고라며 자기도 배우기 시작했으니 같이 하자는 것이다. 골프는 내가 훨씬 선배다. 1992년 골프를 배워 치다가 회사를 그만두면서 골프를 접었다.

회사 로비 차 골프를 치는 것은 회사 영업경비로 치는 것이니 내겐 경제적 부담 없이 운동하는 것이니 할 만했지만 4명의 골프 경비를 합치면 한 번 치는데 거의 1백만 원이 필요하다. 취미로 내 돈 내서 골프를 친다면 4명이 돌아가면서 계산한다고 가정해도 한 달에 골프 비용이 1백만 원 들어간다는 계산이다. 연습장에 연습 비용과 이동용 휘발유 값까지 계산한다면 적어도 150만 원은 잡아야 한다.

연금 가지고 두 식구 식생활비는 되지만 추가 수입 없이 내 운동 용돈으로 150만 원을 쓴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말이 아니다 싶어 골프를 그만두었다. 이제는 매월 들어오는 임대료 정도면 충분히 운동할 수 있을 듯하여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다니는 인근 스포츠 센터 옥상 연습장에 월 회원으로 등록했다.

골프 경력이나 실력은 내가 한 수 앞서지만, 그가 내게 신경을 써주고 배려해 주매 감사한 마음으로 그의 훈수를 받아들이며 열심히 복습하여 과거 실력으로 회복했다. 다른 동기생들의 말에 의하면 연금을 받는 예비역 장교들에게 국방부와 각 군에서 운용 중인 군 골프장에 정회원으로 가입하면 아주 싸게 골프를 칠 수 있다고 했다.

같이 연습하는 동기생은 소령 만기로 전역했다. 월남 참전을 하지 않았는데 연금 대상 직전 전역하여 연금 대상이 아니었다. 때문에 골프장에 준회원으로 입장하다 보니 정회원보다 그린피를 2배로 지불해야 한다. 자주 가는데 제한을 받다 보니 골프장 동행을 피하는 듯했다. 결국 그와는 소원해지고 대부분 정회원 동기생들과 운동을 하게 되었다.

30여 명의 동기생들이 골프를 치지만 결국엔 뜻이 맞는 동기생들과 팀을 짜서 모인다. 나는 병과가 같은 동기생 6명이 전역 전부터 육참회란 이름의 친목회를 결성해 가족까지 분기에 한 번씩 모임을 하고 있었다. 이 중 4명이 골프를 치면서 거의 매주 육참회 회원들과 골프를 즐긴다. 이들 중 예약이 중복되거나 사고나 생길 시만 다른 동기생을 초대한다. 주축은 항상 육참회원들이다.

그들이 예약을 해도 나를 불러 팀을 편성하고 나 또한 예약이 되면 그들을 불러 팀 편성을 하여 하루 경비 7, 8만원 범위 내에서 하루를 즐기면서 등산도 접고 오직 골프가 운동의 주류가 되었다.

요즘에는 IMF시 배운 컴퓨터 실력으로 인터넷에 홈페이지 계정를 받아 글을 쓰고 사진 찍어 올린다. 그런데 사진을 수정작업 해서 올리자니 관련 프로그램도 익혀야 하고, 글 쓰고 사진 찍고 집사람이 필요한 생활용품도 인터넷으로 구입해 주면서 컴퓨터가 나의 기본 일상이 되었다.

매주 한두 번 필드에 나가고 쉬는 날은 연습장에 나가 연습하고 동네친구, 초딩이, 고등이, 군 동기, 병과 전역 동기, 주거지 등 여러 친목 단체의 주기적인 모임에 나가 얼굴 보고 식사하고 노래방 가고 수다 떨면서 모임을 즐기고 있다. 분기에 한 번 정도는 국내 여행을 그리고 봄, 가을로 해외여행 다니고 세월이 언제 지나가는 줄 모르게 지나가고 있다.

2010년까지 골프와 여행 및 사진 위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비 오는 날을 즐기기 위한 실내 취미도 익혀둘 필요성을 느끼고 인근 음악학원에서 2년간 오후 시간에 드럼을 배웠다.

