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백도 1박 2일 관광
출발하기 까지
2005년 환갑 기념 여행으로 해외여행을 생각하였었지만 부친이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시라 유고시를 대비하여 해외로 나갈 수가 없어 국내 여행으로 변경하면서 거문도가 마음(인터넷 상 거문도 백도 관광 사진을 보고 )에 들었으나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도 유사시 개인적인 귀경이 불가하기에 이도 취소하고 동기생 내외와 같이 전라남도 지역을 순회 관광한바 있음.
그간 부모님 양위분이 돌아가시고 5년여 세월이 지나면서 거문도에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해외여행을 우선하였고 여름에는 기상악화로 여행계획을 미루다 작금에 이르렀음.
하긴 금년에도 해외여행을 계획하였으나 한국내지 중동과 일본 등 세계정세가 하 어수선하여 자중하기로 마음먹고 그냥 있자니 답답하여 국내여행을 생각하다가 2월21일 신문 광고 면에서 3월1일 관광 상품 거문도 백도 1박2일 관광(이벤트 상품은 89,000원이고 기타일정은 129,000원임 )을 접함.
사진 촬영이 우선인 나로서 여행은 혼자 출발함이 피차 부담이 없겠으나 자주 같이 해외여행을 다녀온 동기생 친구들에게 안 알릴 수도 없어 2월23일 골프를 치며 만난 송상근 동기생에게 거문도 여행 계획을 전하니 집사람과 의논 후 알려 준다 했으나 집사람 건강상 못 간다 하였고 다시 25일 김효배 동기생과 골프를 치며 의사를 타진하니 가겠다. 하여 집에 와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3월1일 상품에 4명을 예약하려 하니 이미 120명 예약 마감되었다 함.
토요일, 일요일 넘기고 2월28일 월요일 굿모닝 여행사 홈피에 접속하니 3월 14일 일정에 이벤트 상품이 다시 게시됨.
하여 우리 내외만 일단 예약 신청하고 김효배 동기생에게 연락하여 개별적으로 예약토록 전해 그도 두 내외 예약 신청함.
3월 8일 화요일 주간 일기예보에서 3월14일 월요일 전국적으로 비가 올 것으로 예보됨.
아이고, 비가 오면 정상 여행이 안 되는데……. 사진 촬영도 못하는데 .......
돈과 시간만 낭비하는 여행인데……. 하여 여행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추후 일정을 확인하니 3월 19일에 일반 여행 일정이 잡혀 있음 .
김효배 동기생과 연락 , 같이 연기하기로 하고 여행사에 전화를 하여 동기생내외까지 여행일정을 19일로 연기함.
3월11일 금요일 주간예보에 3월 14일은 전국적으로 구름이 끼긴 하지만 비가 안 오는 것으로 변경되어 당초 계획대로(4만원 아끼려고) 3월14일에 여행을 가겠다고 조정 요청(이때 김효배 동기생은 4만원 더 비싼 일반상품은 안가겠다 고 이미 취소하여 조정 대상이 아니라함)하니 팀 편성이 마감되어 수정 가능여부는 명일 12일 오전 중에 알려 준다 함.
3월12일 여행 팀 편성이 수정되었으니 3월 14일 07:00시 서울 역 9번 출구 굿모닝 여행사 1호차를 탑승하라는 문자 메시지 들어옴.(김효배 동기생은 예약을 취소한 터라 나의 일정 변경을 굳이 전할 필요가 없을 듯함)
출발
2011년 3월 14일 월요일 흐림
[05:00] 기상
[05:20] 집 출발
[05:36] 상록수 도착 /지하철 탑승
[06:40] 서울역 도착
[06:50] 굿모닝 1호차 탑승/차내가 아주 깨끗함.
[06:57] 서울역 출발
[07:25] 잠실역 4번 출구 롯데마트 앞 도착
[07:40] 차내 조식(찰밥제공)/국물 없는 4가지 마른 반찬
가이드 없이 운전기사가 주관 아줌마 2명을 모셔내 배식한다. 배추김치도 없고. 풋나물이 없어 그런지 메말라 보임, 준비해간 김을 보충하여 식사함. 차내 식사가 메마른 줄 알고 준비해온 집사람의 배려에 감사한다. 나아가 차기 여행 시에는 커피보다 된장 국물을 꼭 휴대해 올 것을 다짐하기도 한다. 일행들이 5,60대인데 분명 반찬이 거칠어 식사를 남길 만도 한데 모두들 깨끗이 치운다.
[08:00] 잠실 출발 /버스 임시번호로 오늘 우리가 첫 고객이라 함.
[09:20-09:40] 정안휴게소 정차 휴식
공원에 다람쥐 조각상 촬영.
[11:50-12:10] 주안 휴게소 정차 휴식
집사람이 아침식사로 속이 불편하다하여 어묵 한 접시를 구입 국물을 나눠 마시니
조금 안정되는 듯함.
[13:00-13:20] 고흥우주휴게소 도착(중식)
아침과 비슷하나 콩자반과 토란 조림이 있어 조금은 나아 보인다.
[13:40] 녹동 항 도착(쾌속정 탑승)
300인승인지 우리 일행 115명과 타 여행사 30여명 합 150여명인데 빈 좌석이 반이 넘는다.
[14:00] 여객선 출항
선상에 오르지 못하게 하여 선내에서 지나치는 섬들을 촬영하니 차장 유리에 맺힌 물방울들로 사진이 선명치 못해 아쉽고 촬영을 중단함.
[15:05] 거문도 도착
한 시간 정도를 달리는데 멀리 큰 섬이 보인다.
“저 섬이 거문도(첨부 자료 1참고)일 것 같다“라고 예측하고 있는데 예측대로 배는 거문도 영내로 진입한다.
첫눈에 바다위의 오아시스라고 할까????? 분지라 할까?????
사방의 산 능선들이 울을 이룬다. 섬(홍도, 백령도, 울릉도 )하면 통상 외로운 고도로 연상되는데 거문도는 망망대해에서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내륙의 분지처럼, 성내로 진입하는 듯 동도와 서도를 잇는 방파제 중앙통로로 진입하는 가 싶더니 거문도 여객선 터미널에 정박한다.
토성을 쌍은 듯 사방이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 섬 안이라 바람과 파도를 막고 있어 포근한 항구요 해안가 마을 갔다.
삼포교가 보이고 동도 서도 고도 중심에 옹기종기 어촌마을이 아늑하고 산뜻해 보인다.
마을입구에는 양식장과 어선들이 즐비하다.
갈매기는 한산해 보인다.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고 먹이가 풍부하다면 갈매기의 천국이나 마찬가지 일진데 어찌 갈매기가 한산할까 ?????
심해라 갈매기의 먹을거리가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
강화도 선착장에는 갈매기가 유람선을 따라 다니는데.......
여객선에서 하선하면서 바로 옆에 정박 중인 유람선에 오른다.
