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및 기행문

백령도 관광

 



백령도 2박 3일 관광


 

 

 



1995. 7. 30 ---1995. 8.1

원우회 친목 회원들과 피서 겸 관광




백령도 기행


우리나라에서는 서북쪽으로 최북단에 위치한 아니 휴전선을 넘어 북한 땅 코앞에 위치한 백령도! 그래서 민간인은 거의 없고 군인들만이 백령도를 지키기 위해 지하 요새를 구축해 놓고 경계를 서고 있는 곳. 그래서 민간인은 출입이 통제되어 들어 갈 수 없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섬으로만 알고 있던 백령도!


이제 세월이 흘러 관광이 시작되었다는 방송보도를 지난봄에 접하고 나서 나는 가능한 빨리 백령도에 가 봐야겠다고 마음먹은 바 있었다.

국내의 내륙이나 해안 관광지를 두루 답사한 나로서는 새로이 가 봐야 할 곳이 따로 없어 지금은 운동으로 인근 산을 등산하거나 드라이브를 겸해서 해안 길을 여행하기도 하고 피서 때는 높은 산자락의 깊은 계곡으로 야영을 하거나 해수욕장 주변에서 민박을 하며 더위를 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텔레비죤의 여행안내 방송에서 백령도의 절경과 교통편의 까지 상세히 소개받고 나니 그 동안 잠자고 있는 여행욕구가 다시금 발작하여 빨리 가보고 싶은 충동에 하루해가 지루하다. 그러나 금년 5월부터 운항하기 시작했다는 쾌속선의 운항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주 3회 운항하며 2주일 전에 예약해야 한다 했고 피서 철에는 매일 운항하기는 하지만 숙박시설이 부족 할 듯하니 관광회사의 패케이지 관광 편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쾌속선 운항회사인 (주) 세모의 안내원 말을 전화로 확인하고 나서 신문에서 관광안내문을 눈 여겨 찾아보았으나 백령도 관광안내문은 게시되지 않았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작년 가을부터 재경 원주 농고 동창모임에서는 해외관광여행을 나가기로 결정하고 회원 전원이 동부인하여 갔다 올 수 있는 코스를 정하려 하였으나 소요경비도 문제가 되지만 가까운 동남아에는 이미 다녀온 사람이 많아 결정치 못하고 몇 달을 넘겨 오다가 끝내 국내여행으로 바뀌면서 제주도와 내가 제안한 백령도들 놓고 투표한 결과 8 : 7로 행선지는 제주도로 결정되었으며 회장단에서는 5월중에 여행하는 것으로 추진을 하였지만 직장에서의 휴가문제와 이미 갔다 온데 돈 낭비해가며 또 갈 필요가 뭐 있겠냐. 며 기권자가 많아 제주도 여행도 취소되고 또 다시 논의한 결과 회원 중 아무도 갔다 온 사람이 없고 경비도 제주도보다 적게 들어가는 백령도에 전 국민이 휴가를 떠나는 7월말에 갔다 오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회원 50%의 신청을 받아 회장단에서는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2박 3일간의 패케이지 관광코스에 예약까지 마치게 되었다.


아! 이제 백령도를 가게 되는가 보다 생각하니 밤잠을 설치기 수삼 일!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7월 30일을 맞이하였다.

승선신고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필히 소지하는 총무의 전갈과 예기치 못한 태풍으로 수삼일 발이 묶길 것을 대비하여 충분한 비상금과 일용품을 챙겨 여행 짐을 꾸려 놓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허지만 들뜬 기분에 잠을 설치다가 7월 30일 새벽 4시에 기상해 버렸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10분 전 다섯 시에 천호동 집을 나섰다.

집결지인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 6시까지 도착할 것을 계산하고 성내 역까지 택시를 탔다. 30여분이 소요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새벽길이라 그런지 10분 만에 도착되고 보니 지하철이 아직 운행을 시작하지 않아 또다시 택시를 탔다. 광화문까지 20여분 만에 도착하였다. 택시를 타는 바람에 너무 일찍 와서 40여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내가 착각을 한 것이다. 어차피 택시로 올 셈이었다. 면 05시 30분에 출발해도 되는데 지하철이 05시부터 운행되는 것으로 알았던 나의 실수인 것이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도로 가에서 어슬렁거리며 40여분을 기다리자니 할 말도 없는데 내가 너무 서둘렀고 경솔했다 싶어 집사람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06시에 회장 내외가 그리고 다소의 시차를 두고 회원들이 모여들었다. 총무 말로는 10개 가족 중 4개 가족은 가정사정으로 기권하고 6개 가족 13명이 간다고 했다. 06시 35분에서야 송봉섭 회원이 막내딸을 대동하고 가까스로 도착을 하였고 우리 일행이 아닌 개별 출발 자 2명을 포함 15명을 싣고 관광버스는 즉시 출발 , 경인고속도로를 이용 인천 연안부두에 도착을 하니 아침 07시 10분이다. 피서 철이라 차들까지 모두 피서를 간 모양이라고는 하지만 35분 만에 인천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신 것만 같다.


빈속에서는 배 멀미가 더 심하니 속을 채워야 한다고 아침을 겸해서 김밥들을 사 먹는다, 멀미약을 사 마신다. 수선들을 떨며 30여분을 기다리니 관광회사 안내원이 좌석을 지정 받은 승선표를 들고 와서 나누어주었고 개찰이 시작되어 우리들은 부두 쪽으로 몰려 나갔다.


휴가철이고 일요일이라 그런지 서해 인근도서로 출항하려는 인파가 북적대는 틈새를 빠지며 일행들은 눈치껏 따라 붙어 출구를 빠져나가는데 무질서가 눈에 거슬렸고 형무소 출입문이나 되는 듯 승객 수에 비해 너무도 좁은 출구의 통제의미가 무엇인지 아리송하다. 공기부양선인 쾌속을 승선하는 데서는 더더욱 삼엄한 통제와 검표를 하고 있었는데 내 평생 아직 청와대는 못 들어 가 보았으되 이보다 더 할 것 같지 않았다. 물론 휴전선을 넘어 북한 땅 코앞에까지 들어가다 보니 월북을 하거나 안보상의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김포공항 검색보다 더 경색된 것 같아 분단된 우리나라의 현실이 새삼 안쓰럽다.


그 복잡한 곳에서 한 사람이 가방을 들고 겨우 빠져 나 갈 수 있는 출입문의 비좁은 통로에서 승선 명단을 총무가 제시하고 일행을 확인하려니 사이사이에 다른 여행객이 끼여 있어 우리 일행을 다시 불어 모아야 했고 입장 순서를 재정비하자니 어쩔 수없이 우리도 소란을 떨지 않을 수가 없었다. 통로를 확장하던지, 아니면 출입구를 두, 세 개로 증설하던지,........

승선자 명단을 확인하고 나서 배까지 가는 부교같이 생긴 통로가 있었는데 순경과 무장 군복차림의 경비원들이 중간 중간에 서서 삼엄한 눈초리로 지나가는 여행자를 감시하는데 마치 전쟁 중 포로수용소로 이송되는 듯 했다.


배 옆을 지나며 우리가 탈 배를 처다 보니 배가 생각보다 컸고 새것 같이 보여 안도의 기분이 들었다. 승선직전에 남녀 승무원이 또다시 승선표를 확인했고 역시 그 옆에도 무기를 휴대한 경비원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배 안으로 들어가 좌석을 찾아 앉고 나니 이제야 말로 모든 여행 준비가 끝난 것 같았다. 이제 무사히 백령도에 도착하는 일만 남았다.


이 배는 정원이 380명이나 된다고 했다. 시속 70KM로 백령도까지는 네 시간 반이 소요된다고 하며 안전을 고려하여 출입문을 잠그고 모든 창문은 밀폐되어 있었다. 의자의 쿠션은 없으나 머리를 의자에 지대고 잠을 청할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의 공간은 되지만 고속버스나 기차처럼 의자를 뒤로 제킬 수 있도록 설비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탄 좌석은 일반석이고 위층이 우등석인데 비슷한 공간에 좌석이 130석으로 일반석에 절반정도 밖에 안 되는 것으로 봐서 그쪽은 의자가 넓고 푹신하며 뒤로 제킬 수 있나 보다.

제주도 항공료와 비슷한 운임이라면 굳이 우등석, 일반석을 가려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긴 열차고 비행기이고 모두 특실이 있는데 배라고 없을 소냐? 또 자본주의 세상인데 돈 많은 사람은 별도로 안락하게 대우 해 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배가 8시 정각에 출항했다. 소형어선들을 깔보기라도 하는 듯 쾌속선의 위세를 떨치기라도 하는 듯 듬직한 고동소리와 함께 서서히 연안부부를 빠져나갔다.

하늘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고 약간의 안개까지 날려 시계가 밝지 않아 창밖에 스치는 여러 섬들의 경치를 제대로 감상 할 수 없어 아쉽다. 장마가 끝났다고는 하지만 비가 쏟아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 있다. 비가 쏟아지고 세차게 바람이라도 불게 되면 배가 회항 할 지도 모를 일이며 오늘 운항 자체가 취소되었다면 그 또한 어찌 하겠는가?!

배는 영종도와 무의도 사이를 빠져나가면서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다. 지나가면서 보기로는 영종도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데 국제공항이 들어온다니 배에서 안 보이는 부분이 더 넓은 가 보다. 옹진군의 수많은 작은 섬들을 뒤로하고 30여 분을 달린 듯한데 배는 어느새 망망대해에 떠 있다. 좌우 어느 쪽을 둘러보아도 출렁대는 바다와 하늘 끝 수평선뿐이다. 이 배가 지금 서쪽으로 가고 있는 지, 북쪽으로 가고 있는지 , 아니면 남쪽으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오직 바다 한 복판에 떠있는 것만 같다. 이런 상황에서 목적지를 제대로 찾아가는 배들이 신기할 뿐이다.


