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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및 기행문

대만/화련.지우펀,야류 해상공원 3박4일 관광 기행문

대만/화련,지우펀,야류해상공원: 3박 4일(KE) 관광

2010년. 10월.25일. 월요일 맑음 (오전 대만 입국, 오후 대북 시 충렬사, 국립박물관, 용산사, 야시장 관광)

05.:00 기상

05:30 조식

05:50 집 나서며 콜택시 호출

06:00 콜택시 집앞 도착/탑승

06:10 안산 버스터미널 도착/하차(5,500원)

06:05 공항 직행 버스 매표(22,000원)

06:15 버스 탑승.

28인승 우등버스 설비로 안락한 좌석. 편안한 탑승.

06:20 버스 출발

버스터미널 - 시흥시 정왕동 경유 - 정왕 IC진입- 연수분기점-인천대교- 영종도 공항 도착

28인승이지만 만차. 봄 여행 시는 거의 빈차수준인데 여행시즌 실감남.

07:20 인천공항 도착

미팅시간까지 육참회 미팅장소(3층 A코너 23번 테이블장소)안내 및 도착시간 확인 전화

(※ 손 사장 내외5분전까지 도착치 않아 전화하니 A코너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었음)

08:00- 09:00 화물 탑승 및 출국 수속

09:00- 10:00 면세품 매장 윈도쇼핑

DSLR카메라 면세가격을 확인코자 매장 전부 돌아보았으나 매장이 없음 : 봄 여행 시에는 있었음

10:30 KE691 탑승(54C 석)

일행 중 손사장 부인이 창문 쪽 F석에 앉았으나 역광 좌석이고 모처럼 하는 여행인지라 좌석 교환요청을

않음.

10:45 이륙/기내 식사/ 운해 촬영.

기내 식사는 생선 요리와 돈육볶음 두 가지인데 나는 돈육볶음을 선택하였고 고기나 밥의 양이 소식인 내 수준에서도 너무 적다. 맥주 두 잔을 마시니 배가 찬 듯하다. 식후 남자 스튜어디스에게 요청 기내 사진 촬영 가능 장소를 물었더니 맨 뒤 칸 화장실 앞에 있다 한다. 한국에서 대만으로 남행하니 우측은 역광 상황이고 좌측창이 적합한데 화장실 앞에 가 보니 무릎 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 직경 15Cm정도의 창구가 있다. 용도가 무엇인지 분명 카메라 촬영 구는 아닐 것이고 뒤 칸의 일광 조명창이 아닐까 싶다. 장소가 좁고 낮아서 쪼그려 앉을 수도 무릎 꿇고 허리를 펴서 설수도 없어 허리를 꾸부려 높이를 맞춰야 촬영이 가능한 자세인데 이도 화장실 출입자가 있을 때는 문을 여 닫는데 지장이 되어 피해 주워야 한다. 창구가 좁아 결국 창구에서 보이는 구름을 수평각도에서만 촬영을 해야 한다. 날씨 탓인지 바다위에 구름이 두둥실 떠있는
구름사진을 잡고 싶었으나 그냥 눈밭 같은 구름 사진만 담아야 했다.

이후 타이베이 시간

12:07 대북시 국제공항 착륙

(한국시간 13:07분, 비행시간 2시간 20분, 시차 1시간 )

12:16 -13:50 입국 수속

승객들이 많지 않은 듯 검색대 2곳에서 여권 검사 후 가방 찾아 나오기 까지 순조롭다.

13:50-14:10 대북 시내 진입/ 시가지 전경 및 가이드 소개

인천 공항 미팅 시 KE 연합이라고 일행이 31명이라 했는데 대북공항에 나려 현지 가이드를 만나니 노랑 풍선 외 3개 여행사 19명만 한 버스에 탑승 동행한다. 12명은 다른 가이드 안내를 받는 모양이다.

공기는 조금 탁하고 하늘은 잔득 찌푸려 있다. 빗방울이 날린다. 땅이 좁을 듯한데 산이라 그런지 도로 주변 , 주택가 지역이라도 빈 땅이 많아 여유로워 보인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는 김현녀!
한국 교포이고 음성이 상냥스럽다. 나이가 들었다 싶더니 26년 전 대만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는데 30대 후반 같다.

시가지 건물은 5층 건물이 주종을 이루고 띄엄띄엄 20여 층 고층 아파트도 보인다.

국토가 산이 많아 그런지 계곡 계곡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교량 식으로 잘 건설되어 있다.

대만의 영토는 남한의 1/3정도로 경상남북도 와 제주도 정도의 크기이며 인구는 2천3백만으로 한국의 반 정도 되니 인구밀도는 한국의 배도 넘는 단다(대만 세부 정보 : 첨부 1참조).
하여 땅값, 집값은 무지무지 비싸서 대북시에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단 부자로 봐야 한단다.

대북시의 경우 평당 1억5천정도하여 보통서민은 냄새도 못맡고 땅이 경매에 나오면 건설업자들이 낙찰하여 아파트를 건축 분양하기에 아파트 분양가도 서민용은 평당 2천만원 정도 가지만 고급형은 1억원을 호가하기에 현재 집이 없는 서민은 죽을때 까지 모아도 집을 장만하지 못하고 평생 월세로 살아야 한단다.
다행이 보증금은 싸서 월세금이 30만원이면 90만원정도의 보증이면 월세를 얻을 수 있다 한다.

대만의 경제 인구 분포도가 옛날에는 피라미트 형이었는데 근세 항아리 형에서 현재는 "L"자 형으로 극소수가 부의 전부를 차지하고 국민대다수가 서민이란다.

공항에서 대북 시내로 진입하는데 도시 고속도로 주변 건너 산 중턱에 우뚝 선 붉은 빛깔의 한옥 빌딩이 보이는데 장개석 소유였던 원산(圓山)호텔이라 한다. 한옥 건물로는 세게 최고 호텔이라 한다.
장개석이 죽은 후 지금은 국민당에서 운용한다 함.

원산호텔이라 하니 송회장이 북한의 원산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나 싶어 왜 원산 호텔이냐고 질문하니 호텔이 자리한 산 이름이 원산이기에 원산 호텔이라 한단다.

5층 다세대 주택들은 대부분 개별 소유이지만 5층에 사는 사람은 옥상에 대한 개별 사용권이 인정되어 조립식 건물을 올려 본건물의 1/2값에 임대를 놓는 다고 한다. 이곳을 임대해 사는 사람은 한여름 스라브 지붕의 열로 반쯤 익으며 산다고 한다.

신축건물이 아닌 대부분의 건물들은 우중충해 보인다.

가이드말로는 대만사람들은 건물이던 얼굴이던 치장에 신경을 쓰지 않는단다.

이곳이 열대지방이고 태평양 연안 작은 섬이라 비가 많고 항상 습해 건물 벽이 마를 날이 없어 타일 메지 부분에 곰팡이 내지 부식작용으로 검게 변하게 되는데 신축 후 처음에는 몇 차려 도색을 하지만 하나 마나 마찬가지라 끝내는 방치하게 된단다.

그래도 실내에는 24시간 제습기를 가동시켜 건조하게 유지하고 전자제품을 비롯한 실내 장식에 많은 공을 들여 화려하게 장식해 놓고 산다고 한다.

특히 이곳의 기온은 여름에 40도까지 육박하기에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에어컨 없이는 살수 없기에 집집마다 에어컨은 다 있다고 한다.

대만사람들은 자가용 승용차를 가지고 있어도 주자와 교통체증을 피해 오토바이를 즐겨 타며 항상 헬 멋을 착용하지만 비를 맞던 않든 머리를 1주일에 한번 감을 정도로 몸치장에 신경을 안 쓴단다.

대만 국민이 2천만인데 오토바이도 1천만대가 넘으며 오토바이 크기에 관계없이 최대 5명이 타도 법적으로는 용인되지만 경찰이 보면 너무 많이 타면 사고위험이 있으니 자제해 달라고 부탁정도 한단다.

출퇴근 시 오토바이 행렬은 마치 개미떼가 이동하는 것 같다 한다.

우리가 이동하는 동안 4명이 탑승한 오토바이도 보인다.

5명 탑승 요령은 운전수 앞뒤에 아이 하나씩 앉히고 맨 뒤에 엄마가 애기 하나를 엎고 탄다나........

배속에 아기가 있으면 6명이 탑승도 가능하다고 농담을 해 본다.

