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장가계(무릉원) 관광 소감
(금편 계곡 입구에서 들여다 본 전경)
일정 : 2004년 2월 16일부터 2월 20일까지 4박5일간
경로 : 인천시 -사천성 중경시- 호남성 장가계시(무릉원)
-중경시 - 인천시
중국 장가계(무릉원) 관광소감
2004년 2월 16일 월요일 맑음
08:20 - 10:30 안산 버스터미널에서 리무진 버스 탑승, 김포공항경유, 인천공항 도착
드디어 천하절경 중국 호남성 무릉원(장가계, 원가계, 황석채) 관광 여행이 시작되는 구나 !
인천공항 행 버스에는 좌석 40여 석에 50%인 20여명이 탑승을 하였다.
김포공항에서 국내 여행을 할 사람도 있겠지만 인천공항 가는 승객은 우리와 같이 해외 여행이 주목적일 것이다. 경기가 바닥이니 뭐니 해도 안산시에서 나와 같은 시간에 20여명이 여행을 출발한다니 비록 서로 통성명은 안 했어도 다행이다 싶고 같은 목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친근감도 든다.
허지만 인천공항까지 버스 요금이 1인당 11,000원이긴 하지만 공항까지 하루 몇 탕을 운행하는지는 몰라도 이래가지고는 적자 운영일 것이 분명하다.
적자가 심하여 노선이 취소되면 이 또한 안산시민들에게는 해외 여행 시 인천공항까지 지하철과 버스를 바꿔타며 이동하려면 불편한 점이 이만 저만이 아니기에 여행객이 좀더 많아 흑자노선이 되었으면 싶다.
하긴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발전한 셈이다.
7년 전인 1997년 10월 하순에 9박 10일 일정으로 중국 명소일주(북경, 서안, 계림, 소주, 항주, 상해) 관광여행을 출발할 때는 5명이 타고 가면서 노선이 취소될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금까지 취소되지 않고 운행되니 다행이다 싶다.
7년만의 해외관광여행이라!
직장 일로 연일 바쁘게 산다면 몰라도 , 하루 세끼 밥 얻어먹기도 힘들만큼 생활이 어렵다면 몰라도 밥술이나 먹으면서 있는 것이 시간이요 하는 일이 건강관리 와 노는 것인데 7년 만에 해외 여행을 나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50대 실업자의 노후대책에 급급한 막연한 기우에서 빚어진 소치일 것이다.
매달, 매 분기마다 해외 여행을 나간다면 아무리 제돈 주고 가는 여행이라고 하드래도 국가적 경제수준에 비춰 볼 때 나라와 국민의 정서를 도외시 한 사치이고 낭비가 분명 한 것이겠지만 적어도 노후를 검소하면서도 여유 있게 즐긴다는 차원에서 보면 1년에 한번 정도는 여행을 했어야 하지 않을 까?
자녀가 없는 우리내외는 자녀를 둔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학자금에, 결혼비용에, 살림 차려주는 비용까지 감안 할 때 비록 군인 연금으로 근근히 산다고는 해도 어찌되든 상당한 여유가 있는 셈이다.
헌데도 집사람은 앞으로 30년 이상 살아야 하고 몸이 아프거나 무슨 일이 벌어져 살림이 쪼그러 들지도 모르니 다 날라 갔을 때 후회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더 모아야 한다고 여행을 가자고 치근대는 나를 이제까지 견제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IMF 후유증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함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간 전혀 여행을 안한 것은 아니다 .
비록 여러 번 반복되는 코스이지만 등산을 겸하여 , 친목회 모임을 겸하여 봄가을로 동해안이고 남해안이고 기동을 하였고 1주일에 한 두번은 골프를 치니 아닌 말로 화려한 백수인지라 집사람의 자제 요구에 무조건 반발할 상황도 아니다.
아니 나는 적어도 집사람에게 감사함을, 미안함을 표시해야 한다.
내가 골프를 치면서 우리 집 문화 레이저 비용의 전부를 나혼자쓰기 때문이다.
또한 매일 같이 운동 나갈 때 새벽밥에 디저트와 영양제까지 챙겨 먹이고 옷 가방 챙겨주고 운동 나갔다 돌아오면 땀 흘린 운동복 세탁해야 하고 목마르다고 술상까지 차려야 하는 등 노고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같이 운동하는 친구 중에는 며느리 손에 밥을 얻어먹다 보니 눈치가 보여 새벽밥은 거의 굶고 올 때가 많다고 한다. 아니 말도 끄내 보지 못하였다 고 한다.
이런 와중에도 나는 작년 2월 16일 9박 11일 일정으로 친구들과 태국에 골프 여행을 다녀왔으니 더더욱 집사람에게 미안 할 뿐이다.
지난 2월 초순에도 군 동기생 일부가 동부인(16명)해서 인도네시아로 골프 여행을 다녀왔다.
이 골프여행에 나도 동참하라고 작년 가을부터 제안이 들어왔었지만 나는 집사람에게 미안해서 금년에는 사양하기로 했다. 그간 집사람이 내게 베푼 노고에 일고라도 보답하고 감사의 표시로 대신 같은 기간에 그 돈(골프경비) 가지고 해외 여행을 하기로 마음 먹었고 또한 같은 맥락에서 동기생 김효배 내외도 동행하기로 했었다.
작년 여름에 발병했던 싸스 열풍이 수그러지면서 해외여행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싶더니 해가 바뀌면서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에서는 또다시 조류 독감이 발병하여 여행객의 마음을 읊조리게 하고 해외여행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점차 증대되면서 이번 여행도 강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흔들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귀는 너무도 얇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병하였다는 뉴스가 방송되고 나서 정부에서 수입을 금지한다고 하자 그 날 부로 소고기 취식이 전면 중지되고 충청도 어디서 조류독감이 발병하였다는 뉴스에 이 또한 인체에 대한 유해 여부 검증을 떠나서 그 날 부로 닭고기 급식이 전면 중단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과잉반응이 안쓰러울 뿐이다.
하여 나는 이번 여행을 강행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같이 가기로 약속했던 김효배 동기생과 지난 년 말로 정년 퇴직한 송상근 동기생에게 동행을 제안하면서 출발일자를 서로 조율하는 과정에서 김효배 동기생은 5월중에 둘째 애 결혼이 있어 여행이 곤란하다고 전화가 왔다.
"5월중 둘째 애 결혼과 이번 여행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 " 고 같이 출발할 것을 거듭 제안하여 보았지만 불가하단다.
2년 동안 신문을 뒤적이며 갈망하던 천하절경 관광명소 중국 무릉원(장가계 원가계, 황석채) 관광을 취급하는 여러 여행사중 여행 경비와 일정이 나의 뜻과 일치하는 참 좋은 여행사를 확정하여 송상근 동기생 내외 와 같이 네 명을 참 좋은 여행사에 예약하였다.
우리가 예약을 하였을 때는 일행이 11여명이라서 차질 없이 여행을 출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출발 4일 전 참 좋은 여행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약신청자들이 자기네 여행사 보다 싼 타 여행사로 상품을 바꾸면서 일행이 줄어들어 참 좋은 여행사 단독 출발이 불가 하니 타 여행사(투어2000)에 통합되어 출발하시던 지 아니면 일정을 다음 차수로 연기하던가 여행을 취소해도 괜찮고 했다.
동기생 송상근 내외는 처음부터 일정연기가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일정을 잡았기에 또 차액은 돌려준다고 하기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무릉도원만 구경하면 되지 어느 여행사를 따라가든 무슨 상관일까 싶어 타 여행사에 통합되어 출발하기로 동의를 하게 되었다.
여행상품 광고에서는 1인당 10만원씩 차이가 있었으나 단체비자비용(참 좋은 : 20,000원인데 투어는30,000원이고), 왕복공항세(참 좋은: 17,000원인데 투어는38,000원), 관광진흥기금(똑같이 10,000원)에서 차액이 발생하면서 1인당 69,000원씩 276,000원이 내 통장으로 사전 입금되었고 그간 은행에 나가 여행추가 비용도 미화(200불)로 환전하고 구급약이며 간이 반찬, 디지털 카메라 용 건전지 등 제반 준비를 마치고 부 푸른 가슴으로 , 조급한 마음으로 버스에 앉아 시간은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09:55분 김포공항에서 국내선 손님 4명이 하차한 후 즉시 인천공항으로 직행하긴 하였지만 10:30까지 늦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꽤나 했는데 공항전용도로에 접어들면서 탁 트인 고속 도로환경에서 고속으로 질주하더니 정확히 10시 30분에 인천공항 하차 장에 도착시켜 주었다.
10:30 - 12:40 인천 공항 출국 준비/ 인천공항 이륙
만남의 장소 BC 통로 내 5번 테블를 찾아가니 "투어2000" 여행사 간판이 걸려있고 전형숙 가이드를 만나 우선 우리내외 여권만 먼저 제출하고 송상근 내외는 곧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10시 50분이 되어도 송상근 내외가 보이지 않아 가이드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하니 만남의 장소가 아니 5번 출구 앞에서 아무리 찾아도 우리가 보이지 않고 내게 핸드폰을 하니 이미 꺼져 받지 않아 상당히 당황한 듯 화가 난 듯 전화를 받았다.
만나는 장소를 분명 BC 통로에 있는 5번 테불이라고 전했고 송상근이도 해외를 여러 번 나갔었으며 바로 전주에도 꽘을 다녀왔기에 착오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핸드폰을 꺼서 항공화물 탁송가방에 짐을 싼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도 내가 핸드폰을 빌려 전화한 것이 더 이상의 지체나 방황을 막을 수 있었지만 송상근이는 꽤나 화가 난 얼굴이다. 내가 사과하는 선에서 끝났다.
단체비자 복사본, 공항이용료 납부 티켓. 출입국 신고서 및 중국 중경 행 항공권을 받은 후 출국 심사를 편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우리는 여행용 옷 가방 외 휴대 가능한 소형 등산용 배낭까지 탁송의뢰 하였다. 화물 탁송 후 1시간 1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는데 이는 여행객이 많아 지체될 것을 감안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간 낭비 인 것 같다. 면세점 장사를 위해 상가를 배회하게 하고 견물생심을 유도하여 충동구매를 부추기려는 의도도 포함된 듯 하다.
