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 일지01(생명의 신비)
인명은 재천이라고 한다. 그래서 물에 빠져 죽을 사람은 접시 물에라도 빠져 죽고 물에 빠져 죽지 않을 사람은 바다 물에 빠져도 살아 나온다는 말이 있다.
학설에 의하면 사람의 수명은 성장기의 5배로 보아서 약 125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학설일 뿐이고 이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아주 극소수이고 100세 정도도 아주 장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통계에 의하면 한국 사람일 경우 여자가 74세이고 남자는 68세로서 평균은 72세 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배운 사람일수록 그리고 돈을 좀 넉넉히 모은 사람들은 오래 살기 위해 실로 볼 상 사나울 정도로 극성을 부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노력하는 만큼 오래 사는 것 같지는 않다. 건강에 해롭다는 담배와
술을 끊고 몸에 좋다는 산삼, 웅담, 녹용 등 각가지 보약들을 구하여 입에 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가 본데 효과는 아직 밝혀진 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삶에 연연하지 않고 술 담배 할 것 다 하면서 오직 자신의 생활에 충실한 사람들이 더 오래 살고 있는 듯하다.
비교가 다소 엉뚱할는지는 모르겠으나 평생을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시는 농부들과 대도시에서 문화생활을 하면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비교해 보면 농촌의 할아버지 모습은 대부분 깡마르고 검게 탄 얼굴에 주름투성이고. 서울의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하얀 피부에 살이 쪄있는 모습이다. 외모로 보아서는 서울 할아버지가 더 건강해 보인다.
허지만 서울 할아버지들이 잔병이 많고 고혈압, 당뇨, 지방간 등 등등의 문화병에 시달리고 있고 시골 할아버지들 보다 일반적으로 먼저 돌아가시는 것 같다.
요사이 불치병으로 사망률이 높은 암만 해도 그렇다.
주기적인 신체검사를 통해 암을 아주 초기에 발견하는 경우에는 수술로 효과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만치만 자신의 느낌으로 병원에 가 진찰을 받고 암이라고 판별되는 경우에는 대부분 이미 때가 늦은 중증 환자가 된 다음이다.
이때는 수술을 해도 재발되는 경우가 많고 치료하기도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가 보다.
또 항암제 주사를 맞고 나는 헛구역질이 심해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데 본인의 고통은 어떻겠는가?
헌데 신기한 일이 있다.
우선 우리 장인어른의 경우를 먼저 이야기 하고자 한다.
당시 연세가 81세 이셨는데 항상 가슴이 답답하셔 소화불량인 것으로 생각하고 소화제를 복용하시며 그냥 그냥 넘기였었으나 증상이 점점 더 심해 진 것 같아 원주 연세대 부속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폐암 3기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강원도에서는 제일 시설이 크고 좋다는 종합병원인데 오진은 아닐 것이다. 외손 주가 그 병원의 원무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재 정밀 진단까지 한 후 담당 의사가 외손자에게 권한 말이다. 수술해 보았자 6개월 살기 어려우시니 그냥 퇴원하여 집에서 조용히 돌아가시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단다.
연세가 높으셔 수술 후 정상 회복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많은 돈들이고 수술해보았자 반년도 못 사실 텐데 헛돈 쓸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연세가 81이셨으니 사실 사실만큼은 사셨고 해서 가족회의 끝에 그냥 본인에게는 아무 이상 없고 단지 소화 불량 끼가 좀 있으니 그때그때 소화제를 복용하시라는 처방을 일러 들이고 퇴원하셨다.
그 후 처가 주변의 약방마다 장인어른이 오시면 소화제를 들이라고 부탁까지 하여 계속 소화제를 드시면서 시간을 넘기셨는데 문병 차 처가에 들리면 집안에서 인내 같기도 하고 꼭 송장 썩는 것 같은 지독한 악취가 풍겨 처가에 머물기가 고통스러웠었다.
헌데 어느 날 처가에 들리니 그런 냄새가 싹 가셔진 것이다. 이상하여 장인어른께 병세를 물었더니 양 약방에서 소화제를 사 먹어도 답답한 것이 풀리지 않아 한약방에 가서 진맥 후 한약 한 재를 다려 먹으니 효염이 있는 것 갈아 한재를 더 지어다 먹고 완전히 낳았다 고 하신다. 그 후 지금까지 처가댁에서는 냄새도 나지 않고 현재 86세로 아직도 농사일을 하시며 정정하게 살고 계신다.