상점 앞 인도에는 거의 전 구간 오토바이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음도 보인다.

14:10- 14:30 장수 한국요리 식당 입장 중식

우리 교포가 운용하는 식당이라 하는데 실내 규모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실내조명도 조금은 어둡고 주방 쪽과 가족석 특실 입구에 “주류반입 금지“란 경고문이 한글로 워드 하여 붙어있다.

가이드가 사전 경고를 했기에 버스 내 여행 가방에 소주를 놓아둔 채 반주는 참아야 했다.

대만 술을 한 병 사 마시면 지참한 한국 술도 마실 수는 있다. 허나 대만 술 한 병에 2만원 주고 마시기는 바가지가 심하다. 고량주 한 병이니 그리 비싼 편은 아니겠지만 소주 값으로 환산하면 국내 식당 가격이라도 7병 값이다.

술값도 한국이 싸구나!!!!!!

중식은 불고기와 김치찌개에 밑반찬 과 밥 !

요리형태는 한식인데 입맛에 착 붙지는 않는다.

이곳 식당들은 아침 정심 저녁 식사 시간에만 영업(중식은 11:30-14:00 ,석식은 17:00-19:00 )을 하고 중간에는 문을 닫고 요리 준비를 하기에 한국처럼 식당에 마냥 앉아 놀고 있을 수 가 없단다.

14:50- 15:30 충렬사 관광

충렬사는 대북 시 북안로 와 명수로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로는 청산이, 인근에는 기룡강이 흐른다.
이곳은 1958년 중국과의 항전(금문도 전투)시기에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33인의 영령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곳이다. 충렬사의 건축 외관에는 북경의 고궁 태화 전을 모방 하였으다 하며 아름다운 건축물로 중화민국58년에 완공 되었다. 현재까지도 국내외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리는 명소로 특히 매 정시마다 위병들의 교대 공연은 많은 관광객에게 기념사진과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 있다고 한다.

충렬사는 한국의 국립 현충원 격이지만 부속 건물들로 보아 동작동 시설규모의 1/5도 안 되는 듯 하고 위패만 안치하는 듯 유골 안장 구역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의 설명대로 초병은 하얀 제복에 밀랍 인형 같은 자세로 근무한다. 눈 깜박거림 없이 눈동자까지 고정하고 부동자세로 근무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 구조로 이해되지 않을 만큼 대단스럽다.

군대 생활을 통해 아는 초병 교대식을 연상했으나 관광객에게 보이기 위한 의식화 된 교대식이고 비가 오면 약식으로 진행된다지만 운 좋게 우리일행은 약간의 비가 내렸지만 정식 교대식을 관람하였다.

15:45 - 17:40 국립 고궁 박물관

국립고궁박물관은 민국14년 정식적으로 완성 되었으며,주요 수집품으로는 청나라 자금성의 진귀한 보배와 ,송, 원 ,명, 청나라 시대의 유물들이 수집되어있다. 서화, 옥기(玉器), 도자기, 조각 등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황궁 귀족들만이 갖고 있는 유물들인데,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하면서 자금성에 있던 유물(19만여점)중 이동이 가능한 것으로 1/3정도를 엄선하여 대만으로 건너오게 되었단다.

모택동 공산당 당수가 이를 알고 배를 격침하려 했었으나 이는 중국유물을 수장하는 것이기에 대만으로 건너간들 언제인가는 도로 중국 것이 될 것이라며 그냥 보내 주었다 한다.

사상과 국적을 떠나 진정 조국을 위하는 애국충정인가 싶다.

초기 박물관은 교통이 편리하지 못해 민국45년에 타이베이 외곽 쌍계지역에 새로 건축하며 이를 중산 박물관으로 명명했다. 국부 손 중산(손문)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타이베이로 확장 이전하여 지금의 규모인데. 건축형태는 매화 형으로 4층 건물에 5개의 큰 홀과 20여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전시품은 특색에 따라 영구적인 전시와 테마적 한시적 전시로 구분되며,
전시장에는 현재 5천내지 7천여점이 주기적으로 교환 전시되기에 지하 창고에 보관중인 전 유물은 평생 봐도 다 못본다 한다.

본당 내로 입장하니 통로에는 인산인해 일행을 놓칠까 염려스러웠지만 19명 일행들 잘들 따라 다닌다.

방법은 있었다. 가이드는 무선 리시버를 빌려와 나눠주고 가이드는 마이크로 설명하면 우리들은 리시버로 청취하니 관중이 아무리 복잡해도 관광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최근 이곳 유물과 비슷한 골동품이 홍콩 경매장에서 국제 입찰로 낙찰된 금액으로 환산할 때 이곳에 보관된 유물을 돈으로 계산하면 대만 2000만 국민이 평생 먹고 살만큼의 대단한 액수라 한다.

2.3층 전시실에서는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있어 사진을 하나도 촬영치 못함.

이곳 창고에는 약 60여 만점의 유물이 보관되어있고 전시장에는 영구적으로 전시되는 것도 있지만 소품들은 주기적으로 교환하며 전시되는데 평생 봐도 다 볼 수 없다 한다.

전시장 통로가 복잡하여 전시실을 순차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아니고 가이드가 여기 저기 건너뛰며 한가한 곳으로 안내를 해 줘서 관람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중국이나 대만이나 박물관하면 대부분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많다. 하여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데 청 황실의 유물들을 보니 황제가 가지고 놀았다는 장난감 같은 유물들에서는 왠지 씁쓸하다.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 황제의 집정 눈을 피해보겠다고 간신배들이 모사했을 법 한 예물들이 대부분이다.

접었다 폈다 하는 수많은 소형 조각품들이 모두 황제의 장난감인데 아이도 아닌 황제가 계집과 장남 감으로 소일한다면 국정은 어찌 되었을 까 ??????

전시실 유물 중 인기 1,2,3위란 것이 주변국내지 신하들이 황제에게 받친 아부 성 선물이기에 진정한 황제라면 이런 아부선물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데 세상이 그러하지 않으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기도 한다.

3위 유물은 올리브 씨를 엄지손톱 정도의 소형 선박으로 조각하고 그 실내에 8명의 선원까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며 돋보기로 보라 하는데 내 노안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2위는 높이 1.5미터 정도의 체인 형 옥돌 조각 벽걸이 장식품인데 고리 중간에 직경 15Cm 정도의 옥구슬이 매달려 있고 이 구슬 속에 17 겹의 구슬이 또 들어있고 모두가 회전이 된단다. 매 구슬 표면에는 용상을 비롯한 그림들이
조각이 되어있고 내부의 구슬을 보기위해 사방팔방으로 직경 3센티 정도의 구명이 있다. 구슬 하단에는 역시 옥으로 된 장식용 날개 형 꼬리가 있는데 이것이 모두 한 개의 옥돌로 가공된 것이고 8개의 구멍 속으로 조각용 칼을 휘여서 갈 가내며 17겹의 구슬을 가공하였다 하며 3대를 이어 60여 년 동안 가공된 것이라는데 어찌 가공 조각된 것인지 신기할 뿐이다.

1위는 실제 배추모양 크기의 옥돌조각인데 변방 국왕이 당 황제에게 딸을 시집보내며 선물한 것이라 고 하는데 사랑과 집안의 번성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다 한다.

옥돌 배추 조각에는 메뚜기 두 마리가 배추를 뜯어 먹고 있는 장면인데 가이드의 말로는 암 메뚜기의 꾸린 자세가 수놈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자세로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 하여 많은 자손을 두어 풍족한 가정을 이루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라나?????

내가 전에 어느 관광지(TV 연속극인지?)에서 듣기로는 당 황실에서 변방의 군소국 왕들이 당나라에 대적하지 못하게 하기위해 그들의 딸들을 인질 겸 후실로 강제로 끌어와 혼인을 치렀는데 이 한을 풀기 위해 사위에게 백년해로 하라는 의미의 선물이라고 둘러대며 이 배추조각을 선물을 했으나 실제의 의미는 메뚜기가 배추 잎을 갉아먹듯 청 황실을 야금야금 다 갉아 먹은 후 자기민족의 나라를 만들라는 의미였다고 들었는데 .....

수많은 유물의 내역을 모두 서술할 수 없어 예서 마감하고

4층은 출입제한이지만 올라가 보니 수석 전시실인 듯 문 안에 직원 모습이 보이고 문이 닫혀 있어 그냥 돌아섬.