스포츠 용품 특히 골프용품이 싸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기에 용품매장을 찾아가 물가를 알라 보니 시내 스포츠 매장과 별 차이가 없었다. 점원의 말로는 부가세가 면제되고 원가에서 10%가 DC된다고는 하나 시중과 동일하거나 더 비싼 것 같았음. 유명 골프화 이긴 하겠지만 28만원이고 겨울용 목티가 6만원이란다. 시내와 같은 값이라고 하니 품질이 다르다고 한다.
12:40 이륙 대기 때문인지 탑승객이 늦게(1명)와서 그런지 10분 늦게 이륙하였다.
기내는 140여명 좌석에서 20%의 공석이 보인다. 이만하면 적자운행은 아닐 상 싶다.
기내에서 중식으로 생선스테이크와 소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대부분 소고기 스테이크를 선호했다. 국내에서 광우병 파동으로 소고기는 안 먹는다고 하면서 왜 기내에서는 소고기를 선호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구름위로 비행하는 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그러나 별 변화가 없어서 지루하다.
비행고도 가 10,058미터라고 하는데 구름이 없는 지역에서도 멀리 바다의 수평선 같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대기권 위라서 그러냐고 (푸른 바다처럼 보이는 경계선이냐고 ) 기내 승무원에게 물어보았으나 잘은 모르지만 아닐 것이라고 만 대답한다.
16:15 중경 직할시 국제공항 도착( 15:35 보다 40분 지연 : 맞바람 때문이라는데 이해가 되지 않음).
국제공항의 건물이 우리나라 지방 공항보다도 아니 안산시 버스터미널보다도 더 작고 초라하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옆의 국내선 공항이 더 크다고 한다.
승객이 적기 때문이고 경제성을 감안해 정부에서 투자를 자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경제성보다는 과시적 투자도 상당한 것에 비하면 우리가 오히려 반성해야 할 것이다.
현지가이드가 "TOUR2000"안내 간판을 들고 마중을 나와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안내대로 버스에 올랐다. 자기(조선족으로 연변에서 왔고 이름은 강 호, 나이는 30세, 미혼) 소개를 마치고 우리들도 각자 인사를 겸하여 자기 소개를 하란다. 버스에서 자기 소개를 해 보아야 이름을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하는 것이 도리일 것이고 가이드가 생각을 잘 한 것 같다. 우리 일행은 모두 25명이다 . 재경 진주 여고 동창 계모임에서 7명, 의정부에서 오신 60대 초반의 남자 친구사이 인 듯한 6명과 전라도 광주시에 서 오신 50대 초반의 남자 동료 선생님 4명 , 춘천에서 양로원을 경영하신다는 윤병주씨 , 서울 양천구에서 오신 이명숙씨는 친구도 없이 혈혈 단신으로 오신 분이고 군 동기생 관계인 나와 송상근 내외 그리고 증평에서 오신 70대 노인이신 송기민씨 내외를 합하여 25명이 일행이 되었다.
중국의 시간은 한국에 보다 한시간이 늦다.
지금 중국시간은 오후 5시 반이지만 한국시간으로 6시 반이니 여행기간 중에는 이곳 시간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니까 착오를 방지하기 위해서 시계 바늘을 5시 반으로 돌려놓으란다.
나는 시계를 지참하지 않았으니 부르면 부르는 대로 가자면 가기만 하면 된다.
또한 여권과 지갑을 잘 챙겨 항시 휴대하고 다니란다.
옛날에는 여권을 되돌려 받을 수가 있었는데 한국에 가면 돈을 많이 번다고 조선족 사이에서는 너도나도 한국병에 걸려 불법입국이 많아지면서 한국 여권 하나에 한국 돈으로 분실여권 하나가 200만원에 거래되기 때문에 이제는 여권을 길에서 주서도 팔아먹지 돌려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길에서 중국 물건을 살 때 가급적이면 인민피(위엔화)를 쓰고 지갑을 열어 많은 돈을 보이지 말라고 한다. 잘못 하면 쓰리 맞을 염려도 있기 때문이란다.
또한 이곳의 수돗물은 석회질이 많아 한국사람들에게는 맞지 않으니 호텔이고 식당이고 수돗물은 절대 마셔서는 안되니 생수를 사셔 마셔야 한단다.
버스를 타고 30여분 정도에 중경도심에 진입하며 도로 주변을 보니 편편한 밭이 거의 보이지 않고 산에 계단식 소규모의 경작지가 보이는데 봄채소인 듯 한 야채가 새파랗게 성장하고 있어 우리보다는 봄이 1개월 정도는 빠른 것 같다. 공항에서 중경시내로 들어가는 고속도로(장유 고속도로)라면 개발 된지 오래일 것이고 번화한 도로일진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가로수의 수령이 3,4년 생이고 주변의 야산과 논밭의 경계에 나무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 본격적인 개발은 진행되지 않은 듯 하다.
시내로 진입하면서 가이드는 이곳이 옛날에는 장수 마을이었다고 설명한다.
100세 할머니가 길을 가고 있어 80세 먹은 노인이 연유를 물으니 120세 먹은 친정 어머기가 친정에서 140세 먹은 시어머니의 생일을 준비하시며 오라해서 간다고 했을 정도로 장수하는 곳이라고 하나 산세로 보나 황사현상이 자욱한 시가지 모습으로 보나 어불성설 같다.
중경(重慶) 직할시(주 1 참조)는 중국에서 북경, 상해, 천진에 이어 네 번째로 1997년에 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인구가 3천3백만이라고 하니 서울시민의 3배이고 우리나라 전체 국민 수에 80%에 버금가는 대단한 숫자다 . 사천성의 성도(城都)는 성도(成都)이며 중경은 사천성의 한 도시였었는데 장강 땜을 막으면서 상류에 살던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중경시가 갑자기 커졌고 이로 해서 직할시가 되었으며 이곳 주민의 65%가 모두 이주민이라고 했다. 4개 직할시 중 땅이 제일 넓고 주민이 제일 많다고 한다.
중국에는 한족(漢族) 외에 53족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이곳에도 여러 민족이 살고있지만 장족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은 200만명 정도로 작은 민족이지만 조선 말과 글을 사용하고 있어 우수한 민족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다.
산을 배경으로 대부분 산비탈에 가옥을 축조하여 ‘산성(山城)’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하며, 시내 중심부는 삼면이 강에 면한 마치 군함 배 모양으로 생겼으며 주택들이 밀집해 있다.
BC 11세기 주대(周代)에 파(巴)나라의 수도이기 하였으며 이후 남송의 조광중이 왕위에 오른 다음 ‘쌍중 경축[雙重嘉慶]’이란 뜻으로 충칭(중경)이라고 이름을 지어져 지금까지 이어온다고 한다.
항일전쟁 중인 1938∼1945년에 중국국민당 정부의 소재지이기도 하였단다.
17:30- 17:50 벽진공원 관광
푸르고 맑은 호수 공원이라 해서 벽진 공원이라 한다는데 내 눈에는 먼지가 뽀얗게 묻은 침침한 공원 같고 그저 보통의 공원이일 뿐이다.
호수 옆으로 대나무 숲길의 산책로가 있으며 중간 중간 벤치와 운동장이 마련되어있는데 이곳에서 주변의 여자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춤을 추기도 한단다.
대나무의 키가 늘씬하게 날렵하게 성장한 듯 하며 잎이 한국 것에 비해 짧은 것이 새롭다.
최근에 공사를 하였다는 벽진 탑의 지붕이나 건물 벽의 색상으로 보아 방치한다는 느낌이 들고 수심 8미터의 호수 옆에도 시멘트 건물의 누각이 있는데 건물 색이 퇴색되어 을씨년스럽다.
호수 주위 산책로를 따라 한바퀴 도는 관광이다. 특별히 기념이 되거나 볼거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시간을 맞추는 기분이다.
호수 뒤의 아파트 건물은 최근에 신축한 듯 중국의 현대화 과정의 일면을 보여주는 듯하고 산책로에 청소상태는 깨끗하다.
18:20-18:40 조침문 나루 관광
버스는 자링강을 건너 구릉 위에 무질서하게 축조된 번화가를 돌고 돌더니 조침문 나루가 나려다 보는 공원에 닿았다.
공원엔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연이 주변 상공에 많이 날고 있었고 사람들이 날리는 것이 아니고 관광 목적으로 지상에 고정시켜 놓아 혼자서 잘 날고 있었는데 이는 바람이 많음을 알게 한다. 지도 판매상들이 집요하게 지도를 사라고 치근덕거린다. 가이드의 안내대로 뿌요(필요 없어: 안 산다는 뜻) 뿌요 거절을 해도 막무가내다. 이러다가 시비라도 붙을 가 보아 염려되지만 무조건 못 들은 채 해야 했다.
저아래 합수지점이 양쯔강과 자링강이 합치는 지점이고 이곳에서 장강 삼협 선상유람이 시작된다고 한다.
시의 특징은 산악지대에 건축된 산악 도시라고 한다.
양개 강의 범람을 고려하여 산악에 도시를 축성하였다고 하는데 공항 상공에서 본 것이나 버스를 타고 시내에 진입하면서 보아도 들은 보이지 않고 산꼭대기에 모든 주거시설 과 상업용 건물이건 지어졌고 땅이 적어서 그런지 다닥다닥 붙여 건축을 하고 땅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함인지 몰라도 무질서하게 한마디로 난 개발의 대표적 케이스 인 것 같다. 또한 건물의 도장상태가 장기간 방치된 듯 낡아 충충해 보인다.
또한 시내 도로는 구릉을 오르내리는 도로 형태여서 직선도로는 별로 없고 좁은 길을 돌아 올라가고 내려오면 서 거의 무질서에 가깝지만 잘 적응되어서 그런지 만만디 한 성격이라 그런지 버스 건 택시 건 사람이건 횡단 보도도 차선도 없이 신호등도 없이 먼저 진입하는 놈이 임자이고 서두르는 법이 없이 독촉하거나 시비하는 기색도 없이 물 흐르듯 잘 소통되고 있는 것이 신기롭다.