들어올 때처럼 같은 방향 , 배의 좌현 중앙에 자리를 잡으라고 집사람에 당부하고 나는 짧은 시간(5분정도)이지만 주변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유람선 크기나 형태도 여객선과 비슷하다.
녹동 항에서 들어올 때 보다 좌석이 더 여유가 있다.
주민들이 하선해서 그러겠지…….
[15:20] 백도 유람선 탑승 거문도 출발
유람선은 고도의 선착장에서 출발. 고도와 동도 사이를 이곳에도 방파제가 시설되어 있어 중앙 통로로 빠져 나간다. 탑승 시는 좌석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았는데 섬을 빠지면서 선상으로 올라감이 허용되는 듯 일부 여행객들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 지라 나도 따라 선상으로 올라갔다.
바람이 볼에 거세게 몰아친다. 이는 느낌일 것이다.
파도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실제 바람은 미풍수준일 진데 내륙에 적응된 얼굴이라
바람이 거센 듯 느껴질 뿐이다.
좌현 쪽에는 소 삼부도와 대 삼부 도를 지나면서 연안의 섬들인지 점점의 섬들이 보인다.
우현에는 망망대해 ,수평선만 보인다.
초행길이요 해상관광중인데 배안에 앉아서 TV화면 쇼를 시청하는 여행객이 상당수다.
하긴 집사람도 그냥 좌석에 앉아 유리창밖에 보이는 장면으로 만족하고 있는 셈이지만
진실로 관광을 좋아하는 지 의심스럽다.
[15:46-16:20] 백도 유람선 선상 관광
20여분을 달렸을 까 전방에 백도라고 예상되는 크고 작은 섬들이 상당수 보인다.
방송을 했는지 많은 여행객들이 선상으로 올라 왔다.
나만의 욕심이겠지만 나는 선상 맨 앞 좌현에 붙어 서서 열심이 셔터를 눌러 댄다.
선두 맨 앞 쪽에는 안전상 못 나가도록 금줄이 설치되어 있고 또 뒤 사람들의 시선을 막고
있어 핀잔을 받는다.
배가 어찌 움직이는지 상백도 방향인가 싶으면 하백도가 보이고 사진 한방 찍고 나면
다시 상백도가 전개되고…….
배가 파도에 출렁일 때마다 섬이 숨바꼭질 하듯 머리 오르내림을 계속한다.
<상 백도 전경>
<하백도 전경>
백도(첨부 자료 2 참고 )는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7km 지점에 우뚝 솟은 무인군도, 상백도와 하백도로 나뉘어 있고 바람과 파도가 빚어낸 바위와 기암절벽에 갖가지 기기묘묘한 형상들로 절로 탄성이 튀어나오는 남해의 소금강이라 한다.
섬이 백 개(실제는 31개인데)라서 백도란 설도 있고 거문도에서 맑은 날 보면 섬이 하얗게 보여 백도란 설도 있는데 하얗게 보여 백도라 칭함이 정설 같다.
상백도 정상에 무인 태양열 등대가 인간의 흔적을 대변 해주나 지금은 생태 보전 차원에서
섬 상륙을 금지하여 선상 유람만 허용된다 한다.
오! 한국에도 이런 절경이 있구나!
홍도 백령도를 십 수 년 전에 관광하였고 중국의 명승지도 여러 곳 탐방하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신을 원망하기도 하고 중국을 부러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규모는 작아도 이런 절경이 우리나라 연안에도 있음을 확인하며 천만 다행이다 싶고 가슴이 뿌듯하기도 하다.
선상 확성기에서 관광 안내 방송이 계속된다.
매 바위, 병풍바위, 왕관바위, 부처바위. 각시바위, 서방바위. 형제바위, 할매 바위 등등의 설명에 탄성과 머리 끄덕임은 계속되고 나는 셔터 누르기에 급해 방송 소리도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
사진을 좀 더 여유 있게 그리고 여러 각도에서 잡아 보고 싶지만 그럴 시간도 여건도 부여되지 않음이 안타깝다.
유람선은 계속 앞으로 진행하며 설명하지만 이쪽 찍다보면 저쪽이고 저쪽이다 싶으면 이쪽이고 안내방송 순서대로 촬영도 못하겠고 어떤 바위를 설명하는지 가름이 안 될 때도 있고 찍다보니 어느새 뱃머리를 돌린다.
<왕관바위>
<하백도 병풍 바위>
<지면 관계상 백도 사진 첨부를 생략하니 본 블로그 여행기념 사진을 참고 하세요>
뭐야 10시간을 차로, 배로 달려 왔거늘…….
한국 최고의 명승지를 어찌 30여분 만에 관광을 마치냐?????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넘어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리 짧게 관광을 마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 시간도 아니고 30분이라니…….
여행사 일정에는 한 시간이라고 잡혀있었는데…….
아쉽다. 아니 억울하다. 가혹한 처사다.
유람선의 계획대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운항하며 안내 했겠지만 이는 아니다 싶다.
30분! 아니 잠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16:50] 거문도항 도착
일정표상에는 17:30인데, 해가 중천에 있는데 40여 분이나 댕겨서 귀항하는 연유가 무엇인지 ……. 누가 통제하는지…….
항의하고 따지고 싶지만 그러다 더 열 받을 것 같아 기왕 쏟아진 물 빨리 포기하고 잊는 것이 순리다.
[17:00] 숙소 배정
나이가 많아 그런지 여행객 명단에 선두 그룹에 있어 첫 민박집으로 배정되었다.
가이드가 호명한대로 2층 객실로 올라가는데 뒤 따르던 일행 내외(익일 개별 자유 중식을 같이 하며 알고 보니 나보다 나이도 5세나 어린것이)가 나를 앞 질어 방을 잡는다. 하여 2층에는 방이 없는 듯 주인아주머니가 3층으로 올라가잔다.
순서대로 배정받아 우리 내외는 7호실(6,7,8,9호실 만 있음)로 배정받음.
1인당 1만원씩 요금을 더 지불하고 2인 입실을 신청한 사람들에게 먼저 배정하는 듯하다.
방에 들어가니 큰방이다. 10여명이 잘 수 있는 방인데 두 내외가 자긴 너무 큰방이다.
최근 증축한 듯 화장실이며 내부시설이 깨끗하다.
가이드의 말로 실내 화장실이 없는 집도 있고 위풍이 심해 추운 방이 걸릴 수도 있으니
그러려니 참아 달라고 부탁한바 있기에 우리는 방 배정을 잘 받은 듯싶다.
2층은 30여 년 전 스타일(내벽 도배가 아닌 송판 치장)로 조금 우중충 하고 방이 작아 보였었기에 더 더욱 다행이다 싶다.
춥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실제 자보니 채난(전기 패널 장판)이 잘 되어 더워서 전원을 끄고 자야 했음. 같은 3층인데 9호실에서 잔 부인(분당 아파트에 산다는)은 위풍이 심해 잠을 못 잤다 하는데 이해가 안 됨.
