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및 기행문

중국 태행대협곡 /만선산/구련산 5일 관광 기행문

중국 태행대협곡 /만선산/구련산 5일 관광

(2010년 03월 26일-03월30일)

★ 중국 태행산 대협곡을 관광 선택 배경

‘08년에는 2,000여만 원의 재산피해와 예상 밖 큰 부상을 입는 등 삼재수가 있다 하여 여행을 자제키로 하였고 ’09년 전반에는 어머님이 노환으로 위독한 상환이라 해외여행은 상상도 못 했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가을을 맞아 가슴에 쌓인 앙금을 털어내기 위해 해외여행을 계획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일본, 중국, 미국?

문화유산 관광보다는 자연 유산 관광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중국의 자연 풍광에 더 마음이 가지만

중국에서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관광지는 이미 관광이 거의 끝났고 순수한 자연 풍광(기암괴석)만 관광하는 여행상품도 없어 09년 가을 여행으로는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사원을 관광할 까 했었지만 인터넷에서 태행 대협곡 관광사진을 접하고 나서 먼저 태행산을 보기로 마음먹음.

태행산은 중국의 그랜드 캐년이라 이름 할 만큼 광대한 협곡이라 하며 한국에서 가깝고 미국 그랜드 캐년 여행 보다 경비도 싸고 국내선 항공기 탑승에 노 쇼핑, 노 옵션 상품이라 가장 경제적인 금액으로 자연 풍광을 관광한다는데 마음이 쏠린 것임.

※ 일정상 관광 여행정보자료

♥태행산 대협곡 : 몽고초원 아래 산시 성 북부에서 시작하여 산시 성과 허베이 성, 허난 성 경계에 남북으로 600km , 동서로 250km에 다하는 광대한 협곡이다. 열자탕문편에 나이 90세가 넘는 우공이 둘레 700리가 넘는 태행산의 흙을 퍼서 발해 만까지 한 번씩 운반하는데 1년이 걸렸는데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으나 자자손손 대를 이어 하다보면 언젠가는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고 일을 계속하자 이에 옥황상제가 감동받아 산을 옮겨 주었다는 우공이산의 배경이기도 함.

♥홍기거 : 태행산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피난 생활을 하면서 1960년부터 1969년까지 1.250개의 산과 152개의 험준한 봉우리에 바위를 깎고 암벽동굴을 파서 만든 인공수로

♥은허박물관 : 중국 최초의 문자인 갑골문자를 비롯하여 차마갱, 도기, 청동기, 옥기 등 학술적 가치가 높은 국보급 유물이 많이 발굴되어 2006년 유네스코 문화유선으로 지정된 곳.

♥만선산: 태향산협곡 남부에 위치하는 만선산은 아찔한 절벽에 13명이 5년간 공사하여 1977년 완성한 세계 8대 기적으로 불리는 1250m 동굴도로 절벽장랑과 무릉도원 곽량촌 등의 관광지가 있다.

♥구련산 : 높이 120m의 천호폭포, 웅장한 하늘의 문과 같은 천문구, 소박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서련촌, 계곡을 따라 아름다운 폭포가 이어지는 선지협 등 볼거리가 많은 곳

여행 준비

2009.10월 중순부터 태행 대협곡여행 상품(11월6일 -11월10일 일정) 정보 수집

여행사

기본 경비

탑승기

불 포함 사항

특이사항

비자발급비

기사/가이드팁

유류활증료

노랑풍선

499,000

KAL 기

30,000

50불

24,000원

11월 상품 미 계획

보물섬

499,000

KAL 기

30,000

50불

20불

11월 6일 일정 무

KRT

499,000

KAL 기

30,000

50불

35,000원

유일 상품임

온라인

449,000

중민항기

30,000

50불

20불

만선산 관광 누락

2009.10.21 KRT 여행사 홈페이지에 11월06일(-11월 10일: 4박5일 : 2인 998,000원) 일정 예약 신청

2009.11.01 상기 예약 신종플루 전염 염려로 동행자 추가 예약이 없어 여행일정 취소됨.

2010.02.05 신문 광고와 인터넷에서 다시 태행산 관광 상품 정보를 수집해 보니 2월 여행 일정 상품은 대부분 여행사의 경비가 499,000원이었지만 3월 상품은 3만원이 인상된 529,000원이다.

2월은 날씨가 추워 여행 계절이 아닌 비수기 금액이고 3월은 춘삼월 꽃피는 계절, 여행 성수기로 접어들면서 3만원씩 인상되나 보다. 서울의 경우 3월 하순은 되어야 개나리 진달래가 필 것이니 여행 일정을 3월 26일로 잡고 여행사별 여행 일정 확정여부를 확인하고 16명 예약가능상태에서 예약 진도를 수시 확인함 (예약자가 최소 10명이상이라야 여행이 확정됨)

2010.02.27 KRT 여행사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3월26일 일정에 예약 신청함.(타 여행사는 예약 신청 실적이 미미 한데 KRT만 16명중 잔여석이 2석으로 확정 일정이라 하여 신청함)

2010.03.02 09:05 KRT여행사 직원 인터넷 예약 신청내역 확인 전화 받음.

(도보거리가 황산 , 장가계보다 더 걷는데 여행가능 하시냐고? 장가계, 황산. 구채구 다 다녀왔으니 걱정 말라고 함)

2010.03.18 박소영씨에게 전화 (02-2124-5568) 잔금 입금일자 확인.

오늘 전화하려고 했고 오늘이나 내일까지 잔금(1,028,000원)을 입금해 주면 된단다.

금일 입금예정 통보(입금계좌: 신한은행 100-020-617512(주) 세계 KRT).

2010.03.22 17:00- 19:00 비디오카메라 점검/ 촬영요령 복습

2010.03.24 09:10 KRT 여행사 박소영 담당에게 전화함: 여행준비에 대해 전화를 주겠다 했었는데

일행이 많아 전화 오는 순서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전화를 한다 하니 담당자는 중국 현지 일기 상황을 점검하고 전화하려 했었다며 16:00시경 다시 전화 주겠다 함. 환전 액을 물었더니 현지가이드 팁 50불을 지불해야 하니 이는 미화로 준비하고 현지 매장에서는 외화를 받지 않으니 중국 위앤화는 우리 돈으로 4만 원 정도 환전하면 될 것이라 한다. 물건들의 질이 떨어져 살 물건도 없을 것이라고 첨언한다.

이번 여행 일행이 34명으로 많아 두 팀으로 나눠지고 우리 내외는 B팀이라며 인천공항 미팅 시간과 장소를 알려준다.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여행상품별 안내문과 같은 내용이라 추가 질문 않고 무조건 예 예 했다.

2010.03.24 10:20-11:20 홈플러스 여행용 물품 쇼핑 / 버스터미널 인천공항 직행버스 표 예매

참이슬 640미리 리터 3병 ×1,820원 = 5,460원

해태 에이스 크레카 2통 포장 1개= 1,560원

오뚜기 고추 참치3캔 포장 1개= 2,850원

진양 올리브 재래도시 김 10통 1개 =2,750원

안산 버스터미널 들려 인천공항 직행버스 표 예매 2매 × 11,000원 = 22,000원

* 2년 전에는 모든 버스가 부천소사-김포공항- 인천공항 노선(2시간 소요)으로만 운행되었는데 이번에는 안산 -인천공항 직행(1시간 10분소요)노선이 생겼고 한 시간에 한 번씩만 운행되며 요금은 동일함.

* 안산 버스 터미널 안으로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 주차할만한 적당한 장소가 없어 급한 생각에 버스 정차 표시 구간에 주차를 하고 예매하러 매표소에 들어갔더니 그사이 그 자리에 정차하는 노선버스가 들어와서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에게 시비를 하여 빨리 차를 뽑으라고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 표를 구매중이라 알았다고 응답하고 표를 예매 후 차로 돌아오니 내 차 옆에 버스가 주차하며 내게 다시 시비를 한다. 할 말이 없으니 그저 미안하다 사죄하고 못 들은 체 빠져 나왔다.

2010.03.24 12:00-012:30 현지 소요 외화 환전/ 구급약 구입

1. 환전

♥ 미화 200불 × 1,155.00 = 231,000원(20불 7매 , 10불 4매 1불 20매)

※ 소요판단 내역 : 기사/가이드 팁 50불 ×2 =100불.

등산 후 전신 안마 (예상)30불 ×2 = 60불

난코스 가마타기 (예상)20불 ×2= 40불

♥ 중국화 400위엔 × 177.00= 70,800원(100위엔 3매, 50위엔 1매, 20위엔 2매, 10위엔1매)

※ 소요판단 내역 : 참기름 : 2 리터 × 100위엔 = 200위엔

현지기념품 : 100위엔

과일/식수 : 100위엔

♥ 소 계 = 301,800원

2. 구급약 구입

추가 구급약 구입(지사제, 멀미약, 두통약: 관절 약은 옛것 그대로 휴대키로 하고)

종합 감기약 2개 ×3,000= 6,000원

종합 소화제 2개 ×2,000= 4,000원

황사예방용 마스크 2개 × 2500 = 5,000원

2010.03.24 17:30 박소영 담당자로부터 전화 옴: 현지 기온이 서울과 같으니 지금 착용한 정도의 옷을 착용하시고 산악지역을 등산하는 것이니 등산화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2010.03.25 18:00 집사람 여행용 가방에 휴대품 포장 확인/조정

겉옷, 속옷 모두 현 서울 기온 기준 준비함. 전기요, 우의. 반찬, 반주용 소주, 카메라. 엠피3와 충전기

2010.03.25 19:00 중국 제남시 주간 일기 예보(기상/ 최고온도) 확인

구 분

3.26/금

3.27/토

3.28/일

3.29/월

3.30/화

한국 /수 원

구름 많음 5

구름 많음 8

구름 많음 10

구름조금 12

구름 많음 13

중국 /제 남

맑음 12

맑음 16

맑음 13

맑음 16

구름조금 14

2010.03.26 금요일 맑음

.

09.10 집에서 나와 택시 탑승.

09:20 버스터미널 도착

09:35 인천 공항 직행버스 탑승

우등버스로 25인승이며 횡 좌석이 3열이고 앞뒤 공간도 넓어 무릎이 닿지 않는 거리 .

하여 항공화물가방을 밑에 화물칸에 실었어야 했는데 들고 탑승하다 보니 가랑이 앞에 놓고

가방의 움직임에 신경을 써야 했음. 터미널에서 12명 약 50% 탑승.

09:40 터미널 출발

안산역전에서 3명 . 시흥시 지나면 6곳 정차 4명 탑승함.

10:10 정왕 (최근 신설된 )톨게이트 진입 인천항 직전 신 인천대교로 진입 함.

10:36 영종도 톨게이트 진출

10:45 인천 공항 3층에 하차/만남의 시간까지 45분전이라 개인 용무 봄

11:00 국민은행 365일 창구에서 현금 20만원 인출(만일의 경우를 대비 추가 자금 지참).

11:05 LG 로빙 서비스 창구(거의 반대편에 위치) 찾아가 로빙 서비스 신청하니 내 핸드폰 모델을 확인하더니 내 것은 해외에서 로빙서비스가 안대는 기종이란다. 만들 때부터 그리 만들었다나. 해서 그런지

3년 전 구채구 관광 시 로빙서비스를 신청하고 중국에 가서 국내에 전화하려했더니 연결이 되지 않아

남의 것을 빌려서 전화 했던 생각이 난다. 중국에서 꼭 전화가 필요하시면 자기네 전화를 빌려 가란다.

빌리는 비용이 1일 2천원이고 국내 통화 1분에 2천이란다. 그렇게 까지 빌려야 할 중요전화도 없기에 빌리기를 포기함.

11:30 미팅 시작.

일행이 34명으로 에이 팀은 여자 단체 15명이고 나는 비 팀 19명에 포함된다.

확실한 정황은 몰라도 비 팀 19명 중 부부동반 여행자만 따로 모아 단체비자를 신청된 듯 단체비자 6명 명단에 우리내외는 5번 6번째이다.

1,2번이 가장 젊은 59세 권 사장 내외이고 3,4번을 78세 감진국 씨 내외이다.