조침문 나루에는 규모가 꽤 커 보이는 선박들이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 도시의 많은 물량이 대부분 선박으로 운반된다고 한다. 물건이 도착하면 이를 구입코자하는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루며 도로교통이 마비되어 시 방침으로 새벽에 배들이 도착 하역토록 하였기 때문에 낮에는 조용하단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상해까지 가는데는 1주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부두가 나려다 보이는 전망대에서 사진 몇 장 찍고 동방화원 반점이란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사천요리(고기요리1, 생선요리1, 밥, 빵, 국수, 땅콩요리, 생선묵 요리, 된장국, 과일, 맥주 한잔)이라고 하지만 한국사람의 입맛을 고려하여 된장국도 나오고 한국에서 준비해간 고추장 볶음과 김을 곁들이다 보니 식사에 큰 불편은 없었다.
식사 후 중경 국내선 공항으로 나가 탑승수속을 마치고 20:40분 경 출국 검사를 받는데 의정부에서 오신 일행 중 새사람이 한국의 팩 소주를 휴대용 배낭에 지참하였다가 모두 압수 당하고 말았다. 술이라고 해도 믿지 않고 모두 개방 해 냄새도 맞고 라이터 불도 붙여 보며 독극물이나 화재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인지를 검사하면서 모두 19병을 압수 당하였고 이 과정에서 검색이 지체되는 등의 불편을 받아야 했다.
우리도 술은 가지고 있었지만 화물로 탁송하여 모두 통과되었는데 가이드가 개봉되지 않은 물병이나 술병은 된다고 한 것이 화근이다.
처음부터 탁송화물로 보내라고 하였으면 술 안 빼앗기고 시간 지체되지 않고 훨씬 수월하였을 것이다.
21:20 중경 공항 이륙 ∼ 22:20 장가계 도착,
장가계 공항은 최근 3배로 증축하면서 새로 도장되어 신축 건물처럼 보였지만 야간이라 그런지 활주로만 있을 뿐 청사는 한산하다는 느낌이다.
마중 나온 장가계 현지 가이드(남은동: 조선족으로 길림성에서 왔다 함)의 안내를 받으며 버스를 타고 30여분 달려 민남 호텔에 당도. 방을 배정 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기념품 가게에 들렸더니 중국산 비아그라를 판단다.
있어도 써먹을 곳이 없다고 하니까 아가씨를 소개 시켜 준단다.
아직은 비아그라 안 먹어도 되는 나이이고 마누라도 같이 와있다고 사양하며 장뢰삼(이십 만원)과 도장(5만원)등 기념품 가격을 알아보니 상당히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나와 방을 배정 받고 4층 방으로 올라갔다.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송상근 방으로 가서 소수 한잔씩하고 12시가 넘어서 야 잠자리에 들었다.
2004년 2월 17일 화요일 맑음
아침에 잠이 깨였는데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켜보아도 시간이 표시되지 않았다. 아! 여기는 중국이지 한국에서는 인근 중계시설에서 시간을 중계해 주는데 이곳에는 중계시설이 없으니 시간이 표시 될 리가 없고 나는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시계를 지참치 않은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여섯시에 모닝콜이야 오겠지만 지금이 4시 반인지 5시인지 갑갑해서 잡을 더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더 자야 할지 일어나야 할지 시간을 알아보고자 텔레비전을 틀어도 각 방송국 화면에 하나 같이 시간이 표지 되지 않았다.
생각 끝에 구내 전화 안내양에게 전화를 하여 영어로 시간을 물렀더니 화이브 까지는 알아듣겠는데 써리 화이브 인지 포리나인 인지 분간 할 수가 없어 두 번 더 묻다가 여섯시에 모닝 쿨을 원한다고 말하고 끊었다. 다섯시 3,40분 정도인 것 같아 아에 기상해서 여행 준비를 하였다. 얼마 안 있어 모닝콜이 왔다.
6시 반부터 일곱시 반까지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에 올라와 한시간 정도 쉰 후 8시 반에 호텔을 출발하였다.
장가계(張家界) 시(주 2 참조)는 한마디로 초라한 도시 같았다.
호남성(주 3참조) 서북부에 위치한 장가계 시는 인구가 150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한국으로 보면 직할시가 되고도 남을 만큼 큰 도시임에도 이곳에서는 호텔 주변의 상가 건물로 보아서 그리 번화한 큰 도시가 아닌 것 같다. 최근에 지은 3층 짜리 단독주택이나 상가들은 그런 대로 볼만한데 여기저기 낡고 왜소한 옛날건물이 자주보이고 한마디로 빈민촌이 연상된다. 이곳에서는 단독 주택도 2층 내지 3층으로 짓는 다고 한다.
땅이 습해 1층은 가축우리나 창고로 쓰고 사람들은 2층 이상에서 기거한다고 한다.
옛날(1950년까지)에는 이곳이 흉악한 산골이라 산적들 소굴이었다고 한다.
최근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그런 대로 도시형태를 갖춰 나가고 있으며, 이들 토가족(土家族)은 옛 산적들의 성격을 닮아 과격하다고 한다. 하여 이들과 대화를 나눌 때에는 적어도 1미터 이상은 떨어지란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장가계 시에서 한시간(약 30키로의 거리) 정도 버스를 타고 장가계 풍경 구(주 4 참조)로 들어가는데 중간에 백장협 계곡을 지난다. 이곳에서 일 백번 전쟁을 해서 백장협이라고 이름지어 졌다 하기도 하고 산의 높이가 사람 키로 일 백길 이라서 백장협이라고 이름지어졌다고 도 하는데 계곡의 폭이 넓은 곳이라야 50미터 정도이고 좁은 곱은 20미터 정도로서 아주 깎아지른 듯 도끼로 찍은 듯 수직 경사를 이루면서 석회암 바위 봉우리가 그 위용을 뽐내며 우리들을 환영하는 듯 하다. 우리는 풍경에 감탄사를 연발하지만 금새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기감으로 한편 불안하기도 했다.
09:30- 11:30 보봉호수 관광
09:30 버스는 황룡굴 풍경구라는 대형 입간 판이 세워진 공원 주차장에 도착을 하였고.안으로 조금 들어가니 계곡이 Y 자로 갈라지면서 앞 산 중턱이 막혀있는 절벽으로서 절벽중간 지점에서 품어져 나오는 100여 미터 높이의 푹포수가 4,5미터 넓이로 가지런히 보기 좋게 떨어지고 있는데 한눈에 인공 폭포임을 알겠다.
안으로 들어가는데 가마 꾼 들이 가마를 타라고 치근덕거린다.
가이드는 2만원 정도 한다 고 한다.
헌데 이들이 한사람에 만원 만 원한다.
이를 잘못 알고 탔다가는 나중에 가마 꾼 일인당 만원씩 2만원을 줘야 한단다.
왼쪽 끝으로 보이는 지점에 높은 전망대가 보인다.
저기서 보이는 전망이 따로 있나 궁금하지만 가이드가 옆에 없으니 알 길이 없다.
우측 계곡으로 조금 올라가니 길이 갈라지면서 법당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우리 일행인지는 모르지만 한 무리 관광객이 법당 쪽으로 올라간다.
나보다 앞서 있던 현지 가이드가 왼쪽 절벽(인공폭포 쪽)으로 나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란다.계단을 올라 고개를 넘으니 뺑 둘러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가 보인다. 이곳이 보봉(보峰)호수란다.
한 복판에 섬처럼 솟아 있는 봉우리가 있는 데 이것이 보물이란다.
이 봉우리를 하늘에서 보면 여의주가 물에 떠있는 형상이라나.
이 호수는 반자연 반인공 호수하고 하는데 산세로 보아 한국의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와 비슷한 상황인데 사방이 바위 봉으로 분지처럼 막혀있고 한곳에만 조금 열러 있는 것을 사람이 물 막이 공사를 하여 호수를 만들고 산중턱에 구멍을 뚫어 양수기로 물을 뽑아 올려 폭포로 떨러지게 만들었는데 여름에 물이 많으면 24시간 가동하고 겨울철 물이 적으면 관광객이 오는 낮 시간에 만 물을 뿜어내고 물이 더더욱 마르면 인공폭포를 중지시키기 도 한단다.
이 호수는 홍콩사람이 중국 정부에서 임대 받아 공사를 하여 관광사업을 하는데
적게 투자하고 돈을 많이 번다고 한다.
30여명이 탈 수 있는 유람선들이 여러 척 선착장에 정박중이다.
우리보다 먼저 온 일행이 출발하고 우리도 출발을 하여야 하는데 증평에서 오신 송씨 할아버지 내외가 보이지 않는다.
계단이 높아 올라오시지 못하신 것인지 아니면 절 쪽으로 들어가신 것인지 걱정이 된다.
할아버지는 근년에 위암 수술을 하신 후 기력이 많이 떨어지시고 할머니는 최근에 무릎 관절 수술을 하셔서 움직이는데 다소 불편하시다 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도 연세에 비해 걸음이 상당히 늦으신 것 같고 이런 경사지에서는 차라리 가마를 타고 오셨으면 일행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 상 싶다.
10여분 올라오는 길에서 10여분 지체되면 상당한 지체이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한국 가이드가 모시고 올라오는 보습이 보였다. 가마를 타시지.....
일행이 모두 도착되면서 유람선에 올랐다. 선녀가 이곳에 하강하여 경치에 반해 승천하지 않고 숨어 살게되었고 옥황상제가 장군을 나려 보내 찾게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그도 승천하지 못하고 돌이 되면서 저 산기슭에서 장군 바위가 되었다한다.
이곳은 관광객을 위하여 볼거리를 준비하였는데 토가족 아가씨가 선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관광객이 지나 가면 노래를 부른다. 이 배는 여자 배이기에 조금은 치장된 배라고 한다.
중국노래라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노래가 상당히 짧은 노래이고 우리가 박수를 보내니 그래도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든다.
이 아가씨의 하루 일당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인권차원에서 보면 돈 받고 인간 마네킹처럼 비가 오나 눈이오나 본인 감정은 물 속에 수장하고 관광객을 향해 앵무새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엽기 그지없다.
돌아올 때는 반대편 호수 가에 있는 초라한 배에서 남자가 노래를 부른데 이곳에서는 남자는 여자들의 시종이기에 여자에게 쫓겨나서 여자에게 구애하는 노래라고 한다.