[17:30] 거문도 저녁식사(다금 바리 회 )
생고기가 1.5키로 정도의 크기라는데 회는 혼자 먹어도 양이 안찰 것 같은 양으로 4인분 10만원이고 서울에 비하면 1/3값이라 대부분 맛이나 보겠다고 선택했을 것이고 일부가 4인분 돔 회(8만원)를 주문하기도 했는데 115명 여행객이 한 식당에서 먹다 보니 광어회 보다 조금 쫄깃하다 할까 맛은 잘 모르겠고 정말 소란스러울 뿐이다.
집에서 준비해간 소주를 반주로 동석한 일생과 나눠 마심. 초행들인가??????
한 일행은 밖의 슈퍼에서 1,200원에 한 병을 사왔다 하고 이도 준비 안한 사람은 식당에서 3,000원에 구입해 마신다.
[16:30-18:40] 자유 시간 / 고도 주변 산책 겸 관광
백도 관광을 빨리 끝내면서 석식 후 자유시간이 충분해 부두 주변을 산책 겸 관광에 나선다. 항구 주변을 걷다 보니 영국군 묘지가 600미터라는 이정표가 있어 이를 보기로 마음먹고 진입로로 접어들었다.
옛날 마을, 주택가 길 그대로다. 넓이가 2미터 남짓하고 꾸불꾸불 한 것이 영국군 묘지를 관광지로 .많은 관광객을 의식해 현대식으로 개발했다면 좀 더 넓고 직선도로일 진데 해방 전 마을 본래의 길 같다.
몇 채의 집 울타리를 지나니 거문 초등학교 교정이 나온다. 정문이 길에서 3미터 정도의 계단을 올라 언덕에 위치한다.
계단을 보니 섬 학교임이 실감난다.
입구에는 책을 읽으며 학생을 기다리는 선생님 모습의 시멘트 조각상이 앉아있다.
계단을 올라 학교 전경을 돌아보며 55년 전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비교해 본다.
격세지감이지만 운동장과 교실건물은 조금 작아도 그간 개보수를 거친 1층 건물이고 잘 관리되는 듯 깨끗한 학습풍경이 마음에 든다.
학교를 지나니 산비탈 길이다.
이 섬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지 360여년! 평지가 아닌 산악 지세라 비탈 밭과 산소가 공존한다.
학교에서 400미터지점에 영국군 묘지가 보인다.
주변은 돌담이 설치되어있어 공동묘지지만 특별 관리되는 듯하다.
남향받이 산비탈에 3-400평 규모의 공동묘지 구역이었던 것 같은데 동측 하단에 영국군 묘지3기가 있고, 나머지 면적은 모두 공원 현대화 공사 중이다.
계단식 석축을 다시하고 휴식장소와 통로 계단위로 장미넝쿨을 올릴 시렁공사를 하는 등 관광객을 위한 공원화 시설물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첫눈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공동묘지 구역인데....
면적으로 봐서 토착인들 묘가 3-40기도 넘을 면적인데 …….
“ 영국군 3인의 묘를 성역화 한다. “ 기 보다 관광 상품화하기 위해서 파낸 듯싶다.
어찌 생각해야 할 지 모르겠다.
먼저 영국군이 한국 땅을 불법 점거했을 당시 (첨부 자료 3 참고) 무혈 상륙하였는지 , 전투를 하여 섬 주민들에게 항복을 받았는지 기록에 없어 알 수 없지만 비록 서구 문물에 무지한 토착민이라 해도 당시 한국에서는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강행하던 시기라 평화적 상주는 분명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고 약간의 전투행위가 분명 발생하였을 것이다.
군함과 신무기를 소지한 영국군의 함포소리에 질겁한 주민들이 사상자 없이도 항복하였겠지만 ……. 2년을 상주하며 주민들과 동거 동락하였다 치고 정이 들어 선박 내에서 안전사고로 사망한 영국군 시체를 섬에 매장 하는 것까지는 허용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점령군의 묘를 120 여 년 동안 그대로 보존하고 있음은 한국인이 속이 좋은 것인지, 넓은 것인지, 관심 밖의 일인지, 원수의 산소라도 산소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유교 풍습인지 헷갈린다.
다음으로 현세에 와서 여수시청 사업이겠으나 분명 국가 예산일 진데 이런 영국군 묘를 굳이 공원화, 성역화해야 하는가를 묻고 싶다. 영국군의 후손들이 이장해 가면 좋고 안 해가면 그대로 보존만 해주면 그것이 국제적 도리 아닌가! 부산의 유엔군 묘지가 있지만 625참전 용사 묘역을 공원화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왜구의 시체를 묻은 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 죽어 한국 땅에 묻힌 적군들의 묘는, 625때 죽은 북한군의 묘가 남한에 존재하지만 성역화 공원화 하지 않는데 한국영토를 무단 점령했던 영국군 묘가 한국인 관광객에게 어떤 교훈을 심어 줄 지 모르지만 이는 이해가 안 되는 사업이고 분명 볼거리 가 없어 억지로 만드는 사업이 아닌가 싶다.
정부사업이라고 여수시장 명령이라고 인근에 묻혀있던 토착민들 조상의 묘는 거절치 못하고 이장한 모양인데 토착민의 심정은 어떠했을 까 ?????
그저 씁쓸한 뿐이다.
여행객 몇 명이 같이 왔었지만 나와 같이 그냥 훑어보는 것으로 끝나고 해가 지려 하니 하산한다. 집사람도 따라 하산한다.
남들 다 하산해도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
당장 캄캄해지는 것도 아니고 아직 일몰 30여분 전이며 , 고도 동쪽 끝자락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니 내일 아침에 일출 사진을 찍기 위한 촬영위치를 사전 확인해 둬야 한다.
고도 동쪽 까지 짐작으로 500미터만 더 가면 될 것이란 예측을 가지고 어둡기 전에 다녀올 욕심으로 혼자서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길옆에 산소들이 자주 널널하여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에는 조금 오르막 경사였으나 내리막 경사라도 숲이 울창하여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10여분을 더 걸어 오르내리면서 동해 바닷가 수평선이 보이는 경사지에 도착한다.
여기면 된다.
주변을 살펴보니 길옆으로 빠진, 이미 사진 동호인들이 자리를 만들었음이 ,여러 사람이 왕래 했었듯한 ,풀들이 주저앉은 빈터가 보인다.
굿!
내일아침에 여기 와서 일출사진을 찍자!
돌아서서 하산을 시작 영국군 묘지까지 오니 해가 지고 거문도에 어두움이 깔리면서
삼호 교와 서도 유림해수욕장 주변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
[18:50] 삼호고 야경 촬영/ 포천이동막걸리 구입
일단 민박집에 들려 집사람에게 무사히 돌아왔음을 보여 주고 다시 밖으로 나와 부둣가에서 부두 간난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삼호교 야경사진 촬영을 했다.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빛 번짐 효과가 조금은 부족한 듯, 하지만 어찌 하랴 !
집에 들기 전 인근 슈퍼에 들려 한잔 더 하고 잠을 청할 요량으로 막걸리 한 병 을 구입함.