미팅이 시작되며 제일 먼저 감진국 노인께서 창구 직원에게 뒷사람 생각 않고 필요이상 많은 질문을 하여 조금 신경이 쓰였는데 얼굴이 익은 듯(고향 중, 고등학교 동창의 형인가 싶어)하여 확인하니 맞단다. 그러면 감진국 씨는 동창생의 형이기도 하지만 군 선배로서 한미 합동 훈련 시 한국군 대표로 한미 군수 협조 단에서 같이 훈련하기도 했던 지인이기도 하다. 서로 헤어져 근무하다 전역 후 34년만의 만남이다. 반갑기도 하지만 그간의 세월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울러 그의 동생 안부를 물었더니 제대 후 산으로 갔다고 한다. 한동안 소식조차 몰랐었는데 연금 수급자 정리 차 주민등록 등본을 발급받기 위해 집에 한번 들리는 바람에 소식은 알게 되었는데 그때 중이 되었음을 알았고 그 후 소식이 두절되어 지금은 어데 있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동창이 중이 된 것에 말문이 막힌다.

12:00 화물탑승/티켓 구입 완료.

우리 팀 6명 모두 일찍 도착 제일 먼저항공권 구입하고 화물까지 탑승신청 완료함.

12:10 출국 수속 모두 마침

12:10-13:25 살 물건 하나 없는데 면세점 들러보다 다리 앞아 대기실에서 TV보며 시간 소모함.

※ 2시간 전 미팅은 교통체증 등 만일의 사태를 대비 한 것이겠지만 현재까지 서울지역 교통 상황으로 봐서 시간 낭비가 너무 많다.

13:25 개표

13:45 인천 공항 이륙.

14:45 산둥 성 위해시 상공을 통과(10 KM 상공)하는데 아래를 나려다 보니 산이 메말라 보인다. 활엽수는 아직 잎이 나지 않은 시절이고 사철 침엽수가 드문드문 보이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하고 실 상황은 착륙하여 버스 이동시 확인하기 로 함.

비행시간 두 시간이지만 중국과 한 시간의 시차가 있어 공항에 도착시간은 중국 현지 시간으로는 14:26분이란다.

이륙 후 이어 기내 중식이 배달되었다. 식단이 너무 단조롭다. 싸구리라는 생각이 앞선다.

누드 김초밥 3개. 유브 초밥 2개 물. 파인애플 조각 1개. 반 건조 단무지 조각 몇 점, 생강 절임조각 몇 점이 반찬의 전부이다. 중국행 비행기 탑승 중 제일 후진 메뉴다. 주스대신 캔 맥주 1캔을 마시고 나니 그런대로 식사는 된다.

15:00 웨이팡 상공 통과(제남 160km전. 고도 6km 상공)

황해로 유입되는 듯 강줄기가 보임 .저것이 황하 인가 보다. 물빛도 누런색이나 비수기라 그런지 강물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음. 들은 평야 지대로 농경지 정리가 잘 된 듯 하고 농가는 상당한 거리에 밀집되어 있음. 집들은 연이어 똑 같은 모양, 슬라브형 지붕으로 건축하여 공장건물 같기도 하고 가축 축사 같기도 하여 전혀 집처럼 보이지 않음. 제남 시 내로 들어가면서 평지에 농업용수용인가 본대 여기저기 저수지도 자주 보인다. 녹색 밭은 보리나 밀밭일 것이고 빈 땅은 아직 파종되지 않은 휴경지 상태인가 싶고 나무가 별로 안 보인다 싶었으나 공항에 착륙하면서 보니 포플러 나무들이 밭둑이며 도로 양편에 잘 조림되어 있었음.

15:27 제남 공항 착륙

15:40 입국 수속 완료.(체온 측정대 통과, 비자확인, 신체 검색. 화물 검색) 옛날 보다는 상당히 신속해 진 느낌 .

14:45(중국 현지 시간) KRT여행사 가이드 마중 나와 에이 팀 . 비 팀 나눠 안내를 받으며 25인승 중형버스 2대에 나눠 탑승 공항 출발.

가이드 한진영! 키가 작고 예쁘장하다. 나이는 28세. 연변이 고향이며 북한 온성에 사시던 조부가 일제 때 연변으로 넘어와 정착한 조선족 3세대라 한다. 조부님은 땅을 열심히 개간 많은 땅을 소유하며 부자로 살았었는데 71년도 문화 대혁명 당시 지주로 몰려 혁명 세력에게 맞아 돌아가셨고 부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지주(부르조아) 자식들이라고 공직에 취직이 안 되어 농사를 짓다가 80년대 중반에 연변에서는 최초로 양계장을 시작 경영하며 연명해 오고 있음. 자신은 3년 전 한국 관광객 안내를 위해 선발 배치되면서 청도에서 주로 골프 관광안내를 해 왔었는데 3개 여행사가 합쳐 청도국제 관광회사를 설립하고 3년에 걸쳐 이곳 태행산 관광을 개발하면서 이곳 안내를 맡게 되었단다.

문화대혁명 전 연변에는 조선족이 51%. 중국 한족이 49%로 구성되어 살았었지만 중국이 개혁개방하면서 젊은 청년들은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과 관광안내를 위해 전국적으로 소산 배치되면서 고향에는 노인과 애들만 남아 있어 인구 비율도 이제는 40 : 60이 되었다고 한다.

순간적인 생각이지만 중국 정부의 양수 겹장 정책임에 가슴이 저려온다.

급한 대로 한국에 개방하면서 언어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고 만주 땅에 밀집한 조선족을 전국적으로 분산시켜 조선족의 단결력을 약화시키면서 옛날 고구려 영토에서 주축이었던 조선족을 소주 민족으로 만들어 명실공이 만주가 중국 땅임을 과시하시하려는 정책이 숨어있는 듯하다.

옛 고구려 영토가 , 발해의 영토가, 한국 고대의 역사가 중국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정부에 대해 한국 정부는 그간 무엇을 했는지 .......... 역대 위정자들의 국가관이 참 아쉬울 뿐이다.

태행산 관광은 작년 가을부터 시작되었으나 시험적 관광이고 현재까지 6개 팀을 안내하였지만 매번 코스가 변경되는 바람에 기사가 길을 헤매기도 했었다. 이제 코스가 확정되어 4월부터 정식 운영될 예정이며 우리 팀이 첫 테이프를 끊는 단다.

청도에는 한국 사람들이 무지 많이 살고 있단다.

많을 때는 30만이 넘었었고 경제가 침체하여 한국기업이 빠지면서 지금은 10만 정도가 살고 있으며 하여 청도 경제는 한국 사람이 키웠다는 말이 있을 정도란다.

산둥 성에 등록된 인구는 9,800여만 명이지만 유동인구를 감안하면 1억이 넘을 것이란다.

면적도 15만 6천 평방미터로 한국(남한)의 1.5배나 된단다. 국민이 5,000만 명이 넘으면 큰 나라라고 하는데 인구가 5천만이 넘는 성이 중국에는 9개나 된다면서 중국을 소개하는데 내 귀에는 우리들 한국 사람들에게 중국을 자랑하는 듯이 들린다. 조그만 나라가 지금 조금 잘 산다고 까불지 말라는 경고 같기도 하다.

보조 가이드 한성우씨도 대동하였는데 이곳 관광이 호황을 이루면 배치하기위해 미리 준비하는 가 보다. 연이나 우리들에게 가이드 팁을 추가로 더 주문하는 것이 아닐까 우려가 되었었지만 일고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주의/부탁의 말씀:

1. 한국시간과 중국시간은 1시간의 차이가 있으니 착용하신 시계의 시간에서 한 시간을 뼈면 중국시간이다. 현재 우리들 시각이 오후 4시 20분이니 중국시간은 3시 20분으로 보면 된단다.

2 , 태행산 관광은 3일 내내 산행위주로 등산하는 것이기에 안전에 각별이 유의해야 한다.

하여 낙석 피해가 우려되니 모자를 반듯이 착용하고 운동화에 걷기 편리한 평상복을 입어라.

해발 1,000미터 고지를 산행하는 것이기에 바람에 유의하고 내복을 두껍께 입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이번 관광은 산둥 성, 허베이 성, 허난 성 3개성을 이동하는데 산둥 성 쪽은 도로가 잘 시설된 편이지만 허난 성 쪽 지방 소도시에서는 도로가 좁고 교통상황이 무질서 해 보이지만 중국 사람들은 만만디 천천히 움직이니 길을 건널 때 결코 서둘러 뛰지 말고 천천히 걷는 것이 더 안전하다.

4. 시내식당이나 호텔의 화장실은 현대식으로 시설되었지만 산간의 화장실은 옛날 그대로 여서 아주 후지니 이해하라. 칸막이도 없고 물도 안 나오지만 좌변기 자체가 없어 파리가 들끓는 여름철에는 혹간 화장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관광객도 있었는데 계속 개발 중이니 무조건 이해하란다. 아울러 산행 시에는 아예 화장실이 없으니 산행 전 가급적이면 용변을 마쳐라. 산속에서의 용변/특히 여자들은 알아서 처리하셔야 한다.

5. 식수는 가이드가 하루 2병씩 지급하는데 더 필요하신 고객은 능력 밖이니 각자 구입해 마셔라.

6. 아침 7시 50분에 호텔 체크아웃 하니 잃어버린 물건 없이 잘 챙기시고 시간시켜 주시고.

7. 이곳은 아직 팁이 생활화가 안 되어 있어 아무 곳에서나 팁을 주시면 안 됨(버릇이 나쁘게 들면 안 됨). 가이드가 주라는 곳에서만 주란다. 호텔에서 나오실 때 방당 미화1불을 놓고 나오면 된단다.

8. 이곳 안마시술소는 수용인원이 20여명 이내로 소형이라 인원이 많으면 수용이 안 되니 미리 미리 말씀해 주셔야 예약할 수 있다.

9. 이곳에서는 한화나 미화는 사용이 안 되니 위엔 화가 필요하신 분은 가이드에게 신청하라.

그리고 간혹 현지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거스름돈을 받은 경우 가짜 돈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본인인 꼭 확인하란다. 지폐일 경우 햇빛에 비쳐보면 음화에 모택동 모습이 보인단다. 정부의 엄한 처벌로 위폐사용은 거의 없으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운이 나쁘면 받을 수도 있으니 유의하란다. 뭐 어쩌라는 소리인지???????

17:00 중간 휴게소에 정차 용변.(아주 한산함.)

산둥 성 성도 제남에서 허난 성 안양시 까지 고속도로 390여 km거리의 대 평원을 달린다. 허베이 성을 지나면서 조그마한 야산을 몇 군데 지나긴 하였으나 산둥 성 관내에서는 산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에는 화북, 동북, 산동, 산하 4대 평야 지대가 있는 데 우리가 달여 온 평야는 화북평야이고 농사는 밀과 옥수수를 주로 심는단다.

이곳에서 수확한 옥수수가 북한에 구호물자로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고속도로 주변에는 포플러 나무가 정부의 계획적인 식목인 듯 잘 관리하고 있다. 식목의 목적은 방풍림 조정 외에 묘목용으로도 심었다 하는데 내 눈에는 접도 구역 내에 개발제한의 목적과 대평원의 녹화사업 겸 조경 사업이 주된 목적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밭 가운데는 산소(묘)가 간혹 보이는데 잔디가 없는 맨 흙 봉군의 무덤이다. 이도 대부분 옛날 것이고 최근에는 주로 화장을 한다함. 허나 간혹 최근에 묘를 쓴 듯 꽃과 만장이 휘날리는 묘도 보인다.

청도시 주변에는 관광명소가 많은데 시내에서 40키로 지점에 위치한 노산(老山)은 해발 1133m로서 계곡의 폭포와 기암석 등의 경치가 장관이며. 중국 8대 도교 발산지중 하나인 태청궁, 태평궁 등의 도교사원이 있으며, 진시황도 불로초를 얻으러 이 산으로 사람을 보내기도 한 유명한 산이 이며 청도석도에는 옛날 한국의 신라시대에 청도에 들어와 국제 무역을 주도하며 정착해 살았던 장보고 장군의 유적지 와 법화원 유명하고 제남 시 관내에는 200여개의 크고 작은 천연 호수가 있는데 지하수가 샘솟아 형성된 호수로서 흑호천에는 샘물이 2미터 높이로 용솟음치듯 솟아올라 장관을 이룬다 한다.