18:09 - 18:31 용산사 관광

용산사는 청 건륭3년에 지어졌으며, 사찰에는 주신을 푸젠 성 진강현 안해향 용산사의 관세음보살과 함께 모시고 있으며, 삼진사 합원의 전형적인 전통 건물로 앞에는 용의 기둥 한 쌍과,중간에는 용 기둥 네 쌍이 정교하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다. 사찰의 지붕은 오리고 붙이는 전통의 예술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색채의 유리와 자석으로 장식 되었으며,용, 봉황, 기린 등의 길한 동물로 더욱 특색을 줬다.

현재의 건물은 대동아 전쟁시 폭격으로 소실되어 재 건축된 것이고 폭격을 맞을 때부처님 주변에 숨어있던 피난민들은 무사 하였는데이는 부처님의 은덕때문이라고 소문이 나며 전국적으로 유명해 젔다 한다.

용산사는 다른 사찰과 달리 전각에는 불상 (관세음보살 )을 모시고 후각에는 신(12신: 배우자 만나게 해주는 신, 아들 낳게 해주는 신, 돈 벌게 해주는 신. 대학 입학시켜 주는 신. 등 등)을 모시고 사자의 위패까지 안치하고 있어 주야로 많은 신도들이 왕림하여 복을 빌고 있어 항시 성황을 이룬다 한다.

또한 용산사에서는 기도하는데 공양에 제한이 없다 . 돈이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없는 사람을 없는대로 공양(돈, 쌀, 과일등)을 하면 되고아주 가난한사람은 공양후집에 도로가져가 생활에 보태쓸 수도 있다 한다.
하여 절에서는 신도들의 특별 헌금과 사망자의 극랑왕생을 비는 인등 값을 받아 절을 관리 한다 한다.

우중이고 야간이라 사진이 선명치 못해 아쉽다.

18:32-18:42 야시장 관광

화시지 야시장은 용산사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시민시장과 흡사하다. 수많은 상품들이 판매되고 있고, 국내외 관광객들이 가장 즐겨 찾는 명소 중에 하나 라고 한다. 야시장 입구는 중국 건축양식으로, 붉은색 궁등을 걸어놓아 무척 특색이 있다. 먹을거리 위주의 시장으로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가지가지의 재료로 만든 음식들이 즐비하다. 특히 뱀, 자라, 닭 똥구멍, 오리 대가리 구이 혐오식품도 팔고 있어 먹을거리의 특색을 한껏 높여주며, 밤이 되면 뱀을 잡거나 뱀 싸움을 보여주는 공연을 하기도 한단다. 시간이 빨라 그런지 길거리나 식당/상점 내부가 한산해 보인다. 우리일행도 쇼핑에 별 관심이 없어 조기 철수 버스에 오른다.

20:00- 20:30 몽골리언 바비큐 석식

각종 야채 + 고기류 + 10여 가지 조미료를 한 수픈 씩 담아다가 조리사 앞에 순번대로 놓으면 철판위에 쏟아놓고 긴 나무젓가락으로 저으며 익혀서 본 접시에 담아 준다.

젓가락으로 휘 저으며 익히는데 소고기가 제대로 익을 것인지 염려스럽기도 하지만 조리사가 다 익었다고 판단될 때 배식할 것으로 생각하고 테이블에 돌아와 취식해 보니 익은 듯 하고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나는 다른 음식이나 과일은 가져 오지도 않고 바비큐 식사만 했다.

바비큐 식사를 먹는 동안 가이드는 우리 테이블에서 김치찌개를 만들어 주고 나중에 라면을 가져다 넣으라 했는데 이도 나는 국물만 마셨다. 중식을 많이 먹은 것도 아니고 음식이 입에 역한 것도 아닌데 별로 먹고 싶지 않아서 일뿐이다.

우리 일행8명에 여자 친구사이 두 분 10인용 테이블을 배정해주며 끝까지 같이 식사 하라 했고 일행들은 처음 대하는 음식들인데도 지참해간 한국 반찬 없이도 거부감 없이 잘들 먹는다.

20:40- 21:00 호텔 도착/ 907호 투숙/ 샤워 후

우리 일행 4개 룸(907,8,9,910) 순번대로 배정해 줌

최근 완공되어 시설 모두 깨끗함.

호텔에서도 에어컨은 제습기능 때문에 24시간 돌아가니 잘 때 추우면 끄고 자라해서 방에 들면서 아예 꺼버림.

21:50 송회장 룸에서 손사장 생일 축하 겸 소주 파티

송회장 룸으로 모이라는 전화를 받고 들어가니 송회장이 초코파이를 티 테이블에 모아놓고 축하용 초를 꼽는다.

내용인즉 오늘이 손사장 67회 생일 이란다. 하여 준비를 해 왔단다. 생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러려니 하고 박수만 쳤지만 몇 년 전 베트남 여행 시에도 생일이라고 초코파이 깔아놓고 해피 버스데 이를 합창했는데 어찌 이렇게 일치할 수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우연이지만 이번 여행 일정을 기차게 잘 잡은 셈이다.

준비해간 안주 와 소주로 해외에서 멋진 생일 파티를 한 셈이다.

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흐리고 가끔 비(일정: 오전 기차로 화련 이동 오후 대리석 공장 견학. 대노각 협곡 관광)

03:00 새벽 복통이 오더니 이어 설사가 난다.

밤에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고 안주에서 문제 될 리고 없는데 아무래도 석식에 몽고리안 바비큐에서 문제가 발생한 듯싶다. 고기가 덜 익었거나 이름도 모르는 식용유를 너무 많이 넣은 때문이 아닌지…….

06:00 모닝콜

06:30-06:50 호텔 뷔페 조식

새벽에 복통과 설시로 정상적인 식사를 못 할 것 같아 볶은 밥이 있지만 기름진 음식은 피할 생각으로 계란 프라이 2개. 삶은 계란 1개에 흰죽(집사람이 가져와 권함) 과 후레이크(집사람은 우유를 먹으면 안 된다고 반대함) 만 갖다가 간단히 먹음.

룸에 올라와 양치하고 누우니 또 설사가 난다. 이래가지고 여행을 어찌 해야 할 지 걱정이다.

07:30 호텔 출발

08:15 대북역 도착 탑승대기

대북 역은 상당히 복잡하단다.

남행열차와 북행열차로 크게 구분되고 노선도 다수에 출입구도 12개 일행을 놓치면 혼자남아야 하니 절대 개별행동을 말란다. 버스는 동 3문에서 나려 역으로 입장했다.

북행 대합실에서 승차를 기다리는 동아 3차 설사 .

가이드에게 설사가 난다하니 일행 중 모녀가 온 엄마가 설사약(정로환) 4알을 줘서 먹고 괜찮으면 중식 후 또 먹으라고 4알을 더 준다. 가이드는 심하면 화련 시에 가서 병원에 들려 보자 한다.

일행 중 다른 여자 한분이 환으로 된 소화제 또 줘서 먹음.

지금까지 해외 여행 시 구급약을 꼭 챙겨 왔었는데 사용 안적이 없기에 이번에는 준비를 안 해 벌을 받은 모양이다.

08:50 열차 탑승

09:00 대북역 출발

창밖에 비 옴. 전원 풍경 한산하고 건축현장은 하나도 안 보임.

열차 안에서 준비해간 소주로 무료를 달래는데 나는 구경만 해야 했다.

720미리 리터 소주를 송 회장과 손사장이 다 마시다 보니 취기가 돈 듯하다.

대화중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과 험담이 나왔는데 손사장은 노대통령과 부산상고 동문이고 열렬한 펜이란다.

송회장이 사과를 했지만 손사장이 섭섭해 하는 눈치다.

열차는 완행열차로 대북 역에서 북쪽으로 올라와 대만 최북단을 돌아서 다시 남행하여 섬 중간 지점 화련시 까지 달리는데 우측은 산이고 좌측은 해변이다. 비가 계속나려 바다의 경치도 산 경치도 안개 속이지만 간혹
보이는 장면들에는 숲만 보였지 기암괴석 절벽들은 보이지 않는다.