암 전문 의사들이 6개월도 못 사신다는 분이 6년을 넘께 살고 계신데 이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 나는 의사들이 오진한 것이라고는 생각 치 않는다. 양의가 주장하는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 이외에도 한방에서도 단순한 한약으로도 암이 치료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암환자가 보약을 먹으면 암이 더 빨리 퍼진다는 소리를 하고 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고자 한다. 병원에서 치료 불가능하다고 판정이 나 마지막 수단으로 깊은 산골에 있는 기도원에 들어가 몇 년 만에 완쾌 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약도 아니 먹고
하나님에게 기도드리고 하나님이 분명히 치료해 줄 것으로 확신을 가지고 맑은 공기와
채식 위주로 식사를 한 것이 치료의 전부다. 종교인들은 분명 하나님이 치료해 주신 것으로
간주하고 더더욱 신앙심을 고양하겠지만 이는 의학적 치료가 아닌 정신적 저항력과 자연식에서 체네 항암 세력이 생겨 치유된 한마디로 자가 치료인 것이다.
우리 아버님의 경우도 유사하지만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이니까 1958,9년경이라고 생각되는데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의 일인데 당시의 아버님은 42세로서 집안에서는 열 식구의 가장으로 20여 마지기의 농토를 경작하셨다. 원인은 알 수 없으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는 몸져누우셨다. 아버지의 배가 항아리처럼 불러 있었고 통증이 심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결국 청산 병원(지금은 폐업했음) 에 입원하시게 되었다. 13년 전인 1945년 6월에도 아버지가 늑막염으로 입원 치료하신 바 있었고 그때 어머니가 간병 중 나를 분만까지 하시면서 우리와는 인연이 많은 병원이다. 그때 진찰 결과는 신장염으로 간단히 말하면 콩팥이 부었다고 했다. 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허나 수술비가 어마어마하여 아버지는 수풀을 포기하셨다. 왜냐하면 우리 농토를 모두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금세 팔리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농토를 모두 날리고 나면 10여명 식구들의 생계 수단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가족을 위해 자신을 회생하시기로 결심하시고 눈물을 흘리며 퇴원을 하셨다. 당시는 차도 탈 형편이 안 되어 리어카에 실러 집으로 오다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마지막 진맥이라도 들어보겠다고 말씀하셔 중도(우두산 마을: 지금은 원주시 우산동)에 있는 한약방(황약국)에를 들렸다. 이 한의사는 아버님과 연세도 비슷하고 경상도에서 원주로 같이 이사 온 처지로 각별히 친하게 지내셨다고 한다.
그런 사이인지라 돈도 없고 기왕에 죽을 몸 진맥이나 해본다고 들리게 되었는데 진맥 결과 신장에 화가 물려 있다면서 병원 진찰대로라면 어차피 죽을병이니 친구 사이인데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자기가 시험적으로 치료 해 볼 것이니 치료되거든 술이나 한잔 사게 하면서 한약 한재를 지어 주셨고 한재를 다 다려 먹기도 전에 항아리 같았던 배가 가라앉으면서 ,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던 통증이 삭으러드는 등 효염이 있다고 하니 연이여 한재를 더 지여 보내 주셨다.
이런 사연으로 아버님은 수술을 않고 썩어 가는 신장염을 고치셨고 지금도 83세에 술, 담배 다 하시면서 건강히 살아 계신다.
만일 그때 논밭을 모두 팔아 수술을 하셨다면 그 후 우리 집안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면 정말로 끔찍스럽다. 그리고 어려운 살림을 이끌면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계실지도 의심스럽다. 사람이 대수술을 받고 나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나의 조부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부님은 1968년 음력 7월 7일 오시(12:00)에 일흔 일곱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해인 67년 가을부터 편찮으셨었는데 확실한 병명을 알 지 못한다.
초기의 증상은 설사와 구토 증상이 있어 지사 제와 소화제 위주로 약을 지어 온 것으로 기억이 난다. 열도 없으셨고 위장의 통증도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다.
설사는 이질로 바뀌어 혈변까지 하셨고 백약이 무효하여 가족들은 속수무책으로 애만 끓였다. 처음에는 양약을 지어다 드렸으나 드시면 넘기면서 곧바로 토하시기 때문에 약효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약을 드려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아무 약도 쓸 수 가 없는 것이다. 미음은 고사하고 물을 넘기셔도 토하시니 그야 말로 돌아가실 날만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헌데 다행스럽게 토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소주이다. 평소에도 약주를 좋아하셨지만 이런 상황에서 소주라도 잡수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족이나
본인에게도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막걸리도 안 되고 소주만 넘어가고 토하지 않는 것이다. 끼니 때 마다 소주 한 컵씩 마시면서 그렇게 6개월 이상을 연명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육군소위로 1군 하사관 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가끔씩 주말에 집에 들려 조부님을 문병하였는지라 조부님의 운명이 멀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으로는 준비를 하고 있는 터라 학교에서 내가 맡은 과목의 교육이 끝나고 얼마간 공백기가 있어 휴가를 신청하였다.