이 호수에는 아귀고기라고 아주 괴상하게 생긴 고기가 있는데 발이 네 개이고 울음소리가 아기 울음소리와 비슷하며 물 속의 모든 고기를 잡아먹으며 이 고기의 껍데기에는 독이 있어 사람이 잡아먹지도 못한다고 한다. 또한 밤에만 물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사람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호수는 전체적으로 보면 긴 타원형이지만 호숫가의 돌출 된 산으로 해서 정확히 그리면 아메바 형세이다.
호수 끝 반환 점에는 무대가 설치되었고 토가족 남녀가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는 공연을 벌린다. 이것도 우리가 공연관람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고 전체 입장료에 포함된 볼거리인가 보다.
아귀바위 모습도 있고 선녀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보다가 뺨까지 맞으며 돌이 되었다는 바위를 지나고 선녀가 늙어서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가 바위가 되었다는 선녀바위가 물위에 우뚝 서있는데 바위 아래 부분이 여인의 얼굴 모습을 닮았고 눈 밑에 눈물자국까지 보인다.
이 바위를 돌아보면서 승선했던 장소가 아닌 하선 장에서 배를 나려 인간이 땜 공사를 하였다는 곳으로 올라가 절벽계단으로 나려 간다.
땜 공사는 한마디로 공짜공사인 셈이다. 이곳이 공사 전에는 20미터 내외의 넓이로 높이 100미터의 폭포수 지역인 것을 상층 통로를 30미터높이로 가로막아 완전 호수로 만들었고 수심을 높여(제일 깊은 곳은 130미터라고 함)전면의 인공폭포로 급수하여 새로운 볼거리를 만드는 등 일거양득의 성과를 얻은 셈이다.
옛날 폭포 옆으로 급경사의 계단을 50미터 가량 나려 가면서 폭포아래를 나려다 보니 현기증이 나면서 아랫도리가 떨린다.
계단을 얼마간 나려 오다 보니 입구에서 보았던 전망대가 호수정상에서 나려오는 계단 건물이다. 바위 절벽이 너무 심해 계단을 설치할 수가 없어 수직으로 건물을 지어 인공계단을 만든 것이다. 건물 높이만 해도 50미터는 됨직하다. 이곳은 차라리 엘리베이터 시설이 좋지 않을 까 싶다.
12:10 --13:00 보봉 건강원 무료 발 마사지 관광
보봉 호수 관광을 마치고 입구에 있는 건강원에 들어갔다.
공짜로 발 마사지를 해 주니 팁을 줄 필요가 없다고 해서 무심코 따라들어 갔는데 들어가 보니 중국 한약을 파는 곳이다.
한국 가이드까지 26명이 2층으로 올라가 안내된 방으로 들어가니 이미 가이드가 전화를 한 것인지 아니면 사전 예약을 한 것인지 발 마사지를 하기 위한 좌석이 26개로서 사무실이 꽉 찬다.
이어 무좀을 비롯한 피부병 치료 용 한약재 약물을 담은 세수대가 들어와 각자에게 분배되고 발을 담그란다. 약물이 너무 뜨거워 금방은 담글 수가 없었고 상단시간 기다렸다가 발을 담그었다.
약물이 식을 즈음 총각처녀 안마사가 우르르 들어오는데 안마할 사람을 안쪽에서 순서대로 차고앉는 것이 아니라 건너뛰는 것으로 보아, 안에 있는 일부 사람이 나중에 들어 온 안마사가 대좌하는 것으로 보아 밖에서 우리가 모르는 창으로 서로 고객을 지정하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남녀 배분이 맞지 않은지 아니면 약을 살만 사람을 골라 인원을 배치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남자들은 아가씨가 여자고객은 총각들이 맞는 것 같지만 나는 총각이 우리 집사람과 동기생 부인은 아가씨가 맞는 등 원칙은 없는 것 같았다.
이들도 모두가 토가 족이라 얼굴이 둥글고 키가 작아 한국의 초등학교 5,6학년 정도의 연약한 몸매이기에 발 마사지를 제대로 할 가 싶었는데 숙달되어 그런지 세게 하라 하니 비명이 나올 정도로 손 아귀힘이 세다.
마사지가 시작되면서 조선족 교포가 나와 이 건강원은 정부 당국에서 운영하는 곳이고 자기들은 매출에 관계없이 봉급쟁이일 뿐이라고 전제하고 약의 광고차원에서 설명할 테니 들어보라고 해서 , 어차피 발 마사지를 하고 있는 중이라 그가 설명하는 데로 듣고 있어야 했다.
약은 무좀 약 겸 각종 피부약, 그리고 관절염 및 신경통 치료제, 웅담 즙 말린 것, 그리고 편자환 등 4가지를 선전하였다.
나는 집사람용 관절염 치료제 2병과 내가 술을 많이 마시니 간 보호차원에서 웅담(황담)을 18만원에 구입을 하였다. 동기생도 사고 상당히 여러 사람이 약을 구입하였다.
우리로 보아서는 그리 큰 금액이 아니지만 중국사람 월급(평균 월 한화로 20만원 정도)으로 보면 상당한 금액인 것이다. 발 마시지 무료제공은 결국 공짜가 아니다.
여행 출발 전 약을 사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니 충동구매나 다름없지만 집사람이 관절염으로 고생을 하고 나는 이번 여행을 마치면 귀국하여 현재 광고 방송 중인 간 청소 약(10만원)을 구입하여 복용할 계획중이기에 그리고 옛날에 북경 대 한방과 에서 약을 구입하여 효과를 얻은 바 있고 또 정부서 품질을 보증한다고 해서 구입을 하였지만 다른 사람들도 약효를 의심치 않으니 약을 구입하였을 것이고 일행 중 7, 80%가 60대이니 맨 아픈 사람뿐이니 약에 대한 연민을 부정할 상황이 아니기에 이를 이용하는 중국인의 상술도 알아주워야 한다.
13:30- 16:00 황룡동굴 관광
입구에 들어가기 전 주차장에서 동굴입구까지 약 1키로 정도를 걷는데 할머니 ,아주머니 , 아이들까지 굴이며 밤이며 많지 않은 과일을 들고 사라고 따라다니며 떼거지를 쓴다.
마음 약한 사람은 안 사고 못 배길 형국이다. 일행 중 여자들 몇 명이 군밤을 사고 귤도 사는 것 같았다.
석회석 동굴은 한국에서도 또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 도 많이 보았기에 그리 신기할 정도는 아니지만 굴의 규모가 상당하다는 것이 부럽다.
굴속에 폭이 넓지는 않지만 소형 선박(15명 탑승)을 타고 20여분을 선상 유람 하고 다시 굴을 오르내리며 두시간 정도를 관광할 수 있다니 그것도 아직 개발치 못하여 개방치 못하는 곳이 50%가 넘는다니 얼마나 큰 동굴인가.
이 동굴은 말레이시아 사람이 돈을 투자하여 개발하고 운영하고 있다 한다.
그리고 동굴 마지막의 부분에 있는 4, 5백 평 정도의 공간에 마치 석준 전시장 같은 집단 석순 밀집지역은 정말 장관이다.
석순의 크기와 모양을 일일이 말로 설명 할 수가 없어 정말로 아쉽다. 이곳의 석순은 100년에 1센치가 성장한다고 하며 대부분의 석순이 15미터 내지 20미터 정도의 기둥형으로 대충 계산을 해도 이들의 나이가 20만년 이상 된 것이다. 그저 우와 우와 하고 감탄사만 연발 할 뿐이다.
이유가 있었겠지만 석순이 너무 늙어 넘어진 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새로 돋아나는 2세에 밀려 자리를 내주며 넘어진 것도 있다.
가늘고 키만 멀쑥한 한 석순은 중공 관광보험 상품에 중국 돈으로 1역위엔(한국 돈 150억원)에 가입되어있다 한다. 이 석순이 넘어지면 동굴 관리업체에 1억 위엔을 지불해야 한다는데 보험회사는 안 넘어질 확률이 높으니 이것을 보험에 들어 주지 않았을 까 싶다.
16:00- 16;30 진주 , 자수정 및 옥 제품 매장 쇼핑
이런 매장은 다른 여행지에서도 많이 보아 왔고 또 한국 제품의 품질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사는 사람이 없는 듯 하여 윈도쇼핑이 일찍 끝났다.
16:30 천자호텔 투숙
호텔로 돌아가면서 버스에서 현지 가이드가 TOUR200 여행일정에는 황석채 관광이 잡혀져 있지 않으나 일부 여행객이 옵션 관광을 희망하고 있는데 나머지 분들도 갈 의사가 있느냐고 물었으나 투어2000 고객들은 묵묵 부담 당초 계획대로 하잔다.
황석채를 보지 않고서는 장가계를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 아름다운 경치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하며 타 여행사는 우리보다 10만원을 더 받고 황석채까지 관광시키지만 우리가 30불(36,000원)을 더 내고 보아도 7만원 정도는 더 싸게 관광하는 것이라고 내가 보충 설명을 해도 투표결과는 부정적이다.
참 좋은 여행사에서 넘어온 우리 일행 5명 과 전라도 광주에서 오신 선생님 4명을 포함하여 춘천에서 오신 1명까지 10여명이 찬성하고 15명이 반대하여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방을 배정 받고 짐을 배달 받고 현지 가이드가 불편한곳이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 방에 왔을 때 다시 한번 강력하게 황석채 관광을 추진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다.
우리 일정 중 이곳의 마지막 날인 4일째 되는 날은 금편계곡을 보고 오후에 중경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는데 남는 시간은 어떻게 활용 할 것이며 이 남는 시간에 반대자는 호텔에서 잠이 자을 자던지 아니면 버스에서 대기하라 하고 우리는 관광을 꼭 시켜 달라고 하였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이곳 호텔에 투숙중이 다른 여행사에 합류하여 같이 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니 그들은 오늘 이미 황석채를 관광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황석채를 보려면 버스를 이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보면 다보고 안 보면 말아야 한다고 해서 다시 한번 반대자들에게 의견을 묻고 꼭 관철되도록 하라고 당부를 하였다.
일정 상 오늘 밤 발 마사지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낮에 무료 발 마사지를 받았기에 내일로 연기하고 오늘은 조용히 일찍 쉬기로 하였다.