일행 중 멀미약을 복용한 회원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고 약을 복용치 안은 나 역시 창밖에 볼거리가 없어 눈을 감아 보지만 잠은 오지 않고 엉덩이는 배기고 그냥 지루하다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바람이라도 쏘여 볼 겸 선실 밖으로 나갔지만 출입문과 창문이 닫혀 있어 좌석으로 돌아와 대형 스크린으로 방영하고 있는 비디오 영화로 무료함을 달래야 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 까 화장실을 가기 위해 다시 선실 밖으로 나왔는데 40대 아주머니가 얼굴이 곤죽이 되어 난간 손잡이를 붙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배 멀미를 안 해 고통의 정도를 실감 할 수는 없어도 이 아줌마의 용모로 바서는 고통이 대단한가 보다. 이 아줌마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승무원이 창문을 반쯤 열어 놓은 듯한데 얼굴에 스치는 바람의 촉감으로 봐서 태풍 같은 거센 바람과 바닷물이 날려 들어왔다. 선실 창문이 밀폐된 이유를 이제 사 알만하다.


배가 얼마나 흔들리는 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기가 쉽지 않다. 왼손으로 손잡이를 붙들고 바른손으로 내복을 내리고 물건(?)을 찾아 변기에 정조준 하랴, 한참을 허둥대야 했다. 배타는 맛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선실 뒤에 간단한 식사와 음료수들이 준비되어 있어 필요시 이용 할 수는 있겠으나 값이 비싸고 메뉴가 단조로워 고객이 별로 없는 듯 하다. 우리 일행도 총무가 먹을거리를 충분히 준비해와 매점에서는 한 가지도 사지 않았으며 무료함을 달래는데 는 오징어 다리가 제격인 듯 하다. 술은 양주를 두 병이나 준비 해 갔지만 아무도 마시려 하지를 않았다.


인천을 떠난 지 4시간 만에 소청 도에 도착했고 일부 승객을 나려준 후 20여 분 뒤에 대청 도에 들렸다가 12시 50분 경 백령도 용기포 부두에 도착했다. 파도가 높아 다소 지체되었다 한다.

소청도 부두 옆에는 민가가 별로 없고 승용차도 보이지 않으며 경운기가 승객을 싣고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해 고개를 넘는 모습이 이국적이었다. 대청 도는 그래도 섬이 큰지 ,부두에 군용 찦차 며 봉고 차, 승용차가 마중을 나왔고 부두 주변에도 마을이 상당히 크고 짜임새 있게 개량된 건물들로 구성되어있어 생활여건이 구비된 섬 같았다. 소청도 , 대청 도는 보통의 바위 절벽과 나지막한 동산에 해송뿐 경치가 좋다는 인상은 들지 않았다. 작은 부속 섬들이 없어 남해의 해상공원처럼 아기자기함 맛이 없고 그저 외로운 고도로 보였다. 다행이 백령도에서 시계 내에 있어 인접도서로서 서로 위안을 주고받는 듯 하다.


부두에 마중 나온 사람들과 차량들이 번잡한 것으로 봐서는 이곳 백령도에는 주민이 상당히 많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부두 왼쪽에는 규모가 부산의 광안리 해수욕장보다도 더 커 보이는 해수욕장이 있고 오른 쪽으로는 산으로 막혀 멀리까지 보이지는 않으나 바위절벽이 있고 부두 뒤에는 식당과 가옥 몇 채가 한산해 보였다. 부두 내에는 소형 선박 몇 척이 정박 중이며 부두 주위에는 새우 젖을 가공 포장해 놓았는지는 몰라도 드럼통과 플라스틱 통들이 여기 저기 무리를 지어 널려 있는데 용기들이 녹슬고 주변이 지저분하여 꼭 방치된 것 같았다.

우리들은 여행사에서 마중 나온 안내원과 봉고 차에 의해서 면사무소가 위치한 진촌 리로 안내되었다. 이곳은 육지의 면사무소 소재 지역과 같이 가도에 상점과 대중 업소들이 예상외로 많아 백령도의 중심지인 듯 하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백령도는 동경 124°53′ 북위 37°52′ 지점에 위치한 서해 최북단의 도서로서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229km 떨어져 있으며 북한 땅인 황해도 옹진반도와는 13km 밖에 안 떨어져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에는 북한 땅이 건너다보인다고 했다. 섬의 면적은 45.39 ㎢로서 전국적으로는 여덟 번째로 크고 주민은 7,000여명 정도이며 62%가 농업이고 어업은 8%정도 밖에 안 되며 나머지가 상업 및 기타 서비스업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상당수의 주민들은 인천이나 서울에 집을 마련하여 자식들은 도회지로 내 보내고 어른들만 사는 집이 많다고 했다.<백령도 상세 정보: 첨부 1. 참조>


중앙여관에 여장을 나려 놓고 곧바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해변이라 반찬이 해산물로 풍성할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강원도 산간 작은 농가에 온 듯 김치와 콩나물 국, 그리고 들깨 잎 찐 것과 까나리 볶음(멸치와 유사)이 전부다. 시장이 반찬이라 모두들 반찬 탓하지 않고 정량이상을 게 눈 감추듯 했다. 중앙여관은 지은 지 오래 되었고 방이 좁고 습지며 4개 밖에 안 되어 딸이 새로 지었다는 200미터 거리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새집으로 짐을 옮겼다. 이 집에도 방은 4개 밖에 안 되지만 방이 커서 쓰는데 는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시설도 있고 침구가 새것이라 더더욱 좋았다. 남자들이 방 2개, 여자들이 2개를 쓰기로 하고 짐을 분산해 넣은 후 간편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오후 관광을 나섰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고 세계적으로도 단 두 개 밖에 없다는 사곶 천연 비행장<세부정보 첨부 2. 참조>으로 안내되었다. 비행장이 아니라 우리가 하선할 때 제일 먼저 보았던 바로 그 해수욕장인 것이다. 비행기도 없고 관제탑도 , 아스팔트 활주로 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비행장이 이란다. 실제로는 비행장이 아닌 것이다. 다만 해변 모래사장에 비행기가 착륙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해변이 직선으로 3km 나 되고 이곳 모래사장은 동해안이나 남해와 달리 조개껍질이 깨여져 조성된 규조토로서 바닷물이 빠지고(썰물 시) 나면 여느 갯벌처럼 발이 빠지는 진흙이 아니라 응결된 모래바닥으로 차바퀴가 빠지지 않을 정도로 굳어 있어 비행기까지도 나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해수욕장에서 놀고 있는 피서객은 몇 명이 되지 않았고 일부지역에 군인 휴양소가 설치되어 병사들이 운동을 하고 있을 뿐 조용하고 한적한 해수욕장이다. 승용차들이 비행연습이라도 하는 듯 질주하는 것이 자주 눈에 띠는 데 그러다가 사람 다칠까 염려된다. 일부 피서객들은 물가에서 물밑을 뒤지며 무엇인가를 잡고 있었는데 다가가 물어 보니 조개를 잡는다고 했다. 이렇게 크고 좋은 해수욕장이 피서 철임에도 불구하고 한가롭게 놀고 있다 생각하니 안타깝다. 그래서 그런지 주위에 포장마차 장사꾼도 보이지 않는다. 갓 처 놓은 듯 한 천막 두 개가 군 휴양소 옆에 있어 그곳으로 가보니 아직 음식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커피만 마시고 여행사에서 준비한 봉고 차에 옷을 벗어 놓은 후 해변으로 나가 우리가 준비해 온 안주와 술을 마시면서 물놀이도 하고 일부는 조개를 잡기도 하였다.


나 역시 생전 처음 조개를 잡아 보았다. 해면의 경사가 아주 완만해서 30여 미터까지 바다 물에 들어가도 수심이 무릎을 넘지 않아 허리를 꾸부리고 모래(규조토)밑을 10cm 정도 손끝으로 파 들어가 뒤지다 보면 지름이 4~5 cm 되는 조개가 두 세 개 씩 잡힐 때도 있다. 조개 잡이에 정신을 잃고 부지런히 땅 밑을 뒤지다 보면 파도를 뒤집어쓰기 일쑤이고 이를 피하려고 급히 일어나다 보면 잡았던 조개를 놓치기도 하고 더러는 벌린 조개 입에 손가락을 물려 기겁을 하기도 하면서 우리 일행들은 반말 가량의 조개를 잡았다. 일행 중 송봉섭 회원의 막내딸인 여섯 살 박이 송 다솔 이도 물장난보다는 조개 잡는 일이 더 신났고 미처 파도를 피하지 못하고 파도를 뒤집어쓰고 우는 모습은 우리가 원시생활로 되돌아 간 것 같아 감개무량했다. 조개도 잡을 만큼 잡았고 기온이 떨어져 해수욕도 필요치 않으며 술도 떨어지고 심심해진 남성회원들이 회나 먹자하여 용기포구 옆에 있는 횟집으로 몰려갔다.


횟집은 세 개가 있었으나 두 집은 고기가 없어 장사를 안 했고 나머지 한집도 수족관에 고기가 몇 가지 몇 마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선들이 고기를 잡으면 인천에 나가 팔고 오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고기가 귀하다고 한다. 고기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지만 가오리와 비슷한데 팔 랭이라 했고 검은 점이 박혀있는 고기는 망둥이 같은데 노래미라 했다.