헌데 포천 이동 막걸리란다. 한 병 밖에 없었지만……. 유효기간도 아직 3개월이나 남았고 …….
아니 어떻게 한반도 북단인 경기도 포천에서 남해 바다 건너 최남단 거문도까지 들어올 수 있는지……. 포천막걸리가 조금은 유명하기로서니 …….한마디로 신통방통하다.
한 병에 2,000원! 안산에선 1,200원!
40%나 비싸지만 고향 술을 만난 듯 감개무량하다.
[21:30] 민박집에 투숙하여 연속극/ 뉴스 본 후 취침
앞서 언급했지만 10명이 잘 수 있는 크기의 큰 방이고 방바닥이 3등분 되어 전기 패널 온돌이 깔렸다.
조금은 피곤하고 잠을 빨리 들기 위해 막걸리까지 마셨지만 방이 너무 더워 잠을 청해도 들지 않는다. 하여 3단에 별도로 설치된 스위치를 모두 껐는데도 바닥이 금세 식지 않는다.
밖에는 파도소리 철석이고 바람 소리 요란하니 더더욱 잠이 안 온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해상고도에서 잠을 자기는 난생 처음인 듯하다.
제주도에서 잠을 잔적은 있지만 섬이 커서 그런지 바다라는 생각은 안 들었었는데 이곳은 바다 한 복판 무인도에 누워있는 듯 가슴이 구근 거린다.
이런 때 술친구, 대화가 맞는 친구가 있었으면 회포를 풀만한 분위기인데 집사람은 어느새 코를 곤다.
만일 서울에서 효배 내외와 같이 왔다면 효배는 술을 안마시니 일정에 별 차이가 없을 것이고 상근이 내외와 같이 왔다면 지금 이 시각에도 회 안주 사다가 술판 벌리고 있을 것 같다.
전체적인 여정을 보면 혼자 오길 잘 한 것 같기도 하나 조금은 심심한 구석도 있다....
2011.03.15 화요일 흐림
06:30 조식(은갈치 조림)
풍랑주의보 발령에 따라 금일 여객선이 출항하지 못한다. 종일 자유 시간을 줄 것이니 각자 알아서 관광하란다. 당연한 일 처럼 자주 당해본 듯 가이드가 설명한다.
당초 계획은 일찍 조식하고 08:00시에 유람선 타고(1인당 5,000원) 동백섬까지 배로 이동하여 1905년 대한민국 최초로 건축한 등대, 대한민국 최남단의 등대를 보고 10:00시에 귀항하여 11시에 거문도를 출항/ 귀경 하는 것으로 일정이 잡혀있었지만 이 일정이 취소되고 하루 종일 자유시간이란다.
뭔 소리야! 내 생각엔(거문도 내항이라 대해의 실바람 세기는 모르지만) 바람이 그리 세지 않는데 왜 배가 안 떠 ??????
이거 짜고 치는 고스톱 아니어????
거문도 ! 이곳 주민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먹고사는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섬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도 있고 고기를 잡거나 양식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주종 소득원은 관광수입이다.
거문도에는 현재 우리들 관광객을 포함하여 150여 명이 묵고 있지만 오늘 귀경하고 나면 이곳에 들어오는 고객은 없는 일정이다.
여행사에서 매일 빈번이 광고하지만 20여명 이상이라야 여행사에서 일정을 확정하기에 매일 같이 여행객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 이러 할 진대 기상대에 풍랑주의보가 발령되면 , 여객선이 출항을 안 하면 150여명이 이곳에서 어쩔 수 없이 하루를 더 묵어야 하고 하루를 더 묵으면 최소한 3만원이니 하루 450만원이 섬 영업집에 떨어지게 된다.
바꿔 말하면 나가고 안 들어오면 외지 수입이 전무 해 진다는 이야기다.
매일 같이 내륙에서 150여명이 들어오는 것은 분명 아니기에 1개 여행사에서 패키지 상품으로 120명 내지 그 이상 들어오면 섬에서는 봉 잡는 날이다.
헌데 이들 봉이 간다면 할 수 없고 바람 불어 못 간다면 다행이라 할 것이다.
울고 싶던 차에 빰을 맞은 듯 , 그냥 안 내보낼 수는 없는 것이고 풍랑 주의보가 발령되면 녹동 항에서 들어오는 (거문도행) 여행객도 별로 없을 진데 녹동 항에서 손님 올 때 까지 계속 정박하며 기다려야 할 진대 여객선 업체에서는 섬 주민의 편에 서서 굳이 출항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만하자.
(그만하고 이는 내가고도 정상 관망대에 올라 주변 해역을 돌아보니 일반 고기잡이배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보고 나서 굳힌 생각임.)
[07:00-08:00] 고도 공원 산책
조식 후 집사람은 방으로 들고 나만 사진기를 메고 새벽산행을 나선다.
하늘에 구름이 있어 해가 얼마만큼 솟아올랐는지 보이지 않고 고도 정상에 전망대가 있고 공원화 되어 있다 하여 이곳에서 일출 사진 촬영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혼자 나선 것이다.
영국군 묘지를 지나 정상에 이르는 길일 것으로 생각하고 걷다 보니 정상에 도달한다.
동백나무가 울을 이르고 동백꽃이 어느새 지기 시작하여 길에 떨어진 꽃잎들이 즐비하다.
공원이래야 특이한 것이 없고 운동기구 몇 점과 전망대가 전부이다.
여행객이고 마을 주민이고 운동 나온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동도와 서도의 지형이 확실히 보이고 삼호교와 부두 인근 주거시절들이 그림같이 산뜻하고 다정스럽다. 허나 수목이 시야를 가려 수평선 일출사진 촬영은 안 된다.
동도, 고도 , 서도 3도를 통칭 거문도라 하는데 거대한 글자를 닮았다 하여 클 거 글월 문 巨文島라 칭하게 되었다는 말은 실 지형으로 봐서 어떤 글자 모양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옛날에 한 관료(정여창)가 이곳에 출장 나왔다가 학식이 높은 문장가가 많은 것을 보고 귀청하여 왕의 승인을 받아 거문도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도 아리송한 전설이다.
(08:50-12:20] 거문도 등대 관광
전망대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아침 연속극(주홍글씨)이 끝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갑시다!
이래서 우리 내외는 동백섬, 거문도 등대까지의 산행에 나섰다.
산행이라야 실제(해발 고도가 낮은 지라) 그냥 산책로나 마찬가지다.
삼호 교를 건너 주월산(동백섬) 거문도 등대까지는 3.3키로 여정이니
천천히 걸으면 가고 오는데 한 시간씩 두 시간이면 족하다.
넉넉히 잡아 오전 거리다.
삼호교를 지나니 지방에서 흔치 않은 크고 정교한 최근 제작된 묘비가 길옆에 있다.
한일 합방을 반대하는 대한민국 최초 의금부 총사령으로 임명되고 합병을 반대하다 체포되어 이곳에 유배되고 후학을 양성하다 생을 마친 임병찬 의사의 순지 비다.