저녁 식사시 고량주가 한 병 무료로 배달되었으나 우리 식탁에서는 나만 마시게 되어 남은 것은 방으로 가지고 올라와 혼자서 밤에 모두 마시고 잣다.
2004년 2월 18일 수요일 맑음
06:30 기상
어제 밤 식사하면서 마신 술과 자기전 남은 고량주를 모두 마신 때문인지 기상하면서 갈증이 심해 물을 많이 마셨지만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다. 사이다를 마시면 ,아니면 맥주를 마시면 갈증이 빨리 해소될 수 있을 것인데 .....
07:00 호텔 부폐식 조식
식당에서 일행을 만나니 진주 여고 동창생 일행 중 한 분이 어제 밤 자기들 덕택에 황석채 관광을 10불 깎아서 20불에 가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중국식 흥정이다. 계획에 없어 돈을 준비하지 못하였기에 20불 정도면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니까 가이드가 OK 하였고 반대하던 다른 일행들도 모두 찬성하였다고 한다.
황석채 올라가는 케이블카 값이라고 하면서 30불을 요구하였는데 그렇다면 10불은 이곳 현지 가이드와 버스기사 팁이란 말인가?
황석채를 우리가 가든 안가든 우리들은 기사와 가이드 팁으로 1일 1인당 10불씩 4일간 40불씩 이미 어제 갹출하지 않았던가?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황석채를 관광하게 되어 다행이다.
09:00 천자호텔 출발
10:00 - 12:20 황석채 관광
호텔에서 타고 온 버스는 이곳 주차장에 세워두고 입장 하기전 인근 점포에서 캔당 1,000원을 주고 맥주 2캔을 사서 송상근과 나눠 마셨다. 한국보다 조금 싼 것 같다. 역시 갈증해소는 맥주가 최고다. 가이드가 사전에 나누어 준 지문 입장권을 들고 입장을 하는데 지문입장권을 출입구 기계에 먼저 넣고 우측 모지를 물 묻은 수건에 닿은 후 유리로 된 지문 찍는 홈에 지문을 찍으라고 한다. 이것이 지문 입장권에 지문이 입력되고 2일간 장가계 관광입장 시 사용되니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는데 아무튼 기분이 씁쓰름하다.
티켓을 내고 들어가면 되는 것이지 꼭 지문을 남기고 또 매번 지문을 확인하여 출입시킨다는 것은 이것이 군사통제 구역이거나 신기술 연구소도 아닌데 왜 지문으로 들어갔던 사람을 기억해야 하는지 , 그렇다고 카드에 내 이름을 비롯한 신상명세서를 써넣은 것도 아닌데.....
이곳의 전체적인 산세는 한문글씨의 아래 하(下)자 모양으로 계곡이 이어져 있다.
계곡으로 접어들면서 우측계곡 입구에는 원숭이 방목장인데 아직 개장하지 않고 있다 하며
전방의 막힌 산봉우리의 위용과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약간은 안개가 끼어 사진 발이 안 좋을 것이지만 샷터 누르기에 급급하다.
사방이 홍사암 준 봉들로 둘러싸인 분지 같고 준 봉들의 숲 속에 빠져 든 것 같은 느낌이다.
상당히 넓은 광장이 깨끗하게 정리되어있고 장가계 국립공원이란 대형 간판에 강택민 주석이 직접 글을 썼다 함인지 강택민의 이름까지 올라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는 깊을 계곡이 보이는데 이곳이 금편계곡이며 오후에 관광할 계획이고 황석채는 이곳에서 좌측계곡으로 셔틀버스를 타고 케불카 타는 곳으로 이동을 했다. 아주 짧은 거리(3분 거리)의 평지도로 인 데도 버스를 타게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나이 많은 노약자 관광을 배려하는 것일까?
아니면 케불카에 너무 많은 사람이 동시에 모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까?
케불카 탑승 장에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명되지 않았다.
하여 우리일행은 기다림 없이 탑승할 수가 있었다.
만리장성 케불카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많은 시간을 기다릴 까 보아 걱정하였으나 우리 한국 관광객은 10불씩 특별 요금을 납부하였기에 수많은 중국 관광객 출입을 중지하고 한국 관광객을 먼저 통과시키는 배려 때문에 지체하지 않은 생각이 났는데 이곳도 10불씩이라면 사람도 없는데 급행료를 낼 필요가 없으므로 바가지 쓴 것이 아닐 가도 싶지만 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케불카 승강장은 해발 300미터이라고 한다.
케불카는 한 칸에 30여명을 한꺼번에 탑승시키는 것이 아니고 10여명이 탈 수 있는 작은 칸짜리가 1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3칸이 줄에 연결되어있다.
실제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산 정상(1,090미터)까지 아주 급경사를 오르기 위한 케불카의 하중안배 상 배려인가 보다
맨 앞 케불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산 아래를 나려다 보니 절벽 같은 벼랑이지만 도보로 산정까지 등산하는 계단 길이 보이긴 하나 이 길로 오르는 사람은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칸에는 중국 관광객 4명도 타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화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정신이 없다. 중국어 특유의 오성음 때문일 것이다.
케불카 창문으로 이름 모르는 준 봉들이 밀려왔다가 밀려간다. 흙이라고 한 스푼도 없는 맨 바위 위에 어떻게 소나무가 자랄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산 정상 케불카 승강장에서 나려 사방을 둘러보니 해발 1,100미터 고원지대에 서있는 듯 하다. 이곳은 산이 아니고 처음에는 고원지대의 평지로서 대 홍수에 연약한 흙 과 돌들은 모두 급류에 파여 나가고 견고한 바위 봉 위만 남으면서 계곡을 형성하게 된 듯 하다.
이곳은 약 3억 8천만년 전에 망망한 바다였으나 후에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해저가 육지로 솟아오른 후 억만년의 침수와 자연붕괴 등의 자연적 영향으로 오늘의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 숲을 이루고 있다, 허지만 좀더 생각해보면 전체가 층층의 사암으로 지표면에 모두 연결되어 층층이 모두 돌이 되었을 것이고 이 지층은 상당한 범위로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데 어찌 칼로 자른 듯 떨어져 나갈 수 있단 말인가? 하여 대부분의 돌기둥이 하단이나 상단 부의 굵기가 거의 비슷하다. 신기할 뿐이다.
이곳의 산세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국화 꽃 꽃술 정상에 서있고 사방이 노란 국화꽃 꽃잎같이 누런 사암 준봉들로 겹겹이 울을 이루고 있다고 하면 합당한 표현 같다.
산의 9부 능선으로 한 바퀴를 돌면서 바위 계곡들을 나려다 보는 관광인 것이다.
정상 앞 100미터 지점에 육각형의 전망대가 지여 져 있었는데 이 전망대의 이름이 육기각이라고 하는데 육기각의 의미는 이곳에는 하늘 ,산, 물, 나무, 사람, 동물 여섯 가지 기이한 것이 존재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기이한 것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이곳에는 원숭이도 있고 또한 뱀은 독이 많기로 유명하단다.
한번 뱀에 물리면 다섯 발자국 걷다가 죽는다는 오보사, 일곱 발자국 걷다가 죽는 다고 해서 칠보사라고 한단다. 가이드가 더 이상은 설명을 안 해 여섯 가지 기이 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이곳 황석채 정상에서 보이는 모든 것 모두가 기인한 것일 것이다.
사암 봉우리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의 모습이 신기하고 산 또한 다양한 모습에 깎아지른 듯, 까마득한 높이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고고히 서있는데 저 봉우리들은 누가 어떻게 만들었을 까 신기하고 바위 절벽 사이로 흐르는 계곡 물의 모습(수면에 비친) 또한 신기 할 것이며 바위 절벽에 붙어 수 백년 살아온 소나무의 생명력 또한 신기하고 이곳의 사람들과 동물들은 신선들과 함께 하니 이 또한 신기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하늘의 별을 딸 수 있는 곳이라서 사람들이 올라서면 안 된다는 제성대,
애인과 사랑을 맹세하면 그 사랑이 영원하다는 정인봉
손가락 다섯 개의 모양을 닮았다하여 오지봉,
벽이 아홉 개가 겹쳐 있다하여 구중벽.
선녀가 살았었다 하여 선녀봉.
신이 하강한 곳이라 하여 강신봉.
손가락을 모은 손바닥같이 닮았다 하여 손바닥 봉,
가이드가 당부를 한다. 경치에 취하여 산만 보고 걷다가는 발을 헛디딜 수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행 중 아주머니 한 분이 경치에 도취하여 경치만 보며 계단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다 발을 헛디뎌 발목을 접질리면서 실신상태가 되어 다행이 동행자가 가지고 온 우황청심환을 먹이고 등을 두드려 주고 발목을 마사지 하는 등의 노고 끝에 회복이 되어 무사히 하산하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걸음걸이가 불한 해 보인다.
황석채(黃石寨)란 이름은 글자풀이로 봐서 누런 황금색의 바위들이 겹겹으로 울타리(목책)를 형성하고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정말로 이름 값 이상의 절경이다.
다른 이름으로 황사채(黃獅寨), 황석봉(黃石峰)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어렵게 성사시키긴 하였지만 잘못되었으면 이곳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 관광으로 끝날 뻔하였다. 다행이고 남보다 싸게 관광하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정신 없이 이 계곡 저 계곡을 누며가며 한바퀴 돌아보고 케이블카로 다시 하산하니 2시간이 삽시간에 흘러 같다. 한번 더 보고 싶지만 갈 길이 멀단다.
출입구로 나오는 길에서 많은 관광객이 도로 아래 습지를 나려다 보고 있어 나도 그곳에 접근 나려다 보니 길옆 수렁에 내 주먹만 한 누른 개구리들이 산란기를 맞아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한 두 마리가 아닌 상당히 많은 수의 개구리가 동시에 시합이리도 하는듯 짝짓기를 하고 있었는데 개구리 쇼를 보는 듯 하고 황석채에 어울리게 개구리 색깔도 누렇다.
수놈은 암놈 등치의 반정도 밖에 안되면서 암놈 등에 업혀 떨어질 줄 모른다.
주차장으로 나오면서 여자 어린이가 관광안내책자를 사라고 한다.
얼마?
한국 돈 4천 원!
비싸 2천 원.
책자 뒤의 원가(한국 돈 10,000원)를 보이면서 3천 원!