두 가지 회가 나와 맛을 보니 생선 맛은 간데없고 무를 씹는 듯 했다. 아마도 장기간 수족관에 가둬놓아서 진이 빠져 그런가 보다. 식욕은 없으나 술안주 차 몇 점을 씹었다. 이들로 끊인 매운탕 맛도 별로 , 밖으로 나와 주택가의 공터에 모아놓은 드럼통 옆에 가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 이 드럼통은 까나리 액젓을 담가 놓은 것이라고 했다. 뚜껑을 단단히 묶어 놓은 것은 열어 볼 수가 없고 열 수 있는 것만 몇 개 열어보니 젖 국물인지 빗물인지 갈색 물에 구더기가 몇 마리 떠있고 악취가 나 얼른 뚜껑을 덮었다. 우리도 금년 봄에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생멸치를 사다가 항아리에 층층이 소금을 뿌리면 멸치젓을 담갔었는데 까나리 액젓 가공요령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헌데 이 까나리 액젓이 이곳 특산물이라고 한다. 맛이 좋다고 하는데 퀴퀴한 특유의 맛이 왜 좋다는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곳의 특산물로는 해삼과 전복이 전국에서 단위 생산량으로는 일등이라 하고 까나리 젓, 굴 , 가래 비는 품질이 최상이라 하는데 주위에서는 볼 수가 없고 점심때 까나리 볶음만 맛을 본 셈이다. 까나리 볶음의 맛은 멸치와 같은 쓴맛은 없고 고소하였는데 그것이 진품인가 보다.


백령도 관광기념으로 회와 매운탕에 소주 몇 잔을 들고 18시경 잠만 자는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여관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회와 매운탕으로 간식을 해서 그런지 점심때와 똑 같은 반찬이 더더욱 빈약해 보인다. 그래도 밥 한 공기씩은 다 치웠다. 1인당 한 끼에 4,000원씩 계산되었다 하는데 원가는 1,000원도 안 들어갔을 것 같다.


식사 후 일행들은 산책을 한다고 진 촌리 동쪽에 있는 해발 50m 되 안 되는 낮은 동산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듯한 교회를 지나 언덕 위에 올라가니 천주교회가 있었고 바다 가 나려다 보이며 조그마한 운동장에는 어린이용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운동구 옆에서 바람을 쏘였다. 우리가 방금 지나왔던 교회의 역사는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10km 떨어진 중화 동에는 1896년에 설립한 장로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송천의 솔내 교회와 새문안 교회 다음으로 한국에서는 세 번째로 유서 깊은 교회라고 하며 이곳 천주교는 1955년 윤을주 신부가 설립을 하였고 미국인 부영발 신부가 부임하면서 양로원, 고아원, 병원 설립에 피난민 구제사업까지 백령도 육영사업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세월이 바뀌어 전국적으로 생활이 윤택해 지면서 다소 침체한 듯 지금은 그저 시골의 작은 천주교회일 뿐이다.

 

 

하산을 하면서 할머니처럼 보이는 성모마리아 상 앞에서 세월의 유수함과 한 많은 백령도의 지난날을 잠시 짚어 보는 사이에 나는 네잎 클로버를 2개나 땄다. 옛날 학창 시절에 따보고 30여 년 만에 다시 따보는 것이다. 이곳 백령도 관광이 나에게 행운을 안겨줄 모양이다.

아무튼 이곳 천주교회는 1846년 김대건 신부가 백령도 근해에서 중국 신부의 입국을 돕기 위해 서신과 지도를 전해주다가 포졸들에게 붙잡혀 옹진군의 감옥으로 끌려갔고 다시 해주 옥을 거처 새남터에서 순교한 것을 계기로 1913년부터 전도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하니 뼈아픈 사방종교의 전도과정을 보는 듯 하여 숙연해 진다.


산책을 마치고 일행들은 피곤하다고 숙소로 들어갔고 엄창근 내외와 우리내외는 무엇이건 한 가지라도 더 볼 욕심으로 면사무소 지역을 둘러보았다. 특이한 것은 없었으나 벽지라 조금은 문화생활이 낙후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예상외로 육지에 있는 것 모든 것이 다 있었다.

거리에 공중전화 박스도 있고 집집마다 승용차며 가전제품이란 가전제품은 모두가 구비하고 있어 사는데 는 불편한 것이 전혀 없지만 텔레비죤 방송 채널이 제일 방송 하나 밖에 수진되지 않아 그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두 가족 4명이 노래방에 들어가 놀다가 들어갈까 생각도 하였으나 일행들과 같이 놀아야 오해가 없을 듯 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TV를 시청할 사람은 하고 자고 싶은 사람은 자고 남녀 두 패로 나 누워 고스톱을 치면서 술도 마시고 밤 12시까지 놀았다. 고스톱에서는 엄창근과 나만 펐다. 일단 보관 한 셈치고 내일을 위해 쉬자고 했다.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는 가 보다. 남자들은 모두 50을 넘겼고 부인들도 40대 후반이라 인생 살 만치 살아서 그런지 노는 것까지도 기백이 없는 것 같았다. 만일 우리들이 20대라고 한다면 어떻게 놀고 있을 까?

기타 둘러매고 아니면 휴대용 오디오를 가자고 와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며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어느 것이 좋다고 선을 긋기보다는 생동감면에서 , 지구력 면에서 역시 한물 간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바닷바람이 너무도 시원해 선풍기도 틀지 않고 방충망이 붙어 있는 창문만 열어놓고 시원스레 잠이 들었었는데 얼마를 찾을 까 갑자기 불이 켜지면서 퉁탕거리는 바람에 잠이 깨여 일어나 보니 같이 자던 송 사장과 김인대 회장이 생쥐 한 마리를 잡아 놓은 것이다.

두 사람의 말에 의하면 먼저 김 회장에게 무엇인가 발뒤꿈치를 건드리는 것 같았으나 잠결에 발치로 밀어내고 그냥 잤고 다시 송사장의 발가락을 게가 씹는 듯 하여 다른 발로 더듬어 보니 무엇인가 뭉클한 것이 감지되어 급히 일어나 불을 켜고 이불을 들쳐보니 생쥐인지라 옆에 자고 있는 김 회장을 깨워 합동작전으로 생쥐를 잡는 바람에 나까지 잠이 깬 것이다.


집이 아무리 들 한가운데 있기로서니 들쥐가 방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옛날 농가의 초가집이라면 몰라도 지은 지 한 달도 못되는 붉은 벽돌의 새집에 그것도 우리가 첫 손님인데 밤에 밖에서는 모든 출입문이 닫혀 있어 들어 올 수가 없으며 그렇다고 낯에 열려진 출입문으로 들어 왔다면 숨을 곳도 없는데 ……. 있다고 한다면 이불장뿐인데 이불장은 목제 농이 아닌 철제 캐비닛으로 뚫고 들어갈 수가 없으며 또 화장실 옆에는 시멘트 벽돌로 칸막이를 했고 우리 손으로 이불을 모두 꺼내 깔았는데 그때 없던 쥐새끼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그러나 현장에는 있는 것이고 이제 잡았으니 더 이상 논 할 것도 못되어 다시 잠을 청했다.


아침에 기상하고 나니 옆방에서 자던 회원들이  " ;한밤중에 웬 소란들이었느냐 ? " ; 며 사연을 물어왔다.『 생쥐 박살작전』상황을 듣고 난 동료들은  " ;아무래도 그 방에는 삶은 고구마가 자고 있었나 보다. " ;해서 한바탕 웃고 말았지만 나는 잠도 설치고 또 밤새도록 돌아가는 백령도 전력 공급용 자가 발전기의 엔진소리에 깊은 잠을 못 자고 뒤척이다 남 먼저 06시에 잠이 깨였다.


집에서 같으면 새벽운동을 나갈 시간이지만 이곳에서야 운동은 안 될 것이고 산책이나 해야겠다고 숙소를 나섰다. 숙소 뒤가 작은 동산이다. 어제 밤에 산책했던 동산을 마주보고 있는데 소나무가 조경 되어 숲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공공체육시설인가 싶어 길을 찾아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입구의 간판을 보니 반공 유격대 기념공원이라 했다.


정상에 올라가니 100여 평 정도의 직 사격형 운동장에 잔디가 깔려 있고 양옆으로는 벤 취가 몇 개 놓여 있었으며 공원 북쪽 중앙에 반공 유격 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1951년 1.4 후퇴 때 황해도 지역에서 피난 온 주민들로 구성된 유격대가 끝까지 섬을 지켜준 혁혁한 공로와 전몰 기념으로 1960년 경 정부주도로 세워졌다 하는데 공로에 비해 비석의 크기(높이가 60cm 안팎)가 너무도 작은 것이 아쉽다.

 

 


이곳은 고래로 군사요충지임에는 틀림없는 가 보다. 고려 때부터 이곳에 진을 두어 황해연안의 방어와 중국과의 수로를 보호해 왔으며 특히 해적출몰과 불법 어로를 대비해 백령 진에 8척의 군 선과 400여명의 수군 및 군관을 주둔시켰다하는데 일제 점령 시는 해군기지로, 625 때에는 황해도의 전투거점으로, 휴전이후에는 서해도서 방어의 전초기지가 되었으니 현재도 군사요충지이며 이는 통일 후에도 변함이 없을 것 같다.