여기 태생도 아닌데 …….독립투사로서 이곳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했다고 그의 넋을 기리는 의미로 정부에서 순지비를 세워 준 것 같다.
아픈 과거사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고 국가관이 확립되었으면 싶다.
이를 지나니 얼듯 보기에 대 호텔 건축 현장이 보인다.
듣자니 하니 통일교회 재단에서 짓고 있는 콘도신축장이란다.
아니 여기에 콘도를 !
수지타산이 맞을 까?????
건축업에 조금 종사해 본 사람으로서는 계산이 안 되는 공사 같다.
대 그룹에서 , 통일교 종단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니 가능할 수 도 있겠지만 …….
대충 어름 잡아 보니 객실이 120개이면 240여명이 묵을 수 있는 콘도인데 …….
한 여름이라 해도 3일에 한번씩 120여 쌍이 입장할 것으로 예측하기는 힘들다.
설령 들어온다 해도 선착장 주변에 있는 민박들이 먼저 흡수 할 것이고…….
이는 통일교 종단에서 휴양 시설로 .......
종단에서 계획적으로 파견하기 전에는 방을 채울 수 없는 여건이다.
왜 남의 일에 걱정이어??????
수월산(동백섬)의 거문도 등대에 이르는 길은 동백꽃 꽃길이다.
해안가 절경도 절경이지만 동백꽃 잎 깔려진 오솔길과 수평선이 일품이다.
일본의 권고에 의해 조정에서 1905년 4월 건축 점등된 곳이라고, 대한민국 최남단 등대라고, 해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던 그게 관광객에게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듯 일행 115명중 20여명도 산행에 안 나온 듯하다. 50대 아니 60대가 대부분인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지 궁금하다.
관백정 정자에 앉아 동해바다. 남해바다를 바라보니 제주도가 인근에 있고 일본이 지척에 있으며 대한민국 최남단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깊다.
등대나 주변 경관이 잘 정비되어있어 육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 바다의 길잡이로 잘 어울리는 듯하다.
오늘 하루 우리 내외가 등대를 방문한 것은 첫 손님이고 .....
등대 전망대로 오르는 계단에서 집사람은 별무신경인데 나는 왜 다리가 후들 거리는지 모르겠다. 망망대해에 가슴이 탁 트인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곰치인지 이름 모를 풀 몇 가지가 아주 거름지게 어느새 성장을 시작하였는데 너무도 기름진 모습에 이유가 궁금하다. 토양이 비옥함일까? 아니면 천성이 그런 한지…….
집사람은 쑥 나물을 채취한다. 내일 갈지 모래 갈지 모르는데 헛수고가 아니냐고 만류를 해도 듣지 않고 나물 채취를 계속한다. 그도 집사람의 취미이니 변질되고 안 되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니 묵인하기로 한다. 집사람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쑥을 뜯고 있다.
쑥 뜯으려 거문도 까지 왔나?
아님 기왕 왔으니 그냥 가는 것 보다 시간 많으니 뜯어 간다. 왜??????
[12:20-14:10] 돔회 와 매운탕 중식
거문도 등대까지의 산행 길에서 만나 제안을 받고 , 같은 민박 집 동행자로서 ,안산 인근의 안양에서 왔다는 , 어제 방 배정 시 내 앞을 새치기 한 동행자이지만 그들 내외와 4명이서 돔회 중식을 같이 하자는 제안에 동의하였고 우리가 묵은 민박집 1층 회집에서 회와 매운탕으로 중식을 하며 오후에 콜택시를 불러 타고 녹산 등대 입구까지 가서 등대까지 관광을 계속하기로 합의함.
[14:20-15:41) 서도 녹산 등대 /신지끼 인어 동상 관광
중식 전에 전화로 녹산 등대 입구까지 4명에 7천이란 요금을 확인해 놓고 식당에서 콜택시를 불렀다. 거문도에는 택시가 2대 있고 차종은 카니발이다. 여행객 전용이니 콜택시로 운영된다.
택시는 삼호 교를 건너 동백섬으로 향한다.
“스톱 ! 거문도 등대는 오전에 갔다 왔고요 우리는 녹산 등대 쪽으로 가고자 하는데요…….”
“아닌데요. 녹산 등대 방향은 15,000원인데요. 아까 등대라 해서 거문도 등대인줄 알고 4인 7천원이라 했지 녹산 등대는 6키로 인지라 7천에는 못가요. 제가 잘못 들었으니 그냥 내리세요…….”
6킬로를 걸어서 녹산 등대를 관광하기엔 우리가 너무 지쳐 있다.
같이 탄 일행도 금액 고하를 막론하고 같이 행동할 뜻을 비친다.
“알았어요. 서로 착각한 모양인데 15,000원에 녹산 등대방향으로 갑시다.”
하여 서도 포구에서 나려 이금포 해수욕장과 녹산 등대, 신지끼 인어 상을 돌아보고 다시 주차장 까지 나옴.
이금포 해수욕장은 거의 일년내내 텅 빈 해수욕장이겠지만, 쓰레기가 조금 밀려와 산만스럽기도 하지만, 반원형만을 이루고 있어 정감이 가는 평온한 해수욕장으로 등대와 어울려 한복의 그림 같다.
녹산 등대는 무인 등대고 출입을 제한하고 있어 그냥 사진만 찍고 돌아 나옴.
나오는 길의 갈대숲은 때 묻지 않은 양털을 만지는 듯하다.
신지끼 하면 일본 이름인데 어찌 이곳에 일본이름의 인어가 이곳을 지나는 어선에게 돌을 던져 태풍을 알렸다는 것인지 …….
이해가 안 되지만 묻을 사람도 없으니 그냥 지나가자!
주차장 인근 슈퍼에서 동행한 일행이 맥주 한 병을 구입해 마시며 갈증을 식혔고 서도 포구로 진입하는 도로와 고도로 가는 지방도에서 헷갈려 서도 포구로 들어갔다가 길이 없어 되돌아 나오는데 해양 파출소 소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오며 우리 일행을 반긴다.
‘길을 잘 못 드신 것 같은데 차 한 잔 하고 가시란다. “
목도 컬컬하고 사양할 이유도 없기에 해양경찰청 거문도 출장소로 따라 들어간다.
출장 소장님의 근황과 일상에 대한 약간의 푸념을 듣고 나온다.
이곳 해상 업무를 혼자서 총괄하고 있단다.
거문도 주변 해상의 선박운항에 관련된 각종 통제와 사고처리가 그의 임무란다.
그의 말로는 치안과 경계까지도 그의 임무라 하지만
군에서 장기근무하다 전역한 나에게는 이해가 안 돼는 그의 임무이다.
혼자는 무슨 경계고 치안이야!!!!!
어찌 보면 그가 왕이고 어찌 보면 정부에서 파견한 말단 파수꾼이다.
해경 출장소를 나와 고개 길을 걸어 넘는데 산타페 짚 차가 지나가다가 후진한다.
아! 한산한 지방도로에서 걸어가는 우리를 보고 태워 줄 요량으로 후진하는 갚다.