2012년부터는 학원에서 드럼을 치다 보니 남의 노래 반주만 해 주는 것이 아쉬워 내 노래를 연주하고 싶어 키보드를 배우기도 했다. 손가락 연습을 위해 피아노를 2년 배우고 집에 와 키보드 연주를 연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안산에 같이 살고 있는 처남이 사진 전시회를 한다고 초대했다. 한양대 평생교육원에서 사진을 배우고 수료 기념으로 하는 사진 전시회였는데 사진 실력이 대단해 보였다.

나는 1970년 가을, 결혼 때 카메라를 구입해서 그간 40여 년을 여행 다니며 사진을 찍어 왔기에 사진은 내가 처남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진 정규반에서 공부한 처남이 예술적 감각의 사진을 찍었기에 경탄하면서 이에 충격을 받고 나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14년 가을 학기에 사진반 수강을 신청 기초반, 중급반, 고급반, 인물사진반, 풍경 사진반까지 2년간의 과정을 수료했다. 그런 과정에서 전국을 돌면서 각종 기법의 사진을 찍어 보았다. 2018년 가을에는 한국 사진작가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2018년 봄부터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 전국 촬영대회 출사와 공모전 사진을 찍기 위해 전국을 누비며 촬영을 다녔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길게는 20시간까지 돌아다닌 적도 있다. 결국 2018년 가을, 한국 사진작가협회에서 인준한 작가가 되었다. 그동안 같이 수업한 일부 나이 어린(15세 내외) 여성 동료들과 장거리 출사를 같이 다니다 보니 집사람은 걱정이 많았다. 운전을 내가 하니, 만에 하나 사고라도 나면 엉뚱한 소문에 휘말릴 수도 있고 다치기라도 하면 그들은 안면몰수하고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며 그들과 같이 가는 장거리 출사를 싫어하는 눈치다.

2020년 봄, 코로나 발병으로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면서 한국 사진작가 협회 안산지부에서 시행하는 단체 야외 출사가 취소되었다. 전국 각 시도 작가협회 지부에서 시행하는 사진 촬영대회도 모두 취소되면서 공식적인 출사까지 못 가게 되었다. 개인 간의 만남도 자제하다 보니 각종 친목회 모임의 만남과 여행까지 멈추었다. 사진 찍을 일이 없어진 것이다.

어느덧 작가가 된 지도 4년이 되어 간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동행할 동료가 없어 그런지 아니면 사진 열기가 식어서인지 2022년 들어서는 출사 횟수가 더욱 감소 되었다.

78세 협착증 환자라 장거리 운전도 부담스럽고 10여분 이상 서 있는데도 척추에 부담이 되어 앉아 쉬어야 하고 걷기도 힘들어 산악 도보 길은 피한다. 또 내가 좋아하는 일출 일몰은 하늘이 받쳐 줘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구름이 없어 허탕을 치고 바람이라도 불면 수면 반영이 안 잡히기에 출사를 포기하는 등 여러 이유가 겹치면서 지난 2월은 그냥 건너뛴 셈이다.

이제 사진도 궤도를 수정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우선 집사람이 장거리 출사를 반대한다. 그녀도 늙은 몸이라 나와 동행하는데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장거리 운전이 걱정되어 서방 안전을 지키고자 억지로 따라붙자니 당연히 반대다. 나 또한 다급하게 출사지를 선정할 때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나이야 문제가 안 되지만 체력 기동에 문제가 있다. 높은 산을 걸어 올라가 운해 사진을 찍는 것도 부담되고 해외 개인 자유 여행도 언어와 경비가 만만치 않다. 가능하다 해도 유명 작가가 되기 위해 한겨울 북극이건 남극이건 전장이건 단독여행을 가서 설경을 찍는다고, 중동지역 전쟁터에 가서 전장 실황 사진을 찍는다고 아니면 아프리카에 가서 동물들의 생활상을 찍는다고 모두가 다 걸작이 되는 것도 아니고 유명 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기에 그런 헛고생을 사서 할 필요가 있겠냐고 자문자답을 해본다.

가까운 실례로 강원도 원주 고향 마을 뒷동산엔 황새가 많다. 어느 사진작가가 시냇가 풀밭에서 풀을 뜯다 누워 되새김질하고 있는 황소 등위에 앉은 황새를 찍고자 인근 다리 위에 천막을 쳐 놓고 일주일간 매복했으나 실패하고 철수했다고 한다. 마을에 사는 동생한테서 들었다. 이런 기다림과 노력을 강구하기엔 내가 너무 늙었다.