우측 남단에는 역대 첨절제사의 공덕비들을 모아 8개를 같은 단에 일렬로 세워 놓았는데 공원을 만들면서 지역에 분산해 있던 것을 집결시킨 것 같다. 공덕비 역시 높이가 두자 남짓한 것으로 봐서 형식이나 아부성 보다는 정말로 공덕을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자력으로 자신해서 만들어 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벤 취에 의지하여 팔굽혀펴기를 20여 번하고 육군 도수체조를 하다보니 앞에 클로버 잎이 무성하여 네잎 클로버가 생각이 나서 다시 찾기 시작 3개를 찾아 들고 숙소로 나려오니 그제야 일행 중 일부가 나를 찾아 공원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아침 식사 후 오늘 (95년 7월31일) 오전에는 백령도의 서북부에 위치한 서해의 해금강이라 읽커러지고 있는 두무진 절경을 관광키로 계획되어 있었지만 강한 바람이 불어 인천서 들어오는 여객선들의 운항이 중지되고 백령도 자체의 어선들도 출항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 배를 타고 두무진 절경을 관광하기는 불가 할 것 같다고 여행사 가이드는 전제하면서 그러나 배를 못 타도 일부는 관광 할 수가 있으니 일단 두부진 항구에 가서 협상해 보기로 하고 여관을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백령 중, 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잔내리 조금 못 미쳐서 낮은 고개 길이 있는데 이곳에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사소한 사고로 여러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공사 전에도 이 고개에서는 비가 오는 밤이면 귀신이 출몰하여 여러 사람들이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공사를 시작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고 마을사람들은 권했으나 건설업체는 권고를 무시하고 공사를 착수하였는데 사소한 사고로 인부들이 자꾸 죽게 되자 할 수 없이 공사 중간에 고사를 지냈는데 신기하게도 그 후론 공사가 아주 순조로웠다 한다.


현지 안내원의 귀신이야기를 들으며 비포장 된 고갯길을 나려가고 있는데 김 회장이  ꡒ ;백령도에는 이런 고개가 백 개가 있어 일 백백(百), 재령(嶺) 백령도라 한다. 고 했지만 나는 방금 귀신이야기도 들은바 있고 해서  ꡒ ;그게 아니지……. 이곳에는 고기 잡다 죽은 귀신, 해적에게 억울하게 당한 귀신, 섬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죽은 귀신 등 귀신들이 너무도 많기에 일백 백(百), 신령 령(靈) 백령도라 했다 ꡓ ; 하니 내 말에도 일리가 있다면서 누구 말이 맞느냐고 의논이 분분하였지만 이는 둘 다 농담 적인 추측이고 진짜 유래는 아래와 같다.


이곳 백령도를 고구려 시대에는 곡도(鵠島)라 했는데 이는 따오기 곡(鵠) 섬도(島)란 한자의 의미로 보아 이 섬에 따오기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곡도라 이름 지었을 것 같다(따오기는 백로와 비슷한 새인데 몸이 희고 부리는 검으며 밑으로 굽어져 있는 데 근래에는 그 수가 많지 않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새임).

그 후 고래시대에 와서 곡도를 백령 이라 개명하고 진(鎭)을 설치했다 하는데 힌 백(白) 깃 령(翎)의 의미도 따지고 보면 고구려 시대의 곡도와 같은 의미이지만 보다 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얀 새들의 깃털을 총칭하는 의미이니 따오기 외에도 갈매기와 백로까지 포함하여 이들 새들이 섬을 온통 하얗게 뒤덮고 있어 백령도라고 개명한 가본데 곡도 보다는 백령도가 더욱 현실적이다.


옛날에는 인적이 드물고 해변에 먹거리가 풍부하여 생활환경이 좋았을 것이니 가히 새들의 천국이었을 것이나 지금은 인간들이 새들의 천국을 파괴해버림으로서 이들 새들이 멸종되어 가는 듯 하여 가슴이 아프다.


두무진 항구는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작은 포구로 선착장 겸 방파제가 설치되어있어 소형어선들이 드나들고 있다. 포구의 좌우 날개를 형성한 산 능선들이 두 팔로 껴안듯 감싸고 있어 항구 내는 아주 조용했다.


방파제 위에는 바다 어항이라고 하는 내겐 생전 처음 보는 고기 잡는 도구들이 있었다. 민물 어항은 유리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그물로 만들어져 있으며 직경이 1m, 높이가 40cm 정도의 원통형인데 옆면에는 사방에서 원심방향으로 고기를 유인하는 입구가 만들어 져 있고 이런 통 다섯 개를 묶어 드럼통 크기만 한 것을 저녁에 배로 싫고 나가 부표를 매달아 바다에 띄워 놓았다가 아침에 이를 회수한다고 했다.

다 같은 어항이지만 크기로는 한 되짜리 병만 한 민물용과 비교가 되지 않으나 바다 것은 밤에 띄우고 영업적으로 남획하는 것이라 낮에 풍류를 겸해서 물고기를 잡는 민물 어항 같은 정취는 없는 것 같다.


부두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이것저것 둘러보는 동안 관광안내원이 어딘가를 갔다 와서는 바람이 세고 또 출항금지 지시까지 있고 해서 본래의 관광코스는 다 돌아 볼 수가 없고 두무진 절경 앞까지만 갔다 오는 것으로 겨우 선주와 합의가 되었다 했고 곧이어 작은 어선 하나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어디서 기다리다 나타났는지 백령도 올 때 탔던 쾌속선에서 만났던 다른 일행 7명과 함께 20여 명이 배에 올랐다. 배에 오는지 20여 분만에 백령도의 대표적 명승지인 선대바위<세부정보 첨부 3. 참조>가 보였고 형제바위를 지나 병풍바위에 이르니 파도가 높아 배는 심하게 출렁거렸다.


배를 몇 차례 타 본 나로서도 불안감이 든다. 파도가 배 안으로 넘쳐 들어와 배가 바다 속으로 갈아 앉을 것 같기도 하고 물밑에 숨겨져 있는 암초에 부딪쳐 배가 파손되면 어쩌나 싶어 겁이 났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헤엄 처 나갈 방향과 거리를 어림잡아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네를 타는 듯 마음속으로 몸의 중심을 파도에 일치시키니 어지럽지도 않고 짜릿한 스릴감도 들었다.


배는 암초에 좌초될 까봐 절벽 쪽으로는 가까이 접근도 못하고 높은 파도 때문에 멀리 깊은 바다로 나가지도 못하여 시계가 좁은 것이 다소 아쉽기는 했지만 이만큼 구경하게 된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인지라 그저 감사해야 했다.


안전에 위협을 느낀 일부 회원들의 회항요구로 배를 돌렸지만 역시 장관은 장관이다. 신이 창조한 작품이라 해도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신이 창조하였다 해도 예술적 감각의 한계를 넘어서서 온 갓 시름과 역경을 극복하고 자연의 섭리를 도통한 후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만 듯 것이 아닐까 싶다.

 

배에서 보기로는 산이라고 하기보다는 한마디로 깎아지른 바위 절벽인데 바위가 단일 석질이 아니고 캄브리아기의 퇴적 암류와 이들이 부정합으로 덥힌 충적층에 드문드문 화산 활동에 의한 현무암층까지 섞여 있다보니 마치 시루떡을 쪼개 뒤틀어 놓은 듯 하고 층층마다 색깔과 모양과 강도가 다르니 수십, 수백 억년을 지나오면서 파도와 풍상우로에 파이고 깎이고 다듬어진 지구 기상이 만든 작품이지만 요소요소에 신비스럽게 달아 붙어 자라고 있는 해송, 해당화, 춘란의 그윽한 자태와 그 주위를 선회하며 분위기를 바꿔주는 물 가마우찌, 갈매기까지 그야말로 살아 숨쉬는 작품인데 이것을 우연히, 자연적으로 창조된 작품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에 오직 신만의 작품이라고 확정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아직 미완성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완성되려면 앞으로도 또 수십, 수백 억년이 더 소요 될 것이다. 그런데 단 일백 년도 못사는 내가 그것도 단 한 시간의 관찰로 신의 걸작을 평가한다는 것이 주제넘은 것 같아 쑥스럽고 죄송스러워 더 이상은 입을 열 수가 없다. 보고 평가하기도 그러하거늘 백령도를 지켜야 한다고 국방부에서는 병풍바위 절벽에 굴을 뚫어 초소 막까지 설치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 시대의 절박한 안보상황으로 봐서 이해는 가지만 내 눈을 내가 찌른 듯 가슴이 아프다.

 

우리가 배로 해상 관광을 하고 있은 때 선대암 옆에 , 그리고 형제바위 앞에 일부 관광객들이 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이들은 배를 구하지 못해 육로로 온 모양이다. 해서 우리들도 1시간 정도의 해상관광을 마치고 선착장에 있는 횟집에서 횟감을 준비해 가지고 가파른 절벽 길을 타고 나려가 형제바위 앞 좁은 해변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서해안이지만 동해안 같이 맑은 바닷물이 넘실넘실 밀려와 바위에 부딪치며 하얗게 흩어지고 절벽구석 구석에서 울려 나오는 파도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하늘에서는 갈매기가 한껏 목청을 돋운다. 해삼 무침과 가래비 안주에 소주가 절로 넘어간다. 이보다 더 멋있는 정취는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난생 처음 먹어보는 가래비가 소주 안주로는 일품이다. 가래 비는 조개의 일종으로 직경이 5cm정도 되는데 반쪽 껍데기는 떼어 냈고 한 쪽에 붙어 있는 조갯살이 돼지고기 삼겹살 같은 무늬가 3단으로 층층을 이루고 복판엔 하얀 살이 볼록하며 그 옆에 붉은 소시지를 썰어 올려놓은 듯 붉은 조갯살이 붙어 있어 마치 조리사가 맛깔스럽게 정성 드려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여기에 초장을 발라 소주한잔 마시고 안주로 씹으니 새큼하고 짜릿하고 쫄깃쫄깃 함에 술 욕심이 절로 난다.