앞의 다른 사람을 가리키며 어제 보봉호수 2천 원에 샀어. 2천 원!
안 돼 3 천원!
그럼 안 사 하고 돌아서서 걸으니 뒤에서 부른다.
사장님 2천 원!
하여 2천 원에 책을 구입하였다.
사실 어제 보봉호 및 황룡 동굴 관광을 마치고 나오면서 다른 일행들은 깎고 깎아서 3천 원씩에 샀다. 2천 원에는 그들도 팔기를 포기하는 것으로 보아 원가에 미찌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중국사람들은 결코 미찌는 장사는 안 하는 사람들이니까........
헌데 이 아가씨는 2천 원에 파니 어떻게 된 것인가? 모를 일이다.
14:00--16:00 금편계곡 관광
황석채 들어가는 입구에서 우측으로 난 깊은 계곡이 보이는데 이곳이 금편 계곡이라 한다.
거리는 7.5키로 미터 정도 되고 길은 평지로서 돌이 깔려 있고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을 뿐 그리 부담되지 않지만 그래도 약 2시간 정도 걸을 기운이 안 되는 사람은 버스에 타고 있으면 반대편 입구 주차장에서 만나게 된다고 한다.
오전에 황석채에서 넘어져 거동이 불편한 아줌마와 춘천에서 혼자 오신 남자 분 , 증평에서 오신 노인네외분이 기권하고 21명이 관광에 나섰다.
입구에 접어들자 마자 이곳에서도 많은 가마 꾼 들이 가마를 타라고 치근덕거린다.
우리 일행에서는 가마를 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입구에서 조금 들어가니 길바닥에 맨발로 걸으면 지압을 할 수 있도록 잔돌을 시멘트 바닥에 밖아 놓은 길인가 싶더니 시멘트 전주를 잘라 섬돌을 만들어 건너뛰면서 가야하는 부분도 있고 외나무다리를 만들어 중심을 잡으면서 가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평지의 길에 이렇게 변화를 주어 관광객들에게 신경을 쓰게 하는 발생은 의미 있는 일인 듯 싶다.
계곡 입구 우측에서 내 오른손의 엄지손가락 모양을 닮은 사암 봉(엄지봉: 내가 붙인 이름)이 여기 금편계곡이 세계제일이라고 위풍 당당하게 자랑하며 우리를 맞이하는 듯 하다.
엄지 봉을 지나 10여분 정도 들어가니 우측에 까마득히, 당장 무너질 것 같은 거대한 돌탑이 서있다. 이것이 바로 금편암 이고 이것이 이 계곡에서 제일 으뜸이라 금편계곡이라 이름지어 졌다고 한다.. 해발 300미터 계곡에서 우리들의 시계상 높이는 350미터로서 사면을 칼로 자른 듯 층층의 시루떡을 칼로 잘라 세워 놓은 듯 하여 그래서 금편 암이라고 이름지어 졌는데 금편(金鞭)이란 글씨의 뜻으로 보면 쇠 채찍을 의미하지만 중국에서는 통상 전투용 무기를 의미하니까 천국의 한 장수가 자신이 차고있던 무기(칼이던 채찍이던)로 내려 처서 가공한 암석이란 뜻인데 누군가가 만들지 않고는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 졌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작품이다.
이 걸작이 얼마나 중요한지 천국의 옥황상제가 그 옆에 파수꾼을 세워두었는데 이 파수꾼이 돌이 되어 독수리 바위가 되었단다.
계곡의 한 중간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지만 이물은 옥의 티인 듯 석회암에서 나온 샘물이라 석회질이 많이 용해되어있어 생수로는 마실 수 없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물을 끓여서 차로 만들어 마시지만 한국인은 생활화가 아니 되어 마셨다 하면 설사병이 걸리면서 심한 사람은 나중에 탈수증에 걸려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가면서 고생하게 되니 절대 마시지 말라고 가이드가 당부에 당부한다.
계곡 주변에는 높이 2,3십 미터의 활엽수가 아주 곧게 거의 수직에 가깝도록 자라고 있고 지금은 낙엽이 진 상태라 다소 볼 맛이 없지만 여름에는 녹음이 우겨져 맑은 물과 괴암 괴석의 주변경관에 극치를 이를 상 싶다.
대부분의 암벽에는 소나무(천연적인 분재)가 붙어 자리고 있다.
흙 한 삽 없는 까마득한 높이의 바위 탑 꼭대기에서 어떻게 나무가 붙어 자랄 수 있는지 신기하고 그래서 더더욱 풍치가 넘친다.
우리나라 설악산에서도 혹간은 볼 수 있지만 이곳의 모든 사암 봉은 아래서 꼭대기까지 수십 수백 켜의 층으로 형성되어있고 그 층층의 틈새에 소나무 씨가 떨어져 이곳의 습한 기후(비가 자주 오고 거의 매일같이 안개가 낌)에서 안개비를 빨아먹으며 연명한다 한다. 하긴 활엽수가 하나도 보이지 안는 것으로 보아 수분 증발이 적은 소나무(침엽수)이기에 암벽에 붙어서도 살수가 있는가 보다.
송상근 동기생이 한마디한다.
한국에서 산수화 화가들이 바위 봉우리에 소나무를 그린 그림을 보고 말도 안 되는 거짓 과장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이곳에 와보니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와이어로 가설된 흔들리는 다리가 있어 이를 건너는 남자들은 일부러 좌우로 흔들면서 건너게 되는데 공포심이 많은 여자들의 비명을 들으면서 남자들의 장난이 심해진다.
화장실은 중간쯤 되는 곳에 앉아 쉴 수 있는 휴식처와 간단한 음료를 사서 마실 수 있는 휴게실이 있는데 같은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니고 200여 미터 동 떨어져 있는 곳에 별도로 설치되어있었다. 깨끗한 경관에 왼 화장실이냐 싶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골짜기 속에다 설치한 것으로 짐작이 간다.
계곡에는 금편암을 비롯하여 계곡을 밝히기 위한 쌍촛대 바위
하늘을 향해 개가 짖는 듯 한 형상의 벽산구모.
소설가 로신이 머물었었다던 문성암.
거북이 두 마리가 시냇물을 바라보는 형상을 닮았다는 쌍구탐계,
물이 많을 때는 수심이 7미터(지금은 1미터도 안됨)정도 된다고 하는 수면에 붉은 풀(단풍)과 돌이 아름답게 비추인다고 해서 자초담.
손오공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는 화과산 .
남녀가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듯 한 천리 만남,
헤어지면 다시 만난다는 중화수,
이름 없는 봉우리까지 좌우 양편에 돌탑들의 마천루 속을 산책하는 기분이다.
3/4정도의 길에 다시 휴식처가 있고 이곳에는 물레방아 같은 스타일의 그네가 설치되어있고
물을 퍼 올리는 수차도 있는데 쉬면서 민속놀이를 즐겨 보란 배려일 것이다.
우리 일행 중 진주여고 동창생 여자들 중 3명과 남자 한 명이 2인당 한화 1,000원을 내고 물레방아 식 그네를 탔는데 옆에서 한 남자가 손으로 물레방아를 돌려주는데도 체중이 일치하지 않고 요령도 숙달되지 않아 그러하겠지만 원활한 그네 타기가 되지 못했다.
여행의 추억을 남기기 위함일 것이다.
이곳에서의 가마 꾼은 한국 돈 1,000원을 외치면서 호객을 한다.
이동거리가 얼마 되지 않고 입구까지 되돌아가는 길이기에 싼가보다.
쉬었다가 다시 걸으니 뒷다리가 땅긴다.
손으로 주물러도 금새 풀리지 않는다. 아무래도 돌길을 걸어서 그런가 보다.
이곳의 길은 폭이 1.5미터 정도의 폭에 가로 1미터 세로 0.3미터 높이 0.2미터 정도의 돌을 깔고 이어서 가로 0.5미터 정도의 돌을 지그재그로 조립 평지 길까지 돌을 깔았는데 이 길이 오히려 걷기에 불편하다. 오르내림이 있는 계단에만 돌을 깔고 평지에는 그냥 흙 길이 건강상에도 더 좋은 것인데 ......
이 공사는 사족처럼 안 해도 좋은 공사를 한 것 같다.
예측대로 300여 미터를 걸어나오니 상당한 넓이(1만평 정도)의 분지가 전개되면서 금편계곡의 반대편 출구이면서 입구이기도 한 주차장이고 식당건물과 기념품 가계와 위락시설들이 보인다.
이곳은 네 개의 계곡 물이 모여서 달팽이 모양으로 물이 돌아 나간다고 해서 수요사문이라고 한단다.
오른쪽에는 관광지의 위락시설들로서 한 식당 앞에서는 중국여인이 주현미의"마주치는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하는 노래 가사를 중국말로 부르면서 호객행위를 하고 있고 한 소녀는 우리들을 따라다니며 새 모양의 도자기에 물이 들어 있는지 꼬리부분을 입에 물고 불면 새소리가 나는 기념품을 팔기도 하고 한 소년은 퉁소로 우리민요 아리랑을 연주하면서 팔기도 하며 펼쳐진 길이가 가로 1.5미터 세로 1미터 정도의 접는 대형부채를 팔기도 하는데 저것을 어떻게 한국에 가져가나 하고 염려하는데 우리 일행 중 아주머니 한 분이 이 부채를 사기도 했다.
광장 왼쪽 하천 변에는 "장량묘" 라는 안내 표시석이 설치되어있지만 장량의 묘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한다.
아닌 말로 저 많은 봉우리 중 어느 봉우리에서인가 도를 닦으며 309년을 살다가 신이 되어 승천하셨다고 하는데 시신이 남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며 영혼만 떠났다고 해도 높은 산봉우리에 시선이 남아 있었다면 새가 다 파먹고 뼈다귀만 남아 있을 것이며 보통사람은 봉우리 꼭대기엔 올라갈 수 없으니 확인도 안된 것이며 사실이라 한들 수 천년이 지난 지금 모두 자연 증발되고 말았을 것이다.
버스에 올라 공원 입구로 나오면서 한 아줌마가 자랑인지 이곳의 평가인지 한마디한다.
계림이 장가계보다 훨씬 멋있단다.