산둥 성 농가 주택은 평 슬래브 형 지붕이 많고 허베이 성 농가 주택은 삼각형 기와지붕이 많으며 허난 성 농가도 평 슬래브 지붕이 주를 이룬다. 성마다 지붕형태가 차이가 나는 이유가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안 오고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위도 상, 해발 상 눈과는 차이가 없을 듯 한데 가이드에게 일일이 물어 볼 수도 없고 그냥 넘어갈 수밖에 .......

농가주택을 바라보노라면 답답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마을의 집들이 다닥다닥 연이어 지어져 집과 집 사이에 공간이 없어 그러하기도 하나 지붕에 처마란 것이 없어 집과 외부가 단절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집 구조에 여유 공간이 없다. 한국 농촌에는 초가지붕이건 기와지붕이건 지붕이 있어 농기구나 농작물 등을 비를 피해 보관 할 수도 있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처마 지붕 밑에서 비를 피할 수도 있는 구조이지만 중국 농촌의 집은 그런 여유 공간이 없다. 멀리 차장으로 보아 건물내부 배치가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치 않고 언급하기는 무리하지만 대부분 1층단층 건물이고 전면에만 출입문과 작은 창문 두, 세 개가 보일 뿐이다. 따라서 땔감은 어디다? 화장실은 어디고 농기구 창고는 ? 살림도구와 음식물은 어디에 보관하는지? 또한 자녀들과 노부모는 어찌 방을 나눠 잠을 자는 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이니 농촌생활상이 암담해 보인다. 3면의 벽을 봉쇄한다는 것은 추워서 그런 다기 보다 의심 많은 한족이라 도적의 침입을 대비하여 창문을 최소화 한 것은 아닌지……. 또한 중국의 황해 연안에는 황사 현상이 자주 발생하여 흙먼지에 타성이 밴 것인지 아니면 불요불급한 비경제적인 일에 돈과 시간과 노력을 결코 허비하지 않는 국민성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건물 관리를 전혀 안하는 것 같다. 쉽게 말하면 건물 외벽에 전혀 화장을 안 하는 것 같다. 연한 주황색 기와에 황사 먼지가 겹겹이 쌓여 본색이 퇴색해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기 때문이다. 이는 상가 건물도 마찬가지이다. 외벽 도색도 전면만 칠하고 양 측면과 후면은 시멘트 미장색 그대로인 건물이 대다수이다.

가이드에게 묻고 싶어도 그들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 같아 참기로 한다.

경항 대운하는 허베이 성의 북경에서 산둥 성을 거쳐 장쑤 성 항주 시까지 연결되는 1,500여 km(? :못 알아들었음) 가넘는 대운하인데 춘추전국시대부터 일부구간에서 운용해 왔었지만 수양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집정하면서 수 백 만 명을 동원 확장 공사를 하여 개통했으나 당시에는 별로 활용치 못했고 당나라 때에 와서 가장 요긴하게 활용되다가 청나라로 넘어오면서 활용이 미미해지며 400여년을 사용하지 않다보니 지금은 이름만 있는 운하가 되었단다. 꼭 보고 싶은 사람은 항주에 가야 관광코스로 개발된 운하의 제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여행 일정표상에는 첫날 이동 중 경항 대운하 차창 관광이라 언급했는데 고속도로 교량 위라 버스는 정차 할 수 도 없이 그냥 지나가며 가이드가 대운하라고 한마디 한다. 이도 그냥 지나칠 번 한 상태이다. 그리고 지금은 강도 운하도 아닌 운하 자리일 뿐이다. 폭이 300미터가 넘는 듯 하지 만 강물이라기보다 농경지 중심부에 실개천이 되어 아주 소량의 개천물이 굽이굽이 돌며 흐르고 양옆 평지에는 농작물(밀밭과 휴경지)을 경작하고 있어 가이드의 안내가 없었으면 농경지의 일부로 그냥 지나칠 번 한 상황이라 운하라는 말은 역사적인 기록 일 뿐이다. 버스를 세우고라도 차창 밖으로 사진 촬영을 하며 가이드가 관광안내를 하지 않는 한 여행일정표상 경항 대운하 차창 관광이란 표현은 안하는 것이 좋을 듯함.

산둥 성에서 허베이 성으로 접어들면서 고속도로의 교통량이 증가한다. 그리고 대형 화물차가 대부분이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대형 화물차 들이다. 앞바퀴에 3개 축. 뒷바퀴 3개축에 적재함을 3개 연결하여 대형버스보다 3미터 정도 더 커 보이는데 적재 중량이 몇 톤이라고 표기 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는 25톤 정도의 화물차가 대형인데 40톤이 넘을 상 싶다. 그리고 화물적재함의 높이가 1.5미터 이상 높다. 경랑화물을 많이 적재하기 위함일 것이다. 대륙을 횡단하는 20억 국민들의 일용품들을 운송하기위한 대량 화물운송 체계의 일환인가 보다.

화물열차 역시 7,80량을 견인하는 대단위이다. 화차 총연장이 500미터가 넘는 듯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 몇 군대 시가지를 지나면서 보니 한국에서 볼 수없는 다양한 수송수단이 운용되고 있다. 승용차는 국제적 모델들의 전시장임은 차치하고 대형화물차 외에 중소형차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3윤 화물차도 상당수 보인다. 3윤 화물차가 소, 중, 대형이 있어 대형은 한국의 2.5톤 트럭 화물정도를 적재하고 움직이는데 넘어지지 않을 까 걱정스럽고 또 신기한 것은 딸딸이 화물차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나라 경운기 엔진에 화물 적재함을 연결한 화물차도 있고 자전거와 리어카를 연결한 화물차도 있다. 정말로 다양한 차종인데 성 정부에서 사업 승인 시 규제가 없는 듯 수송 장비 선택 운용 폭이 한국보다 훨씬 더 다변화된 듯함.

버스에서 감 선배가 집 팔아 여행 다닌다고 자랑하듯 한 소리에 비슷한 연배의 일행이 조금은 비아냥거리는 조로 맞장구를 치며 어디 집을 팔았냐고 질문을 한다.

인생 부귀영화가 모두 각자의 운명이라는 감선배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관광여행 버스 내에서 인사도 없는 초면지제에는 어색하게 들린다.

얼굴이 익던 초면이던 돈 자랑,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다.

19:30 4시간 45분간 버스 탑승 이동 안양시 도착.

호텔 투숙 전 시내 식당에서 석식 (식당 직전 상점에 들려 가이드 식수 구입, 집사람은 중국 과자 3종 10원에 구입). 밥 외 11가지 요리 나옴. 향이 짙어 구미에 안 맞음. 이곳에 관광 상품이 개발된 지 오래지 않아 아직 한국인 입맛에 맞는 조리가 안 되고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가이드의 부탁도 있어 투정 않고 식사를 때움.

개별 일행 (10명)과 개인택시 일행 ( 9명: 이들도 70대 초반 이라함)으로 나누여 식사를 하는데 이들은 반도 안 들고 일어났고 우리 식탁은 그래도 80%정도는 먹은 듯하다. 여행 가방이 버스화물칸에 있어 반주를 못해 아쉬웠다. 그리 바쁠 것도 없는데 식사는 30분도 안되어 끝난다. 11가지 요리가 다 나오기도 전에 수저를 놓은 사람이 반도 넘는다. 이런 식사관행을 현지 사람들은 뭐라 할지?????

20:20 호텔(안채 호텔 705호실) 투숙

호텔은 4성급이라고는 하나 방에 소형냉장고는 식수도 없이 텅 비어 있고 전기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 휴대해 간 소주로 갈증을 면하고 식이섬유 화이버는 녹차를 끓인 후 풀어 마시려 하였지만 금세 묵으로 변해 마시지 못함.

밤에 추울 것 같아 집사람은 휴대해간 전기요를 침대에 깔고 나는 소켓을 찾지 못해 그냥 잠을 청했으나 한밤에는 히터가 안 들어와 추워 잠이 깨어 할 수없이 집사람 침대에 같이 누워 잠.

2010.03.27 토요일 맑음

06:00 모닝콜

06:30 식사 전 나려가 호텔 주변 환경 사진 촬영.

새벽이라 시내는 한산 하겠지만 건물들이 먼지에 찌들어 후줄 구리 해 보인다.

07:00 조식

호텔 뷔페식인데도 야채 요리에 향을 썼다. 작일 석식보다는 향이 약해 그런대로 먹을 만한데

국이 없어 오렌지 주스로 갈증을 해소해야 했음.

08:00 체크아웃 안양시 소재 은허박물관으로 이동

09:00-10:00 은허 박물관 관광






은허 박물관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요약하면

기원전 1700여 년 전부터 이곳이 상나라의 도읍이었으나 기원전 1050년 경 상나라가 멸망하고 주나라가 점령해 통치하면서 상나라를 은나라고 불렀고 청나라 때 이곳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가 농기구에 손가락을 다쳤는데 밭에서 발견된 동물 뼈 조각을 갈아서 환부에 발랐더니 피가 금세 멎으면서 농촌에서 지혈제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이것이 소문이 퍼져 약방에서 이를 수집 약제로 팔기 시작했고 문자가 새겨진 뼈 조각은 흠이 있다하여 값이 떨어지는 바람에 문자를 갈아 약방에 내다 팔았다하며 그러던 중 청나라 때 양의 학을 배운 의사가 이를 접하고 전국적으로 수집하면서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뼈에 새겨진 것이 고 문자 같다는 생각을 청나라 황실에 보고하면서 이를 정책으로 받아들려 연구를 하게 되고 연구결과 은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기록한 역사 문서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고 청나라 말기 중국에 세계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진주하면서 불란서, 미국 ,일본 등으로 유출되었는데 일본이 가장 많이 가져갔고 한국에는 2개가 유출되었다 한다. 현세에 들어 이곳에 박물관을 지으면서 은나라가 망한 곳이라고 하여 은나라 은자에 패망할 허(옥편에는 언덕 허자임)박물관이라 명명되었으며 이곳에서 발굴된 선사시대 은나라의 유물들이 보관된 박물관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하는데 그의 설명보다는 백과사전 자료를 첨부한다.

은나라 당시 사용된 청동 유물 중국 최초 문자가 새겨진 갑골

<주1: 은나라>

중국 고대왕조. 스스로는 상(商)이라 하였으나 이 나라를 멸망시킨 주(周)나라가 전(前) 왕조를 은(殷)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상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대략 BC 17∼BC 16세기 무렵부터 BC 11세기 중반 무렵까지로 알려져 있다.

<주 2: 전승과 갑골문의 발견>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와 그 밖의 고문헌(古文獻)에 따르면 시조 설(契)의 어머니 간적(簡狄)은 유융씨의 딸로서 제곡의 차비(次妃)였는데, 현조(玄鳥;제비)의 알을 먹고 설을 낳았다. 설은 우(禹)의 치수(治水)를 도왔으며 순(舜)에 의해 상(商)에 봉해졌다. 다음 대인 소명(昭明)부터 제12대 주계(主癸, 갑골문에는 示癸)까지 부자상속(父子相續)이 행해졌으며, 그 뒤에는 천을(天乙;湯王, 갑골문에는 大乙)이 계승했다. 이 이전에 도읍을 여덟 차례나 옮겼으며, 탕왕 때 박(지금의 河南省 曹縣 부근)으로 옮긴 뒤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무왕(武王)이라고 하면서 천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것이 은왕조(殷王朝)의 시작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천도해 탕왕에서 제18대 반경(盤庚) 때까지 다섯 차례나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제30대 주왕(紂王;帝辛) 때 나라가 매우 혼란했는데, 이때 서쪽에서 일어난 주나라에 의해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사서(史書) 속의 전승이 과연 사실이었는지의 여부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으나 1899년 허난성[河南省(하남성)] 안양현[安陽縣(안양현)] 부근의 샤오툰[小屯(소둔)]이라는 마을 옆을 흐르는 위안허강[洹河(원하)]이 범람해서 제방이 무너졌을 때 그곳에서 문자가 새겨진 귀갑(龜甲)과 수골(獸骨)의 조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우연한 계기에 이것을 입수한 유철운(劉鐵雲)이 이 문자를 해독한 결과, 이 가운데서 문헌에 나온 은나라 왕명을 많이 읽어낼 수 있었다. 이로써 유물들이 은대의 유물이라는 사실과, 또는 역으로 사서에 있는 기록이 근거없는 기록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은왕조가 실재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 뒤 갑골편은 같은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 1928∼1937년 사이에 중앙연구원역사어언연구소(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에 의해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행해져 대량의 갑골편과 함께 거대한 왕릉과 궁전터 그 밖의 많은 유물·유적이 발견되어 이곳이 《사기》에서 말하는 은허(殷墟)인 동시에 반경에서 마지막 왕 주왕까지의 도읍지일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해졌다. 20세기 중국 고고학 고대사연구에서의 최대발견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사서에서는 이보다 앞선 하왕조(夏王朝)가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 그 실재를 증명하는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은 왕조가 중국 역사상 확인된 가장 오래된 왕조이다.