 

물이 빠지면서 우리 앞에 작은 섬으로 보였던 마당바위까지 돌아들어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그곳으로 나아가니 선대바위 여러 형제들의 장엄한 모습을 제대로 관광할 수가 있었다. 술은 떨어지고 여기저기서 기념 촬영을 마치고 나니 안내원과의 약속시간이 넘는지라 아쉬운 이별을 고해야 했고 우리들은 두무진 포구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보니 포구 옆 해변에는 백령도 특유의 홍돌 들이 많이 깔려 있는데 파도에 깎이며 마치 조개 모양을 닮았다. 무늬가 선명하고 형상이 참한 놈으로 몇 개를 챙겼다. 백령도 관광기념으로 안성맞춤이다. 각자가 수집한 돌에 나름대로의 형상과 의미를 부여해 가며 두무진 항구를 떠났다.

 

점심 식사를 위해 천연비행장 뒤에 있는 사곶 마을로 갔다. 막국수 집인데 백령도 산 메밀 국수로 백령도에서는 제일 잘 한다고 했다. 국수 맛은 서울 과 별 차이가 없는데 국물 맛이 구수해서 좋았다. 양념도 양념이지만 냉면이나 막국수는 국물 맛이 좋아야 한다. 헌데 대부분의 냉면 집에서는 국물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맛내는 것도 비법이 있는가 보다.

 

오후 코스로 용기포 우측에 있는 창 바위와 평 바위로 안내되었다. 이미 두무진 절경을 관광하고 온 터라 경탄하는 이는 없었다. 이곳도 두무진 처럼 층층바위들로 구성된 절벽인데 이곳에는 돌출형의 탑 모양의 형상은 없고 갈라진 바위절벽 사이사이에 구멍 뚫 힌 곳이 많았는데 그래서 창 바위라고 하는 가 보다 . 그리고 그 옆에는 상층부 2/3을 모두 잘라 낸 듯 평평한 바위들이 풍류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이 빠져 길이 나있으므로 몇 군데의 창 바위 구멍들을 둘러보았다.

물이 빠진 자리의 바위 절벽에는 수많은 굴들의 잔해가 하얗게 붙어있어 국화꽃이 만발한 것 같다. 허나 넘어지면 국 껍데기에 다칠 것 같아 굴에 대한 식욕보다는 조심성이 더 앞선다. 물이 차면 길이 막히므로 부지런히 둘러보고 나왔다. 일행은 관광에 지친 듯 해변에 퍼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이 나 혼자서만 평 바위 쪽으로 가 보았다. 담배 불을 붙여 물고 망망대해를 바라본다. 예서 육지가 얼마인가?

지은 죄도 없이 당쟁에 휘 말려 이곳으로 유배를 왔다면 그는 여기서 무엇을 생각했을 까?

누구를 기다렸을 까?

답답하다. 공허해진다. 돌아가자!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시간이 남아 다시 홍돌 무늬 기념 석을 수집하였다. 일부 회원들은 창 바위와 평 바위를 멀리서만 바라보고 곧바로 기념 석 수집에 여념이 없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모두 한자리에 모여 각자가 수집한 돌을 자랑하고 있는데 엄사장이 작은 수박만 한 돌을 안고 오면서 " 야! 이 돌 좀 봐라!"고 했다. 처다 보니 타원형 평면에 가운데가 쭉 찢어져 있고 그 찢어진 홈 복판에 콩알만 한 차돌이 박혀있었다. "기똥차다야!"이를 처다 본 일행들은 그 모습이 무엇과 비슷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우리 옛날 속담에 "개 0에 보리 알 끼듯 했다."는 속담이 있는데 꼭 그 모습이라 기념 석으로는 최고라고 모두들 경탄했다.

내가 주은 것 중에는 그와는 또 정반대로 색깔도 불그스레하고 모양도 남근과 유사한데 딱 중간을 면도칼에 잘린 듯 했다. 수절하는 과부한데 바람피우다 잘렸다면 비유가 너무 과장되었나?

 

창 바위 관광을 마치고 다음으로 백령도의 지도를 바꿔 놓았다는 간척지 매립 공사장으로 안내되었다. 화동과 사곳 사이에 제방을 쌓았는데 이 매립공사로 1997년에는 100만평 정도의 농토화 담수호 저수지가 생겨 이곳 주민들의 주요 영농단지가 될 것이며 우리나라 섬 중 크기 면에서 14번째에서 8번째로 격상된다고 했다. 물막이 제방은 2km남짓 한데 그 안에 전개된 드넓은 들은 육지의 어느 평야 지대와 유사해 보였다.

 

 

아직 염분이 빠지지 않아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으나 장차 대단위 영농단지가 될 듯 하고 먼 후일 남북통일 된다면 이곳에 비행장을 만들고 골프장, 호텔, 각종 레이저시설 등 섬 전체를 해상국립공원으로 개발한다면 서울에서 비행기로 30여분 ,개성이나 해주에서는 육로와 해로라도 1시간 이내의 거리이기 때문에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될 것이다.

제방 끝에 수문이 있고 수문에 붙여 30여 미터정도의 교량이 놓여져 있는데 <백령 대교>로 명명되어 있었다. 섬 내에서는 제일 긴 교량인지 몰라도 다리 길이에 비해 너무도 이름이 장대하여 모두들 웃었지만 제방 전체를 다리로 본다면 대교라 할 수 있겠다.

 

백령 대교를 지나 500여 미터 정도 들어가니 200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화동 염전이 보였다. 옛날에는 규모가 컸었나. 본데 장기간 관리치 않아 대부분 윤곽은 어슴푸레하고 지금은 2000여 평 남짓 경작중 이지만 이도 간척지 매립 공사로 머지않아 담수호 아래로 가라앉을 운명에 처해있다.

 

 

화동염전을 지나 콩돌 해변<세부정보 첨부 4. 참조>으로 나갔다. 해변에 이르니 백사장 대신에 온통 콩돌이 깔려있었다. 하얀 돌, 검은 돌, 붉은 돌, 회색돌 등 형형색색의 콩만 한 모양의 돌들이 파도와 어울려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듯 했다. 도대체 파도에 얼마나 깎기고 달아야 요렇게 될까? 태초부터 지금까지라고 해야 갰지!.......

대부분이 구슬처럼 동구렇치만 더러는 투원반 새끼 모양으로 깎인 것도 있고 진짜 콩알 같은 것도 있다. 기계로 정밀 가공한 듯 하여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도 기념이 될 듯 하여 어항에 깔거나 수반석 받침으로 쓰기 위해 하얀 차돌과 붉은 색의 홍돌 만을 3홉 정도 수집했다.

 

 

 

숙소로 돌아오다가 시간이 다소 남아 진촌리 북쪽 2km지점에 있는 해변으로 안내되었다. 이곳에는 군 경계초소가 있어 관광 코스에는 빠져 있지만 특별히 안내를 한다고 했다.

이곳은 심청이의 전설이 서려져있는 임당수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육지 사람들에게는 혹이심 가는 코스 일거라고 했다. 오늘은 기상이 나빠 북한 땅을 볼 수 없어 아쉽다고 안내원은 미안해하면서 바다 위에 얕게 솟아 있는 바위들을 가리키며 이는 물개 바위라 했고 그 옆 우측으로 먼 바다에 가물거리는 섬이 보였는데 그 섬 앞이 심청 이가 심 봉사의 눈을 띄우기 위해 바다에 뛰어 내렸던 임당수라고 했다.

초소의 경계병에게 쌍안경을 빌려 관측을 해도 물개바위 위에는 물개인지 물까마귀인지 식별이 되지 않고 다만 몇 마리가 모여 있는 것이 보였고 임당수는 그냥 바다일 뿐 그 뒤의 섬만 안개 사이로 아련하다.

 

 

심청 이가 물에 빠진 후 용궁으로 끌려갔다가 심청 이의 애틋하고 갸륵한 효성에 감복한 용왕이 연꽃에 태워 돌려보내 준 곳인데 지금 보니 파도만 넘실대는 여느 바다와 다른 게 없다. 전설에 의하면 저 임당수 밑에 용궁이 있다는 말인데 이는 옛날 귀신을 믿는 어진 백성들에 의해 의인화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인간 생활 방식으로 상상해 보면 분명 심청 이는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 수 있다. 또한 당시의 뱃사람들은 뱃길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바다귀신인 용왕에게 어떤 형태로건 연례행사로 고사를 지냈었을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중국 상인들은 무역선을 운항하면서 용왕에게 보다 귀한 진상품을 바치는 의미에서 심청 이를 거금을 들여 샀을 것이며 제삿날에 맞춰 심청 이를 싣고 출항하였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실일 수도 있다. 헌데 임당수에 이르러 심청 이가 제물로 바다에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 배는 태풍을 만나 파손된다.

몸이 작고 가벼운 심청 이는 부셔진 선편조각이나 물에 뜨는 봉물을 끌어안고 기적적으로 생명을 구했거나 아니면 심청 이를 도망가지 못하도록 돛대에 묶어 놓았는데 강풍으로 돛대가 부러지면서 돛대와 함께 심청 이는 바다에 떨어졌고 상선은 물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상인들은 모두 죽고 심청 이만 목숨을 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을 돛대나 부서진 선편을 타고 표류하다가 마침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배를 만나 목숨을 구하게 된다. 하얀 소복을 입었던 관계로 심청 이의 용모는 선녀와 같았을 것이며 지극한 효성에 탄복한 사신들은 중국에서 보내오는 선물과 함께 심청 이를 개경으로 데리고 가 임금님께 귀국보고를 하였을 것이다.