누워 있는 황소 등위의 황새 사진이면 흔히 볼 수 없는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라 작품성은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걸작이라고 평가하기엔 부족 할 것 같다. 개인 작품 전시회에서 작품이 팔릴 때 작가의 이름값이 부과되긴 하겠지만 아마추어 작가라면 50만 원도 못 받는데 1주일의 시간 투자는 취미로나 경제적으로나 정답은 아닌 듯하다.

돈 벌 욕심으로 사진 찍는 것이 아니고 후세에 이름을 남길 욕심도 없기에 강태공으로 심심풀이로 세월을 낚으며 날씨 좋을 때 출사하려니 출사 빈도가 낮아진 것이다.

요즘에는 노후 건강을 위해 기본적 일상으로 매일 아침 기체조 30, 저녁 오후 공원 산책 한 시간 운동한다. 사진 찍을만한 날씨면 나가 찍고 골프 예약되면 치고, 비 오는 날이면 키보드 치고, 폰으로 인사장 만들어 카톡 친구들에게 안부 전하고, 소주 한 잔 하자는 친구 있으면 만난다. 이제 20대 대통령 선거도 끝났고 코로나도 풍토병으로 전환하여 사회적 거리 두기가 풀리면서 친목 모임에도 나간다. 많이 걷지 않는 여행코스를 찾아 여행도 간다.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노후 인생이다.

2022. 3. 9. 10:00 오전에 인근 투표소에 나가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마쳤다. 귀가하여 회고록 마지막 원고를 쓰면서 선거 방송 보기가 짜증스러웠다. 미세먼지가 몹시 나쁜 수준이라 창밖이 뿌옇고 외출을 자제하라는 경고 문자까지 들어왔지만 종일 집에서 뜨개질만 하는 집사람과 심심풀이 드라이브를 겸해서 20여 일 만에 카메라 챙겨 출사하러 다녀왔다.

하느님께서 특별히 배려해 주시어 낙조의 멋진 노을을 연출해 주신다면 오늘은 장노출 촬영을 하겠다 다짐하고 현장에 도착했다. 미세먼지가 조금은 걷히면서 태양 위로 구름 문양이 조금 보이나 태양 아래 수평선 부근엔 미세먼지가 한밤중같이 검다. 삼각대를 받쳐 놓고 18분 장노출을 찍고 보니 구름의 이동이 없어 내가 바라는 장노출 사진이 되지는 않았다.

실패한 출사다. 집사람과 콧바람 쏘이려 드라이브한 것이니 아쉬울 것은 없다. 저녁 7시에 선거가 끝나면 이어 각 방송사가 집계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될 것이니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올 것이다. 부지런히 달려 7시에 집에 도착하여 TV를 켜니 윤석열 후보가 0.6% 차이로 당선될 것이라고 한다. , 극적인 승리가 되겠네.

술 좋아하는 내가 축하주라도 들고 싶지만 편도선 치료 중엔 금주 명령이 떨어진 상태라 맨밥에 사이다를 반주 삼아 뒤늦은 식사를 했다. 그간 갈라진 국론을 빨리 통합 조정하여 살기 좋은 나라로 발전시켜 줄 것을 기도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이것이 오늘의 내 인생이다.

 

**노년에 중요한 것들

건강, 배우자, () 취미 친구 순서이다.

모두 건강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아픈 다음에 건강의 중요성을 인식한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몸은 안 쓰면 쇠퇴한다. 과하지 않는 적당한 운동과 적당한 식사를 해야 장수 할 수 있다.

배우자의 위치와 필요성은 언급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특히 남자들에겐 절대적이다.

젊어서 제대로 살았다면 노후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 놓고 노후를 즐기는 사람들을 성공한 삶이라고 하는데 돈이 있어도 일을 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기에 일을 세 번째로 꼽는다.

80세가 내일모레인데 일하는 친구들을 보면 얼굴에 건강미가 보인다. 일이 있는 친구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동료들과 교분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돈 많다고 게으름을 피우면 금세 늙는다. 하여 돈보다 일을 더 우선한다.

네 번째는 취미다. 취미가 있어야 움직일 일이 생긴다. 정신이 활발하게 움직이기에 치매도 예방된다.

