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과 마지막까지 한참을 이야기하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03:30. 터미널로 향했다.
그런데...
예약표를 들고 매표 창구로 향하는 순간,
뭔가 잘못돼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이상야릇한 분위기.
내 눈을 피하는 창구 직원...
그렇다.
뭔가 잘못됐다.
영어를 못하는 창구 직원은 내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그건 바로 자리가 없다는 얘기였다.
이런 쉬트!
예약표를 가지고 있는데 자리가 없다니 말이 되니?
하지만 스페니쉬와 잉글리쉬는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
이미 04:00 출발시간은 다가오고...
이걸 못타면 남극은 어떡하란 말인가!
한 호습 쉬고 주위를 돌아보니 이틀 전 표를 예매할 때 같이 줄서있다가 말을 텄던 영국 아이들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내 상황을 설명하자 이 세 친구들이 서로 나서 통역을 해주었다.
얘기인 즉슨,
여기 El Calafate에서 Ushuaia까지 가는 직행버스는 없고 Rio Gallegos에서 갈아타야하는데
내 자리는 Rio Gallegos까지밖에는 없다는거다.
열을 내며 내 영수증을 보여줬고 증인으로 이 영국아이들을 내세우자
직원은 Rio Gallegos-Ushuaia 구간은 돈으로 돌려주는게 아닌가.
이런 확!
사태가 심각해지자 다른 여행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창구직원은 차 출발시간이 다가오자 대충 이쪽을 피해 버스 쪽으로 가고 있었다.
열은 받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단 가는 데까지 가는거지.
가는 데까지 가서 거기서 또 방법을 찾는 수밖에.
실갱이 끝에 버스틀 탔더니 이미 좋은 자리는 다 차고
미니버스의 한 구석지에 몸을 구겨넣었다.
버스 출발.
다시 열이 받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아시아인이라고 무시한거라고 밖에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나쁜 것들.
뒤에 앉은 영국아이들의 위로도 들리지 않았다.
분노로 씩씩대다 어느 순간 잠이 들고 다시 추위 땜에 살짝 깨려는 순간,
내리라는거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도끼눈 뜨고 안내리고 버텼더니 영국애들이 통역을 해준다.
여기서 일단 차를 갈아탄다고.
그 새벽에 바리바리 짐을 꺼내들고 큰 버스로 갈아탔다.
Patagonia는 지형 자체가 빙하 침식 지대라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진 탓인 듯 싶었다.
그리고 다시 빠져든 잠.
-분노 속에 잠이 들었으나 버스를 갈아타야했다-
07:30.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시각, Rio Gallegos에 도착했다.
휴...
여기서 어떻게든 오늘 안으로 지구 땅끝마을인 Ushuaia로 가야하는데.
그래야 내일 남극출발 예비소집을 가고
모레 남극으로 가는데...
서둘러 매표소들을 뒤져뫘으나 당연히도 Ushuaia로 가는 표는 매진이었다.
영국 아이들, 프랑스 아이들 모두 안됐다는 듯이 쳐다보며
쏘리를 연발했다.
그러다 보인 곳이 여행안내소.
일찍도 열었군.
여기서 Ushuaia로 가는 방법은 비행기뿐.
어차피 업무시간 돼야 돈도 찾고비행기도 알아보지.
미스김 정도 되는 아가씨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상황 설명을 하자 그 아가씨도 비행기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가격이 USD 182라...
말도 안되게 비싸지만 방법이 없으니...
일단 그도 어떻게 될지 몰라 예약을 걸어두고 은행이 여는 시간까지는 여기서 개기기로 한다.
지도를 보며 시간 계산을 하고 아가씨와 농담따먹기를 하고...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짐 잠깐 놔두고 화장실을 갔다오는데 어디서 뭐라고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슈아이아'라는 말만 들릴뿐 다른 단어는 전혀 못알아듣겠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우슈아이아 가실 분!"이란 뜻임을 직감했다.
무조건 손 들고 앞으로 나갔다.
역시나 그 사람은 우슈아이아행 표 한 장을 들고 있었고
나는 너무도 기쁜 마음으로 그 표를 쟁취했다.
옆에서 졸다가 놀라 깬 영국, 프랑스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나의 행운을 축하해줬다.
누군가 갑자기 취소를 했다는 것이다.
-남극은 나의 운명: 아마도 El Chalten에서 베푼 선행때문이겠지-
아싸!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이런 식으로 표를 구하다니.
남극은 아무래도 나의 운명인가보다.
-Rio Gallegos 터미널을 통과하며--바로 나타난 남미의 넓은 들판-
09:00
드디어 우슈아이아행 버스 출발.
남들보다 몇 배는 기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러모로 도와주고 함께 분노해줬던 영국 아이들은 그들의 길을 떠났고
다시 프랑스 아이들이 동행이 되었다.