 

성품이 어질렀던 임금님은 사신들이 중국에 가 용무를 잘 처리하고 선물까지 얻어온 것만으로도 경탄할 만 한데 인간으로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임당 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또한 지극한 효성에 감동했으며 선녀같이 아름다운 자태에 용왕께서 보내주신 용왕의 딸로 생각하고 적령기에 있는 왕자와 결혼을 시킨다. 그 후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왕비가 되었고 왕비를 위해 전국적인 맹인 잔치를 소집하게 된다.

미화된 부분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추상해 보면 심청전은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축지법을 쓰고 사람이 하늘을 날며 짐승으로 둔갑 할 수 있을 만큼 도술이 횡행했던 시절이다 보니 얼마든지 용궁에서 살아 돌아 온 것으로 의인화 할 수 있을 듯 하다. 심청전은 전설이 아니라 실제 상황인데 이것이 구전되면서 미화되었을 상 싶다.

 

짧은 시간의 임당 수 관광을 마치고 일행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는 여관 식당에서 하지 않고 토종닭을 구입 숙소에서 도구를 빌려 집사람들이 닭 도리 탕을 요리해주어 먹었다.

 

오늘 인천에서 들어오는 여객선이 바람 때문에 결항되었고 내일의 기상도 불확실하여 우리도 며칠 붙잡힐 지도 모른다고 했으나 우리들은 여비도 충분하고 시간적인 여유도 있어 걱정할 일은 아니나 이제 불 거리가 없어 어떻게 소일하느냐가 문제이다. 내일 문제는 내일 해결하기로 하고 전날과 같이 화투치고 술 마시며 밤 12시까지 놀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초저녁부터 출입문을 열어 놓고 놀다보니 모기가 많이 들어와 있었다. 모기약을 뿌려 놓고 잠이 들었으나 창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모기약 성분이 금세 바람에 날라 가 죽었다 되살아난 모기들의 기습으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있는데 같이 자고 있던 친구들도 도저히 못 참겠는지 불을 밝히고 일어나 앉았다.

세 사람의 피를 마냥 빨아먹고 둔해진 모기들이 여기 저기 날아 다녔다.

셋이서 합세하여 맨손으로 때려잡느라고 또 소란이 벌어졌다. 날아다니는 놈은 키가 작은 송 사장이 잡았고 키 큰 나는 천장과 벽에 붙은 놈들을 잡았다. 손바닥이 벌겋다. 송 사장이 방충망에 붙어있는 것을 잡으려다 방충망만 떨어트리고 말았다. 할 수 없이 내가 밖으로 나가 방충망을 달아야 했다. 이러다 보니 무슨 잠을 잤겠는가?

 

날이 밝아(95년 8월 1일) 늦잠을 자고 여관식당에 나가 아침식사를 마쳤는데 인천에서 배가 출발하였으니 숙소에 가 쉬면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낚시를 나가려 해도 오전에는 물때가 좋지 않고 요금만 비싸 안내원 말대로 숙소에서 쉬기로 했다. 잘 사람은 자고 고스톱 칠 사람은 치면서 오전을 보냈다. 바람이 시원히 불어서 더운 줄도 모르고 피서하는 기분으로 시간을 보냈다.

짐을 싸면서 어제 수집한 홍돌 중 무늬가 희미하거나 특징이 없는 것은 골라냈다. 모두 가져가기엔 짐도 무겁고 또 다시 보니 별 것 아닌 생각도 들었다. 골라낸 돌을 숙소 뒤에 버리자니 해변에 잘 있던 돌을 옮겨와 쓸모없는 곳에 버리는 것 같아 죄스럽다. 앞으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모두 돌을 수집해 간다면 결국 홍돌이 바닥날 것이 아닌가?

자연 보호를 위해 솔선수범해도 시원찮을 판에 훼손에 앞장서는 것 같아 망 서려 진다. 그렇다고 힘들여 수집한 것 다 버리고 가자니 아깝고 에라 지금은 무진장 한 상태이니 조금은 괜찮겠지 억지로 자위하며 짐을 꾸려 놓았다. 전날 밤에 먹다 남은 닭도리탕으로 남은 술 모두 치워가며 점심식사들을 했으나 나는 술을 피했다. 나의 내장도 하루는 쉬어야 될 것 같아 사양했다.

 

13시 10분에 숙소를 떠나 13시 20분에 부두에 도착했다.

오늘은 나도 멀미약을 마셨다.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무료함을 참느니 보다는 자는 것이 낳다. 떠난 다는 아쉬움으로 부두에서 다시 기념사진들을 찍었다. 이틀 동안 보아서 그런지 바다며 산들이 눈에 익었다.

 

개찰이 시작되어 우리도 짐을 챙겨들고 줄을 섰다.

인천에서보다는 경비가 삼엄하지 않았으나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표를 확인하고 가방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돌을 회수하는 것이 보였다.

자진 반납 할 것인가? 숨길 것인가? 운명에 맡기자! 내 차례가 되었다.

주민등록증과 승선표를 보이고 가방을 검사대 위에 올려놓았더니 검사원이 가방을 들어보고 무게로 의심이 가는지 가방을 열고 짐을 점검했다. 콩돌 봉지가 나왔다. 콩돌을 봉지 채 압수하여 검사대 밑에 쏟아 부었다. 가방을 넘겨준다.

아! 명품 홍돌은 구제가 되었구나! 네잎클로버 덕택인가 보다.

검사대 밑에는 많은 돌이 쌓여있었다. 저 돌들이 분명 원위치로 돌아 갈리는 만무하고 한꺼번에 어느 해변에 버려질 터인데 이럴 바에는 애당초 우리가 백령도에 도착 할 때 여객선에서거나 부두에서 안내방송을 통하여 주지시켜 주었다면 피차 헛수고을 안 했을 것이 아닌가! 이는 분명코 사전 통제방법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엄사장이 수집한 문제의 돌도 무사히 통과되었는데 사연이 기막히다.

왜냐하면 수집당시는 장난 끼로 수집했지만 집에 갔다가 진열하기에는 남사스러운 생각이 들어 현장에서 버리고 온 것을 그의 부인이 숙소까지 챙겨왔고 짐을 꾸리면서 선별 시 또 골라냈는데 부인이 고집을 부리면서 손수 부두까지 들고 왔다고 한다.

부인은 남이 보면 흉할 것 같아 수건으로 싸고 덮어 가지고 배에 안고 검표 대를 통과하려다 모두 회수 당하는 것을 보고 자진 반납하려던 참인데 검사원이 남편의 가방을 검사하면서 가방 속의 것을 압수 할 때 남편이 부인에게 눈짓하여 자기의 등 뒤로 통과하도록 하여 자진 반납도 않고 압수도 모면을 했다고 한다.

 

모든 승객들의 탑승을 마치고 배는 14시 정각에 출항했다.

백령도여 안녕! 짧은 2박 3일의 여정이 아쉽다. 허지만 두무진의 절경을 가슴속에 안고 홍돌 몇 점을 소지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족 하자!

이제 돌아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남북통일이나 되면 김포에서 비행기로 피서 차 오면 모를까 해상으로 다시 오기는 힘들 것 같다.

백령도 야! 잘 있으래이 ! ........끝

 

 

<첨부1.>백령도 상세정보: 백령여행사 홈자료 인용(http://www.paekryoungtravel.com)

 

가. 지리적 특징

백령도는 동경 124도 53분, 북위 37도 52분 지점에 위치한 대한민국 서해 최북단의 섬이다. 이 섬은 면적 45.84 제곱 킬로, 해안선의 길이 56.8킬로, 최고높이 해발 185미터로 우리나라에서 14번째로 큰 섬이다. 인천에서 서북쪽으로 222.2킬로 떨어져있는 이 섬은 북한의 황해도 장연과는 직선거리 10킬로, 장산곶과는 15킬로 떨어져 있다. 백령도 서북쪽의 두무진과 북한의 장산곶 중간에는 만고 효녀 심청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뱃사람에게 공양미 300석에 몸을 팔아 바다에 빠졌다는 인당수가 사나운 물결을 꿈틀거리고 있다.

 

백령도의 남쪽에는 인당수에 빠졌던 심청이 용궁에 갔다가 타고 온 연꽃이 조류에 밀려왔었다는 연화리 와 그 연꽃에 걸려 있었다는 연봉바위가 있다. 이 섬은 동쪽과 북쪽으로는 북한의 황해도 옹진반도와 장연 군을, 남쪽으로는 대청 도를 마주 보고 있다. 이 섬의 북쪽에는 이 섬의 최고 지점을 이루는 산이 있고, 동쪽 해안선은 작은 만을 이루고 있어 예로부터 항해 중에 어려움이 생기면 피난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이 섬은 신라 시대부터 중국과 배로 왕래할 때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

 

백령도는 제4기 빙하기 때에는 황해도 옹진반도와 연결되었던 평원 상에 돌출한 잔구상의 지형으로 해수면의 상승으로 저지가 침수되어 잔구의 윗부분이 남아 육지와 분리되어 섬으로 된 지형이다. 섬전체가 ㄷ자형으로 섬의 동쪽이 만입지형의 갯벌 중간 대를 이루어 바다와 접하고 있다.