남한 영토의 1/3이고 전국토의 2/3가 산악이며 해발 3,000이상 산이 49개나 있다는데 분명 중국의 무릉도원이나 황산. 석림 같은 기암괴석 지역이 많을 것인데 우리나라 관광 상품에 이런 지역이 빠져있는데 어찌된 형편인지 궁금하다. 가이드에게 물을 까 생각했지만 관광 상품으로 개발이 안 된 상황이면 오지도 못하는 것이기에 자제한다. 질문을 한다 해도 대노각 협곡을 본 다음 질문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11:50 신성역(대노각) 하차

가이드가 중식 식당 수용인원에 맞춰 입장키 위해 우리 일행은 한정거장 앞서 하차 버스로 화련 시내 대리석 공장으로 이동한다. 상당수 인원이 하차 하는 가 싶었는데 개찰구를 나와 버스에 오르니 그 많던 승객들이 삽시에 없어진다.

12:10 대리석 공장 도착 공장 내 식당에서 중식

버스에 나려 바로 식당으로 안내 되었고 나는 화장실로 먼저가 4번째 설사를 하고 중식 후 정로환 4알 다시 복용 후 설사 멈춤.

12:45 중식 후 타이완 원주민 소수 민족인 아미족 쇼 민속공연 관람

중식 후 곧 이어 떠밀듯이 옆 건물인 남도 문화극장이란 소형 건물로 입장하란다.

같이 중식 한 인원만 입장하여 입장객은 40여명 내외로 보인다.

원주민 무용단이라고 하지만 공장에서 채용하여 볼거리를 만들어 운용하는 듯하고

민속춤은 조금은 미숙해 보이고 고난도의 춤이 아닌 건강댄스 리듬 같은 음악에 4박자 차차차

스텝과 비슷하다.

그들 풍속의 상징이겠지만 사냥하는 율동 . 고기 잡는 율동, 농사짓는 율동들이 보이긴 하지만

억지 연출 같은, 기초 율동 같은 감이 든다.

한국의 태권 품세로 비교한다면 3,4단 고급 품세가 아닌 8,9급 초급 품세 같다는 생각이다.

마지막에 장대 놀이 춤은 어느 민속춤인지 중국 여행에서도, 한국 방송에서도 본 춤이다.

13:40-14:20 대리석 공장 견학

대리석 공장 견학이라고 하나 실 생산라인을 견학하는 것이 아니고 공장 앞 야외 전시장에 전시된 옥 돌 가공품과 비취 가공품에 앞에서 원석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이고 이것이 끝나면서 실내 전시장으로 안내 하여 옥과 비취제품 판축 설명이다.

옥이고 비취고 가경이 너무 너무 고가라소 일반 가정집에서는 구입 내지 진열이 부담스럽다.

옥돌 병풍 하나네 3억 원이요 비취 화병하나에 3천만 원이라니 이는 우리보고 사라는 금액이 아니다.

옥이나 비취가 보석이고 고가임은 이해 하지만 일반 중산층에서 구입하여 가정에 진열하려면 몇 10만 원 정도라야 가능할 것이다. 시장에 유통되지 않은 금액은 아무 의미가 없을 듯싶다.

마지막에 소품 매장으로 안내 되여 집사람만 혈액순환에 좋다는 말에 비치 팔찌 하나를 한화 2만원에 구입하였다.

견학을 마치고 전시장을 나오면서 대작 앞에서 촬영들을 하던 중 손사장 부인은 내 카메라로 독사진을 찍은 후였는데 돌아 나오다 보니 정여사가 자기 남편 카메라에 독사진 품을 잡았으나 이여사가 합석하면서 이어 이순희 여사도 따라 붙어 사진을 찍었는데 이를 본 박여사가 자기만 빼고 찍었다고 투덜대며 힁하니 밖으로 나간다.

집사람에게 전하니 좀 있으면 풀릴 것이니 신경 쓰지 말잔다.

14:20-14:45 화련시에서 대노각 풍경구로 이동

14:48 -17:40 대노각 관광

오늘은 평일이고 관광객이 많지 않아 관광하기 좋아 다행이라 한다. 사람이 많은 주말에는 걷기도 힘든 단다. 차장에 비친 장면은 바위 협곡사이로 시멘트 빛 강물이 흐르고 수직 바위 절벽 속에 터널을 뚫어 도로를 낸 것이 특징적이다.

중국의 태행산 진입로와 비슷하다.

이도로는 동서횡단(197Km) 공로라 하는데 대만 국토의 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로서 장개석 총통의 명에 의거 그의 아들 장경국이 군인들과 감형을 전제로 죄수들을 동원해 시공했다 한다.

태노각(太魯閣)협곡-태노각 협곡은 침식 작용에 의해 대리석과 화강암의 산이 강의 흐름에 따라 깎여져 좁은 협곡을 이룬 지형으로 하늘을 찌를 듯 쏟아 있는 산 사이로 좁은 길이 이어지고, 수백 미터 아래로 흐르는 강 위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대리석 기둥이 솟아 있다. 산 속에 뚫린 작은 터널 너머로 펼쳐지는 풍경이 출렁이는 다리, 폭포의 물줄기와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약 19km의 길이로 형성 되어 있는데 협곡 초입 연자구에서 가이드는 하차하여 도보로 관광하란다. 태노각 협곡 중 가장 좁은 곳으로 서로 마주하는 단애절벽의 간격이 겨우 16m이며 수 만년의 세월동안 폭풍우와 홍수 등으로 인한 침식작용에 의해 단애가 형성된 곳이다.
연자구는 태노각 협곡의 하이라이트로 관광객은 이곳에서 내려 보행자용 길을 따라 약200m 걸으며 웅대한 태노각 협곡을 감상한다.

다시 버스로 이동하여 태노각 협곡 경치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계곡의 굴곡이 굽이굽이 이어져 "구곡동"이라 이름이 지어졌다 하는데…….꼭 아홉 계곡이라서가 아니라 "九"자는 굽이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곡동(九曲洞)에 들어서면 산지 수려함에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듯 하며, 굽어진 길에선 견고한 암석층만 보이나 계곡 가까이의 동굴에서는 협곡의 풍경을 감상 할 수 있다. 협곡 맞은 편 대리석은 진회색에서 순백색까지 여러 가지의 형상으로 보여 풍부한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변화무쌍한 자연경관과 동굴을 가로지른 도로의 거대한 공정, 구곡동은 이처럼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장관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꼬불꼬불한 터널 속의 수없이 계속되는데 협곡의 폭이 좁기로는 이곳의 협곡 가운데 첫 번째로 꼽힌다 한다.

버스가 선로라고 하는 긴 터널을 지나면서 장춘교(長春橋)라는 철교 다리가 나오고 갑자기 시계가 넓어지면서 마치 중국 영화에서 자주 봤던 것 같은 풍경들이 펼쳐진다. 산기슭에는 중국 전통 양식의 장춘사(長春祠)가 보이고, 그 아래로는 장춘폭포가 협곡으로 하얀 물보라를 지우며 굴러 떨어지고 있다. 이곳 장춘사에는
횡단공로를 건설하다 순직한 212명의영령을 모시는 사당이다.

오전에 비가 오락가락하였는데 날씨가 맑아 다행이지만 바람이 불어 모자가 날아가는 상황이 자주 발생함.

석회석 바위 절벽의 협곡이고 수량이 적은 폭포가 여러 개가 보일 뿐 기암괴석이 눈에 뜨이지 않음.

열대 지방인고 특이한 재해도 없을 것인데 수령 20년 이상 거목이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에게 질문해도 해답을 못하고 짐작인데 바위절벽에서 정상적인 성장을 못해서 일 것이란 추측이 우선이고 태풍이 자주 불러 나무가 크면 넘어져 자연 도태된다고 하는 가정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사람 접근이 불가한 절벽 숲에 넘어져 썩고 있는 나무들이 보여야 할 것 아닌가.

몇 일전 태풍으로 고산지대에 산사태가 나서 지금도 계곡에는 시멘트 같은 색깔의 석회석 물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대노각 계곡 1/4정도만을 버스로 이동하면서 관광을 한 셈이다.

대노각 고산지대에 원주민이 많이 살아 대노각하면 원주민 마을로 인식할 정도이며

이곳 원주민은 한족(漢族)이라기보다 외래 족이란다.

필리핀이나 인도 , 스페인 등 서구인들이 배로 이곳을 지나가다 태풍을 만나 배가 파손되고 난파선으로 이곳 해안에 밀려 들어와 산속에 숨어 살면서 이곳 원주민 여자들과 결혼하여 아기 낳고 살다 보니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보면 백인에 가까운 사람 , 흑인에 가까운 사람 여러 인종이 모여 산다.