이 아이들도 스페인어를 잘 하는 건 아니었지만 기본 의사소통은 되었기에
나로서는 어쨌건 우군을 얻은 셈이었다.
이렇게 든든할 수가.
-칠레 넘어가기 직전의 Immigration-
10:00
버스의 속력이 잦아들었다.
이민국 사무소를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파타고니아 남쪽으로 갈수록 지도가 복잡해진다.
직선거리로는 짧지만 빙하침식지대이기 때문에 모든 길들이 지형을 따라 꼬불꼬불.
그러다보니 여행 루트 짜기는 굉장히 힘들어진다.
외통수 길이 많기 때문에.
우슈아이아를 가는 길도 역시 복잡하다.
아르헨티나와 칠레 사이의 국경이 남쪽으로 가면서 애매하게도 두부 잘리듯 잘렸기 때문에
칠레령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아르헨티나로 넘어와야한다.
그러니 출입국을 따지면 우슈아이아로 가기까지 이민국을 총 4번을 통과해야하는 것이다.
뭐 이리 복잡해!
첫번째 이민국.
크게 주의할 것은 없다.
과일이 문제가 될뿐.
이 나라에서 산 과일을 다른 나라로 가져갈 수가 없으니
무조건 버리시길.
괜한 문제는 만들지 않는 것이 낫다.
더군다나 아시아 남자로서는.
-Welcome to Chile: 국경을 넘는다는 건 늘 설렌다-
양국의 이민사무소를 통과하는 데에 1시간이 소요된다.
줄 잘 서고 간단히 서류 작성하면 큰 문제는 없다.
설레는 마음으로 국경을 넘어 버스는 또 간다.
11:30
새벽부터 설친 탓에 푹 잤다.
차가 다시 멈추길래 봤더니 이번엔 바다다.
저 멀리 이쁜 등대가 보이는 이 곳은 어딘가.
이곳은 필시!
지도를 얼른 펼쳐들었다.
그렇다.
바로 마젤란 해협이다!
말로만 듣고 책에서만 봐왔던 그 곳.
이런 꿈같은 일이.
마젤란 해협이 눈 앞에 있다니.
-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차량행렬--간단한 식음료를 파는 카페-
배가 올 때까지 시간이 좀 있었다.
모든 차들이 배를 타기 위해 일렬로 대기중이었고
사람들은 카페에 들어가 배를 채우거나 화장실을 갔다.
작은 등대가 있는 이 작은 바다.
이게 마젤란 해협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웃겼다.
어떻게 책에서만 보던 게 내 눈앞에 있을 수 있는지.
항해 역사상 위대한 발견이었을 이 항로가 내 눈앞에 있다니.
허허.
-마젤란해협을 건너는 카고선-
12:00
멀리 보이던 빨간 배가 부두에 닿았다.
그 옛날 큰 배가 아닌 cargo선.
저 배를 타고 DJ는 오늘 마젤란해협을 건너는거다.
배 이름은 Ferry Patagonia.
버스 몇 대가 들어갈 만큼 꽤 큰 배였다.
해협의 폭으로 보아 금새 건널 듯 했다.
-Ferry Patagonia 스케치-
사람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보면 설레는 법.
갑판에 올라 사진들 찍고 바다를 감상하고 선내 카페에서 차 한 잔 하며
나름의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여행중 생기는 모든 먹을 것들은 무조건 받아 챙겨두자-
역시 배로 가는 거리는 길지 않았다.
해협을 건너자 다시 기나긴 육로가 시작되었다.
여기서 좋은 건 버스 안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준다는거.
식사라 하긴 뭐한 빵 두 쪽이지만 가난한 여행자로선 얼마나 커다란 양식인지.
기쁜 마음으로 양식을 취하고 칠체의 대지를 감상한다.
-넓은 벌판을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양떼들과 소떼들-
먹으면 잠들고 잠깨면 음악 듣고.
버스 안에서 시간을 잘 보내는 것도 여행의 기술인데
다행히도 난 잠이 많은데다 잠자리를 가리지 않으니
최적의 여행자랄까.
게다가 촬영때문에 늘 버스생활을 하니까.
17:00
Rio Grande에서 마지막으로 버스를 갈아탔다.
Ushuaia까지 가는 길이 이토록 멀고 복잡하다니...
그럼에도 이 끝까지 꾸역꾸역 찾아온 나는 뭔가.
그것도 모자라 남극을 들어가려 하다니.
-지구 땅끝마을 Ushuaia: 따로 터미널같은 건 없었다-
20:30
드디어 지구 땅끝마을 Ushuaia에 도착했다.
기사 아저씨가 엄청 달리셨는지 예상보다 1시간이나 빨리 도착했다.
Ushuaia!
남극의 관문!