교수 부장님에게 조부님의 병세를 말씀드리고 휴가를 신청을 하니 승인해주며 만일을 대비해서라도 휴가증을 발급 받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다. 인사과에게 들려서 휴가증 발급을 신청하니 인사과장의 결재가 있어야 하는데 과장이 군사령부에 들어갔고 돌아올 시간이 되었으니 잠시 기다리란다. 반시간 이상을 기다려도 과장이 돌아오지 않아 담당자에게 나는 조부님의 병환이 위독해 휴가 기간 중 집에만 있을 것이니 과장님 오시면 휴가증만 발급 받아놓으라고 부탁한 후 부대를 나와 태장에서 소주 한 됫병을 사들고 4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집에 12시경 도착하였다.
집에 도착하고 보니 큰 고모부 내외와 건너 마을에 살고 계시는 6촌 장형까지 오셔서 마루에서 부모님과 점심 식사를 막 시작하는 중이였다.
먼저 건너 방에 들어가니 할머니가 나를 보시고 반기면서 “큰 손자가 왔어요. 라고 큰소리로 할아버지에게 알린다.
할아버지가 편찮으신 관계로 큰절은 않기로 되어있어 할아버지 옆에 무릎 꿇고 앉아 나 역시 큰 소리로 “할아버지 저 왔어요. “ 하니 나를 알아보시는 듯하였고 ”아프신 데 없어요?“하고 물으니 할아버지는 입술을 달싹 거리 시나 무슨 말을 하는지 나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상황인데 할머니가 아프신 데 없다고 하신다고 통역을 해 주신다. 내가 사가지고 간 소주병을 열고 한잔을 따라 드리니 할머니가 받아 할아버지 머리를 받혀 안고 입에 대어들이니 한잔을 모두 마신다.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고 또 당신에게도 소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원은 없으세요? “라고 물으니 할머님의 통역에 의하면 ”손자며느리 못보고 죽는 것이 아쉽다“고 하신다.
“얼른 아프신 것 털고 일어나세요! 그러면 제가 당장 장가들게 요”라고 인사말을 남긴 후 마루로 나왔다.
고모부 내외도 조부님 문병을 오신 것이지만 고모부는 집에 오자마자 처가 집에 와서 씨암탉 못 먹고 가면 천추의 한이 된다고 밭에 놀던 닭을 도리께로 때려잡아 가지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병든 닭은 빨리 잡아먹어야 한다면서 잡은 닭을 내 놓으니 어머님도 꼼짝 못하고 닭 잡아 술상을 차리기에 이르렀고 닭 잡은 김에 건너 마을에 사는 장조카까지 부른 것이다.
마루에 나와 내가 점심을 몇 수저 떴을까 말까 싶은데 “애비야 어서 들어와 봐라!” 라고 할머니가 급하게 식구들을 부르신다. 운명을 직감하고 급히 방으로 들어가니 할아버지는 주무시는 듯 눈을 감으신 채 반듯이 누워 계셨다. 할아버지는 마지막으로 맏손자가 사온 술 한 잔을 드시고 손자며느리 못 본 것을 아쉬워하며 맏아들, 맏딸, 맏사위, 맏손자. 장손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아무런 말씀도 없이 조용히 생을 마치셨다.
6개월 간 곡기 하나 없이 오직 소주로 연명하셨기 때문에 그간 생명 연장에 필요한 최소한의 에너지는 소주에서 얻어지는 열량과 당신 체내의 살 속에 있는 영양분을 증발시켜 공급하였을 것이고 결국 모든 살이 다 빠져나가면서 이제는 더 이상의 영양을 공급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고 해서 심장이 뛸 만큼의 열량도 없어 숨을 거두시게 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소주에도 상당량(100그램당 300cal정도)의 열량이 있다. 고로 할아버지께서 만일 소주까지도 드시지 못했다면 훨씬 일찍 돌아가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학자들은 술이 건강에 해롭다고 하지만 조부님의 경우를 보면 반듯이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과음이 건강을 해치는 것이지 적당량의 음주는 스트레스도 풀고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는 등
오히려 장수하는데 기여도가 많은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할머니 돌아가신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그야말로 복 받은 운명이셨기에 여기에 수록하고자 한다. 1978년 할머니는 숙부님 댁으로 거처를 잠시 옮기셨다. 아버님이 모시고 사셨으나 정부의 농가 주택 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흙벽에 스레트 지붕의 낡은 옛 집을 헐어내고 비록 블로크 집이지만 기와집으로 정부에서 융자까지 해주며 강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라 농촌에서는 자비 부담이 더 걱정이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따라 집을 짓게 된 것이다. 해서 집이 다 될 때까지 원주 시내에 사시는 숙부님 댁으로 거처를 옮기셨는데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식사 후 감기 끼가 있으니 감기약을 달라고 하셔 숙부님이 직접 판콜 A 한 통을 사다가 한 병을 드렸고 이를 마신 후 잠자리에 드셨는데 아침 식사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셔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기에 주무시는 방문을 열고 들어 가보니 이미 몇 시간 전에 운명하신 상황 이였다 한다.