근세에는 1622년 네덜란드 군대가 대만을 점령하여 40여년을 살다가 중국 명나라 장수 정성공이 점령 수복하여 이들을 추방하지만 일부는 역시 산속에 들어가 숨어 살다 오늘에 이르다 보니 이들이 원주민이 되기에 이른다.

고산지대는 가보지 않아 언급할 수 없지만 수직에 가까운 절벽에 어찌 숨어 살 수 있는지?????

농사를 짓지 못하면 그냥 원시림에서 자연산 바나나 등 과일을 채취하고 사냥을 하여 연명할 것인데…….

배움도 없이 먹고 할 일이 없어 이들은 대부분 조혼이란다. 20세전에 대부분 결혼하고 아기도 무제한으로 둔단다.
하니 고생일수 밖에 없다고 가이드는 첨언한다.

이들은 시내로 나오려 하지 않고 나오면 정부에서 상당한 배려를 하여 공부하는 것 직장까지 알선해 주는데 어려서 부터 놀고먹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한 달 일하고 월급주면 그다음 날 부터 직장을 나오지 않아 직장 관리자가 애를 먹는단다. 돈 떨어지면 다시 와서 일하겠다고 또 목을 맨단다. 하여 일당으로 지불 한단다.

버스는 장경국이 공사를 하며 어머니를 그리던 다리 자모교(慈母橋)에서 다시 하차 걸어서 다리를 건너고 다시 탑승 계곡 중간 휴게소에서 여행 종점이라며 하차 1층 매점에서 토산품 구입이나 차를 마시라고 30여분의 시간을 준다.

2층에는 관광안내 모형 지도도 있고 벽에는 명소의 사진들과 고산지 희귀 동식물 사진들도 게시되어 있다.

매장에서 이곳 원주민이 만들었다는 자수가 화려한 골프 모자의 값을 물으니 한화로 15,000원이란다.

장난삼아 깎아 달라 주문 해 보니 들은 채도 않는다. 대만은 중국과 달리 에누리가 없다 한다.

받을 금 달라하고 깎으면 적자가 나니 깎자면 노코멘트 팔 수없는 것이 당연 한 것인데…….

때가 덜 묻은 국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실한 국민이다. 한국처럼 원가를 뻥튀기 하여 고시하고 50%.90%하며 고객을 우롱하고 이에 길들은 고객은 당연히 깎자고 기를 쓰고 하니 흥정이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너무 화려하여 실제 필드에서 착용하기가 쑥스러울 것 같고 골프채는 일행들도 관심 없어 해 구입치 않음. 차 한 잔 안 마시는 일행들도 대단하다. 여행을 많이 다녀 이골이 난가 보다.

볼 것도 없는 계곡 속에 내려놓고 뭐 하자는 짓인지????? 하다못해 실낱같은 폭포가 있던가?
산 중턱에 누각이나 원주민 집이라도 보이던가? 정상에 낙락장송이라도 보이던가? 하늘을 찌르는 산속 분지 일뿐이다. 수령 5,6년 생 숲만 보일뿐이다.

17:40- 18:10 화련 시로 이동

버스에 탑승하니 비가 또 내린다. 하나님이 우리들 여행을 보호해 주는 듯 하여 감사인사를 드린다.

계곡 중심에서도 거목이 없어 다시 가이드에게 질문해 보지만 대답은 마찬가지 모른다는 것이다.

대만에 20여년을 살면서, 가이드가 직업이면서 분명 관광객이 질문을 많이 했을 덴데 일관된 대답이다.

18:10 -18:40 화련시내 식당에서 현지 석식

18:56 화련역 열차 탑승

역에 들어서는데 역 광장에서 폭죽을 터트리는데 규모로 봐서 개인이 장난으로 터트리는 것 같다.

폭발 소리를 듣고 얼른 카메라를 꺼내 촬영모드를 불꽃놀이 설정하고 꺼져가는 불꽃을 손 각대로 촬영하니 샷터 속도가 지연되면서 정상 촬영이 되지 않는다. 삼각대가 있어야 갰구나. 그래도 더 찍어 보려고 기다렸으나 폭죽은 이내 중단 된다.

역 대합실에 100여명의 여객들이 웅성거리며 개찰을 기다린다. 대북시로 귀환하는 관광차림이다.
이번에는 직행 열차란다. 열차 내부가 깨끗하다.

19:07- 21:20 대북역 도착 까지 계속하여 비 내림

직행 열차라 대북역 인근 기륭 역까지 논스톱이긴 한데 운행시간은 별(20여분) 차이가 없다.

21:20-22:00 대북 역에서 관광 버스 편으로 부용 호텔로 이동, 투숙

호텔로 오기까지 속은 조용하다. 정노환덕에 설사가 멈춰 다행이다.

피곤 해 각자 그냥 취침하기로 함

2010년.10월.27일 수요일 오락가락 비(일정: 오전 지오펀, 야류해상공원, 오후 101층 빌딩 전망대. 잡화상
쇼핑 ,발마지 관광)

06:00기상 (07:00모닝콜 예약상태)

06:50 식사

07:10- 08:40 숙소에서 누워 휴식

09:00-10:00 버스 탑승 호텔 출발 지우 펀으로 이동

차창에 지나가는 산위 공동묘지가 주택모양이다. 이곳에서는 죽은 영혼이 사는 집이라 음택이라 하고 사람이 사는 집은 양택이다.

대만에는 장례예식장은 있어도 결혼 예식장은 없다고 한다.

사자에 대한 배려가 대단하다. 장례 절차나 시신을 모시는 음택 모양까지 내가 본 동남아 각국중 제일 성대하게 정중하게 모시는 것 같다. 장례도 3일 장이 아니라 상주의 뜻에 따라 10일 장 2년 장도 지낸 집이 있다 한다. 장례 행렬의 길이 , 고급승용차 동원으로 고인의 경제력이 나타나고 호상일 때는 후미에 핫팬츠차림의 아가씨들이 춤을 추며 이동 한단다. 조의금은 흰 봉투에 홀수로 넣어야 한다. 결혼식은 식당이나 학교 운동장, 야외 공원 등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면서 예식을 한단다. 축의금은 황금색 봉투에 짝수금액을 넣고……. 대만은 한국과 달리 결혼 시 여자가 가제도구 모두를 준비할 의무 없이 남녀가 합동으로 준비 한단다. 기타 절차 설명은 지면상 생략한다.

90:45-11:00 온에어 영화 촬영지 지우펀 관광

지우펀 관광은 영화 온에어 배경으로 타이완의 옛 정취를 담고있고 타이베이에서 동쪽으로 1시간거리에 위치해 있는 기륭시 해변 산악 정상부근에 위치한다. 아시아 최대의 광산(금광)도시였던 언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에 찻집이 즐비하고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경관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지우펀이란 이름은 옛날 이곳 산 정상에 9명(가구)이 살랐는데 이중 한사람이 산 아래 시장을 보러 내려와서 9인분을 항상 구입해 가기에 이들이 장보러 오면 상점 간에 9인분 왔다 하여 (九人芬)하다가 마을 이름이 되면서 “인“자는 빠지고 구분(九芬)으로 명명되었다지만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일제 통치 시 이곳에서 금을 캐면서 광산촌이 형성되었고 노다지를 벌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 금을 캐면 부자 된 기분으로 금을 못 캐면 공허한 마음으로 화풀이로 차 마시고 술 마시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산간 좁고 짧은 골목에 시민시장이 형성된 곳인데 당시 광부의 사랑이야기를 이곳에서 영화로 촬영하면서 최근에 유명해 졌고 이로 해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상권이 형성되면서 나름의 번화가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 이곳을 관광코스에 반영한 것도 이제 겨우 1년 정도 밖에 안 되었단다.

4미터 정도의 좁은 노폭에 150미터 정도의 거리에 각종 상점이 이어져있고 영화 촬영 장소는 시장 골목 끝
부분에서 비탈 아래로 50미터정도 계단을 나려가면 차집이 있는데 이 차집을 배경으로 영화를 촬영했다
해서 유명집이 된 것이다. 차집은 들어가 보지도 않고 집 앞 광장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돌아서 나오다
집사람은 강아지 옷이 예쁘다고 하나 사고 싶어 나를 불러 세웠으나 한국 돈으로 한 벌에 16,000원! 너무 고가품이라고 포기한다. 다시 더 나오다가 기념품 가게를 들려다 보니 옥돌배추 조각품이 보인다. 어제 대만 국립박물관에서 관광 기념품으로 구입하려던 옥돌 조각(옥돌이 아닌 합성수지 제품일 것임) 배추를 구입했다. 15불 달라는 것을 3불 깎아서 12불에 구입했다.