결국 여기까지 오고야말았구나.
남극이 가까워서인지 괜히 좀 추운 느낌이었다.
지구 땅끝이라는 생각에 괜히 외롭고 괜히 쓸쓸하고...
왠지 이 곳의 모든 것은 마지막일 것만 같은 슬픈 느낌.
우슈아이아의 첫인상은 내게 그랬다.
-비버와 펭귄이 관광객을 맞아주었음에도 여전히 쓸쓸했다-
프랑스 아이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함께 숙소를 구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얘들도 예약을 하고 오지는 않았더군.
대신 이곳저곳 함께 다닌 끝에 여행객 50% 할인이라는 작은 숙소를 구했다.
남1+여2이었기 때문에 내가 합류함으로서 남자놈은 숙소값이 반으로 줄어드는 이익을 누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동행이 있을 때의 잇점이랄까.
-우체국 앞 벽화: 적절한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높지 않은 건물 덕에 전체적으로 아담해보였으나
생각보다는 훨씬 큰 마을이었다.
오늘은 일단 짐 풀고 샤워 좀 하고 동네 오리엔테이션만 끝내야지.
-절반 가격에 얻은 숙소-
숙소는 크지 않았다.
확실히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물가는 비싸졌다.
하지만 깨끗했고 혼자 잤을 경우 두배였을 금액이 반이 되었으니
무슨 불만이 있을까.
따뜻한 물 나오고 푹신한 잠자리면 충분한거지.
-우슈아이아 중심 거리 San Martin-
긴 이동의 피로를 따뜻한 샤워로 씻어내고 다시 밖으로.
체력이 조금 회복되었으니 다시 돌아봐야하지 않겠어?
우슈아이아의 밤은 좀더 외로워보였다.
사람들마저도 거리에 많이 없었기에.
아무래도 '땅끝'이란 편견이 더욱 내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았다.
-우슈아이아의 밤-
그런데 이거 뭐.
있을 건 다 있네.
카지노 있음 말 다 한거 아닌가?
멀리 관광버스도 보이고...
지금은 한적한 이 거리, 내일 샅샅이 훑고 다니리라.
-하루 한 끼는 잘 먹자 주의-
배가 고파왔다.
하긴,
새벽부터 그리 설쳐대고
열받느라고 쓸데없이 에너지 소모하고
긴 이동 동안 먹은 거라고는 낮에 버스에서 준 빵 두 쪽이 전부.
마음같아선 45페소 부페를 가고 싶었으나 어제 El Chalten에서의 택시비를 떠올리며
싸고 배부른 피자로 배를 채웠다.
-밤이 깊어가는 우슈아이아 여객터미널-
배가 부르면 확실히 사람이 여유가 있어진다.
마냥 쓸쓸하게만 보이던 우슈아이아의 거리는 내일을 위해 잠시 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일부러 해안 거리를 걸었다.
바다는 잔잔했다.
지구 땅끝에 있는 바다는 한없이 조용했다.
아니,
쓸쓸하고 외로워보였다.
역시나 끝에 있는 모든 것은 슬퍼보였다.
그게 땅끝에 있기 때문인지 내 마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밤이 내려않은 조용한 우슈아이아.
그곳에 내가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끝을 향해 갈 것이다.
그 끝까지 보고 오면 난 어떻게 변해있을까.
혹은 그대로일까.
끝을 보고 왔기에 올라올 수 있을까,
혹은 한없이 끝에서 쳐져있을까.
가보면 알겠지.
남극에 가보면 알겠지.
그건 그때 생각하자.
오늘밤은 그냥,
이 외로운 우슈아이아를
마음으로 달래주자.
여기는 지구 땅끝망ㄹ
우.슈.아.이.아.
-여행 TIP-
1. Calafate-Ushuaia 구간은 늘 붐비므로 미리 예약하도록 하고 꼭 체크하기를.
2. Calafate-Uahuaia 구간: 04:00 Calafate 출 -> 07:30 Rio Gallegos 착:35페소
09:00 Rio Gallegos 출 ->20:30 Ushuaia착: 125 페소
(칠레로 국경 넘었다 배로 마젤란 해협 건너 다시 아르헨으로 국경을 넘는다.
17:00경 Rio Grande에서 버스 한번 더 갈아탄다)
3. 비운의 Asian으로서, 특히 Asian 남자로서는 여행 중 백인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 확실히 잇점이 많다.
비굴할 필요는 없지만 백인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 무시당하거나 사기당할 일은 줄어든다. 확실히!
4. 숙소 75페소(반띵)
5. 저녁: 피자 10페소
6. 남하할수록 물가는 비싸다.
일반 가게보다는 San Martin 끝에 있는 슈퍼마켓을 이용하는 게 훨씬 좋고
더 여유가 되면 외곽에 있는 까르푸를 이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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