<주3: 갑골문자>

귀갑(龜甲)이나 짐승의 뼈(주로 소의 견갑골) 위에 새겨진 중국 은(殷)나라의 상형문자(象形文字). 현재 알아볼 수 있는 중국 최고(最古)의 문자로 귀갑문자·귀갑수골문자(龜甲獸骨文字)·은허문자(殷墟文字)라고도 한다. 짐승의 뼈를 태워서 점을 치는 법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거기에 글자를 새기는 것은 대개 은나라 때의 안양기(安陽期)에 한정되고 그밖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서주시대(西周時代) 전반기의 유물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복점(卜占)의 절차나 대략을 말하면 정형(整形)인 귀갑이나 짐승의 뼈 뒷면에 찬(鑽)·착(鑿)이라 불리는 홈을 파고, 그 찬 또는 착 부분에 불에 탄 나뭇조각 따위를 눌려 붙여서, 표면에 복(卜)자 모양의 틈, 즉 복조(卜兆)를 만든다. 그 복조가 나온 표면에 점을 치려는 내용, 때로는 그 복조에 대한 왕의 판단과, 실제 어떠한 결과가 발생했는지를 예리한 칼날로 새긴다. 새겨진 글자에 빨간 안료가 발리는 경우도 있다. 이 복점의 기록은 왕조(王朝)의 신성한 기록으로서 한 곳에 모아 보존되고 있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쌓인 그대로 가져다가 땅 속에 묻었다. 이 기록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899년 청나라 말기의 금석학자 왕의영(王懿榮)이 베이징[北京(북경)]의 한약방에서 용골(龍骨) 위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한 것이 최초의 일이다. 문자의 수는 약 3000인데 그 중 해독된 글자는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갑골문자가 기록한 것은 제사·농업·전쟁·수렵·일기, 왕의 행동과 질병 및 신들의 재앙에 관한 복문(卜問)이었다. 이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말미암아 은나라의 정치·경제·문화 등 각 방면에 걸친 그 구체적 상황이 명확히 밝혀지자 전설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은왕조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왕조임이 실제로 증명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서주시대 초기의 복갑(卜甲)·복골(卜骨)이 몇 개의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찬이나 착이 모가 나 있다는 등 공통되는 특징을 지닌 이 시기의 유물 가운데서도, 일괄 정리된 양의 각자(刻字)를 가진 것으로서 산시성[陝西省(섬서성)] 주원(周原)에서 출토된 갑골문이 특히 주목된다. 주원의 갑골문은 주왕조(周王朝)의 종묘유적(宗廟遺蹟)이라 생각되는 건물 마루 밑에서 발견되었는데 글자가 있는 것이 거의 300조각에 이르고 은나라 말기부터 서주 전반기의 것으로서, 극은(克殷) 이전의 은왕조와 주족(周族)과의 관계를 엿보게 하는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은허의 갑골문에 대한 개설서(槪說書)로서는 현재, 진몽가(陳夢家)가 쓴 《은허복사종술(殷墟卜辭綜術)》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자서(字書)로서 손해파(孫海波)의 《갑골문편(甲骨文編)》이 있다.

<주:4 주나라 >

주(周)는 기원전 1046년 경부터 기원전 256년까지 상을 이어 중국에 존재했던 나라이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나라로, 이 시기에 철기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견융이 침략하여 기원전 771년 유왕이 살해되고 제후에 의해 옹립된 평왕이 호경(鎬京, 시안)에서 낙읍(洛邑, 뤄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는데,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 이후를 동주라고 구분한다.

주나라는 본격적인 봉건제도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국 초부터 무왕은 자신의 친족들과 태공망 등 개국공신들에게 영토를 나눠주며 다스리게 되었고, 이것이 시간이 지나 독립적인 국가를 유지하는 봉건체제가 되었다. 춘추 시대의 봉건 국가들은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을 인정하며 그 안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다퉜으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주나라 왕실의 정통성은 유명무실화 되었고, 급기야 주나라 왕실이 폐지되고 전국 칠웅의 국가들이 형식상으로도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임을 내세우게 된다.

가이드가 전하는 은나라 멸망 야사

은나라 말기 이곳 위수 강가에 살고 있던 강태공은 문무에 해박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지만 딱히 하는 일 없이 늘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며 소일했다고 한다. 고기를 낚으려면 고기가 걸리도록 바늘이 휘어져 있어야 하는데 그는 늘 곧은 바늘로 낚시를 했단다. 사람들이 연유를 물으면 잔고기 잡아 무엇 하나, 대어를 잡아야지 하며 잡히지도 않는 낚시질에 여념이 없어 했단다. 은나라 서쪽에 있던 주나라 문왕은 이곳 동쪽에 위치한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며 전력 증강에 전념하고 있던 차 이곳을 지나던 병사들이 강태공의 낚시질 이야기를 주나라 왕궁에 보고 하였고 이는 보통사람이 아닌 듯 하고 문무 세상사에 박식하다는 강태공을 군사로 초청하기로 정하고 강태공의 인물됨을 알아보고자 병사를 보내 왕궁에 입궐할 것을 제안하나 거절되었고 다시 대신들을 현지에 출장 보내 입궐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하니 물라는 큰 고기는 안 물리고 웬 송사리새끼만 문다면서 제안을 거절함에 주왕은 사냥을 핑계 삼아 이곳에 출타하려 하니 풍수지리에 능한 신하 하나가 왕께 이른다. 오늘 사냥에서 범이 아니면 용을 한 마리 잡을 것이라 제언했다는데 이곳 강가에 이르러 왕은 강태공을 만난다.

정중한 인사와 입궐을 제안하니 왕보고 세상에 찌들어 냄새가 나서 상대할 수 없으니 자기를 만나려면 3일간 목욕 재배하고 다시 오라하여 그리하고 마차에 타자하니 강태공은 몸이 아파서 말이나 마차에 탈수가 없으니 업고 가라한다. 다른 사람은 안 되고 꼭 왕보고 업고 가라한다.

융성한 국가 건설을 위해 강태공을 꼭 모실 생각으로 아무 말 못하고 업기는 업었는데 이 노인이 얼마가 무겁던지 걸음을 옭길 수가 없었단다. 200여 보를 걸었는데 너무도 무겁고 힘들어 쉬었다 가자하니 그런 힘으로 무슨 대사를 운운하냐 하며 계속 더 가라 한다. 그리하여 죽을힘을 다해 90여 보를 걸었을 때 기진맥진한 왕은 더 이상을 걸을 수 가 없어 강태공을 나려 놓고 숨을 고른다. 이에 태공은 왕이 자기를 업고 290보를 걸었으니 자신도 주나라를 290년 동안만 봐주겠다고 한다. 이에 주문왕은 태공의 의중을 알고 다시 업고 더 가겠노라 하니 이것이 문왕의 운세라며 더 이상 업기를 거절하고 입궐하여 국정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하며 국력을 증대해 결국 은나라를 정벌하지만 주나라는 290여년 만에 내분과 외침으로 서주, 동주로 분리되면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단다.

<주5:강태공>

중국 은(殷)나라 말 주(周)나라 초 군인·정치가. 《사기(史記)》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에 따르면, 그는 백이(伯夷)의 후손으로 산둥성[山東省(산동성)] 해안지방 출신인데 영락(零落)하여 웨이수이강[渭水] 근처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에 주나라의 문왕(文王;西伯昌)을 만났다. 문왕은 여상이 바로 선왕(先王)인 태공(太公)이 흠모했던 현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태공망(太公望)이라 칭하고 군사(軍師)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여상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주나라군의 지휘자로서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활동을 하여 그 공으로 제후(齊侯)로 봉해졌으며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의 창시자가 되었다. 제나라의 영토는 지금의 산동성으로 많은 이민족이 있던 곳이었으나 그들을 주나라의 백성으로 동화(同化)시켜 주나라왕조의 동부지역을 안정시켰다. 또한 농업·어업·상업 등의 산업을 일으켜 제나라의 경제적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하였다.

10:00-11:40 석판암으로 이동

안양에서 도화곡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지방도로라 노면 상태가 불량하고 3차전인데 중앙 2차선은 추월하기 위한 노선으로 먼저 들어선 차량이 우선인가 보다.

마을 /상가건물 건물 먼지 뒤집어 써 미사용 건물처럼 보임.

오후인대도 연무 현상으로 시계가 불량하여 먼 산세가 뿌옇게 보인다.

선명한 사진 촬영은 불가해 보인다.

안양에서 1시간 40여분을 달려 석판암에 도착했다

“ 태행산 입구“라는 간판을 지나 버스는 2대의 버스가 교행이 안 될 것 같은, 부딪치면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좁은 2차선 도로를 굽이굽이 돌고 돌아 산을 오르고 나리며 계곡 아래 좁은 분지에 도착한다.

산 중턱에서 500미터 정도의 긴 굴과 50여 미터의 짧은 굴이 있는데 이곳 주민들이 정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무보수로 5년간의 고생 끝에 완성된 암벽동굴 도로란다. 변변한 측량 도구도 없이, 설계도도 없이, 현대식 굴착기도 없이 어찌 암벽 속을 뚫었는지 경탄스럽고 신기할 뿐이다. 굴을 내기 전에는 더 높은 상봉까지 좁은 소로를 돌고 돌며 걸어 올랐을 것인데 화물은 어찌 운반했을 것인지?????

차창에 비치는 장엄한 준봉들을 촬영하려 해 보지만 차가 좌우로 흔들리고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 포커스를 맞추기가 어렵고 또 셔터를 누를 수가 없다.

석판암은 울창한 원시림과 높이 1.000여 m의 웅장한 절벽, 폭포, 기암괴석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태행대협곡 내에 있는 풍경구 중 하나로 주차장에 하차하니 사방이 바위절벽으로 울을 이룬다.

와! 소리가 절로 난다. 지도에서 분지란 용어가 있지만 분지라기보다는 바위 항아리 속에 ,아님 지하 우물 속 바닥에 나린 것 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깎아지른 바위절벽은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 있고, 바위 면은 여러 개의 띠가 가로로 짙게 층을 이루고 있어 마치 시루떡을 엎어 놓은 형상이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니 바위 절벽 중간 중간에 계단 같은 띠가 보인다. 이 띠는 관목들이 자라고 있는 층이다. 본디 바위산이니 흙이 없었을 것이매 어찌 나무들이 뿌리를 나리고 성장할 수 있었는지????? 또한 층간 능선은 대체로 편편해 이도 사람들이 암반을 짤라 내고 공사를 한 듯 형상인데 수십억 년 전 해수면에서 침적된 지면이 굳어 바위가 되고 이것이 솟구쳐 산이 되고 연약한 지반은 대 홍수로 씻겨 나갔을 것인데 절벽이면 절벽이지 어찌 중간 중간 계단 층이 형성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의 작품이라고 할 수 밖에 없겠다.