일행들 대부분 기념품 구입에 흥미도 없고 먹을거리 상점도 많지만 맛으로 사먹기도, 입맛도 안 맞을 것이고 중식은 별도 계획되어있으니 개별적으로 돈 쓸 일도 아니기에 딱히 할 일도 없어 전망대에서 산아라 멀리 해안가 바다구경을 하며 억지 시간(30여분)을 보낸다.

입장료를 지불 하는 곳도 없던데 이곳을 관광하는 상품이 왜 온천관광 상품보다 5만원이 더 비싼지 이유도 이해되지 않는다.

12:04- 13:10 야류 해상공원 관광

지오펀에서 버스로 다시 한 시간 정도를 이동하여 해변 항구로 들어선다.

"C"자 형 만인데 항구인지 관광지인지 주거 및 위락시설이 상당규모로 한국의 청사포 바닷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이드에 의하면 섬나라이지만 해변에 모래가 없고 해저 지면 경사가 급해 해수욕장이 별로 없다한다.

하니 이곳은 항구이긴 하지만 고기잡이와 관광산업으로 조정된 소도시다.

야류 해상공원은 대북시 서북쪽 완리(萬里)향 해변에 있다. 해안에서 손가락 하나를 바다 쪽으로 불쑥(1700미터) 내민 듯한 지형인데 수억 년 동안 밀려온 파도에 씻기고 씻겨 연한 지반(황토석)은 많이 깎여 나가고 석회석바위만 남으면서 대체적으로 바위 모양이 버섯 형태를 이루면서 크고 작은 여러 형태의 모양들이 조성되어 자연의 신비를 탄복케 한다. 사람 머리 모양, 슬리퍼 모양, 계란 모양, 벌집 모양, 두부모양, 도마뱀 모양 등 장관을 이룬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여왕바위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집트의 여왕 네페르티의 옆얼굴을 닮았다 하여 명명된 이름이지만 목 부분의 연약한 지반이 계속 깎여 나가 오래지 않아 머리가 떨어질 것 이라며 이를 보호하기위해 보완장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침식되어 목이 잘려 나가는 것도 자연현상이니 자연그대로 방치하는 것 자체가 자연보호라며 정부에서 손을 대지 않는단다.
우리나라는 어찌 할 까? 분명 더 이상 침식되지 않도록 시멘트 보호 외피를 입힐 것 같다.

여왕바위가 해변에 가까워 접근 시 파도에 휩쓸릴 위험도 있고 장기보전을 위해 입구에 실물 보다 큰 모조품을 만들어 관광객들이 사진 찍기 좋도록 시설해 놓았다.

비바람이 부는 기상조건에서도 다행히 관광은 허용되었고.

비가 오락가락 하여 비 안 올 때 촬영을 하며 그런대로 모두 촬영은 끝냈으나 비바람 때문에 바닷가 가까이 현장접근을 금지한 일부지역의 근접촬영을 못한 것이 아쉽다.

13:15-13:40 현지식 중식

다른 시내 식당에 비해 바닷가라고 해물요리 3가지가 더 추가되어 10가지 요리가 나온다.

회를 먹고 싶으면 추가요금을 내면 그리 안내한다고 하지만 아무도 응하지 않는다.

14:28-16:10 대북시 101층 빌딩 전망대 옵션(30불) 관광

버스에서 나리니 정4각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른다. 넘어지면 어쩌나 가슴이 섬뜩하기도 한다.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 같기도 하고 높다란 대나무 죽순 모양 같기도 하다.

2009년 중동 부르즈 두바이(162층 828미터)빌딩이 준공되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 빌딩이었다 한다.

89층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초고속이고 세계 제일(기네스북에 등재)이란다. 시계를 보지 않아
정확한 시간은 측정치 않았으나 순식간에 소리 없이 올라간다.

101층 빌딩 소개: 총 고도 508미터, 고속엘리베이터 속도는 분당 1,010미터로 89층까지 37초에 상승함,

2500년 주기의 대지진을 견딜 수 있는 방진 설계를 했으며 초당 60미터 이상의 17급 풍속에 견딜 수 있는 구조로서 88층에는 직경 5,5미터 660톤 무게의 강철 구슬 모양의 공기제동기가 있다.

구성품 하나하나씩을 올려 위에서 조립되었다는데 이것이 빌딩 상단부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빌딩의 중심을 잡아 준다니 이해가 될 듯하지만 신기하고 추 운동의 역학 구조를 이용한 건축 공법에 경탄할 뿐이다.

일반 관광객은 89층 전망대(89층 이상은 통신용이라 출입불가)에서 하차 이어폰을 착용하고 한국어 (8개 국어로 편집된 멀티미어) 동영상 가이드 방송을 청취하면서 대북시를 돌아본다. 비행기에서 나려다 보는 듯 하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연무 현상이라 시가지 모습이 선명치 못해 아쉽다. 이어 88층으로 계단을 나려가 공기제동기를 보고나서 취보 4대 예술 전시관( 천연 산호 전시관, 고급 조각 산호전시관, 액세서리 전시관, 대만 이미지 기념품 전시관)을 관광한다.

1층 메인 홀에서 대기하는 동안 시간이 넉넉한 듯 하여 혼자서 말없이 지하 4층(명품매장) 까지 에스컬레이터 타고 나려갔다가 다시 올라 오니 일행들이 안 보인다. 급히 출구를 찾아 밖으로 나가니 나를 기다리던 손사장이 나를 찾아 나서는 바람에 일행들을 5분 정도 지체시킴.

16:45 - 전통 차 및 기념품 상점 쇼핑

차 시음 후 판매하지만 아무도 구입안음. 차, 옥, 그림, 먹을거리 등 상품은 다양하지만 아무도 구입치 않음.

17:40 - 18:20 옵션(30불) 발마사지

전원 남자들이고 장소가 협소한데 촘촘한 좌석에서 기계적, 사무적인 감이 든다.

등어리를 잠시 마사지 하고 발 마사지로 이어지는데 마사지 동안 한약을 판촉하나 아무도 산 사람이 없음.

발마사지 하면 신체 5장 6보가 다 연결되어 검진까지 된다 하는데 나는 심한 통증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정상
건강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모를 일이다. 송회장 피부 알레르기 치료 연고에 대해 관심이 있어 질의하였지만 만병 통치식 약효에 의심이 들고 약값이 비싸 구입 안함.

가이드는 안마사에게 추가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했지만 열심히 땀 흘려 안마함이 가상하여 송회장 몫까지 2불 지불하니 감사하단다.

18:30 -19:30 현지 샤브샤브 석식

1 차 요리 : 야채와 고기, 2차 요리 : 면 , 3차 요리 : 볶은 밥

여행 마지막 석식이라고 소주 물병3개에 담아와 반주하며 식사 즐김.

20:00 호텔 귀환(비는 계속됨) 샤워 후 21:50 송회장 방에 다시 모여 남은 소주 한 병 나눠 마신(술이 좀 부족해 아쉬웠음) 후 취침.

2010년 10월 28일 목요일 흐림 (일정 : 타이베이 시내 면세점 쇼핑관광 후 공항으로 이동 귀국)

06:30 송회장이 깨워서 일어남

간밤 헤어질 때 6시 반에 식사하기로 내가 제안(늦으면 복잡해져 테이블 잡기 힘듦) 합의 했었는데 피로 때문인지 비몽사몽 꿈을 꾸다 기상시간 놓침( 꿈꾼 이야기 생략)

07:00 간단히 식사하고 다시 올라와 휴식하면 가방 챙김.

09:00 호텔 체크아웃

지난주 태풍 시 유실된 중국 여행국 수색 장면을 촬영하기위한 중국 방송사 촬영기사들이 프론트에서 분주하다. 방송용 카메라가 10대가 넘는다. 하긴 입체적으로 촬영해야 하니…….

계획된 일정이지만 너무 짧은 일정이라 조금은 아쉽다. 일행들이 모두 건강해 보인다. 나만 첫날 설사로 고생한 셈이다.