간밤에 드신 감기약이 잘 못 되었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남은 감기약이 이상 없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는 할머니가 죽음의 복이 있으셔 별 고통 없이 하루 밤새에 잠드시듯 운명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아쉬운 것은 아무도 임종을 못했다는 것이다. 83세에 혼자서 조용히
명을 마치셨고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10년을 건강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살아 계실 때는 할머니가 더 자주 편찮으셨었다. 해서 우리들은 할머니가 할아버지 보다 먼저 돌아가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었다. 할머니 스스로도 꿈에 선 몽했다 면서 내년에 죽는다고 하시기를 여러 차례, 허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잔병치레는 씻은 듯 치유되었다. 해서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잔병을 모두 가지고 가셨다고 했다. 집안으로 보아서는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이나 엄연한 결과가 있으니 무엇인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식사 여건이나 위생 생활 여건, 그리고 생활 여건이 전과 같으므로 할머니의 잔병치레도 자주 있어야 하지만 무엇인가가 할머니의 잔병을 치유한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정신적 자기 보호 본능이 아닐까 싶다. 당시 살림을 어머니가 맡으셨기 때문에 이로 인한 상실감, 허탈감 ,소외감 또는 어머니가 살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따른 분노와 갈등 등의 스트레스와 할아버지에 대한 의지 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육체적 저항 의식이 떨어지면서 병이 자주 발병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들이 즐겁고 신나는 활동을 할 때는 피로한 줄도 모르고 넘어 저도 다치지를 않는다.
허지만 우울하거나 신경질이 날 때 같은 활동을 해도 쉽게 피로해지고 어쩌다 살짝 넘어 저도 꼭 탈이 나고 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바꿔 말하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혼자라는 생각을 갔었을 것이고 그래서 자신의 위치도 집안의 핵심이 아닌 변두리로 밀려났다는 것을 인정하시게 된 것이다.
며느리에 대한 상실감으로 마음이 항상 부정적이던 것이 이제 당연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받아 드렸고 자신의 건강도 스스로 돌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로 해서 잔병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해지면서 잔병도 밀려난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노후에 사랑을 베풀면서 사셨다. 이것도 잔병을 물리치게 된 이유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대개의 부모들이 평생을 두고 자식들을 사랑하시지만 남편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랑의 차이가 상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남편이 있을 때는 남편 그늘에서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이지만 남편이 없을 때는 정신적으로 자식에게 매달리는 사랑으로 변할 것 같다.
할머니의 예를 보면 아버지가 원주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셨다가 늦으시면 마을 입구까지 마중을 나가 기다리신다. 그리고 아버지의 힘을 덜어주시기 위해 산에 가서 죽어 마른 나뭇가지들을 베어 조그만 단으로 묶어 머리로 이고 오신다.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의 체면을 생각해서 할머니의 나무해오기를 만류하셨지만 나는 권장을 했다. 그것이 할머니의 유일한 운동이셨고 건강 유지와 장수의 비결이라고 아버지의 만류를 설득까지 한바 있다.
한 가지만 더 언급하고자 한다. 내가 신혼 때인 1971,2년 때의 일이다. 원주 시내에서 신혼살림을 하고 있을 때인데 손자와 손자며느리가 보고 싶고 집에서 나는 야채들을 나눠주고 싶어서 호박이며 가지 등 야채들을 어머니 모르게 마련해 가지고 조그만 보따리에 싸서 머리에 이고 6km 거리의 손자 집까지 걸어오신다. 버스가 있는데도, 차비가 있는데도 차를 타시지 않고 걸어서 오신다. 혹시나 차비가 없어 걸어오셨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고쟁이 속을 뒤져 꼬기 꼬기한 돈 뭉치를 꺼내 보이며 돈이 없어 걸어온 것이 아니란다. 걸어오면 되는데 쓸데없이 왜 돈을 쓰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76세의 나이로 시오리 길을 걷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집에 가실 때는 꼭 차를 타고 가시라고 차비와 용돈을 들이지만 할머니가 가신 후 찬장이나 다른 곳에서 할머니에게 드렸던 돈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런 할머니의 깊은 뜻에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할머니의 이런 강인한 정신과 사랑하는 마음들이 노후에 건강을 지키시게 했고 깨끗한 임종을 마치시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먼저 육군 보병 학교에서 유격 훈련을 받을 때 있었던 일이다.
장교를 양성하는 유격 훈련이라 시설 면에서나 훈련의 농도면 에서 빈틈없는 훈련이다.
레펠 코스라고 암벽 하강 훈련 코스로서 3개 코스가 있는데 1코스는 높이90여 미터 경사 80도이고 마지막 3미터는 점프를 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고 2코스는 높이 100미터에 경사가 90도이고 마지막 10여 미터 지점에서 뛰어내리게 되어있다. 3코스는 높이 120여 미터에 경사는 80도이나 마지막 20여 미터를 뛰어내린다.