태항대협곡은 내몽고 초원 아래 산시 성 북부에서 시작하여 산시 성과 허베이 성, 산시 성과 허난 성 경계에 남북으로 600여 KM, 동서로 250여 KM에 달하는 광대한 협곡으로 태행산(太行山)은 경치가 웅장하고, 웅대한 영혼을 담고 있다. '태항산'으로도 불리는 태행산은 문인묵객들의 창작의 원천이 되었고, 일제침략기에는 중국과 우리 동포에게 혁명기지가 되었으며 이곳에 있는 15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인공수로 '홍기거(紅箕渠)'는 사회주의 중국 건설과 성장의 상징이라고도 한다.

11:40-12:30 중식



버스에서 나려 사방 셔터를 누르다 보니 맨 나중에 쑥스러운 마음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어느새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고 집사람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식당 건물은 최근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듯 식당과 잠자리를 겸한 우리나라의 산장이나 펜션형태로 건물 벽에 운해여행사 현수막이 걸려있고 지붕에는 운해도가촌이란 간판이 걸려 있다. 식당내부 시설도 깨끗해 보인다.

관광을 온 것인지 밥 먹으로 온 것인지 카메라를 휴대한 4명을 제외한 15명은 한 바퀴 돌아보고 이내

식당으로 들어간다. 메뉴는 엇 저녁 식사와 비슷하다.

가이드의 엄살 보다는 훨씬 양호한 요리다. 두 번째인지라 벌써 현지에 적응된 듯하다.

반주를 위해 소주잔을 주문하는데 영어로도 수화로도 안 통해 가이드를 불러 주문하였고 잔을 가져오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가이드의 말대로 만만디 하니 그러려니 할 수 밖에 …….

12:30-13:30 도화곡 관광




중식 후 다시 버스를 타고 산 옆구리로 꼬불꼬불 이어지는 좁은 포장도로를 20여 분간 달리자 도화곡 매표소에서 정차, 입장료를 지불하고 도화곡(桃花谷) 입구로 들어섰다. 공원관리 사무소이겠지만 이곳의 건물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이다. 이곳 건물들이 대부분 돌로 지어 지긴 했지만 이 건물은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돌 블록을 만들어 건축했고 지붕 역시 돌을 정교하게 대리석 같이 다듬어 기와지붕 잇는 방식이 아닌 대리석 벽면 시공하듯 돌과 돌 사이에 방수 시멘트로 매지를 넣어 공사한 듯하다. 도화곡 관광을 시작하면서 최근에 지은 건물인가 보다. 도화곡은 한겨울에도 복숭아꽃이 핀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한겨울에 피는 복숭아꽃, 한 여름에도 계곡에 어는 얼음덩이, 그리고 내리치면 돼지 울음소리를 내는 '저규석(猪叫石)'이 도화곡의 3대 명물이라 하지만 계절이 빨라 그런지 복송아 꽃은 고사하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아직 겨울잠에서 해어 나지 못한 듯 드문드문 진달래와 개나리꽃만 보인다.


도화곡 입구에서 100미터 가량 걸어들어 가니 시루떡 같은 바위 절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절벽에는 비룡협이란 글자가 있다. 한문의 뜻으로 보면 용이 날아 오른 협곡이란 뜻인데 계곡 생김새가 용상처럼 굽이굽이 처 오르는 형상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이어 승차관광도로와 도보관광 도로 갈림길에서 200미터 정도 걸어 올라가니 황룡담의 모습에 다가선다. 이곳 역시 항아리 형세이다. 시루떡 같은 누런 바위 절벽이 울을 이루고 울 한 복판에 폭포수(관폭대)가
흘러나려 고인 연못(황룡담)을 이루고 있다. 상단 계곡에서 흐르던 물이 관폭대 앞에서 1-2미터의 좁은 계곡사이를 빠져 흘러내리는데 수량은 그리 많지 않다.

본디 바위 절벽으로 막혀있었던 것이 지진으로 절벽사이에 금이 생기고 물이 새어 나가면서 억겁의 세월에 점차 물길이 확대된 형세다. 여름철 수량이 많으면 장관일 듯하다. 사진 몇 장 찍고 계속 올라간다.



황룡담에서 위쪽의 바위 옆구리로 빙 둘러쳐진 철 계단을 따라 10여분 가량 올라가자 제법 길이가 있는 폭포와 못은 계속된다. 어디서인가 큰 복 소리가 들린다. 지그재그 형 철 계단 길은 계속된다. 동굴 같은 좁은 협곡 앞에 약간의 좁은 광장이 있는데 대형 북 3개가 철봉으로 설치되어 있고 한 여자 관광객이 복을 비는 마음으로 북을 치고 있다. 계곡이 흔들린다. 관광기념이 될 상 싶다. 나는 사진만 찍고 앞서가는 집사람을 따라 가기가 바쁘다. 협곡 양편으로는 10억년의 세월을 이어 온 잘 앉혀진 시루떡 모양의 바위가 자리를 잡고, 그 사이로 5-10미터 넓이의 계곡에 물이 흐른다. 계곡에서 바로 5미터 정도 높이의 바위 옆구리에 철 계단이 계곡을 따라 죽 이어진다. 때로는 머리 위로 바위가 내밀어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 쪽에 바위가 나와 있으면 몸을 약간 비틀기도 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현기증이 나서 앞 계단만 올려다보며 발걸음을 옭기고 다리를 쉬는 시간이면 먼 산봉우리만 처다 본다.

두 마리의 용이 구슬을 가지고 놀았다는 이룡희주(二龍戱珠)를 지나서 10분 정도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기념품 상인들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손에 몇 가지를 들고 파는 행상도 있고 좌판을 벌린 장사. 작은 돌집 건물이지만 점포상도 있다. 내 주먹 2개 크기의 공용 알 모양의 수석이 마음에 들어 값은 물으니 한국 돈으로 10만원이란다. 보조가이드에게 흥정토록 하여 2만원에 타협을 보았으나 아무래도 비싼 것 같아 휴대하는데 부담스럽고 공항에서 반출이 허용될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지나쳐 하산을 위한 집결지 부근에서 좌판 상인이 주먹 하나만 한 타원형의 산호석(비단 문양) 같은 수석을 팔고 있어 관광기념으로 적합한 것 같아 흥정을 시작 결국 5천원에 구입함.

주차장 위로 올라서자 빵차(승차 관광도로)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빵차라고 하는데 한국의 차 모양으로 보면 대우의 다마스보다는 조금 크고 기아나 현대 봉고보다는 훨씬 작지만 8명이 탑승한다. 여행 옵션으로는 이차를 타고 버스 주차장까지 하산하는 것이지만 추가 옵션으로 1인당 1만원씩 더 지불하고 태행산 대 협곡 전망대까지 올라갔다가 하산하기로 했다. 에이 팁 일행은 추가 옵션 없이 바로 하산하고 우리는 빵차 3대에 나누어 타고 비좁은 바위 절벽 길을 굽이굽이 지그재그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해발 1200고지에 있는 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까지 올라오면서 절벽 여기저기 순 돌로 지은 움막 같은 농가들이 보였고 전망대 앞에선 20여 가구의 산촌마을도 보인다.

한마디로 모든 식구가 한 방에서 비와 눈만 피하고 사는 집 같다.

밀과 옥수수 농사를 짓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의식주를 해결하는지 ?????

외부세계가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먹고 일하고 자는 석기시대 식생활 이상 더 발전한 것이 없는 삶!

이들이 신선같이 사는 것인지 아니면 유배된 자들의 마지막 연명 수단인지 몰라도 끊질 긴 생명력. 환경적응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놀라운 것은 해발 1000고지가 넘은 고산 절벽에 돌로 밭두렁을 만들어 놓은 농지의 모습이다.

밭두렁의 높이가 경작지 폭보다 더 높다. 맨 바위벽뿐인데 흙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또한 이 밭두렁은 일이년에 쌓아 올린 것이 아닌 수백 년에 걸쳐 조상대대로 연연히 이어온 공사였을 것 같다.

이곳에 초등학교도 하나 있다. 학생이 몇 명인지는 모르겠으나 건물 규모로 봐서 20여명 내외 일 상 싶다. 이학교도 공부가 필요 없다고 산길 다니기 불편하다고 포기하는 경우도 많단다.

도연명은 도화원기에서 이곳을 이상향으로 표현하여 도화원이라 하였을 것이나 좀 더 깊이 되짚어 보면 인간의 통행이 .삶이 불가능한 고산 절벽지대이기에 보통사람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들어왔다고 보기는 힘들고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국가 간 계속되는 전쟁을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었거나 또는 죄를 짓고 이곳으로 도망오거나 유배를 오면서 이곳의 삶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여 이곳에는 군신사이가 없고 주종사이가 없이 오직 부자간이 있을 뿐이고 가족끼리 농사지으며 먹고 잘 공간이 있음에, 살아있음에 만족해야 하는 태초의 삶을 이상향으로 과대 포장함에는 억지가 아닐까 싶다.

전망대에서 태항산 대 협곡의 풍광을 돌아보면서 경치하나는 신선들의 고향 같지만 인간의 의식주를 생각하면 숙연해 진다.

이곳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면서 산속에서 농사만 짓던 아녀자들 까지 관광기념상품이나 이곳 특산물인 건 과류 등을 들고 나와 장사를 시작한 모양이다. 가이드의 당부처럼 옷도 단순 남루하고 화장도 안한 초라한 모습이고 이들을 보고 웃으면 시비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 모른 체 지나가라하였지만 관광객이라야 동일시간대 입산 객 기준하여 내외 국민 모두 100여명도 채 안되는데 물건 팔려는 상인들이 더 많은 것 같고 이들의 판매량이 얼마나 될지 ????? 하여 허기진 배를 움켜주고 제발 좀 사달라는 마음으로 미소를 짓고 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 온다. 어린 시절 읽었던 성냥팔이 소녀가 생각나 안타깝다. 산촌에서는 초등학교만 있어 대부분 초등학교 교육만 받는 단다. 헌데 노점상 중 일부는 초등학생 정도의 소녀들도 상당수 보이는데 이들은 학교도 안 다니고 하루 종일 나와 앉아 돈벌이를 하지만 하루 2.30위엔(한화 5천원 내외)을 벌지 못 벌지 가름도 안 되는데 그 무슨 이상향??????







중고등학교는 인주시 등 대도시로 나가야 하고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기에 대부분의 소년 소녀들은 공부를 포기하고 부모들의 생업을 물려받으며 중매결혼으로 이곳에 안착 평생을 산촌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단다.

전망대 관광을 마치고 빵차에 올라 바위절벽 길을 지그재그로 돌고 돌아 20여분 만에 주차장에 도착 관광버스로 옮겨 타고 석판암 운해 식당을 지나 20여분을 달려 왕상암 주차장에 도착한다. 정상은 하나인데 다른 계곡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빵차로 전망대에서 돌아내려오면 이곳 왕상암 주차장으로 오는 길도 있다한다.

13:30-16:00 왕상암 관광



주차장에서 바라보니 왕상암 정상 봉우리가 근엄한 모습으로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다.

해가 떴으나 멀리 높은 산봉우리는 연무현상으로 선명한 산세를 보지 못함이 아쉽다. 아울러 사진도 안개 속을 찍는 것 같아 안타깝다.

상나라 국왕 무정과 노예출신인 재상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는 설에 의하여 "왕상암"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는데 깊은 계곡 저 멀리 메산(山 )자 형상의 삼봉이 다정다감한 모습으로 계곡을 수호하는 듯 . 나그네를 영접하는 듯 우리를 맞이한다.

주차장은 한산하다. 한국 관광객을 실어온 관광버스 3대가 전부(50여명)이다. 내국인도 없는 듯하다.

왕상암 입구 조형물도 이곳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어 돌로 지어진 아취다.

주변 식당건물 몇 개가 보이지만 관광객이 없으니 빈집 같고 산에는 화장실이 없으니 무조건 용변을 보고 등산을 시작해야 한다기에 공원 관리 사무소 옆 공중 화장실에 들어가니 50년대 한국의 공동화장

실 같다. 옆 사람과의 칸막이도 없고 그야 말로 노천 방료식이라 용변 보는데 고통스럽다. 가이드가 사전 양해를 구했었기에 모두들 말은 하지 않지만 또 관광지로 개발하면서 위락시설 건물들을 신축하면서 공용화장실은 왜 현대식으로 신축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다.

산행코스는 단순했다.