09:40-10:30 시내 면세점 쇼핑

관광수입을 위한 정부 방침이겠지만 이는 너무 중복된 쇼핑 일정이다.

짜증스럽고 시간이 아깝다.

관광객에게 면세점이란 혹이심을 충동 하지만 이곳에서 여행경비보다 더 비싼 고가의 명품가방이고 옷이고 시계를 사는 여행객은 없어 보인다.

우리 일행은 귀국 후 내달 친목회 모임 시 불참자(2명)에 대한 배려로 같이 나눠 마실 금문 고량주 2병(36,000원)을 구입했고 출국 시 대북 공항 면세점에서 인수 했다.

10:30-11:30 공항으로 이동

11:30- 12:20 탑승 수속

가이드가 여권만 가지고 대한한공 창구에 가더니 이미 왕복 예약 된 상태라 금새 표를 가져 온다.
화물탁송도 그리 지체됨이 없고 검색창구도 순조로히 통과됨

12:25 비행기 탑승

일행 중 순광석 창구옆(F석) 좌석이 있어 얼굴도 익은 지라 구름사진 촬영을 위한 양해를 구하고 좌석 교환함.

이하 한국 시간

13:25 - 16:50 KE 692 탑승 타이베이 출발 인천공항 도착

안산행 리무진 버스 탑승하고 1시간 만에 안산도착 택시 타고 집에 도착

여행 총평

대만 여행기간 중 내내 비를 뿌렸으나 비를 맞으며 계획된 관광일정은 무사히 마침.

3박4일 일정 중 야류 해상공원 외 타 볼거리는 특이한 맛이 없었고 쇼핑 일정이 너무 많은 상품이다.

한 호텔에서 3박하여 잠자리는 안정적이었고 호텔 조식은 괜찮았지만 현지 식사(중, 석)는 중국보다 못한
(맛은 비슷하나 요리 수가 11가지에 비해 7가지로 적다) 편이었고 준비해간 소주는 공개적으로 못 마시게 하여 첫날은 호텔에 돌아와 야간에 룸에서 마셨고 2일 차부터는 호텔 물병에 담아 지참하여 식탁에서 개별적으로 물마시 듯 마셨음.

기차이동 구간 , 야간 룸에서의 여유 시간 활용을 위해 간식거리, 안주와 소주를 준비하여 추가경비 없이 아주 실비적인 여행이었음.

나만 관광기념품(소형 옥돌 배추 조각과 비취 팔지)을 구입하였을 뿐 타 일행들은 아무것도 구입 치 않음.

10월 하순임에도 바람과 비로 우중충 한 대만 기후를 보니 재삼 한국에 태어난 것에 감사함.

총 여행 경비: 1,443,380원(환율 1,140원)
여행사 지불 경비 112만원 + 가이드 지불 팁 80불 +옵션관광 120불 +서비스 팁 5불+ 비취 팔지 2만원+
옥돌 배추 조각 12불 + 국내 공항 왕복 교통비 5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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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대만 관련 정보: 백과사전 자료 임>

대만 (臺灣): 타이완

중국 대륙 동남해상에 160㎞ 떨어진 곳에 있는 섬. 타이완 섬과 펑후제도[澎湖諸島(팽호제도)]의 79개 섬, 기타 15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식명칭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면적 3만 5,980㎢. 인구 2,289만 5000명(2005). 동쪽으로 태평양, 남쪽으로 바스 해협과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타이완해협을 사이에 두고 중국의 푸젠성[福建省(복건성)]과 마주보고 있다.

타이완의 자연

면적의 68.7%가 산지로 평지가 적은 편이며 100m 이상 산지가 2/3를 차지한다. 본섬인 타이완섬은 동부에 대부분의 산맥이 편재되어 있고 서부는 비교적 넓은 평야로 되어 있다. 산맥 동쪽은 타이둥지구대[臺東地溝帶(대동지구대)]를 사이에 두고 타이둥산맥[臺東山脈(대동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있고, 서쪽 경사면에는 쉐산산맥[雪山山脈(설산산맥)]·아리산산맥(阿里山山脈) 등 지맥이 이어져 있다. 북단부에는 쑤아오와 화롄[花蓮(화련)] 사이에 대단애(大斷崖)가 형성되어 있고 일대에 깊은 협곡이 발달해 있다.

주요 산맥으로 중양산맥[中央山脈(중앙산맥)]·츠가오산맥[次高山脈(차고산맥)]·위산산맥[玉山山脈(옥산산맥)]·아리산산맥·타이둥산맥·다툰산맥[大屯山脈(대둔산맥)]이 있고 3000m 이상인 산이 49개에 이른다. 특히 중양산맥은 타이완섬 면적의 50%를 차지하며, 위산산맥에는 최고봉인 위산산(3997m)이 솟아 있다. 구릉은 대부분 해발고도 250~1000m 정도로 중양산맥의 좁고 긴 산기슭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다.

평원은 서부연해에 많이 분포되어 있으며 타이난평원[臺南平原(대남평원)]이 가장 넓다. 타이베이·타이중[臺中(대중)]에는 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하천은 대부분 동북쪽 산지에서 발원하며 흐름이 빠르고 수량이 적다.
또한 토사 함유량이 많고 양쪽에 사구가 발달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줘수이강[濁水溪(탁수계), 170㎞]이 가장 길고, 단수이강[淡水河(담수하)]·가오핑강[高屛溪(고병계)] 등 큰 강은 대부분 서쪽으로 흘러 타이완해협으로 들어간다.

기후는 아열대 및 열대 해양성기후로 다양한 특징을 나타낸다. 동부는 서부보다 겨울에 따뜻하고, 중부·서부는 높은 산때문에 기온변화가 심하다. 남부와 북부의 온도차이는 크지 않으나 우기와 건기가 반대로 찾아온다. 북부는 여름에 건조하고 겨울에 비가 내리며 기온이 15℃ 이하로 내려간다. 반면 중남부는여름에 비가 내리고 겨울에 건조하며 기온은 최하 18℃를 유지한다.

평원과 산꼭대기 사이에는 열대·온대·한대의 3가지 기후가 나타나며 평지의 여름은 겨울보다 길다. 연평균기온은 15.3℃(1~2월), 평균강우량은 2580m에 이른다. 계절풍은 강도와 발생시기가 다른데 10~3월에 매우 강한 동북계절풍이 불고, 5~9월에 서남계절풍의 영향을 받는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태풍이 찾아온다.

타이완의 역사

고대중국의 진(秦)·한(漢)나라에서는 타이완을 동곤(東鯤), 삼국시대에는 이주(夷州)라고 불렀다. 230년 중국이 타이완을 최초로 경영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707년 수(隋)나라에서 리우차우(流求)를 복속시켰다. 당(唐)나라 이후 송(宋)나라 때까지 중국 연해에서 많은 사람들이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다. 원(元)나라 초기에 중국은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360년 펑후에 순검사(巡檢司)를 설치하고 푸젠성 둥안현[同安縣(동안현)]에 예속시켰다.

네덜란드가 1622년 펑후를, 1624년 남부 타이완을 점령한 데 이어 1626년에는 에스파냐에서 지룽[基隆(기륭)]·단수이[淡水(담수)]를 점거하였다가 1642년 철수하였다. 1661년 명(明)나라의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를 철수시키고 타이완 개발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1683년 청(淸)나라는 펑후를 점령하고 타이완을 중국의 푸젠성에 예속시킨 뒤 푸젠타이완성이라 칭하고 1부 3현을 설치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이주민이 급증하여 개척이 빠르게 진행되고 행정구역도 확대되었다.

아편전쟁 후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천진조약)]에 따라 북부의 단수이가 개항된 이후 유럽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1874년 일본은 일본인이 살해된 것을 이유로 타이완에 출병하여 이것이 1894~1895년 청·일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결과 타이완은 일본에 할양되어 51년간 식민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에 앞서 1884년 프랑스함대가 펑후를 점령하여 이듬해 청·프전쟁이 일어났고, 타이완성으로 개칭되었다.
1895년 일본은 초대 대만총독에 하바야마 모토기[樺山資紀(화산자기)] 해군대장을 임명하고 이듬해 군정(軍政)을 폐지하였으며 타이완총독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 제63호>를 공포하였다.