나도 계림을 7년 전에 가보았지만 계림의 풍광이 이곳 무릉원 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에는 동의 할 수가 없다. 아니 그 반대이다.
가이드가 보충 설명을 했다.
일부관광객은 계림의 풍광이 이곳 장가계보다 더 아름답다고 하는데 이는 각자가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이거다 저거다 속단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꽃으로 비유를 한다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고 백합이 아름답다는 사람도 있고 더러는 가냘프지만 그윽한 향기를 내뿜고 있는 난 꽃이 더 아름답다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에서는 계림의 풍광은 여성적이고 장가계는 남성적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계림의 산세는 해발 100미터 이내면서 모양새가 대부분 처녀 젖가슴을 닮았다해서, 작고 부드럽다해서 여성이고 장가계는 6, 7백 미터의 까마득한 높이에 서슬이 시퍼런 창 같기도 하고 남자들의 거시기 같기도 한 수직의 암봉(일명 좇대바위) 모습에 , 크고 거친 것에 기인된 듯 합니다.
또한 이곳 장가계 계곡에는 계림보다 물이 적습니다. 장가계는 사람이 움직이면서 동적으로 관광을 해야 하고 계림은 배에 앉아서 정적으로 선상유람을 하는 차이에서도 의미가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계림에는 선비가 많이 배출되고 이곳 장가계에서는 위인이나 장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모택동도 이곳 장가계는 아니지만 가까운(같은 성) 호남성 출신입니다.
이곳 무릉원에는 이름 붙여진 봉우리가 3,000여 개이고 무명의 봉우리까지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 금강산에는 1만 2천 봉이라 하지만 아직 못 가보았고 계림에서는 30만 봉이라고 하지만 사실 볼만한 봉우리는 없는 것이고 이곳 장가계의 봉우리는 대부분이 그야 말로 촛대 바위 형상이라 다양한 맛에서는 금강산(사진으로 본)에 비유가 안될 상 싶다.
하지만 아쉽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셨다면 왜 중국은 넓은 땅에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까지 하사하시고 (이들은 대부분 예수를 믿지 않는데) 한국은 좁은 땅에 70%는 모두 산으로 만들어 놓으면서도 볼만한 풍경은 하사하시지 않았는지(한국사람은 광적으로 하나님을 신봉하는데) , 한라산이나 지리산, 태백산에 10분에 1, 아니 100분의 1만이라도 떼어줄 것이지........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너무했다.
아쉽다.
부럽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니 우리 것(백령도 두무진 절경,설악산 천불동 계곡,주왕산)이 더 좋다고 자위 해본다.
16:00-17:00 중국 차 매장 쇼핑관광
차 매장에는 시음하는 티 테불이 준비되어있고 우리일행은 두 패로 나뉘어 고산차 우롱차 , 등등의 차 끓이는 요령과 맛을 보이고 약효에 대해 조선족 여자가 설명을 하는데 우리 일행 중 자꾸 아는 체 하여 강사의 설명을 끊어 신경이 거슬리지만 뭐라 할 수 없어 그냥 넘어 갔다. 진주 여고 동창들이 차를 많이 산다. 다도회 모임인가?
18:30- 19:50 발 마사지 관광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가 호텔 입구에 있는 천자 건강원으로 안내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중간의 탁자를 경계로 갈라져서 남자고객은 아가씨들이 여자고객은 총각들이 마사지를 맞는다. 그리고 전신 마사지를 할 사람은 15불은 더 내고 별도의 방으로 안내되어 안마를 받는다. 춘천에서 오신 분과 동기생 송상근 배려로 그의 부인과 우리 집사람이 전신마사지를 받았고 나머지는 5 불 짜리(팁이라고 함. 기본금은 관광 비에 포함되어있음) 발 마사지만 받았지만 그래도 등과 팔까지 안마를 해 주어 전산마사지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우리남자고객을 안마하는 아가씨들의 나이가 25세라고 한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곳 아가씨들도 모두 토가 족이라 키가 작고 얼굴이 동그란 것이 예쁘고 귀엽긴 한데 한국 의 초등하고 5,6학년 정도의 등치보다 더 가냘 퍼 보이지만 안마하는 힘은 성인 수준이다.
아주 간단한 정도의 영어와 한국말이 통한다.
전신마사지를 마친 사람들은 다시 발 마사지 좌석으로 나와 추가로 발 마사지를 더 받았다.
집사람이 발 마사지를 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다 도로건너 한글로 "백두산 슈퍼"라고 써있어 길을 건너가 들어 가보니 현지인(토가족) 여인이 장사를 한다. 한국말도 못한다. 영어도 안 된다. 한국 관광객을 유인하기 위해 한글 글씨를 써넣은 것이다, 맥주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한 캔에 1,000원씩이다. 여자들 것 까지 4캔을 사서 동기생 가족들과 나누어 마셨다.
집사람에게 전신마사지를 어떻게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가 발 마사지 받은 것과 큰 차이가 없다고 한다. 전신마사지는 낭비인 것 같다. 이는 관광회사에서 권장해서는 안되겠다.
2004년 2월 19일 목요일 맑음
08:00-- 천자산 관광
천자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짐을 챙겨 버스에 싫고 무릉원 입구에서 하차한 후 또 다시 지문 출입절차를 마치고 공원 내 셔틀버스로 바꿔 타고 천자산을 향하는 달리는가 본데 도로가 버스가 서로 교행 할 수 없을 것 같이 상당히 좁아 보이고 바위 절벽 옆을 깎아 만든 도로인지라 밑에는 수십 길 벼랑이며 산 계곡을 따라 도로를 건설하였기에 구비 구비 돌고 돌아 주행을 하여 야 한다.
또한 도로가 건설이 불가능 한 곳인지 산에 구멍을 뚫어(시멘트 공사가 아니 생굴임) 버스 한 대가 겨우 지나 갈 만큼의 바위 동굴 도로가 있고 이 동굴은 3개가 연 이어 있었는데 양방향 교통소통을 위해 신호등이 양방향 입구에 있을 뿐 특별히 안전을 배려하는 느낌은 들지 안았다.
도로 밑에는 호수인데 비수기라 그런지 물이 얼마 되지 않는다. 물이 부식되어 녹색 빛(녹조)이다. 산이 높아지면서 호수는 바닥이 보인다. 호수를 막기 전에 사람이 살았던 집터와 허물어진 담벼락 잔재가 보이기도 한다.
버스의 안전운전에 신경이 쓰이기도 하였지만 한시간 정도 달려 천자산 케불카 승강장에 도착하였다.
천자산 케불카는 우리나라 스키장의 스키리프트 형과 비슷한 모양이다.
한쪽에 3명씩 마주보고 앉도록 의자가 있고 6명이 한 칸에 타고 유리벽으로 밖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있다. 한 칸은 약 2분 정도의 간격을 두고 출발시킨다.
리프트에 여러 대의 케불카가 매달려 동시에 도는 가 보다.
케불카는 천자산 정상을 향해 2키로 정도의 거리를 45도 정도의 경사로 올라가면서 좌측방에 전개되는 다양한 모습의 바위 탑들을 관광하는 코스이다.
황석채는 산정에서 다양 각색의 돌탑들을 나려다 보는 관광이고 금편계곡은 계곡에서 산책하며 올려다보는 관광이며 천자산은 45도 경사로 올라가면서 보는 케불카 관광이다.
천자산은 무릉원 서북쪽에 위치하며 천자산(天子山)이란 이름은 옛날에 이곳 토가족 수장인 천자가 이산에 올라 풍광에 도취하여 자기 외에 딴사람이 봐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천자산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케불카에 가이드가 탑승치 못하다 보니 올라가며 보이는 절경들의 이름을 알 수는 없고 그저 와! 와! 감탄사만 연발하며 사진만 찍을 뿐이다.
케불카 승강장에서 하차하여 일행들은 전망대로 집결되고 기념 사진도 찍었지만 실제 절경들은 계곡에 숨어있어 잘 보이지 않고 멀리 겹겹이 전개되는 고원과 계곡들이 보일 뿐이다.
이곳 고지대에서 만 운행되는 다소 낡아 보이는 버스를 타고 5분 정도 이동하니 산 8부 능선쯤에서 완만한 경사와 넓은 공간이 전개되는가 싶더니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하차하란다.
5분 거리는 걸어도 될 시간이지만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함 배려인 듯 하다.
이곳도 역시 식당과 기념품 가계 등의 위락시설이 상당규모로 시설되어있었고 하룡 공원이라고 했다. 하룡은 모택동 휘하 10대장군 중 한 명으로서 이곳 출신이며 중국 공산당 집권에 공이 지대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강택민 국가 주석이 장군의 이름으로 공원명칭을 정하고 개발하였다 한다.
하룡 공원에서 보는 관광코스는 붓 통에 꼽아놓은 붓을 닮았다 하여 어필봉 ,
선녀가 꽃을 뿌리는 형상이라 하여 선녀헌화 ,
무사가 전투용 투구를 쓴 모습을 닮았다 하여 무사두상 ,
48명의 대장군 형상의 봉이 집결된 점장대,
돌배가 바대에서 솟아오르는 모습과 비슷하다하여 석선출해.
하룡각 전망대. 동천대, 신당만, 천옥암, 등등의 볼거리를 감상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50여분을 구비 구비 돌고 돌아 원가계 관광지구 도착하였다.
원가계(袁家界) 전망대는 해발 800여 미터로 이곳도 황석채 관광과 마찬가지로 산 정상에서 아래 풍광을 나려다 보는 관광코스이다.
이곳 역시 사암 봉우리 숲이 울울창창하여 하찮은 필설로 논하기가 미안스럽다.
천하 제일 교는 사람이 공사를 한 다리가 아니고 봉과 봉 꼭대기가 자연적으로 연결된 그러니까 밑에서 보면 봉과 봉 사이가 동굴 모양이겠지만 하도 높아 동굴이라 기보다는 신이 봉과 봉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오면 99세까지 장수한다 하며 잠을 쇠에 이름을 새겨 이 다리에 걸어 놓으면 두 사람의 사랑이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하여 교각 주변에는 수많은 잠을 쇠가 걸려있다.
99세까지 장수도하고 집사람과 변함 없는 사랑으로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며 천하제일 교를 건너갔다 나오는데 오금이 떨려 다리 아래를 나려다 볼 수가 없다.