출렁다리 앞에서 갈라져 산행이 가능한 사람은 왼쪽 출렁다리를 건너고 목마파를 지나 전망대에 지그재그로 설치된 철 계단을 올라 사방을 돌아본 후 우측으로 거의 평면 이동하여 80미터 직립 쇠 계단 옆을 돌아 하산한다. 등산이 불편한 사람들은 우측 길로 올라가다 좌로 올라간 사람과 만나서 뒤돌아 하산하면 된단다.

일정상에는 목마파-잔도-관경대-88통제-사자동-옥황각-운제- 왕상촌 코스를 2시간 반 동안 산행 하는 것이지만 가이드가 시간이 없다고 그냥 88미터 통제(직립 쇠 계단)옆을 지나며 하산하라 해서 이의를 달수가 없다. 88통제 계단을 올라 사자동과 옥황각 관광은 중단된 것이다. 내 욕심으로야 아깝지만 다른 일행 ,70대의 고령자들이 대부분인 우리 팀으로 보아 이곳까지 등산한 것만도 대단한 것이다. 직립계단을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물론 도색 상태로 봐서 이도 최근에 시공한 것이겠지만 8부 능선에 있는 암자(사자동)를 관광하기위해 시공한 것이었을 것이매 더더욱 아쉽다. 또한 8부 능선 일대에 몇 채의 민가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곳 90도 절벽에 바위를 디귿자 (ㄷ)모양으로 바위 절벽을 파내어 길을 냈는데 이는 최근 것이 아닌 것 같아 몇 사람의 왕래를 위해 이런 어렵고 힘들 공사를 하였다는 것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 사람의 성격을 만만디(천천히)라고 표현하지만 거북이 근성이랄까 죽을 때 까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을 보는 것 같아 숙연해 진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사자성어 “우공이산(愚公移山)”이 생각난다.

옛날 우공(愚公)이 자기 집 앞의 산을 딴 곳으로 옮기려고 오랫동안 노력하여 결국 이루어냈다는 데서 온 말이고 쇠절구를 숫돌에 갈다보면 바늘이 될 것이라고 갈고 있는 할머니 이야기도 같은 맥락의 속담으로 죽는 다는 한계보다 될 때 까지 한다는 것이 중국 사람들의 근성인 듯하다.

옛날의 만리장성 축성이나 경항 대운하 시공이 이런 근성에서 이루어진 공사들이고 최근에는

이곳 태항산 대 협곡에 152개의 봉우리를 깎고 암벽 동굴을 뚫고 뚫어 시공한 1500킬로에 이르는 인공 수로(홍기거)도 이런 근성에서 시공된 것으로 바야 할 것 같다.

우리 비 팀 중 감선배 부인만 오른쪽으로 가고 18명은 좌측코스로 산행했다.

집사람도 지방관절염이 있어 등산을 잘 못 하지만 오늘 하루 일정은 무사히 잘 마쳤다.

같은 여행사에서 온 에이 팀과 투어2000에서 온 팀은 산행코스를 어떻게 잡았는지 산행 내내 만나지 못함.

왕상암!

그대 저 높은 곳에서 위용을 뽐내며

천하를 품은 듯 당당 하오나

보잘 것 없는 찰나의 세상!

허세가 그 무슨 상관

내가 이곳에 오거나 말거나 함구하고

나 또한 그대 있음을 이제서 배알하는 터

그대가 그곳에서 억겁의 세월을 지켜왔음에

그대의 모습은 더더욱 고결해보이며

그대 있어 나또한 저 높은 이상의 실체를 이제 사 자각하였소.

그대 내가 있거나 말거나 괘념치 않겠지만

나 그대의 인고에 머리 숙여 경배합니다.

그대는 영원히 그대이어야 하고

나는 잠시 나일뿐

나는 나대로 살 것이니

그대는 그대대로 영원하시게.......




16:00-17:20 석판암에서 임주 시로 이동

17:20 임주 호텔(중주 국제호텔) 도착 투숙

내방에는 컴퓨터가 설치되어있었음. 야후와 다음 사이트에 접속하여 국내 뉴스 열람함. 천안함 침몰 원인은 아직 모르고 조사 중이라고 함.

최진실 동생 최진영이 또 자살하였다 함.

이메일도 열어 보고 답장을 쓰려하니 중국 자판이라 답장은 쓸 수가 없어 포기 함.

18:00 버스타고 식당으로 이동 석식 함.

휴대 고추장으로 ,소주로 푸짐한 석식. 백령도 해전 초계함 피격 국가 안보 문제점 의견 교환 .

감 선배와 나는 아침 버스 출발 시 백령도 천안함 침몰사고에 따른 해군 사상자를 위해 묵념을 하자고 제안한 일행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예비역 출신으로서 미안한 마음 금치 못함.

식사 후 5명만 안마 신청(20불)하고 우리는 마지막 날 하기로 함

19:30 호텔로 돌아와 인터넷으로 한국 방송시청하려니 화면이 열리지 않음(수상한 3형제 시청은 안 되고 인터넷 뉴스만 자막으로 보임)

2010.03.28 일요일 맑음.

호텔 뷔페 조식

휴대해간 고추장과 밥 채소 위주로 식사.

09:30 만선산 입구 도착

만선산(해발 1500미터)의 전설:

아주 옛날.

하늘에 사는 선녀 한분이 이곳에 목욕 차 놀러 내려 왔다가 너무 경치가 좋아 잠시 머물던 중

산속에 사는 한 농부가 노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함을 보고 그 효행에 감명을 받고 그 농부에게 사랑을 느껴 여자로 변신 연애 끝에 살림을 시작하였고 이로 하여 아들하나까지 얻게 되었는데

선녀가 하늘의 율법을 어기면서 하늘로 귀환하지 않고 인간 과 동거까지 함에 화가 난 옥황상제가 병사들을 시켜 선녀를 잡아 들여 지하 바위 속 감옥에 투옥한다.

아버지의 효행을 닮은 아들은 성장하면서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어머니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하늘나라 병사들을 싸워 무찌를 수 있는 무술을 연마합니다. 당시 이산에 살고 있던 손오공에게 무예를 익혀 인간으로서는 천하제일의 무술을 손오공과 대적할 만큼의 무예를 익히고 하늘로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쳐들어갔습니다.

옥황상제는 아들을 물리치라고 일만 병사들을 내 보내 대적하였으나 선녀 아들의 효심에 감명 받은 병사들은 아들 편을 들어 선녀 어머니를 구해 이승으로 따라 내려와 같이 살게 되면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 만개의 산 봉오리가 되었다 하여 만선 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함.

만선산 입구에 들어서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시루떡모양의 암벽 계곡사이 약간의 경사진 돌계단 길로 산행이 시작된다. 역시 연무현상으로 멀리 기암기석의 1만 산봉우리들은 안개에 묻혀 그 실상을 내보이기 부끄러워한다. 사진 찍기도 염려스럽다. 해가 떠도 저러니 언제 그 실상을 공개하려나?????



시루떡 모양의 암반이 12억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안내 간판도 보이고 20여분을 올라가니 흑룡담 폭포다. 사진 한방 찍고 산행은 계속된다. 좁고 경사가 심한 철 계단을 머리 조심, 허리 조심하며 올라가며 전망만 열리면 셔터만 눌러댄다. 얼마를 올라갔을 까? 백룡담 지나 단분구에서 산행은 끝나고 하산하란다. 나는 사진 촬영 때문에 맨 뒤를 따라 오르다 보니 그냥 바위 절벽과 기암괴석 준봉만 카메라에 잡았지 무엇을 보고 어디를 돌아 지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글씨가 있으면 사진으로 확인이 되지만 글씨가 없으니 지나는 것이 계곡이고 폭포인지라 백룡폭포를 지났는지 안 지났는지 단분구가 어디인지 일정표상 일월성석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 모르겠다.

하산 길은 오르던 길을 길 뒤돌아 하산한다. 산에 오르는 사람도 없고 우리 일행뿐이니 막힘도 없고 집사람은 내 행보와는 상관 않고 부지런히 하산한다.

가이드가 지시한 승차지점에 모두 모이는데 맨 먼저 내려 온 일행과 20여분의 차이가 난다.

11:20- 12:00 빵차 탑승 곽량촌으로 이동.

빵차를 탑승하고 공원 입구 주차장까지 가는 가 싶더니 300여 미터 직전에서 좌측 계곡방향으로 진입하고 이어 지그재그로 돌고 돌며 6부 능선 해발 1000고지까지 오르더니 굽이굽이 돌고 돌며 해발 1,000고지 절벽난간에 설치된 도로로 거침없이 달린다. 숙달되기는 했겠지만 조금만 핸들을 늦게 돌려도 아니면 제동이 조금만 안 돼도 절벽 아래로 굴러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아 절벽 반대편으로 몸의 중심을 최대한 의지하지만 간은 콩알만 해지고 절벽 쪽은 나려다 볼 수가 없음.

빵차의 이동 경로를 보면 주차장에서 만선산 정상을 기점으로 좌측으로는 우리가 도보로 산행했던 흑룡담과 단분구에 이르는 계곡이 있고 다시 주차장 주변 그러니까 정상 우측계곡은 아주 급경사라서 도보산행이 아닌 빵차로 돌고 돌며 해발 850미터 곽량촌에 이른다. “ V “자를 좌로 90도 회전해 입구는 절벽이라 좌측절벽을 돌고 돌아 올라서서 내리막길로 마을 까지 도착하고 마을에서 다시 좌측도로를 이용하여 주차장까지 나려 가는 데 이도로는 암벽 절벽에 13명이 5년간 공사하여 1977년 완성한 1,200m의 동굴도로( 절벽장량)로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는 불가사이한 공사라 한다.

또한 이곳 곽량촌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통 산간마을이라 이 소박한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무형영화를 촬영하면서 중국에 널리 알려지면서 유명해졌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많다보니 수입도 늘어 임주시 관내 산촌 마을 중에서는 가장 부촌이라 한다.




12:00 곽량촌(해발 850미터) 도착. - 12:30까지 중식

산촌 앞 도로 연변에는 상당수의 신축 식당 겸 민박집들이 있으나 그중 우리가 들린 무성 여관만 영업을 하고 나머지는 빈집 같다.

내 외부 시설이 최근에 건축되어 상태 양호함.

인근 건물 모두 한 업체가 동시에 건축한 듯 모양, 규모, 자제가 동일해 보임.

세면벽돌로 디귿(ㄷ)자 이층집 구조임.

메뉴 역시 타 식당과 유사하고 먹을 함.

택시 사장(9명)들 음식 안 먹고 가이드 시켜 휴대해온 라면 끄려 먹음.

현지인이 보면 그 비싼 음식들을 손도 안대고 나간 것에 대해 뭐라 할지???????

남은 음식 내버릴지 이웃에 나눠 먹을지 알바 아니나 너무 안 좋아 보이고 아주 비 경제적인 행동임.

차라리 식사를 취소(9인분)하고 판갑이라도 가이드에게 밥 굶어가며 라면 끓여준 대가로 팀을 주는 것이 더 경제적일 것이다.

노년 팀은 70%이상 취식함.

내가 소지해간 소주는 관광버스에 두고 나려 옆 사람이 지참한 소주를 3잔이나 얻어 마심.

12:40-13:00까지 20여 분간 무협영화 촬영 한 옛 산촌 마을 전경인 곽량촌 돌아봄.

이곳 산촌마을도 앞서 언급한바 있듯 모두 벽이고 지붕이고 담이고 돌로 지어진 마을이고 집집이 이어져 있다.

이 넓은 땅에 평지 놓아두고 경사지에 왜 이렇게 집을 다닥다닥 붙여지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마을 통로 길도 사람이 화목이나 또는 농산물을 지고 이동하기에도 불편해 보인다. 그래도 이제까지 살아 왔으니 나름대로 해결책이 있었겠지만……. 민가 시설내부를 돌아보고 싶어도 돈을 내야 한다 해서 포기했다. 좁은 출입문과 창문 안의 내부시설과 이곳의 생활상이 그리 넉넉해 보이지 않는데 이를 배경으로 무슨 영화를 찍었다는 것인지……. 기암괴석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손오공과 사오정이 하늘을 날며 적을 무찌르는 장면이라면 적당할 것 같다.