올빼미 번호가 2번이라 남보다 먼저 훈련에 임하게 되지만 1코스에서는 자세가 좋았다고 교관으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했다. 헌데 2코스로 올라가 하강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보니 허리 부근에서 줄을 잡고 몸을 지탱해 주는 오른 손이 100여 미터의 로프 줄 하중에 상당한 부담이 생기면서 끝까지 지탱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생겼지만 출발을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냥 하강을 시작했다. 중간쯤 나려오니 절벽에 홈이 있어 그곳에 군화 앞 코끝을 그 속에 꼽고 허리를 펴고 잠시 쉬었다. 규정된 자세는 발을 십일 자로 벌이고 허리를 90도로 꾸부리고 오른손으로 줄을 잡았다 놓았다하며 2,3미터 간격으로 점프를 하듯 나려오게 되는데 허리를 90도로 꾸부리면 내려가는 속도가 빨라지나 제동을 걸어주는 오른 손에 힘이 많이 소요됨을 느끼고 다시 출발하면서 는 허리를 130도 정도를 유지하였더니 밑에서 조교들이 악을 쓴다. “ 야 이 씹 새끼야 뒤질 라고 환장 했냐 ? 허리 안 꾸부려! 빨리 안 꾸부려! ”조교들의 욕설에 순간적으로 자존심이 발동한다. “그래 이 새끼들아 꾸부려 주마 네놈들에게 욕을 먹을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허리를 90도로 힘주어 꾸부리는 순간 오른손이 제동 능력을 상실하며 그대로 주악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다. 순간 아! 이제 나는 죽는구나!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없는 것인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로프 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줄을 놓으면 머리가 먼저 떨어지면서 박살이 나고 현장에서 즉사될 것임을 알기에 줄에서 죽더라도 줄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팍 떠올랐다.
발이 땅에 닫는 순간 뒤로 넘어지면서 한 바퀴 돌았다. 내가 낙법을 쓴 것인지 떨어지는 힘에 그리된 것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떨어지면서도 낙법을 써야한 다는 생각은 순간적이나 한바 있다. 한 바퀴 돌아 나뒹굴러 쓰러졌다가 일어나니 교관이 하얀 얼굴로 내 앞을 막고 서서 “다친 데 없냐?”하며 사지를 점검했다. “네! 2번 올빼미 다친 데 없습니다.”라고 부동자세로 서서 대답을 하니 “휴 이 새끼 때문에 십년감수했네! 엎드려! 이 새끼야 !” 엎드리고 나니 빳따 20대를 때린다. 나는 빳따도 아프지 않았다 . 살랐다는 생각에 빳다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엉덩이는 물러터질지 모를 지만 죽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빳따를 맞고 나서 다시 쪼그려 뛰기 50회를 실시했다. 그래야 엉덩이에 멍이 들지 않는다. 기압과 치료를 겸한 지휘법인 셈이다. 교관이 자기의 위치로 돌아간 후 나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저를 살려주셔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내가 떨어졌던 암반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내 총을 집어 들고 M-1총대가 부러졌는가를 확인하니 나무 총대인데도 부러지지는 않고 약 1cm정도의 깊은 홈이 파여 있었다. 결국 등에 메었던 M-1 소총이 나의 등을 지켜 준 것이다. 동료들도 그제서야 내 옆으로 다가와서 50m 높이의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피 한 방울, 발목 하나 안 다치고 살았으니 이것은 기적이라고 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다고 했다. 그 후 산 아래로 굴러 나려간 철모를 찾아 가지고 보니 철모가 사과 정도의 깊이로 우구려 들어 있었다. 뒤로 넘어질 때 암반에 부딪치면서 우구려 든 것이고 턱에 의지해 묶었던 반도가 분리되면서 산 아래로 굴러 나려간 것이나 철모가 없었다면 뒤통수가 박살나면서 뇌진탕으로 죽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 동료는 이 철모가 내 생명의 은인이니 임관 후 집에 가시고 가서 신주 모시듯 하란 말도 했었다.
훈련이 다시 시작되어 나는 3코스에 올라 성공적으로 하강을 마쳤다.
길을 가다가 넘어지면서 발목을 삐거나 팔이 부러지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50미터 높이의 절벽에서 로프 줄에 감겨있기는 하지만 암반 위에 떨어 졌는데도 다치지를 않았다는 것은 신의 보살핌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를 않는다.
이틀 뒤 우리들은 도피 및 탈출 훈련을 받았다.