다섯 번째는 친구다. 요즘 친구들은 먹고살 만한데 친구들의 만남을 그리 우선시하지 않는다. 몸이 불편하고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점심 한 끼 먹자고 멀리서 움직이는 것을 기피한다. 친구도 가까이 살며 취미가 맞을 때만 친구이다. 입맛도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출신이 다르면 동창도 죽마지우도 근래에는 모두 남남이다.

 

인생 칠십 종심 소욕 부유구.

공자가 70세가 되어 종심소욕(從心所欲 :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았으되) 불유구(不踰矩 : 법도에 어긋나지 않다) 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하여 '일흔 살'을 이르는 말. 출전<논어(論語)>

 

-공자인생 : bc551-bc 47973세로 운명

2500여년 전 인간의 평균 수명은 50세도 안 되었을 것이고 건강하고 출세한 사람들이라야 겨우 어렵사리 70을 살았을 것이고 세상 인습을 두루 터득한 바이니 욕심을 버리고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 정례이지만 현세에는 90을 살아야 하고 20년 더 살기에는 욕심을 버리기 쉽지않다. 자녀들과 세상살이가 사람을 경쟁하게끔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생 90이기에 90년은 살아봐야 종심소욕 부유구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 때 70세이면 지금은 100세 삶이기 때문이다.

 

 

 

 

 

12. 거래 귀신(역마 귀신)

 

나는 거래 귀신이 환생하여 인간으로 태어났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옛날 젊었을 때 주머니 용돈이 별로 없을 때도 주말이면 자전거로 아니면 걸어서 어느 곳인가를 돌아보고 온다. 요즘 말로 드라이브를 즐긴다고나 할까. 그것이 아니면 등산이라도 가야 직성이 풀린다. 취미도 있기는 하지만 팔자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기질에 직업 군인으로 근무하면서 전후방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며 근무하다 보니 이사도 많이 하게 되고 근무 중 주말이면 주변의 관광지나 명승고적을 섭렵하게 되었다. 그도 아니면 명분 없이 그냥 산과 들로 돌아다니며 세월을 낚는다. 그런 이야기들을 모두 필설로 다하기는 문제가 많아 그간 이사 다닌 일지만 요약 한다.

 

 

 

순서 주 거 지 주거기간 생활 형태 휴대살림 비고
1 춘천 산천리 67.7월초-8 부대옆 민가에서 하숙 가방 2개 정도  
2 춘천 샘밭 67.9- 12 부엌없는 방하나 자취 침구,옷장,취사기구 정도 최소한의 생활도구
3 춘천산천리 67.12-68.1 부대옆 민가에서 하숙 자취살림 주인집
보관
 
4 원주 태장동 68.1-68.5 하사관 학교 BOQ
식사는 장교식당
책상, 전축,
가방2(1톤정도)
 
5 원주 태장동 68.5-68.11 큰 방 월세 잠만 자고
식당에서 매식
책상, 침대, 전축,
이불장, 옷장(1.5)
 
6 원주 명륜동 68.11-69.2 방하나 월세 잠만 자고 숙부님댁에서 식사 상동  
7 원주 학성동 69.2-69.6 상동 상동  
8 춘성 신포리 69.6-69.7 방하나 하숙 가방 2개 정도  
9 대전 69.7-69.8 상동 상동 병참전과
10 학교 BOQ 69.8-69.11 학교 비오규에서 식사 상동  
11 원주 태장동 69.11-70.3(4) 부대 비오큐에서 식사 상동  
12 원주 태장동 70.3-70.7(4) 부엌있는 방,
어머니 살림
침대,전축,이불장,옷장,취사기구(2)  
13 원주 단개동 70.7-70.11(4) 부엌있는 방
여동생 살림
상동(2)  
14 원주 단개동 70.11-73.1(24) 부엌유 큰방
신혼살림
책상,, 찻장, 찬장,미싱,전축(2)  
15 양구 양구읍 73.1-73.2(1) 상동 상동(2) 임시 방
16 양구 양구읍 73.2-74.2(11) 상동 상동(3)  
17 대전 선화동 74.3-74.8(6) 상동 상동  
18 대전시 74.9-75.8(11) 상동 상동  
19 원주 호저면 75.8-75.9(1) 본가로 살림 옮김 상동(3)  
20 서울 보광동 75.9-77.9(24) 부엌무 작은방 이블, 찬장(0.2)  
21 양구 양구읍 77.9-78.1(4) 부엌유 작은방 책상,책장,전축,
취사기구(3)
임시
22 양구 양구읍 78.1-79.9(20) 군인아파트(15) 상동(5)  
23 인제 현리 79.9-80.8(11) 군인아파트(15) 상동(5)  
24 성남 태평동 80.8-80.12(5) 부엌 유 작은방 상동(5)  
25 용인 역북동 80.12-82.4(17) 상동 상동(5)  
25 남양주퇴계원 82.4-83.12(20) 부대 관사 상동(10) 전자제품
26 부산 안락동 83.12-87.9)48) 군인아파트(15) 상동(10)  
27 서울 천호동 87.9-96.5(108) 30편 단독주택 상동(10)  
28 성남 금곡동 96.5-98.5(24) 32평 아파트 상동(10)  
29 용인 수지읍 98.5-00.5(24) 32평 아파트 상동(10)  
30 안산 본오동 00.5-23.5 40평 단독 주택 상동(13)  