하지만 이는 아니고 도로가 협소하여 대행 차에게 길을 양보하면서 후진 한 젓이고
태워달라는 나의 부탁에 순순히 우리 일행을 태워 준다.
무지 고마울 뿐이다.
하여 선착장까지 4키로의 거리를 아주 쉽게 돌아옴.
[17:50] 일등 식당에서 석식
추가 요리 주문 않고 백반으로 석식 함.
일행 모두 이곳 식당에 모이라 했는데 일부는 참석치 않아 가이드가 몸을 달굼, 식당의 매상을 위한다기보다 여행객들과 간격을 유지하기 위함일 진데 일부가 연락없이 자유식사라고 타 식당으로 간 듯함.
명일까지 섬에서 묵게 되면 경비를 최소화해야 하는 식사(5,000원)임.
그래도 반주는 해야 함 (소주 한 병: 3,000원)
[19:10] 민박집에 들어 TV보고 샤워하고 억지로 잠을 청함.
2011.03.16 수요일 맑음
[06:00] 기상
창문을 열어 보니 바람도 조용하고 하늘이 맑다.
일출 촬영을 하기로 마음먹고 출사 준비
[06:15-07:30] 일출/ 새벽 해상 촬영
고도 동쪽 벼랑까지 1.2키로 정도의 거리를 20분 정도면 도착하리라 생각하고 15분에 집을 나섰으나 경사가 심한 것은 아니지만 산악 등산로라 시간이 지체된다면 만사 허사가 되기에 6시 40분전에 필이 도착해야 하기에 산행길이지만 뛰다 싶이 속도를 높였다. 숨이 턱에 찬다. 조금 급한 경사에서는 이러다가 숨이 멎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첫날 저녁 때 확인해 두었던 촬영 위치에 도착하니 35분!
맑은 하늘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오 ! 다행이다.
드디어 나도 거문도 백도 해상 일출 사진 촬영 기회를 잡았다.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고른다. 숨이 차 손이 떨리면 촬영이 안 되니 빨리 숨을 골아야 한다.
카메라 다리를 받칠까 생각했으나 경사면에 궁둥이 깔고 앉아 무릎에 양팔을 얹고(몸각대) 숨을 멈추고 셔터를 누른다면 흔들림 현상은 발생되지 않기에 쉽게 생각하고 자세를 잡아 본다. 초점거리가 20미리 정도의 줌 렌즈 기능에서는 손 떨림이 거의 없는 듯하다.
50미리, 100미리 당겨보니 오히려 정상 화면을 손상시킨다.
됐다. 그대로 셔터만 누르면 된다.
정확히 06시 40분에 해가 눈썹을 내밀기 시작한다.
하백도 점점의 암석 우측 수평선위로 해가 솟아오른다.
찍자! 그냥 찍고 당겨 찍고 수평선을 위로 찌고 아래로 찍고 …….
순간적으로 촬영된 사진을 보니 정상 촬영되고 있다.
성공이다. 아름답다. 아니 너무 멋지다. 미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집사람이 같이 보지 못함이 안타깝다.
6시 47분이 되면서 해는 바다가 아닌 하늘로 비행을 시작했다.
해를 받아들인 하늘이 더더욱 휘황찬란해 진다.
오, 작품이다. 명품이다.
하늘에 점점이 떠 있는 황금빛 찬란한 새털구름은 오늘 이 순간 !
나에게만 선사하는 하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바다에서 일출사진은 하늘님이 허용하지 않으면 흔히 잡을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면 아예 촬영자체가 안되지만 맑아도 구름이 없으면 무미건조해 진다. 가장 좋은 상황은 뭉게구름보다 약간의 새털구름이 있어야 휘황찬란한 아름다운 하늘을 연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하늘님 감사 합니다.
[08:00-08:30] 아침 식사
미역국에 은갈치 구이 백반 식사다. 5,000원짜리지만 정갈하고 먹을 만하다.
식대는 개별 추가 부담. 오늘도 풍랑주의보가 유효하여 여객선이 못나간단다.
서해 쪽에는 05:00시 부로 해제되었지만 남해안은 아직 바람이 불고 있어 오후에나 나갈지 말지 하단다. 파고가 2-3미터면 운항이 되지만 2-4미터면 안전상 출항을 금하고 있단다.
하여 별도 연락이 있기까지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자유 시간이란다.
오늘이고 내일이고 귀가하여 특별한 일정이 잡힌 사람들은 안달이 나겠지만 화려한 백수신분이니 나로서는 걱정할 일이 아니네…….
거문도로 휴양 온 셈 치면 된다. 아니 휴양 온 것이다.
[08:30-09:30] 등산 시작하여 등산 중 여객선 출항 연락받고 하산함.
어제 볼 것은 다 보았고 하여 우리내외는 서도 정상 봉우리에 등산로가 좋다하여 오전에 등산하기로 마음먹고 출발함.
반시간 정도 걸었을 까 , 1/3지점은 되었을 까, 거문도 중학교 교정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풍랑주의보가 해제되어 여객선이 정시에 출항할 예정이니 여행객은 개별행동을 중지하고 짐을 챙겨가지고 10:00시까지 여객선 터미널로 집결하란다. “
[10:00-10:50] 출항 대기 및 수속
엊저녁 석식과 금일 조식 비는 아침에 계산되었고 1박 더한 민박 비를 수금하고 정산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상 싶은데 …….
<배웅 나온 갈매기>
가이드는 보이지 않고 여객선 터미널에서 앉아 대기하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다.
결국 한 여행객이 가이드에게 화를 낸다.
한마디로 10:30에 집결해도 되는 것을 왜 미리 집결시켜 다리 아프고 지루하게 만드느냐고
항의 해 보지만 가이드는 별로 미안해하지도 않고 차기여행에 고려하겠다는 소리도 않는다.
[11:00] 거문도 항 출항
[12:10] 녹동 항 도착
식당에 가면 화장실이 협소하니 필이 화장실을 보라하여 모두가 볼일을 마치고 올 때 좌석을 그대로 잡는다. 버스에 타고 나니 집에 도착한 듯 걱정이 말끔히 걷힌다.
[12:50-13:30] 고흥 국도 주변의 기사 식당에서 삼겹살 중식
여행사와 계약한 단골 식당인 듯 건물외벽은 아주 허름한데 안으로 들어서니 규모만큼은 상당하다. 하긴 12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으니 …….
시골길 기사식당이라면 30명 이내의 규모일진데 …….
공장지역도 아니고 휴게소도 아닌데 …….어찌되건 삼겹살과 반찬이 깔끔해 보인다.
4명씩 한 테이블에 앉으라고 가이드가 노래를 부르는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내외 옆에는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먹다 보면 오겠지 했는데 다 먹도록 오지 않았다.
하여 삼겹살을 나 혼자서 독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6:40-17:40]흑삼 엑기스 매장 쇼핑.