그때가 67년 음력 정월 열나흘 날 이였는데 어두운 밤 부대가 이동하다가 적으로부터 기습 포위 공격을 받게 되고 동료들은 뿔뿔이 흩어져 적진을 탈출, 우군 부대를 찾아가는 훈련이다. 4명 일개 조로 편성하여 야밤에 길도 없는 깊은 산중에서 지도와 산세로 방향을 잡고 산을 넘을 때의 일이다. 지도를 잘 본다고 내가 조장을 맡았고 탈출로를 계획했기에 내가 앞장을 서서 산을 오르다가 나는 나무그루 턱에 걸려 앞으로 엎어졌다. 엎어지면서 예리한 싸리나무 그루터기에 오른쪽 눈썹 위를 찔렸다. 가죽 장갑을 벗고 손바닥으로 상처 부위를 훑으니 촉감으로 바서 피가 흐르는 듯 했다. 그래도 나는 무릎을 꿇고 또다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눈을 다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만일
내가 엎어지면서 2센티 아니 1센티만 더 앞으로 엎어졌다면 분명 눈동자가 터졌을 것이고
이로 인해 실명과 함께 나는 장교는 고사하고 의가사 제대가 되면서 나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짐작도 인된다. 겨울이라 그런지 피는 얼마 안 있어 넘쳤고 우리들은 밤새도록 산악 행군을 하여 다음 날 새벽에 집결지(우군 부대)에 도착 의무대에 가 단순한 외상 치료를 받았다. 군의관이 말한다. 정말 운이 좋았다고 까닥했으면 실명할 뻔했단다.
다음은 내가 남에게 살려달라고 구조 신청을 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이야기이다.
춘천 하사관 학교에서 교관 요원으로 파견 근무를 할 때의 일이다. 67년 8월 초순경 이였을 것이다. 그날이 토요일 이였는데 오전에 수업이 없어 같이 근무하는 동기생과 11시 반경 퇴근, 소양강 부근에 있는 나의 자취방에 와 점심을 지어먹고 더위를 식힐 겸 둘이는 소양강으로 나아갔다. 동기생은 부대 옆에서 하숙을 하는지라 볼일이 있어 집에 가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충동에 마지못해 강으로 나온 것이다.
둘이서 옷을 모두 벗고 강가에서 샤워를 하던 중 어렸을 때 헤엄치던 생각이 나면서 강을 건너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해서 또 그 친구에게 강을 건너 갔다 오자고 제안을 했고
힘들게 그럴 필요가 있겠냐? 면서 사양의 뜻을 밝혔지만 역시 나의 충동에 못 이겨 강을 건너게 되었다.
소양강은 여름 장마 뒤라서 물이 많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소양교 2km 상류 지역이라 강폭이 300여 미터 정도로 보였다. 물살이 세서 직선으로는 건너 갈 수가 없을 것이고 떠내려가면서 건너면 밑으로 가면서 강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500미터는 수영을 해야 할 것으로 짐작을 했다. 친구는 영산강 출신이라서 그런지 수영 실력이 월등해 보였다.
내가 반 정도 건너고 있는데 그 친구는 어느새 다 건너가 쉬고 있다.
3분지 2 쯤에서 팔에 기운이 다 빠진 듯하다. 해서 누웠다. 배영을 하니 힘도 그리 들지 않고 잘 나간다. 얼마 후 다 건너 왔나하고 몸을 바로 잡고 보니 나는 그냥 떠내려 온 것 이였다.
700여 미터를 떠내려 오면서 강폭을 더 넓어지고 그때부터 온힘을 대해 일단 건너는 갔다. 건너고 나니 거의 탈진 상태 이였다. 친구는 빨리 돌아가자고 보채였지만 기운이 회복되면 건너가자고 하면서 1시간 이상을 강가에 누워 쉬었다.
팬티만 입었어도 상류로 올라가서 다리를 건너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못되는 지라 어쩔 수 없이 다시 건너가야 한다. 두 시간 가까이 쉬었다 쉽고 더 이상 뭉갤 수도 없어 되 건너기로 하고 친구는 출발했지만 자신이 없는 나는 미기적 거리면서 출발을 못했다.
어느새 다 건너간 친구가 빨리 건너오라고 재촉한다.
이판사판이다. 나도 출발을 했다. 허나 아까워 마찬가지로 중간에 이르니 팔에 힘이 빠져
다시 누웠다. 이제는 팔을 쉰다 생각하고 누운 것이다.
얼마를 떠나려 왔을까 머리를 들고 쳐다보니 친구가 까마득한 것으로 바서 1km이상 떠내려 온 것이다. 강폭은 더 넓어지고 수심은 더 깊어지고 급류에 밀려 반도 못 건넌 상태가 되었다. 포기하고 싶었으나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친구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은 생각으로 다시 수영을 했다. 얼마를 헤엄치다가 수심을 알 겸 서보니 발이 땅에 닿지를 않는다. 다시 솟구쳐 수영을 한다. 이제는 팔에 아프다 못해 아예 감각이 없다. 얼마를 허우적거리다가 다시 서보니 역시 발이 닫지를 않는다. 버럭 겁이 난다 아직 200여 미터는 더 남은 것 같다. 바위 위에 떨어지고도 살았는데 이제 물에 빠져 죽는 것만 같았다.