 

 

 

 

 

13. 맺는말(2022310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결과 발표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도 어느새 16일째가 되었다. 전 세계가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데도 전쟁은 계속되면서 수많은 양민이 불의로 사망하고 수천만 불의 전쟁경비를 탕진하면서까지 꼭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정에서 형제지간에도 살다 보면 의견이 분분해 다투는 일이 있긴 해도 정 싫으면 안 만나면 되듯이 죽음을 거는 싸움까지는 가서도 안되고 간다면 내남없이 필히 나서서 말려야 한다. 지난 2000년간의 역사 속에서 국가 간, 민족 간, 종교 간 수많은 전쟁을 치러 왔고 1, 2차 세계 대전까지 치르면서 수백, 수천만 선량한 국민만 도탄에 빠져 허덕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결과를 아는 사람들이 과거의 종속국이라도 이미 독립하여 저마다 잘살고 있으면 되지 이를 눈앞의 가시라고 또다시 러시아 연방으로, 종속국으로 만들겠다는 푸틴 총리 개인의 정치적 야심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도 무조건 말려야 한다. 하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나서는 국가는 없이 입방아만 있는 실정이다.

비록 전쟁에서 이긴다 해도 양국 국민들에겐 생이별로 평생의 한을 안길 것이다. 국민의 재산을 탕진하면서 결국엔 국민의 빚으로 넘어와 지도자의 위상도 무너지고 국가는 파산하며 국민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는 전쟁을 왜 계속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현세에선 전쟁하는 당사자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경제가 얽히고 설키면서 인접국에도 생존을 위한 물자들의 수출입 통제 또는 단절에 따른 전쟁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데 이로 해서 각 나라 경제는 정체 또는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어찌 강 건너 불 보듯 하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2주가 지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피해가 없다 해도 러시아와의 무역이 중지되면서 원자재의 수입도 전자제품의 수출도 막힐 것이고 어느새 원유 도입에 영향이 미쳐 승용차를 소지한 서민들에게 개전 전 휘발유 11,600원 하던 것이, 어제는 1,900원까지 근 20% 300원이 올랐는데도 정부에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국내적으론 지난 39일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 국민의힘 당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0.73(득표율: 이재명 47.8% 윤석열 48.6%)% 247천 표의 아주 근소한 차로 승리했다고 난리가 났다. 내가 지지했던 후보가 당선되어 다행이긴 하지만 득표 결과를 보니 가슴이 답답해 온다. 걱정스럽다.

민주주의 국가의 삼권 분립 체제의 국가 조직이라 해도 행정 수반으로서 여소야대 국회에서 발목이 잡힌다면 원만히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나이 먹어 살 만치 살아본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투표 결과가 말하듯이 국민 47.8%가 북한, 중국, 러시아 공산사회의 실상을 보면서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지난 60여 년간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발전 과정과 한국 전쟁 시 원조와 파병까지 했던 세계 선진국들이 사회주의 지도자를 잘못 뽑아 나라가 정체되거나 파산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배울 만치 배운, 국민 학력 수준이 세계 제일이라는 데도 어찌 이를 망각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남북으로 분단되었던 베트남이 남북 전쟁으로 통일되기까지 수많은 인명이 전사한 전력을 보면서, 국민을 아사 직전까지 내몰면서 오직 무력 증강으로 남한을 통일하겠다고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하는 북한의 전쟁 위협 앞에서 이들의 체제와 목표에 동조하려는 정당 목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들과 정쟁은 계속될 것이다. 국론은 분열될 것이고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차라리 경계선이 있다면 둘로 갈라져서 통일 운운하지 말고 따로따로 살았으면 좋겠다.