이미 여러 번 들렸던 , 3년 전에 한번 구입(2개월분 66만원)한 바 있어 교대로 끊질 게 구입을 권하는 강매를 사절하고 나옴. 우리 버스 35명중 6명이 구입하였단다.
[18:15-19:20] 광동제약 키토 올리고 진 원액 매장 쇼핑
처음 들리는 매장이고 키토 올리고 진 원액이 혈관속의 콜레스톨를 제게 해 주기에 심근경색이나 뇌경색에 좋고 장운동을 촉진하여 변비에 효과가 탁월하며 노인들 전립선 비대증을 예방할 수 있으며 집사람 무름 관절염과 잠 못 자는 병에도 효과가 있다하여 2인분 2개월분을 66만원 10개월 월부로 카드 결재 함.
[22:10~] 잠실 도착 하차 지하철 탑승
[23:50] 안산 집에 도착
집에 도착하여
눈감으니 백도 절경이 눈에 가득하다.
하늘의 뜻으로 하루 더 묵으면서 여유롭게 백도, 고도, 서도의 볼 것 다 보고 온 여행이다.
정말 운 좋게 다녀온 여행 같다.
외로운 고도라 그런지 신선한 공기와 파란 물빛 그리고 마을 구석구석 모두 공원 같이
깨끗하다.
관광지라 주민들이 협동하여 마을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듯하다.
지난 날 중국의 계림, 무릉도원, 황산, 석림, 구채구. 태행산등을 여행하며 신께서 어찌 한국에는 그런 절경을 하사하지 않음을 아쉬워했었는데 이제 백도를 보고 나니 비록 규모는 작아도 한국에도 비경이 있음을 자긍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나 추천할 여행코스는 아닌 듯하다.
서울에서 거문도까지 9시간을 이동하고 백도까지 30여분 더 배를 탄 후 40여분 정도 스쳐 지나가듯 짧은 선상 관광이 너무 아쉽다.
욕심 같으면 한 바퀴 더 돌던가 아니면 천천히 배를 좀 세워 놓고 골고루 흘터 볼 수 있는, 사진을 여유롭게 찍을 수 있는 시간(2시간정도) 배정이 되었으면 싶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내가 3월1일 상품을 예약했었다면 풍랑주의보 발령으로 백도 유람선이 못 떠 거문도에서 잠만 자고 돌아왔단다.
그리고 해상의 풍랑 주의보가 발령되면 며칠이고 발이 묶일 수도 있기에 여유자금과 내복 등을 준비해야 하며 시간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쉽게 잡을 코스가 아닌 듯하다.
또한 귀경길에 피곤한 사람 토산품 매장에 두 번씩이나 감금하고 강매를 당하는 기분도 여행기분을 망치는 일정이다.
기본 경비 받을 것 다 받고 순수하게 여행하였으면 싶은데 여행사에서는 상품단가를 덤핑 수준으로 고객을 유치해 놓고 적자보존이라며 매장에 들려 매상에 따른 경비보전에 치중하는 듯싶어 씁쓸하다.
1박2일 동안 소요 경비는 기본요금(98,000원)에 다 포함되어있다. 이는 계산이 안 되는 저렴한 요금이다. 2인 1일 민박 요금이 1.5만원이고 백반 한 끼 식사비가 5,000원에 5끼면 25,000원 서울에서 고흥 녹동 항 까지 고속버스 왕복(22,300*2=45,000원 잡고)요금과 녹동 항에서 거문도까지 여객선 편도 운임24,000원이면 왕복 48,000원이고 거문도에서 백도 유람선 요금 29,000원이면 대충 잡아도 16여만 원 돈인데 반값이다.
단체 여행이니 선박운임에 디씨가 있겠지만 적자를 보전한다는 핑계로 토산품 매장의 강매는 필연적으로 시정되어야 할 문제이다.
또한 석식 시 다금 바리 회를 1인당 25,000원(돔회는 1인당 20,000원)씩에 현지 옵션 식사를 한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백반이라는데 동행자 대부분이 회를 선택하는데 회를 안 좋아 한다고는 하드래도 별석에서 백반 취식하기도 어려울 듯하다.
총 경비는 2인 1박 일 일정에 기본 98,000원×2 +다금바리회 50,000원 =250,000원이고
하루 더 묵으면서 중식 회 값 5만원. 백반 2끼 2만원, 방값 3만원 10만원 추가 되고 소주 2병(6,000원), 콜택시 10,000원 합하면 모두 37만 여원을 지출 한 셈이다.
기념품 (비디오 CD : 10,000원)과 토산품(키토올리고 진 원액 :65만원) 구입금액은 제외하고 .........
첨부 자료 1 : 거문도(야후 백과사전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에 속한 섬.
고흥반도에서 남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다. 고도(古島:0.83㎢)·동도(東島:3.4㎢)·서도(西島:7.77㎢)의 3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위에 소삼부도와 대삼부도가 있다. 고도만을 거문도라 부르기도 한다.
최고봉인 동도의 망향산(247m)을 비롯하여, 서도의 음달산(237m)·수월산(128m) 등 비교적 급경사의 기복이 심한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해안은 외탄갑·다렝이끝·취끝·대매지끝 등 작은 돌출부가 많고 드나듦이 심하다. 대부분 암석해안으로 동도의 남쪽 해안은 높은 해식애가 이루어져 있다. 기후는 대체로 온난하며 비가 많다. 농작물로 고구마·감자·마늘·보리·콩·유채·참깨·양파 등이 생산되지만, 자급하기에도 부족하다. 연안 일대에서는 삼치·멸치·장어·도미·갈치 등이 주로 잡히며, 자연산 굴·미역·조개류 등의 채취와 함께 최근에는 미역양식업이 시도되고 있다. 취락은 동도 서쪽 해안가인 유촌·죽촌마을, 서도의 북쪽 서도리·남쪽 덕촌리, 고도 서쪽 해안가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3섬으로 둘러싸인 도내해(島內海)는 파도가 잔잔하고 수심이 깊으며, 거문항이 있는 고도 일대의 수역은 근해·원양 어업의 전진기지로, 서도는 연안항로의 기항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360여 년 전 추씨(秋氏)가 처음 거주했다고 전해지며, 매년 음력 섣달 그믐날에는 추씨 할머니를 수호신으로 모시는 제사를 올린다. 여수-거문도 간을 운행하는 정기여객선이 하루에 5번 왕래하므로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하다. 서도에는 동백나무가 섬을 뒤덮고 있으며, 섬 일대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하여 관광객유치를 위한 관광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지금까지 주민들 사이에서 구전되어 전해진 〈거문도 뱃노래〉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문도라 부르기 전에는 삼도·삼산도·거마도라고도 불렀다. 1885년(고종 22) 영국의 동양함대가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거문도사건으로 유명하며, 이때에 해밀턴 항구라고 불렸다.(→ 색인 : 거문도사건)거문도라는 이름은 정여창(丁汝昌)이 섬 내에 학문에 능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하여 붙여졌다. 서도의 남단과 북단에 등대가 있으며, 남단의 거문도 등대는 1904년에 설치된 우리나라 제1의 등대로 촉광(燭光)이 약 40km에 이른다. 면적 12㎢, 해안선 길이 4.3km, 인구 796, 가구 280(2003).