 

이 만입지형의 넓은 뻘이 최근에 간척되어 농지와 저수지로 변하고 있다. 해안선은 동부의 만입지형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단조로운 해안선을 이루고 암석해안과 사반해안이 교체되어 발달하였다. 섬의 동북쪽에 위치한 용기 포와 용기원산은 원래 섬이었으나 연안사주의 발달로 백령도와 연결된 전형적인 육계도이다.

 

용기 포에서 남서방향으로 3km 정도 발달된 사곶 해수욕장은 세립질의 규사로 이루어져 물이 잘빠지고 단단하여 천연 비행장으로 이용되어 왔으나, 최근 진촌리 앞 갯벌을 간척하기 위하여 방조제를 쌓은 후 실트(모래와 점토의 중간입자)질의 입자가 유입되기 시작하여 특성이 변하고 있다. 진촌리 앞 만입 지형내에 위치한 갯벌은 백령도에서 보기 드문 뻘 지대이나 1991년부터 농지조성과 수자원 확보를 위하여 간척지개발사업이 시작되어 1991년 완공되었다.

 

나. 백령도 역사:

백령도에는 선사 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남아 있다. 진촌 지구에 있는 말동 패총과, 용기포 지구에 있는 용기패총 등에서 빗살무늬 토기와 무문토기, 타제 및 마제 석부, 연석봉, 기타 골편(骨片)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의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3,000여 년 전, 신석기 시대 말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이 시대부터 백령도에 사람이 거주하여 역사가 이루어졌다.

당시의 주민은 어로에 종사하는 한편 초기 원시 농경 생활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백령도는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치려 할 때에는 고구려의 군사가 이 곳에서 신라의 군사와 싸워 물리친 일도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신라 영토가 되어 한주(漢洲) 장구진(長口鎭)에 딸려 있었다.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에는 고려 영토가 되어 해주(海州)에 속하게 되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餘地勝覽)』 강령현(綱領縣) 조에 의하면, 백령도는 고구려 때에는 '곡도(鵠島)'라고 하였고, 고려 때에는 '백령진(白翎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세종 10년에 영강(永康)과 백령을 통합하여 강령진(綱領鎭)이 되고, 뒤에 강령현이 되었다고 한다.

 

백령도는 조선 세종 때에는 해주목사(海州牧師)가 관할하였다

. 조선 중기에는 황해우도(黃海右道)에 소속되어 옹진에 설치된 병마절도사령에 귀속되었다. 그래서 옹진에서 백령도에 행수군첨절제사(行水軍僉節制使)를 파견하였다. 조선 말엽 전국이 23부로 구성될 때 해주부에 속해 있다가, 13도가 설치되고 나서 일제 말까지는 황해도 장연군 백령면으로 내려왔다.

 

백령도와 관련된 문헌 기록으로는 맨 먼저 『삼국유사』「진성여왕(眞聖女王) ․ 거타지 (居陀知)」조의 기록을 들 수 있다.

 

신라 진성여왕 때의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후백제의 해적들이 진도(津島)에서 길을 막는다는 말을 듣고 활 잘 쏘는 사람 50명을 뽑아 따르게 하였다.

 

배가 곡도(鵠島)에 이르니 풍랑이 크게 일어나 10여 일 동안 묵게 되었다. 양패는 이것을 근심하여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하니, 섬에 있는 신지(神池)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래서 못 위에 제물을 차려 놓으니, 못의 물이 한 길이 넘게 치솟았다.

 

그 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에 남겨 두면 순풍을 얻을 것이라 하였다. 양패가 잠에서 깨어 그 일을 좌우에게 말하고,

 

"누구를 남겨 두는 것이 좋겠소?" 하고 물으니, 여러 사람이 말했다.

"나무 조각 50개에 각각 저희들의 이름을 써서 물에 가라앉는 것을 보고 제비를 뽑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패는 그 말대로 하였다. 군사 거타지의 이름이 물에 잠기었으므로, 그 사람을 남겨 두니 문득 순풍이 불어서 배는 거침없이 잘 나갔다.

거타지는 조심스럽게 섬 위에 서 있었다. 갑자기 노인 하나가 못 속에서 나오더니 거타지에게 말했다.

 

?나는 서해약(西海若, 서해 바다의 신)이오. 늘 해가 뜰 때면 중하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타라니의 주문을 외면서 이 못을 세 번 도는데, 그렇게 하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물위에 뜨게 되오. 그러면 중은 내 자손들의 간을 빼 먹곤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반드시 또 올 것이니 그대는 그 중을 활로 쏘아 주시오."

이 말을 들은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은 나의 장기(長技)입니다.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노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 속으로 들어갔다. 거타지는 숨어서 기다렸다.

 

그 이튿날 동쪽에서 해가 뜨자 과연 중이 오더니, 전과 같이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간을 빼어 먹으려 하였다. 이 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중은 이내 늙은 여우로 변하여 땅에 쓰러져 죽었다.

 

이에 노인이 나와 치사하며 말했다.

"공의 은덕으로 내 생명을 보전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아내로 삼기를 바라오."

 

이 말을 들은 거타가 말했다.

"따님을 저에게 주시고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원하는 바입니다."

 

노인은 그 딸을 한 가지의 꽃으로 변하게 해서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 두 용에게 명하여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의 배를 따라 호위하여 당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를 두 마리의 용이 호위하고 오는 것을 보고 이 사실을 황제에게 고했다. 황제는 신라의 사신이 필경 비상한 사람일 것이라고 하고, 잔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의 윗자리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본국으로 돌아온 거타지는 꽃가지를 내어 여자로 변하게 하여 함께 살았다.

 

이 이야기에서 당나라에 가는 신라 사신 양패(良貝) 일행은 '곡도(鵠島)' 즉 백령도에 이르렀을 때 풍랑이 크게 일어 가지 못하고 10여 일을 묵는다. 양패가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대로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섬에 남겨 두자 문득 순풍이 일어 황해를 계속한다.

이 서해신은 중으로 변신하여 자기의 가족을 잡아먹는 늙은 여우를 물리치기 위해 양패가 데리고 가는 군사 중 활을 잘 쏘는 거타지를 원했던 것이다. 서해신에게 바쳐지는 제물이 되었던 양패는 활 솜씨를 발휘하여 늙은 여우를 물리쳐 서해 신을 도와준다. 도움을 받은 서해신은 자기를 도와준 양패에게 딸을 아내로 주어 은혜에 보답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백령도는 신라 때에 중국과 왕래하는 뱃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에서 사신양패는 백령도에서 서해 신에게 거타지를 제물로 바치고 순풍을 얻어 항해를 계속하였다. 이것은 백령도 지역에는 오래 전에 항해의 안전을 위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해 준다. 백령도에는 「거타지 설화」 외에도 「용난 개울」, 「용이 올라간 참샛골」,「두 용이 싸운 용기포」,「용의 승천과 용신제」 등 용에 관련된 전설이 많이 있다. 황패강 교수는 학술조사를 위해 백령도에 다녀간 뒤에 쓴 기행문에서 "거타지 이야기에서 꽃으로 변하는 용녀는 「심청전」에서 연꽃으로 변하는 심청과 흡사하다."고 밝힌 바 있다.

거타지 설화와 「심청전」은 지리적 배경이 같고, 내용상으로 공통되는 점도 있어 서로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고려의 대호문호인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고려 고종 7(1220)년 이세화가 백령진장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평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고을에는 옛날부터 향교가 없었는데 이세화가 처음으로 향교를 창건하고 아전들의 자제를 모아 글을 가르쳤다.

 

이들이 몇 해 안 가서 모두 인재가 되어 과거에 응시한 자까지 있게 되었다. 그래서 온 고을이 그를 사모하였으며 여러 번 글을 올려서 그의 아름다운 행동을 포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백령도에 유교를 전해 준 사람과 시기를 말해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백령도와 관련된 기록이 몇 군데 보인다.

이를 종합해 보면 백령도는 국방과 관련되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나 땅이 협착하여 진장을 포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보면, 고려 태조 때에는 대광(大匡) 유검필을 이 곳으로 유배하였다가 불러들였다고 하며, 회종 때에는 최충헌이 그의 생질 박진재를 이 곳으로 귀양 보내어 죽게 하였다고 한다. 고종 때에는 김중구(金仲龜)와 추밀부사(樞密部使) 김경손을 백령도로 귀양보냈 다가 죽였으며, 충렬왕 때에는 김흔과 이분희를 백령도에 유배시켰다고 한다. 이로 보아 고려 때에는 백령도가 유배지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백령도가 유배지로 이용될 정도로 교통이 나쁘며, 모반할 수 없는 악조건을 갖춘 곳이었음을 말해 준다.

 

조선 시대의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에는 왜구를 포함한 외부의 적들이 백령도를 침범한 일, 이에 대한 백령도의 대응 방식, 그리고 지리적 조건 등이 적혀 있다. 여기서도 백령도는 군사적으로 요충지이자 취약 지역이며 척박한 곳이라 하였다.

 

백령도는 조선시대에도 유배지로 이용되었다. 조선 광해군 8(1616)년에 정인서가 백령도에 유배되었다. 광해군 12(1620)년에는 문신 이대기(李大期)가 정인홍 사건에 연루되어 백령도에 유배되었는데, 그는 유배되어 있는 동안 당시의 백령도 풍물을 기록한 『백령도지(白翎島誌)』를 남겼다. 이 문집에는 백령도의 지리적 특징과 지형, 산업, 국방, 풍속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는 백령도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갑오경장 직후에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으려고 상소하던 사람들이 백령도로 귀양왔다.