이를 악물고 허우적인다. 다시 서본다. 역시 발이 닿지 않는다. 정말 이제 죽는 가 보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서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 앞에 낚시하는 사람이 보였다. “ 아저씨! 아저씨! 나 좀 살려주세요…….”소리를 거듭 지르는데도 낚시하는 사람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낚시에만 팔려 있다. 친구가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거리가 아니므로 이제 죽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누구도 나를 구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좋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죽는 순간까지 수영을 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어금니를 물고 허우적임을 계속했다. 이제 더 이상 팔을 휘 저을 수 없다. 포기하고 가라앉는데 발이 땅에 닿는다. 서보니 물이 목에 찬다. 물가에까지는 아직도 100미터 이상 남은 것 같은데 물굽이가 밖으로 돌기 때문에 강바닥이 얕아진 가 보다 . 살았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걸어서 나아갔다.
내가 물가에 도착하면서 친구도 도착했다. 토하는 나를 씻겨주었고 나는 다시 한 시간 이상을 누워있었고 친구가 가지고 온 옷을 입고 휘청 이는 걸음걸이로 우리는 소양강을 떠났다.
그때 내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죽을 때까지 수영을 하겠다는 의지와 남은 거리에 비해 수심이 얕은 곳을 만난 것인데 좀 더 하류로 떠내려갔었다면 가에까지도 수심이 깊기 때문에 기운이 빠진 상태에서는 익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죽을 운이 아니기에
떠내려 오다가 시간 맞게 다시 수영을 시작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가라앉는 순간에 얕은 지역을 만난 것이니 운명적이랄 수도 있고 신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10년 가까이 물을 멀리 했다. 차를 타고 강 옆으로 지나가도 겁이 났다. 어쩌다가 피서 철을 맞아 물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물이 허리를 넘자 숨이 막히는 것 같아 도망치듯 나온 적이 있다.
이번에는 찦차가 굴러 죽을 번했었던 이야기이다.
79년 4월경이라고 생각되는데 2사단 병참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중 1군사령부 군수처에 유류 검열관으로 차출되어 1군 지역 각 사단 및 군단 사령부를 순회하면서 검열을 다닐 때 일어났던 일이다.
15사단 검열을 마치고 군사령부로 복귀하기 위해 토요일 새벽 여섯 시 경 사창리를 출발했다. 여관에서 자고 이러나 보니 비가 내린다. 봄비치고는 상당히 굵은 비가 내렸다. 검열용 차를 배차 받아 내 마음대로 운행하는 것이기에 비오는 것은 신경 쓸 일이 없고 한 시간이라도 빨리 원주에 가서 마음 놓고 푹 쉬겠다는 일념으로 아침 식사도 않고 출발한 것인데 비가 오니까 운전병이 차를 도로 가장자리에 우측 바퀴를 올려놓고 운전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일차 주의까지 주었는데도 사고가 난 것이다. 당시 전방의 군사 도로들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이고 노폭도 좁은 2차선 도로이다. 해서 차가 많이 다니는 자리는 움푹 파이게 되고 이로 해서 차가 털커덕거린다. 그러다 보니 운전을 잘하는 운전병들은 도로 가장자리에 파지지 않은 부분으로 차를 몬다. 직선 도로 같으면 그도 괜찮겠지만 커브와 경사가 많은 전방 도로에서는 안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탑승자들은 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와 같이 차출된 운전병은 일병이지만 사회 면허라면서 운전에 경험이 많다고 해서 갓 길 운전에도 염려를 안 했었으나 비가 와 길이 미끄럽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안으로 들어가 주행하도록 주의를 준 것이다.
신포리 검문소를 지내면서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는 도로인데 찦차가 너무 도로 가에로 주행한다 싶어 재차 주의를 주는데 뒤 바퀴가 도랑 쪽으로 미끄러진다. 차가 미끄러지니까 운전병은 핸들을 급히 좌측으로 틀었다, 운전병이 당황한 듯 꺾은 핸들을 바로 잡지 못하고 도로 좌측 아래로 넘어 들어간다. 눈앞에는 5~6미터의 낭떠러지이고 그 밑에는 밭이다. 뛰어내릴 시간도 장소도 없었다. 그냥 앉아 있으면 차가 구르면서 머리를 다칠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를 최대한 낮추고 몸이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도록 무엇인가를 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서 내 앞에 있는 손잡이를 오른 손으로 잡고 왼 손으로는 의자 밑에 있는 다리를 잡으면서 몸을 최대한 엎드렸다.
그 다음 순간은 정신을 잃은 듯하다. 차가 360도 회전하여 바로 섰다. 정신이 들어 운전석을 보니 운전병이 보이지 않는다. 운전병이 튕겨 나간 모양이다. 찦차의 윈도가 찌그러들면서 나의 몸을 덮고 있어 윈도를 몸으로 밀면서 뒤꽁무니로 기어 나갔다.
차를 빠져 나와서 보니 운전병이 진흙 밭에서 진흙투성이로 일어선다. 다친 곳이 없다 했다.