1897년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하관조약)]에 따라 모든 타이완국민은 2년 내에 중국이나 일본의 국적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타이완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정치적 차별정책으로 반일 감정이 격화되어 1895년 타이완민주국 건설, 1920년 타이완의회 설치 청원운동 등의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1945년 7월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타이완은 중국에 반환되었다.

1949년 중국 본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함에 따라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국민당정부를 타이완으로 옮기고 대륙수복의 기치 아래 경제발전을 통한 국력신장에 주력하였다. 정책적으로는 불접촉·불담판·불간섭의
3불정책을 고수하면서 본토와의 대화에 응하지 않다가 1987년 7월, 38년만에 민간인의 중국거주 친척방문을 허용하는 등 교류를 확대하였다.

타이완의 정치

1949년 이래 타이완의 국민당정부는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내세우고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기본이념으로 하면서 반공과 대륙복귀를 국시로 삼아 대륙의 중국과 대립하여 왔다. 그러나 1990년 야당인 민진당 등에서<타이완공화국>으로의 독립을 선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고, 1992년 이후로는 타이완정부도 중국과의 대치에 따른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본토를 인정하는 국가와도 공식외교관계 수립을 검토하였다.

국가기구는 국민대회, 총통, 행정원(내각)·입법원·사법원·고시원·감찰원의 5원과 중앙정부 및 지방정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2000년 독재의 상징인 국민대회는 자진해산하였다. 총통은 국가원수로서 임기는 4년이다.
헌법은 1946년 제정되어 이듬해 공포되었는데 국가권력을 정권(政權)과 치권(治權)으로 구분한 것이 특징적이다.
정권은 인민의 권력인 선거권·파면권·창제권(創制權)·부결권을 말하고, 치권은 정부의 권력인 행정권·입법권·사법권·고시권·감찰권을 뜻한다. 정당은 쑨원[孫文(손문)]이 중국국민당의 전신인 흥중회(興中會)를 창설한 이후 현재 제1야당인 민주진보당(DPP)과 친민당(親民黨) 등이 있다.

1975년 장제스가 사망하고 1978년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장경국)]가 뒤를 이었으나 1988년 사망함으로써 리덩후이[李登輝(이등휘)] 부총통이 1990년 총통으로 선출되었다. 1949년 이래 국민당 1당 지배체제를 펴오다가 1987년 7월 계엄령을 해제하고, 1989년 1월 복수정당제를 도입, 국민당 1당체제를 벗어났다.

리덩후이는 취임연설에서 중국이 타이완에 대한 무력행사를 포기하고 타이완의 대중국(對中國) 관계의 전개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힘으로써 관계개선의 뜻을 표명하였다. 이어 1991년 40여 년간 중국과 전쟁상태임을 규정한 전시비상조치법인 <동원·반란 진압 시기> 임시조례을 폐기하고 민주적인 헌법 개혁안을 승인하였다.

대륙 중국정부와의 통일문제에 대하여는 중국이 1970년대 국제연합 가입과 대미수교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 홍콩문제 처리방식인 <1국 2체제>를 내놓은 것에 대하여 타이완은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여 왔다. 이후 중국은계속 타이완의 개방을 촉구하였으나 타이완은 3불원칙으로 맞서다가, 1991년 국가통일위원회는 통일을 위하여 3불정책을 폐기하고 대신 통우(通郵)·통상·통항의 3통정책 실시, 고위인사 상호방문 등을 내용으로 하는 획기적인<국가통일강령>을 확정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1993년 양측은 싱가포르에서 44년만에 첫 고위민간회담을 개최하였으나 회담의 정례화 등 원칙적인 사항만을 합의하는 데 그쳤다. 2000년 3월 실시된 총통선거에서 야당인 민진당 천수이볜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어 대폭적인 개각을 단행했다. 외교노선은 독립자주와 호혜평등에 입각한 총체외교방침을 표방하고 있다. 친서방정책을 고수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교관계가 없는 국가들과 경제실리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군제도는 징병제로 병역은 육군은 2년, 해·공군은 3년이다. 총통이 3군통수권을 갖고 최고의결기관은 총통이 의장인 국가안전회의에 있으며 국방부장 아래인 참모총장이 실질적 작전지휘권을 행사한다. 2003년 현재 육군 24만 명, 해군 3만 명, 공군 5만 9000명, 해병대 2만 9000명의 병력을 갖추고 있다. 국방비는 1978년 미국의 군사원조가 중단된 이후 계속 증액되고 있으나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감소하여 2003년 75억 740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타이완의 경제·산업

청나라 말부터 수출지향적 농업이 발전하여 일본통치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탕수수와 쌀을 중심으로 한 농업 발전이 계속되었다. 1930년대 군수공업, 1950년대 수입대체공업의 발전과정을 거쳐 1960년대 이후 외자도입에의한 수출지향 공업화를 추진하여 민생 위주의 수출주도형 경제구조를 갖추었다.

농업은 기후가 온난하고 강우량이 풍부한 자연조건과 함께 수리관개 개발로 다모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쌀은 자급되나 밀·콩의 수입의존도가 큰 식량수입국이다. 주생산물로 쌀·사탕수수·고구마·콩류·바나나·파인애플등이 있다. 농업인구는 전체 인구의 10.9%이며, 경지는 전체 면적의 25%인 약 90만 ㏊이다. 수산업은 근해어업 중심에서 최근 원양어업과 양식업으로 전환하였으며, 어획량은 109만 t(2000)이다.

공업은 1960년대 이후 노동집약적 수출가공업을 중심으로 급성장하여 공업인구가 전체 취업인구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부터는 중화학공업화를 추진, 철강·석유화학·조선업에 주력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정보산업과 자동차산업에 힘쓰고 있다. 특히 1992년에는 서비스업이 급성장하여 민간부문투자의 54.8%를 차지한 것이 특징적이다. 기간산업은 주로 국가에서, 소비재산업은 민간에서 주도하고 있다.

외환보유고는 2002년 8월 현재 1564억 4000만 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2002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3%이며, 실업률 2.99%(2000)이다. 한국·홍콩·싱가포르 등과 함께 신흥공업지역군(NIES)으로 각광받고 있다. 주요 수출품은 전기기구·전자 등 가공품이 주류를 이루고 수입품은 기계설비·중간원료 등이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미국·일본·홍콩·독일·영국 등이며 미국·일본이 수출입의 1/3을 차지한다. 2004년 대외무역은 수출 1705억 달러, 수입 1654억 달러를 기록하였다.

타이완의 사회·문화

주민은 17세기 광둥[廣東(광동)]·푸젠성 등지에서 이주해 온 한족(漢族) 98%와 원주민인 고산족(高山族)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어는 베이징관어(北京官語)를 공용어로 하며 타이완어나 고산어도 쓰인다. 인구밀도는 높으나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고용이 증가하고 여성취업률이 높아 실업률은 낮은 편이다. 종교는 불교·도교·프로테스탄트·가톨릭·이슬람교 순으로 신도수가 많고 종교적 갈등은 거의 없다.

교육제도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구분된다. 취학연령은 6세, 의무교육기간은 9년이며 9월부터 신학기가 시작된다. 대학입시 경쟁률이 높고 최근 본토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본토 대학에 유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문화시설로 타이베이에 있는 고궁박물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곳 소장품 가운데는 은(殷)·주(周)나라로 부터 청나라 때에 이르기까지의 유물과 본토에서 가지고 온 국보급 보물 및 서화예술품이 포함되어 있다.

언론은 1988년 1월 신문창간 금지가 해제된 이후 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를 비롯, 정부기관지인 신생보·연합보·중국시보, 야당지인 민중일보 등이 있다. 통신사로 중앙통신(CNA) 등 61개가 있고, 라디오방송국 33개와 TV방송국으로 중국전시(中國電視)·중화전시(中華電視)·타이완전시[臺灣電視(대만전시)]가 있다.

타이완과 한국과의 관계

1948년 11월 남한과 단독 수교를 맺고 같은 분단국가 입장에서 긴밀한 정치·외교 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88올림픽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관계가 급진전되고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에 따라 타이완측은 곧 한국과 단교를 선언하고 9월에는 항공협정을 중단하였다. 1993년 7월 실리외교 차원에서 한국과의 관계회복을 결정하고 비공식수교 협정에 조인하였다. 2002년 10월에는 타이완 국적 항공기 운항이 10여년 만에 재기되었다. 2004년 대한수입은 98억 달러, 대한수출은 73억 달러이다. 2003년 교민수 2100명, 체류자수 300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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