신임 대통령이 당선 수락 일성으로 국민의 대통합, 자유민주 체제 확립과 민간 주도 시장경제를 달성하겠다고 표방하셨기에 나라를 그리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한다.(후보자 대선 주요 공약 : 1.코로나 긴급 구조 2.지속 가능한 일자리 창출 3.대통령실 개혁 4.외교 안보 5.공정사회 6.부동산과 주택)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미국의 안보 우산 하에, 중국과 러시아와 장사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느 한쪽만을 지향할 수는 없기에 대통령의 외교 안보 감각이 남달라야 할 것이다. 그의 멋진 통치를 기대한다. 적어도 앞으로 5년까지는 안정된 삶이 되리라 믿는다.

가정적 근황을 조금 첨언 하자면 재종형제간 남자 형제가 큰집에 77녀 우리 집에 78녀 총 29명이다. 내 나이보다 어린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형제가 5510명으로 3분의 1이 나보다 먼저 갔다.

내가 지금 남이 보기엔 건강하게 잘살고 있는 듯하지만 6년 전부터 전립선 비대증으로, 녹내장으로 4년 전부터는 척추 협착증까지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약을 복용 중이다. 치아도 부실하여 인사돌을 복용하고 있지만 젊어서 좋아하던 삼겹살 구이를 이제는 피하고 있다.

집사람도 신장에 좁쌀 크기의 물혹이 있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고 무릎 관절이 약해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한다. 자주 침까지 맞고 몸살감기 기운만 조금 있어도 동네 병원에 달려가 진료를 받으며 기운이 없다고 한다. 매년 한 번씩은 영양제 주사를 맞고 일상 시에도 운동 삼아 산책을 하라고 해도 걷기 힘들고 기운이 없다며 거실에서 TV를 보며 누워 생활하는 시간이 많다.

지금 살아 있는 형제 중 89세 재종형님은 그 나이에도 사지 멀쩡한 형수를 대신하여 집안 살림을 전담하고 계신다. 관절염으로 고통이 심해 걷기도 힘들다 하시나 병원에 입원하라 권해도 병원비가 없는 것도 아닌데 입원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50대 아들 하나 있었는데 지난해 비명횡사 후 내외분이 눈물로 서글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76세 재종 동생은 척추 골절에 빈혈로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정도로 거동이 아주 불편하다. 병원 출입을 밥 먹듯 하며 연명하고 있는데 아들 딸 하나씩 두고 자식들은 먹고살 만하다. 며느리가 요양원 가시기를 권하지만 거절하고 있다. 754촌 동생은 지지난해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원 치료를 받고 있고 며느리가 지난해에 암으로 사망하면서 71세 제수씨가 아들 손자까지 신경을 쓰면서 살기 힘들어하는 눈치다.

처가 쪽은 85세 처형이 14년 전에 암으로 돌아가시면서 89세 동서는 44녀를 두고도 누가 모시겠다는 사람이 없다. 자식들이 인근에서 먹고살 만한데도 이집 저집 경로당까지 구걸하듯 찾아다니며 연명하시다가 지난해부터 혼자서는 화장실 출입이 안 되고 치매가 있다고 해서 의사인 큰아들이 요양원으로 모셨다.

내 나이 어느덧 78.

살 만큼 살았고 평균 수명 83세까지 아니 아버지 나이 88세까지 전쟁 없이, 별 탈 없이 더 산다 해도 오늘의 생활에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두 내외 병들어 못 움직이게 되면 재가 요양 보호사를 부르던가 요양원에 가서 인생을 마감해야 함이 나의 마지막 남은 길이기에 나의 회고록은 여기서 맺는다.

그간 살아오면서 간간이 남겼던 글들을 모아 저의 육체적 정신적 발자취를 이 한 권의 책으로 남기고자 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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