13:00- 14:00까지 산책 겸 주변 산세 관광

감진국 선배와 단둘이서 앞장서 계곡 산간 평지 도로를 산책 겸 시간을 맞출 겸 백룡굴 입구 까지 좌우 산세를 관광하고 하산하는데 일행들이 안 보인다. 처음에는 뒤따라 왔었는데 중도포기하고 모두 돌아가고 우리만 산행을 하였나 보다. 식당 앞에서 한 시간을 무엇 하며 보냈는지 ?????

감선배가 기념품 상점에서 석회석 수석을 구입하기 위해 위앤화 30위엔 빌려 달라고 했으나 돌 재실이 나쁘다고 설득해 못 사게 함.

가이드 하산 시간 급하다고 전동 카로 마중 나와 대동함.


14:00-15:00 빵차 탑승하고 하산 하며 절벽장량 동굴 도로 중간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암벽 동굴도로(절벽장랑) 관광 후 다시 빵차 타고 주차장까지 하산함.

이곳 암벽 동굴 도로는 13명이 5년간 연장 1,250m 2차선 도로로 바위 동굴을 뚫어 1977년 완성한 세계 8대 기적으로 불일 정도로 유명한 도로인데 이 역시 우공이산 같은 기적이라 경탄할 만하다.

정상인이 먹고 자면서 공사를 했다면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공사실적이기 때문이다.

공사 진도도 기적적이지만 절벽에 동굴도로를 시공하면서 요소요소에는 창을 내어 전기 시설 없이도 동굴이 내다 보여 차량통행이던 도보통행이던 지장이 없는 경제적인 도로임도 칭송할 만하다.




15:00-16:30 휘현 호텔(金龍) 도착. 샤워 휴식

너무 빠른 시간에 호텔에 도착된다.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어디인가 더 관광할 수 있는 시간인데 주변에 볼거리가 없어 일직 들어왔단다. 볼거리가 없어 일직 온 것인지, 아니면 일정표상 계획이 안 되서 그런지 모르지만 볼거리가 있다면 이는 추가되어 시간을 효과적으로 편성해야 할 것이다.

18:00 호텔 식당에서 중국요리 석식 .

우리가 투숙한 호텔은 신향시 변두리에 있는 호텔인데 4월부터 4성급 호텔로 승급 승인을 받고 정식영업을 할 것이라며 아직 엘리베이터가 없어짐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해서 우리가 직접 가방들을 챙겨가지고 1층에 들어서니 엘리베이터가 작동되고 있다 . 가이드가 이도 모르니 오늘 처음으로 입장 한 것이 아닌지???? 우리가 든 건물은 등급 상승을 위해 신축한 건물인 듯 방이 깨끗하다. 샤워 후 호텔 식당에서 중국 요리로 석식 함.

중식에 얻어 마신 소주 보상한다는 의미로 내 소주로 우리 식탁 음주자 5명 나눠 마심.

일정이 많이 남아 호텔에서 시간 보낸 것이 아쉽다.

에이 팀은 중식 후 곧바로 하산하여 이곳에 와 안마하고 뒤 늦게 와 식사했다 하지만 이도 그리 좋은 시간 활용은 아니다.

집사람이 곽량촌에서 가이드에게 위앤화 30위엔 빌려 표고버섯 1KG을 구입하였다기에 호텔에 와 20위엔 과 한화 2,000원으로 상환함.

2010.03.29 월요일 흐림

06:00 모닝 콜

07:00 식사

시간 맞춰 식당에 내려갔었지만 맨 꼴찌.

뷔페식인데 과일 과 주스나 밀크 등 음료수는 없고 국 종류와 국수만 있음.

08:00 호텔 체크아웃/ 출발

10:00 구연산 주차장 도착 /빵차 바꿔 타고 10여분 더 안으로 진입.

아홉 개의 봉우리가 연꽃 봉오리를 닮았다 하여 구연산이라 명명되었다 함.

여자들이 원형으로 둘러서서 북춤을 추는데 동작도 박자도 어설픔.

관광 상품으로 마을 부녀자들을 채용하여 이제 연습시키는 가 봄.

입구에 산소가 울타리도 없이 관광객들에게 짓밟히며 방치된 듯 보전되고 있었는데 관리자가 있으나 이장을 거부한 것인지 임자 없는 묵 묘라 이장동의를 받지 못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시멘트 포장공사를 하면서 봉분만을 남겨놓은 것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음.

오늘 산행은 999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등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면 된단다.

엘리베이터는 작년에 착공 1년 동안 공사를 하여 이달 초부터 운행을 시작하였지만 아직 주변공사가 마무리되지 못한 상태이고 편도는 30위엔 이고 왕복은 50위엔 이라 한다.

오늘은 사람이 많지 않아 대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을 것이지 만 주말에 사람들이 많을 경우 20여분도 더 소요될 될 수 있음. 실제 탑승(정원:16명) 후 100미터 높이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1분 20여초 정도 걸리지만 대기시간이 길어질 경우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는 시간 30여분 과 비슷하기에 걷기 불편한 사람만 탑승하라 한다.




10:10- 11:30 오전 산행.

구연담을 지나면서 멀리 천호폭포의 웅대함을 바라보고 엘리베이터 승강장을 지나면 천제(하늘 계단)999계단인데 이 계단을 굽이굽이 돌며 올라서면 5부 능선의 평지 산악도로를 만나며 잠시 휴식 후 엘리베이터 승강장 입구를 지나 산촌 서연 마을에 이른다. 50여 미터의 짧은 계곡다리를 건너면서 바로 식당에 입장한다. 이곳 계단은 대부분 절벽을 깎아 계단을 냈지만 폭이 2미터 정도 되어 걸어 올라가는데 문제가 없지만 절벽아래에 대한 공포심은 여전하여 아래쪽은 보지도 않고 절벽 쪽에 붙어 서서 계단만 처다 보고 오르다가 잠시 다리를 쉴 때면 먼 산의 경치를 바라보며 쉰다. 이곳 절벽 계단도 관광이전에 이곳 산촌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이곳 사람들이 자력으로 공사를 하였을 상 싶다. 어제 오후 곽량촌에서 나려오는 동굴도로만은 않겠지만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난공사였었을 것인데 어찌 공사를 하였는지 대단할 뿐이다. 또한 인간의 손길이 이리 엄청남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계단 끝 중간 집결지 부근에 3개의 깃발이 펄럭이는데 중국 오성기는 없고 3개의 깃발이 펄럭인다. 그중 태극문양의 깃발이 있는데 우리 한국 관광객을 환영하다는 의미로 계양 된 것인지? 아님 구연산 관광안내소의 깃발인지 알 수 없지만 일행 중 한사람은 북한을 의식해서 대한민국 태극기 대신 옛날부터 전해오는 태극 모양의 깃발을 계양한 것이 아니겠냐고 했다. 한국 관광객으로서 우리 팀이 여섯 번째 일 만큼 한국 관광객이 많이 온 바가 없는지라 한국을 환영한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어불성설일 것 같다.

11:30-12:00 중식

맛 시내 식당과 유사함(가이드 여행일정중 제일 후지다고 사전 공고했으나 시내 식사와 별 차이 없는 듯함).

가이드는 오후 일정상 시간 많으니 12시 반까지 식사하라 했지만 30분 만에 모두가 식사하고 일어나니 가이드도 어쩔 수 없이 오후 산행 안내함.

12:30- 14:30 오후 산행

식당 건물에 연이어 있는 서연사 들어가니 주지 스님이 나와 환영인사를 한다.

불교와 도교를 융합한 사찰이라 하는데 마침 절의 축제일이라 사찰의 유물이기도 한 길이 20여 미터의 긴 그림을 깔아 놓고 그림의 유래를 설명하였지만 나는 경내 사진 촬영으로 듣지 못했다.

인근 사찰에서 쏘아 올리는 폭죽 소리가 요란스럽다. 장엄한 계곡에 오점을 찍는 듯 계곡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산골이라 그런지 좁은 계곡에 지어진 절 건물은 크기가 작고 건축양식도 중국의 타 사찰에서 보지 못한 형상이다. 절을 지나 선지협(仙脂峽) 계곡 끝까지 올랐다. 계곡은 그저 단순한 계곡이다. 주변 기암괴석 준봉들이 볼만한데 연무가 덮어 실상을 못 봄이 아쉽다. 우리 팀 대부분이 서연계곡 끝까지 따라 오는 듯 하고 뿌연 연무는 끝내 비를 내려 사진촬영을 포기해야 했다. 산행여정 상 전체적인 사진 촬영은 끝난 터라 다행이다 싶다. 하산코스로 타원형으로 계곡 반대편으로 돌아 내려오는데 연화동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서연계곡도 7부 능선의 높은 산속인데 연화동(蓮花洞)은 어느 정도의 거리에 얼마나 깊은 어떤 형태의 동굴인지 궁금하지만 일정에 없고 우리들은 군폭담 쪽으로 하산해야 한다. 폭포가 여러 개 연속 되어 있다 하여 군폭곡(群瀑谷)으로 이름 지어진 계곡으로 하산한다. 수량도 적고 폭포의 연장이 짧아 굳이 폭포라 이름 부르기 미흡하지만 바위 절벽을 타고 흐르니 폭포는 폭포인 셈이다. 하산 시부터 비가 나려 우비를 챙겨 입었으나 가랑비 정도라 산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중식을 했던 식당에서 20여분을 기다리니 일행이 모두 집결됨.




기다리는 중 식당 앞 주변에서 도로 포장용 바닥돌 보수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삶은 국수(칼국수 형)를 담은 대접을 나눠주고 다시 육개장 같은 국물을 국수 대접에 배식해 준다. 가랑비가 내리는데 비를 맞으며 식사를 한다. 바로 앞 식당 안 식탁은 공석인데도 식당주인이 남의 일이라 그런지 불러들이지 않는다. 가이드의 말대로 이곳 산촌사람들은 식사를 대부분 집 밖에서 한다 했는데 같은 맥락인가 보다. 일과 관계없이 자기 집 앞에서 밥그릇에 반찬 몇 가지 얹어가지고 양지쪽에 나와 혼자 앉아서 먹는 모습을 여럿 보았지만 비까지 맞으며 인부들이 실외에서 식사를 하는 상황은 이곳 인심이 아닐까 싶다. 국수요리는 식당 요리가 아닌 임부들의 식사로서 가정에서 먹는 주식 스타일일 것이다. 다른 반찬도 없이 간단한 식사형태이다. 공사인부들이라면 반주도 마실 법 한데 술은 보이지 않는다.

비가 와 길이 미끄럽다고 가이드가 식당에 특별히 요청하여 식당에서 엘리베이터 승강장까지 약 1키로 정도의 거리를 전동 카로 이동한단다. 한차에 12명 정원인데 걸어서 출발한 일부일행을 빼고 16명이 탑승했다. 보조가이드는 발판에 붙어 서서 지붕 프레임을 잡고 매달려 가는 상황이고 좁은 바위 돌 도로에 한쪽은 절벽인데 사고났다하면 전원 떼죽음을 당할 것이나 아무도 정원 오버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함이 없이 당연한 듯 무릎에 동행자를 끌어안고 이동하며 좋아한다.

엘리베이터 편도 탑승요금이 위앤화로 30위엔 이면 한국 돈으로 5천 원 정도로 조금은 비싼 요금이지만 비가 와 돌계단이 미끄러울 같아 몸조심 차원에서 일행 대다수가 탑승함.

일행 중 감진국 선배와 권사장은 도보로 하산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감 선배 부인은 신랑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신경질을 부린다. 선배가 고령에 여러 가지 약을 복용하며 산행을 한다 하지만 같이 산행해 보니 정상적인 나와 별 차이가 없는데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것 같고 여러 동행자 앞에서 조금은 한심스러워 보인다.

본인이 걷겠다고 이미 떠난 마당에 포용해 줌이 좋으련만. 떠난 사람 뒤통수 처다 보고 짜증 부림은 자기얼굴에 침 뱉기 아닐까 싶다.

엘리베이터는 일행이 많아 두 번 나눠 탑승해야 하고 우리 내외는 뒤에 남아 대기하면서 100여 미터의 높이에서 절벽을 나려다 보니 현기증이 나고 다리가 떨려 문 앞에 서있을 수가 없다 .곧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은 불안감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시간이 3분여 정도인데 되게 지루하다.