그 중 공주 사람 김성진은 중화동에 사는 허득(許得)에게 성서를 전하고, 함께 힘을 합하여 중화동 교회를 세웠다.

 

백령도의 행정 조직은 조선시대에는 군사 조직과 겹치도록 하였다.

그래서 섬의 최고 수장(首長)인 첨사는 이 섬의 사령관 격인 행수군첨절제사로 삼품 당상관인 문무 겸직의 전제관이었다. 섬을 다스리기 위해 행정구역을 진내면(현재 진촌리 일대), 북면(북포리와 연화리 일대), 남면(남포리 일대)으로 나누고 각각 풍헌 내지 향장을 두었다. 이것이 최말단 조직이 되어 행정을 보좌하였다.

 

첨사는 병조에 속한 벼슬로, 왜적과 해적으로부터 섬을 방어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첨사는 절충장군을 비롯한 이방․호방․병방으로 두어 섬을 통치하였다. 첨사는 죄인을 먼저 참하고 뒤에 보고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첨사가 집무하던 진촌에는 섬을 방어하기 위해 토성을 축성했던 흔적이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또 첨사 밑에 필요한 관원을 현지에서 뽑아 쓸 수 있도록 하였다.

 

역대 첨사 중에는 주민의 재물을 빼앗고 횡포를 일삼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여건에서도 선정을 베푼 첨사도 있었다고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선정비는 모두 여섯인데,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모두 진촌리 남산의 반공유격전적비가 있는 곳으로 옮겨 놓았다.

 

고종 31(1894)년 갑오경장 때 진(鎭) 제도가 도장(島長) 제도로 바뀌면서 백령도는 장연군에 속하게 되었다. 이 때에는 도장에게 군사권은 주지 않고, 행정․사법권만 주어 섬을 다스리게 하였다. 191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면장을 두게 되었다. 면장은 행정만을 수행하고, 순사 주재소가 설치되어 경찰 행정 책임을 수행하게 되어 행정․사법의 양권이 분리되었다.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으로 남북이 갈라지자, 장연군에 속하였던 백령도는 옹진군 백령면으로 남한에 속하게 되었다. 6․25 사변 후에 생긴 휴전선으로 옹진반도에 있는 옹진군의 대부분이 북한의 지배에 들게 됨에 따라 백령도․대청도․소청도를 포함한 백령면은 경기도 옹진군게 속하게 되었다. 그 후 197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령면에 속했던 대청도와 소청도가 대청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그래서 백령도 1개 섬이 옹진군 백령면이 되어 내려오다가 1996년 3월 1일자로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 백령도의 전설

 

(1) 추방된 선비가 사랑을 이룬 백령도

옛날 황해도 어느 마을에 열심히 글공부를 하며 지내는 선비가 있었다. 매우 가난하게 사는 선비의 집 가까이 사또의 거처가 있었다. 사또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그 선비가 사또의 하나밖에 없는 딸을 사랑했다.

그래서 선비는 밤이면 몰래 담을 넘어 들어가 사또의 딸과 깊은 정을 나누곤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사또가 가난한 선비를 미워하여 그 고을에서 쫒아내면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라고 했다. 그 선비는 헤어지는 마당에 사또의 딸과 만나서 "우리가 헤어지더라도 다시 만날 때가 있을 것이다. 꼭 만날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자 그런 날이 머지않아 올 것이니 참고 기다리자."고 단단히 약속을 하고 배를 타고 멀리 떠났다.

그 선비는 어느 섬에 도착하여 역시 글공부를 계속하면서 사또의 딸을 그리워하고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지냈다. 하루는 하얀 학이 울안에 종이 한 장을 떨어뜨렸다. 얼른 그 종이를 주워 읽어보니 그 아가씨의 사랑의 고백을 담은 연서었다. 그래서 다른 종이에 "여기가 어느 지점이다"라고 적어서 그 학에게 주었다. 그 학은 길이 잘든 학이었던지 다시 그것을 물고 사또가 사는 집으로 가서 그 딸에게 전해 주었다.

학이 전해준 쪽지를 받은 사또의 딸은 그 선비가 있는 곳으로 찾아와 함께 잘살았다.

그 때부터 사람들이 그 섬을 "흰 백자, 날령 자를 써서 백령도라 불렀다."

 

(2) 비단에 싸여 살아난 심청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심청전과 내용은 흡사하다.

그러나 심청이가 연꽃으로 환생한 것이 아니고 심청을 바다에 빠뜨릴 때 중국 상인들은 배에 있던 비단으로 심청의 온몸을 꽁꽁싸서 빠뜨렸고 심청이는 비단덕분에 바다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조류에 의해 황해도 덕돔포라는 포구에 떠밀려가서 임금이 아니라 그 마을 원님에게 불려가 원님의 아들과 혼인을 하고 맹인잔치도 임금이 아니라 그 마을 원님이 열어 아버지를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첨부 2.>천연 비행장 : 천연기념물 제391호로 지정

 

총길이 3km. 넓이 250m(썰물시)의 사빈으로 단단한 규조토로 이루어져 차가 다녀도 빠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여 실제 1976년까지 군부대의 물자수송을 위해 군용수송기가 한 달에 두번 이착륙하던 곳으로 천연비행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에서 두 곳뿐이라는 이 사곶 천연비행장은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 규모로 알려져 있다.

이 곳은 지금 백령도에서 세가지 용도로 쓰이고 있다.

첫번째는 천연비행장으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으며, 또 여름에는 해수욕장으로 개장되어 많은 이들의 더위를 식혀준다. 또 하나의 용도는 바로 도로이다. 사곶과 용기포를 이어주는 도로의 역할까지 있다.

 

<첨부 3.>두무진 선대바위 : 명승 제8호로 지정

 

두무진 선대암은 백령도 북서단 해안에 약 400m 거리에 걸쳐 기암절벽이 발달하여 있는 곳을 말 한다. 두무진 일대의 지질은 원생대의 상원계에 속하는 세립질 규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규암은 대체로 백색, 또는 담회색을 띠고 있다. 일부 규암은 풍화작용에 의해 약간의 붉은색을 띠고 있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 곳은 두무진 일대를 돌아볼 수 있는 유람선이 있고, 또한 도보로 갈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두 곳 모두 가봐야 진짜 두무진을 봤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곳은 조선 광해군 때 귀향 온 이대기가 지은 "백령도지에서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극찬했을 정도로 기이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 백령도에서 유일하게 해안가에 횟집들이 포장마차 형식으로 영업을 하고 있어 자갈밭에 앉아 회를 먹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백령도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에서도 첫번째로 꼽힌다.

 

[백령8경]

선대비경 : 신선이 노닌 듯한 깎아지른 절벽의 두무진 절경

백사청송 : 천연 비행장의 하얀 모래와 푸른 소나무의 조화

남산두견 : 남쪽에 보이는 두견새

해구오수 : 오후에 바위에 오른 물개

해오모정 : 물까마귀 모자의 애뜻함

추야안비 : 가을밤에 갈매기 나는 모습

서해낙조 : 기암괴석 사이로 지는 주홍빛 낙조

객선입항 : 선착장으로 객선이 입항하는 모양

 

<첨부 4.>콩돌 해안 : 천연기념물 제392호로 지정

 

우리나라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보기 힘든 둥근 자갈들이 해안을 덮고 있는데 색상이 백색, 회색, 갈색, 적갈색, 청회색 등으로 콩과 같이 작은 모양을 지니고 있어 콩돌 해안으로 부른다. 약 1km정도 깔려있는 콩돌 해안은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실제 이 곳은 맨발벗고 걸어 다니며, 지압을 하는 곳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또한 바닷물이 있기 때문에 무좀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여름철이면 이 곳에 온 모든 사람들이 맨발로 자갈밭을 걸어 다니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백령도의 지형과 지질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 곳 중의 하나로 해변에 둥근 자갈들로 구성된 퇴적물이 단구상 미지형으로 발달한 해안이다.

둥근 자갈들은 백령도의 모암<母岩>인 규암이 파쇄 되어 해안의 파식 작용에 의하여 마모를 거듭해 형성된 잔자갈들로 콩과 같이 작은 모양을 지니고 있어 콩 돌이라 하고, 색상이 백색 ․ 회색 ․ 갈색 ․ 적갈색 ․ 청회색 등으로 형형색색을 이루고 있어 해안경관을 아름답게 하고 있다.

콩돌 자갈은 간조시 육지로부터 조립질 자갈대(corse-gained pebble zone), 세립질 자갈대(fine-gained pebble zone) 및 중립질 자갈대(medium-gained pebble zone)의 순으로 해안선에 평행하게 발달하여 있다.

조립질 자갈대는 약 6m 내외의 폭을 가지고 있고, 자갈들은 직경 16~64mm가 약 65%, 8~12mm가 약 35%로 구성되어 있다. 세립질 자갈대는 그 폭이 8m 정도이고, 자갈들은 직경 4~9mm가 95%, 10~19mm가 5%로 구성되어 있다. 자갈 모양은 둥글고 표면이 잘 연마되어 있다.

중립질 자갈대는 그 폭이 약 10m 내외이고 바로 바닷물과 접해있다. 중립질 자갈대의 자갈들은 직경 7~13mm가 90%, 18~40mm가 10%로 구성되어 있다.

 


'수필 및 기행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천왕봉  (0) 2012.01.26
한라산 백록담   (0) 2012.01.26
중국 장가계(무릉원) 관광 소감  (0) 2012.01.26
중국 곤명 관광 기행문(04)  (0) 2012.01.19
중국 곤명 관광 기행문 (03)  (0) 201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