한 아주머니는 다리 난간도 겁이 나서 잡지 못하고 다리가 흔들리기라도 하는 듯 오리걸음을 걷는다.
잠을 쇠를 기념으로 사올까 하고 가격을 물어보니 한국 돈 10,000원이란다.
한국 같아도 비싼데 중국의 물가시세로서는 더더욱 비싸 그만두었다.
다섯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는 오면암.
비경에 도취하여 정신을 잃어버린다는 미혼대.
이곳 전망대 옆에서 맥주며 과일이며 간단한 기념품을 팔고 있는 조그마한 간이 매점이 있는데 우리에게 한국말로 반갑게 인사를 한다. 말인즉슨 연변에서 온 한인교포라고 한다.
교포라는 말에 우리 역시 반갑고 조금이라도 돕고 싶은 마음에서 우리는 캔 맥주를 4캔 사서 마셨고 다른 관광객도 호감을 가지고 과일을 구매하는 등 동족간에 사랑을 베푸는 것 같아 보기가 좋았다.
수직엘리베이터 전망대 앞의 준봉 군락지를 끝으로 원가게 관광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308미터의 수직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산한다.
이 엘리베이터는 독일사람이 시공하였다 하며 세계에서 제일 놓은 엘리베이터라고 한다.
상층 반은 바위절벽에 붙여 노출형으로 공사를 하였고 하단 부 반은 암반에 구멍을 뚫어 지하공사를 하였다고 한다.
계곡을 걸어나오니 어제 오후에 금편계곡의 출구였던 장량 묘가 있다는 수요사문이다.
어제의 황석채, 금편계곡과 오늘의 원가계, 천자산이 모두 한 지역에 연결되어 있음이다.
2월19일 12:20 - 13:20 천자산, 하룡공원, 원가계 관광을 마치고 셔틀버스를 타고 무릉원 입구로 나와 밖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가이드는 우리들을 북한산 특산품 매장으로 인솔해 갔다.
북한산 매장으로 안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별한 사연이 어떤 것(전에 들은 바로는 중국 관광정책에서 지역 경제 촉진을 위해 특산품 매장을 1일 1곳 이상 들려야 한다고 했다)인지는 모르겠으나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군대 생활을 한 나로서는 이들이 해외에서 이렇게 돈을 벌어 북한으로 송금하면 이 돈으로 식량을 수입하여 기아에서 허덕이는 북한주민들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고 핵무기를 개발하여 대한민국 국민의 심장을 겨누는 것이 아닐까 염려스러워 진다.
매장에는 북한 수를 놓아 그린 그림과 웅담, 상황 버섯 등의 약재를 팔았고 북한 무역대표부 소속 남자 직원의 경직된 어조의 설명은 다소 지루한 감이 들었고 일행 대다수가 남의 이야기를 듣는 형국이다. 그 와중 뒷좌석에서 의정부에서 오셨다는 한 여행객이 졸다가 코를 크게 고는 바람에 장내가 웃음 바다가 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는 증평군에서 오신 할아버지가 상황버섯을 샀을 뿐 모두 빈손으로 나왔다.
14:00- 16:00 십리화랑 관광
다시 무릉원에 입장하여 버스를 타고 40여분을 이동하여 삭계욕(索溪욕) 풍경구에 있는 십리화랑의 모노레일 승강장에 도착하였다. 십리화랑은 모노레일 좌측의 경치가 한 폭의 그림 같고 그 길이가 3킬로미터 정도로서 약 십리에 이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모노레일의 속도는 수평의 레일로서 사람이 걷는 속도 보다 조금 빠르지만 폭 40센치 정도의 철 빔 모노레일 위를 고무바퀴가 굴러가는데 소음이 상당하다. 소음만 나지 않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는데.... 좌석은 2명씩 앉았다. 그리고 한차에는 20여명이 승차하고 두 칸을 달고 운행한다.
손가락으로 십을 가르치는 모습과 똑같이 닮은 십지봉 .
엄마, 아기, 아빠를 닮았다 해서 가족봉이고,
노인이 산초를 뜯는 모습이라 하여 노인봉이요.
식탁을 닮았다 해서 식탁바위,
선비가 책을 읽는 모습의 신선봉 등등의 사암 봉우리 군락지를 지나 모노레일 종점에 이르니 앞이 멀리서 산맥으로 막혀 있고 그 한 복판에는 하늘높이 3자매 봉우리가 마중을 나와 우리일행을 반기는 형상이다. 돌아 나오는 길은 일부는 모노레일을 타고 우리들은 걸어서 올 때 보던 경치를 다시 한번 감상하며 하산을 하였다.
십리화랑 관광을 마치고 무릉원을 나온 우리들은 전용버스를 타고 장가계 풍경 구에서 백장협 계곡을 지나 장가계 시로 나왔다.
17:00-18:00 장가계 시내 호텔에서 석식을 하고 곧바로 공항으로 나왔으나 중경행 항공기가 한시간 20여분이 연착하여 공항 대합실에서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공항당국자는 무엇 때문에 연착된다는 해명도 없고 언제 오겠다는 예보도 없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듯 한다고 한다.
지루하여 맥주, 과일 등을 구입 심심풀이로 때워야 한다.
그래도 그간 3일 동안 동고 동락 한 한가족이라고 서로 나눠 먹는 모습은 보기가 좋았고 역시 한국인이 정이 많음을 실감케 한다.
2월19일 22:00에 중경 국내선 공항에 도착 화물 찾고 버스로 30여분 이동
23:00 시내 진입 힐튼호텔(오성급이라 함) 도착 방 배정 받아
23:30 방에 도착 짐 받고 샤워하고 누우니 24:00시 피곤하다.
2004년 2월 20일 금요일 맑음
09:30- 10:00 비파산(枇杷山) 자연사 박물관 관광
오늘은 일정이 한가하다고 아침식사 천천히 하고 09시에 호텔 라운지에 모이란다
관광버스가 어렵게 좁은 길을 오르내리면서 중경시 비파산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중경시가 현대도시, 직할시로 승격되기 전 전통적인 중국인 서민들이 모여 사는 서민 촌을 통과하면서 이들 서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시장 모습이 보인다.
좁은 도로이지만 노상에 채소상인들이 난전을 벌리고 있고 이발소며, 미장원이며 간이식당이며 작은 잡화상 점포며 여러 가지를 보며 우리나라의 70년대를 연상케 한다.
가이드의 안내 방송에 의하면 이곳의 모병제도는 병력공석에 비해 인구가 많다보니 지원 제이고 군에 복무를 하고 나면 공부를 보장해 주고 직장을 알선해 주기 때문에 경쟁적으로 지원하다보니 신체검사에서 신체적으로 부적한 자가 군에 가기 위해서 돈 봉투를 뿌린단다.
한국에서는 군에 안 갈라고 돈 봉투를 뿌린다는데 이것이 중국과 한국이 다르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는 여자 버스기사가 많은 데 그 이유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곳은 사회주의이고 남녀 평등 원칙 때문이 아니냐고 대답하였더니 아니란다.
이곳은 여름에 40도를 넘는 폭서 지역이란다.
지상의 온도가 50도를 넘을 때도 많다 한다.
이러니 사람들 모두가 더위에 시달리며 옷을 벗게 되는데 이때 남자기사들은 거의 웃옷을 벗어 던지고 운전을 하려 하는데 시 당국에서 보면 눈꼴사나운 정경이라 법으로 옷 벗는 것을 금지 시켰지만 그래도 벗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일일이 식별하여 처벌할 수도 없고 하여 고육지책으로 만들어 낸 것이 여자들은 수치심 때문에 옷을 들 벗는 것 같아 여자들 기사를 모집하여 배치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산 도시답게 길도 좁고 오르내림이 많으며 버스와 택시가 교행이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경적을 울리며 상대를 독촉하는 법이 없다. 택시들이 후진까지 하며 버스에게 많이 양보하는 것 같다.
한국 같으면 서로 대놓고 경적 울려가며 소리소리 지르는데......
이곳은 여인 천국이라고 한다.
여자가 시집만 가면 팔자 늘어진단다.
이곳에서는 남자들이 아침식사를 집에서 하지 않고 직장근처에서 간단한 음식을 매식하며 때운다고 한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출근한 후도 늘어지게 자고 10시경 일어나 오랜 시간 화장을 마친 후 인근 차 집에 모여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다가 식당으로 몰려가 맛있는 요리를 시켜 먹고 공원이나 찻집에 모여 앉아 마작을 하는데 요사이는 포커를 한다고 한다.
남자들이 일찍 퇴근하여 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들고 들어와 저녁 준비를 한다.
준비가 끝나는 시간이 되면 부인들이 집으로 들어와 남편이 준비한 요리가 맛이 있느니 없느니 잔소리를 하여가며 식사를 한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면 다시 마을 한 복판에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에서 에어로빅이나 사교춤을 추며 저녁시간을 즐긴단다. 남자가 요리를 못하던가, 용돈을 속인다던가 , 다른 여자를 넘보다가 아내에게 들키면 현장에서 귀를 잡혀 개 끌 듯 끌려간단다. 이도 세 번이면 이혼 조건이 된단다.
이곳에서의 남자들은 여자들의 노예라고 했다.
자연사 박물관은 공룡화석 전시장 이였다.
이곳 비파산에서 발견된 공룡화석으로 채식 공룡과 육식 공룡 두 가지에 80%이상의 실체와 행방불명인 20%의 모양은 인공적으로 만들어 실제 모형대로 조립 세워 놓은 것이고 하나는 땅에 죽어 넘어져 화석이 된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있다. 이외엔 공용 알을 비롯한 다른 바다 고기류의 일부화석이 유리상자에 넣어 전시되고 별도 옆방에는 각종기념품과 그림을 파는 상점으로 구성된 박물관 이라기 보다는 이를 이용한 상술의 일편을 보는 듯 하다.
'수필 및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라산 백록담 (0) | 2012.01.26 |
---|---|
백령도 관광 (0) | 2012.01.26 |
중국 곤명 관광 기행문(04) (0) | 2012.01.19 |
중국 곤명 관광 기행문 (03) (0) | 2012.01.19 |
중국 곤명 관광 기행문(02) (0) | 2012.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