15:00- 16:30 서연산에서 안양시로 이동 안채 호텔 투숙.

안양 시내로 이동하면서 용변이 급해 주유소에 차를 대고 화장실을 찾으니 주유를 하지 않는다고

용변을 허용해 주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남자 일행들은 도로 길에서 줄지어 실례를 해야 했다.

중국에서는 연료 값이 상당히 비싸다고 한다. 경유 값은 중국 돈으로 리터당 6.5위엔 인데 한국 돈으로 치면 1,100-1,200원 정도 된단다. 한국에서 경유가 1400원 정도 한다니까 외형상 조금 싸 보이지만 이곳서 생활물가로 비교하면 무지 무지 비싸다고 강변한다.

가이드의 월급이 2,000위엔 이면 한화로 35만 원 정도다

한국에서 보통 직장인이면 월급이 25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곳의 7배다 .

월급수준으로 비교한다면 경유 값은 한국 돈으로 리터당 8,000원에 버금가는 금액이란다.

바꿔 말하면 한국 사람은 월급을 250만원 받고 리터당 1400원에 사지만 중국 사람은 월급을 35만원 받고 1200원에 사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런 배경에는 중국 내에도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있는데 이는 아껴두고 외국원유를 수입하여 가공 공급하다보니 국민들에게 비싸게 공급하지만 이모두가 미국과의 무역 마찰에서 온 불행이라 한다. 중국가공품을 세계시장에 싸게 내다 팔다보니 중국에서도 상당액은 수입을 해야 하는 것이기에 철강석이나 석유등 원자재를 수입하여 국민들에게 팔고 있는데 하루속히 미국과의 무역 마찰이 잘 처리되기를 바란다는 가이드의 국가관은 참으로 칭송받을 만하다.

이동시간 중 가이드의 한국 제주도 서귀포에 대한 중국에서 전설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위해 불로초를 얻기 위해 선남선녀 3000여명을 뽑아 배를 태워 한국으로 보냈지만 이들이 제주도에 도착하면서 태풍을 만나 배가 파손되면서 서쪽으로 귀환하는 것을 포기했다하여 당시의 포구를 서귀포라 불어지게 되었다 하는데 이 전설 속에는 한국 땅에도 옛날부터 중국의 한족이 이주해 살았다는 중국의 우월성을 고양하기위해 만들어진 전설이 아닐까 싶다.

하긴 경상도 청송군에 있는 주왕상도 중국의 주나라 왕이 도망 와 이 산속 동굴에 숨어 살았다 해서 주왕산이란 한다는 전설도 있으니 이도 그냥 넘어가야 할 것 같다.

18:00- 18:40 버스 로 식당까지 이동 석식

식사를 하며 내가 휴대한 소주가 조금 밖에 안 남아 3명에게만 한잔씩 나눠마시게 되었는데 하여 어제 내 술을 얻어 마신 한사람에는 술을 권할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전하고 여행 마지막 날인데 술 한 잔 더 나누고 싶으시면 식당에 주문하면 한국 돈으로 5천 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을 것임을 전하니 혼 케이 그가 고량주 한 병(4홉) 샀고 음주 가능자 5면이 한잔씩 나눠 마신 후 남은 것(반병정도)은 나보고 처리 하라고 내게 전함.

19:00-20:30 전신 마사지 (희망자 10명만 받음: 여자가 해 주는데 별로 시원치 않았음)

20:50 호텔로 돌아와 샤워 후 남은 고량주 한잔 더 하고 잠.

2010.03.30 화요일 맑음.

05:30 모닝콜

06:30 호텔 뷔페 조식(잠가지고 만남)

에이 팀은 이동 중 타 코스를 한 곳 더 관광 하겠다며 조식을 호텔에서 취식하지 않고 도시락으로 지참하고 일찍 출발함.

07:00 호텔 체크아웃 / 관광버스 탑승 출발

가이드는 07:30에 출발 한다고 했었으나 고속도로 정체를 대비 우리 요구로 30분 당겨 출발 함.

08:00 안양시 외곽 고속버스 톨게이트 진입

09:30 비향 휴게소 정차 용변

제남까지 남은 거리 220키로 .

건물 최근 건축된 듯함. 다방. 식당, 슈터 화장실 정확히 구분 일자로 균등 배분.

정차한 차 우리버스 외엔 한 대도 없음.

남녀 화장실 입구가 양쪽으로 구분 된 것은 좋은 데 입구에 유리 형 출입문이 아닌 이불 형 커튼인데 (이불을 펼쳐 걸어 놓은 듯 ) 원래 검은 색인데 검은 색이 바랜 듯 하고 차량 매연과 먼지가 묻어 고질 고질 하여 이를 밀치고 들어가는데 옷에 닿을 까 마음 조림.

경항 대운하 위 다리를 지나면서 산동성 진입 환영 간판이 보였다. 경항 운하가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인가 보다 .

산동성에 접어들고 나니 고속도로 양 옆의 포플러 조림 면적이 50미터 정도로 넓어 보인다.

그리고 접도부근의 한 필지 밭 모두를 조림한 경작지도 자주 보이는데 이는 경작자가 가이드의 말대로 묘목생산을 위해 조림을 할 수도 있고 나의 생각으로는 경작자가 없어 정부에서 관리하는 땅이라 묘목생산과 방풍용 숲 조정 겸 고속도로 변 풍광을 위해 조림하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들의 수령이 5년 정도로 보이는데 이는 5년 전에 고속도로를 시공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고

아주 드물게 20여 미터는 수령5년생이 그리고 30여 미터는 작년에 심었음 직 한 조림지도 보인다.

가이드에게 물을까 했지만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상 싶어 생략한 것이지만 이 넓은 평원에 밀과 옥수수만 경작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고 더 더욱이 넓고 넓은 경작지에 현대식 농기계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참 일하는 시간이고 일기도 좋은 데 밀밭을 괭이모양의 농기구로 밭을 매는 듯한 농부들이 띄엄띄엄 보일 뿐이다. 직사각 경작지 한 구역에 다시 20미터 정도로 10개에서 20여개로 세부 경작지로 나눠져 있고 이 세부 경작지 하나하나가 주인이 다른 듯하다. 하여 혹간 두 사람의 농부가 각자 자신의 경작지를 관리하는 듯 비료를 뿌리거나 밭을 매는 듯한 모습도 보였기 때문이다.

도시 근교로 접어 들 때 보니 소채 영농단지들도 보인다. 이곳은 마을 대부분이 또 소채농사를 짓는 듯 비닐하우스가 줄을 잇는다. 이곳에서도 한국과 다른 비닐하우스 형태가 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쇠파이프를 이용하여 반 타원(?)형인데 이곳에서는 최근 개발된 형인가 싶기도 한데 대나무를 이용했는지 현장 확인이 안 되니 정확한 내역을 알 수 없지만 벽면 높이가 그리 높지 않은 1미터 내외의 평 퍼짐한 지붕 형이고 반 정도는 구형인 듯 북쪽에는 1.5미터 정도 흙벽을 쌍고 남쪽은 지면과 같게 .그리고 양옆은 역시 토담을 경사시게 시공한 후 위에 나무 석가래를 걸쳐 놓은 후 비닐을 덮어 보온 하는 형상인데 우리나라에서는 4,50년 전 새싹을 티우기 위한 소형 온상(땅을 파고 흙벽은 짚을 엮어 세워 막고 천장만 비닐 창을 덮어서 보온함)이라고 하는 형태와 비슷하다. 밤에는 보온하기위해 짚으로 엮은 영 덮개가 설치되어있다 . 해가 뜨면 영을 걷어 올려야 하는데 하나하나 일일이 말아 올리려면 손이 많이 갈 것인데 이를 보면 소채농사도 거의 대부분 개인별 소규모 경작인가 싶다 .

11:08 제남 시 진입하는 돌 케이트 통과 (4시간 8분소요)

제남시로 진입하는데 일부 공사구간에 교통체증이 발생하니 우리가 탄 버스가 반대차선으로 역주행하며 정체구간을 지나간다. 반대차선에서 오는 차량들이 전조등을 깜박거리기는 하지만 정면충돌을 피하며 그들이(소형차. 화물차. 버스 등의 상당한 차들이)차선을 변경하여 빈자리로 빠져 나간다. 사고 후 다치고 나서 시시비 가리느니 안전을 위해 피해가는 것이겠지만 한국에서도 가능할 까 싶다.

11:20 식당 도착 /중식

식단은 중국 요리로 다른 식당과 유사하게 11가지 요리가 나왔는데 그중 한 가지가 처음 본 요리다. 우리나라로 보면 만두피 같이 보이는데 밀가루 반죽을 기계로 얇게 밀러가지고 이를 12센티 정도의 정사각형으로 자른 것인데 한 면이 조금씩 연결되어 한 잎 한 잎 뜯어 가지고 요리된 야채와 밥을 쌈 싸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한국 요리로 치면 김 대신이거나 만두 형으로 말아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맛을 보면 생 밀가루 반죽은 아니고 옥수수 가루를 섞고 살짝 익힌 것인지 밀가루 반죽보다는 거칠면서도 구수한 맛이 난다.

12:20 식사 완료 출발

에이 팀은 우리가 출발 할 때 까지도 식당에 도착되지 않았다.

우리 팀도 에이 팀처럼 옵션관광을 더 하고 싶었지만 일부인원이 첫날 전망대 옵션관광에 이의를 제기한 듯 가이드는 나의 제안을 받아주지 않았다.

공항으로 이동하며 농산물(참깨, 잣 등) 시장을 들리자 해도 파는 곳이 없다 한다.

13:00 제남 공항 도착

13:15 KAL 직원이 나와 우리 일행을 안내하며 인천행 탑승권을 가져와 나눠준다.

다른 공항에서는 우리가 직접 구매하였었는데…….

13:40 검색완료.

15:05 탑승(이하 한국 시간 )

15:20 제남 이륙

17:45 인천공항 착륙

18:15 입국 수속

18:30 김포 공항 경유 안산행 공항버스 탑승

20:28 안산 버스터미널 도착

20:40 집에 도착 .

결 론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눈을 감고 지난 일정을 회상해 보니 은허박물관과 태항산 계곡의 절벽들과 폭포수 그리고 절벽동굴들이 연상된다. 굳이 세분하자면 도화곡, 왕상암. 만선산, 곽량촌, 구연산이지만 따지고 보면, 절벽과 폭포만 연상 될 뿐이다. 그리고 이들 절벽을 왕래하는 동굴과 철 계단의 모습이 떠오를 뿐이지만 인간의 무한한 인내력과 무궁한 창조력을 보고 온 것이다.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을 보러 간 것이기에 그 이상 바랄 것은 없지만 그 고지대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토착민들에게 경탄의 찬사를 보냄과 아울러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참 다운 삶인지를 터득하고 온 여행이 아닐까 싶다.

좀 피곤하다 싶은 데 소주한잔 하고 얼른 눈을 붙이자 !!!!!

남은 돈

♥ 위앤화 300圓 중 100원 쓰고 200圓 남음.

♥ 미화 200$ 중 151불 쓰고 49$ 남음

♥ 원화 70,000원 중 60,000원 쓰고 10,000원 남음.

안산 집 왕복 택시비 10,000원

안산 직행버스 표 22,000원

빵차 옵션 광관 20,000원

말린 표고버섯 1키로 구입 5,000원

엘리베이터 탑승 4,000원(위앤화 30원) 한화로 지불

총 경비 지출 내역

♥ 여행사 지불 경비 : 1,228,000원

( 1인당 기본 경비 529,000원 +단체비자 30,000원 + 유류 할증료 55,000원 )×2인

♥ 여행 준비 금액 : 49,620원

구급약 3종 : 15,000원

소주/반찬 : 12,620원

공항버스 예배: 22,000원

♥ 현지 사용 금액 : 269,805원

미화 151불 ×1,155=174,405원

위앤화 200圓 ×177=35,400원

한화 60,000원

♥ 총 계 : 1,547,425 원

< 자세한 사진들은여행 기념 사진태항산 1,2,3,4를 참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