첨부 자료 2 : 백도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거문리에 속한 섬.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약 28km 떨어져 있다. 크게 상백도군과 하백도군으로 나누어져 있다. 지적도에 나타나 있는 섬은 모두 31개이고, 때때로 물에 잠기는 바위섬까지 합하면 99개로 백 개가 조금 안 되어 일백 백(百) 자에서 한 획을 빼고 흰 백(白) 자를 붙였다고 한다.
최고높이는 상백도의 110m 지점이며, 대부분의 섬들이 암석으로 된 바위섬이다. 자연의 신비함을 간직한 기암절벽과 괴목이 곳곳에 있으며, 상백도에는 나루섬·노적섬·매바위·병풍바위·형제바위·오리섬·탕근대 등이, 하백도에는 각시바위·궁성바위·서방바위 등의 바위섬이 많다. 또한 바다직박구리·흑비둘기·휘파람새 등 희귀한 조류가 서식하고 까마귀쪽나무·당채송화·동백나무·보리똥나무·풍란·쇠뜨기 등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연근해에서 조기·갈치·고등어·농어·복어·참치·도미·민어 등이 많이 잡혀 거문도 어장의 중심을 이룬다. 1979년 섬 일대가 명승 제7호로 지정되었으며, 지금은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섬 전체의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남국적인 정서가 짙어 최근 관광지로서 인기가 있다. 거문도와 백도 간에 유람선이 정기적으로 운항된다. 1978년 종합 학술조사가 실시된 바 있으며, 상백도에 태양열 무인등대가 설치되어 있다.
첨부 자료 3 : 거문도 사건
요약: 영국의 동양함대가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미리 봉쇄하기 위해 1885년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약 2년간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한 사건.
배경
개항 후 조선은 청·일과 구미 열강의 침략의 각축장이 되었다. 특히 1860년 러시아가 옌하이저우[沿海州]를 점거함에 따라 조선과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는 조선은 물론 극동의 새로운 위협적 존재가 되었다. 19세기 전반을 통해 해양으로 진출하려던 러시아는 세계 도처에서 영국과 대립했다. 영국이 대서양·지중해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의 팽창정책을 군사력과 외교수단을 총동원하여 저지하자, 러시아는 크림전쟁 이후 태평양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60년에서 1900년에 이르는 약 40년간 일본·조선·중국의 연안지를 대상으로 태평양 진출을 끈질기게 시도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었으므로 자연히 좋은 항만조건을 가진 조선에 대한 지배욕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러시아의 위협에 대하여 영국·청·일본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개항 전부터 청·일본은 누차 러시아의 접근을 경고해왔고,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에 나타나 있는 방아책(防俄策)은 대표적인 것이었다. 대원군 집권 이래 수차례나 수호통상을 요청해온 러시아는 조선이 구미제국에 문호를 개방하자, 반러시아적인 청나라의 중재를 통하지 않고 조선정부에 직접 외교활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1884년 6월 베이징주재 러시아 공사관의 서기관 K.I. 베베르를 조선에 파견, P.G. 묄렌도르프의 알선으로 7월 조선과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베베르의 노련한 외교활동으로 갑신정변 후 지나친 청나라의 간섭에 반발을 느껴오던 조선정부 내에 친러세력을 부식했다. 조선 내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있을 무렵인 1885년 3월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군과 러시아군이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전투를 개시하자 조선에서도 양국의 충돌위기가 예상되었다. 이때 러시아의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면서, 영국은 러시아에 대한 공격책으로 거문도점령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천연의 요항(要港)인 거문도는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양국의 해상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지의 요충지로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1885년 2월 29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長奇] 항을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섬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병영을 건설했으며, 항내에는 수뢰까지 부설했다. 거문도 주둔군의 숫자는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증가했고, 군함의 숫자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했다.
외교교섭
영국 정부는 3월 3일 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고했으나, 영국의 정식통고가 통리아문에 접수된 때는 거문도 점거 1개월 후인 4월 6일이었다. 영국측이 조선에 통고한 공식적인 이유는 "예측할 수 없는 변(變)을 막고자 잠시 거수(居守)케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구실에 불과했고 오히려 러시아의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책이었다.
점령초 청은 러시아에 대한 방비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국제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목적으로 영국의 거문도 점령을 은근히 인정했다. 영국은 당초 청나라와 교섭하여 거문도를 조차할 계획이었으므로, 3월 14일에 거문도협정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이 이 사건으로 러시아와 일본이 각각 조선 내의 영토점령을 요구하고 나설 경우 국제분쟁으로 커질 것을 우려해 영국의 거문도 조차에 반대하면서 조선정부에 통고했다. 지금까지 애매한 태도로 있던 조선정부는 우선 거문도 현지의 실정을 탐사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유사당상(有司堂上) 엄세영(嚴世永)과 외교협판 묄렌도르프는 4월 3일 정여창과 함께 거문도에 도착, 점령지 함대사령관에게 점령이유를 힐책했다. 그리고 이들은 곧바로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측과 외교교섭을 추진했다.
4월 6일 영국측의 점령통고문이 정식으로 전해지자 다음날 통리아문은 강력한 항의를 주청 영국공사에 타전하는 동시에 공함을 발송하고 청·일·독·미의 각 공관에도 영국의 불법점령 사실을 연락하는 한편 영국이 조선정부의 항의에 불응하는 경우 조정에서 취해야 할 방책과 각국 공관의 협력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각국 대표는 본국 정부로부터 훈령을 받지 못하여 명확한 답변을 할 수 없으나, 우선 조선과 영국 두 나라가 원만한 타협을 이루길 바랄 뿐이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결국 조선정부는 사건해결에 주체적인 구실을 담당하지 못하고 청·영국·러시아 3국의 상호교섭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편 영국도 서울주재 영국총영사 W.G. 에스턴을 통하여 협상을 제의했다. 즉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파운드 이내로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됨과 동시에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관한 영국·러시아 간의 긴장이 완화되고, 8월 2일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자 영국은 거문도점령의 명분이 없어졌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무성의 정치적 타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해 8월 28일과 9월 2일에 열린 회담으로 청의 이홍장과 주청 러시아 공사 라디젠스키는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조회장(照會章)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이에 청나라는 10월 5일 영국 공사관에 러시아측의 보증을 전달하고 영국의 거문도에서의 철수를 촉구했다. 주청 영국 공사 웰샴은 11월 24일 청국정부에, 12월 23일 조선정부에 철수를 통고했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이었으며, 22개월간 점거한 뒤 철수한 셈이었다.
의의
거문도 사건은 당시 세계 도처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라는 제국주의 상호간의 정치적 대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조선정부는 이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극도의 허약성을 드러냄으로써 이후 서구열강의 문호개방의 요구와 더불어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사건해결에 중개역할을 했던 청나라는 이후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내세우고 내정간섭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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