차는 호로(천막)와 윈도가 찌그러들고 유리가 깨지는 등 파손이 심각하지만 사람은 멀쩡하다. 사람이 무사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허지만 걱정이 앞선다. 사고 보고를 해야 하는 지, 사고 보고를 하고 나면 선탑자로서 처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중령 진급에 지장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당장 망가진 차를 어떻게 원주까지 끌고 갈 것인가? 이것이 문제다.
우선 차를 끄집어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방금 지나온 검문소로 걸어 올라갔다.
검문소 문을 열고 들어가 신분을 밝히고 구난차를 불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초소장이 하사인데 인명 피해가 있는지를 묻기에 없다고 했다. 사고 보고를 하려고 하는 것을 인명 피해도 없고 차는 호로가 조금 찢어지는 등 경미한 파손이니 내가 고쳐 가지고 갈 것이라며 사고 보고를 하지 말라고 부탁을 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초소장의 얼굴을 보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라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원주라고 한다. 해서 자세히 짚어 보니 나와 한마을 사람이며 내 동생 친구이기도 하였다.
한 고향이고 친구 형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초소장의 관심 있는 배려로 인근에 있는 병기 중대(차량, 총포 정비를 담당한 부대)에 연락을 하여 구난차가 왔다.
차를 구난하여 08시경 병기 중대로 들어가니 토요일이라 내무 사열을 준비하고 있었다. 병기 중대장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 하니 내무 사열을 중지하고 차를 고쳐 주라고 지시를 한다. 역시 중대장 실에서 차 고치기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가 잘 아는(한 고향이고 고등학교 선배임) 김운섭 병참 중령이 그의 매형이라고 했다.
정비 반장이 중대장실로 들어 왔다. 차를 점검해보니 동력장치는 이상 없고 앞 범퍼 와 호로 및 호로대 찌그러진 것은 고칠 수 있으나 윈도 그라스는 부대에 재고가 없어 당장 고칠 수가 없으니 나보고 춘천 시내에 가서 사오라고 했다.
생각보다는 경미한 파손이다. 오늘 중으로 고쳐 가지고 원주까지 갈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주머니에 돈은 없지만 춘천까지 버스를 타고 나왔다. 다방에서 양구에 있는 집사람에게 돈을 가지고 오라고 전화를 한지 한 시간 반 만에 집사람이 왔다. 열한시가 넘었지만 그때까지 아침 식사도 못한 상태이다. 하여 우선 식당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중 집사람이 꿈 이야기를 한다.
집안에 초상이 나 모두가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있는데 자기만 평복을 하고 있어 멀쑥해 가지고 상복을 찾아다니다가 전화 벨 소리에 꿈이 깨였다는데 사고 났다는 소리에 정신없이 달려 나왔으나 다치지 않아 천만 다행이라고 했다.
집사람을 돌려보내 후 윈도 그라스를 사서 택시에 싫고 병기 중대에 도착하여 차를 모두 고쳐 가지고 그날 해 그름에 원주에 도착, 여관에 들어가 식사 겸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긴장과 피로를 풀 겸 다음날 아침까지 내어 잤다.
차량 사고와 관련하여 부수적이 이야기가 더 있지마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인 지라 예서 맺고 마지막으로 내가 폐렴에 걸려 또 한 번 죽을 번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83년 봄 나는 퇴계원에서 대대장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2월 초순경 국방대학원에서 실시하는 대대장 정신교육과정에 입소하여 1주일간 교육을 받았다.
이때 감기가 들었는데 부대에 돌아와 쉬면서 치료를 해야 하나 약만 복용하면서 바쁜 일정에 매달리다 보니 감기가 악화되면서 폐렴이 되었다
헌데 이상한 것은 꼭 밤에만 열이 난다. 낮에는 바쁜 일로 아픈 줄 몰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저녁 10시경 열이 오르기 시작 하면 참어 보다가 잠을 자기 위해 군의관이 지어준 해열제를 복용한다. 그러면 땀을 흠뻑 흘리며 잠에 떨어진다. 이렇게 지나기를 일 개월 !
그때부터는 낮에도 열이 높아지면서 체온이 40도를 넘어서고 맥박은 고사하고 호흡을 100번 이상 하게 되니 여름에 개가 헐떡이는 것보다도 더 헐떡이면서 정신이 희미해지는 등 고통이 심해 출근도 못 하고 집에서 쉬면서 약만을 복용하며 치유하여 했으나 차도가 없어 결국 의정부에 있는 군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 입원을 하니 급성 폐렴이라며 중환자 취급을 한다. 링거 주사와 마이신 주사 등 주사를 하루에 열여섯 대까지 놓는다. 일주일 정도 치료를 받으니 호흡이며 맥박이며 체온 등 정상으로 돌아 왔다. 토요일 오후에 퇴원하라는 것을 하루를 더 치료받은 후 일요일 퇴원을 하였다.
허나 밤이 되면서 10시를 넘어서니 또 다시 체온이 올라가면서 호흡이 빨라진다.
<병상일지 02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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