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지02(생명의 신비)
<전엽에 이어>
허나 밤이 되면서 10시를 넘어서니 또 다시 체온이 올라가면서 호흡이 빨라진다.
아이고, 이제 죽는구나! 그간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슬기롭게 넘겼지만 병에는 방도가 없는 것이다. 폐렴이란 폐렴균에 의해 폐가 곪는 것으로 약이라면 마이신밖에 없는데 주사 바늘을 뽑고 나니 또 재발한다면 이제 죽는 것만 남은 것 같았다.
그간 어떻게 살아 왔던가? 수많은 즐거움과 인간으로서의 기본 도리도 접어둔 채 오직 군대 생활에만 내 모든 것을 바쳤다. 이제 내가 죽는다면 이건 너무 허무하다. 아니 억울하다.
나는 아이들이 없다. 해서 먼 장래의 엔조이를 위해 급료의 75%를, 상여금은 100% 몽땅 저축하며 건실하게 살아왔다. 이제 내가 죽으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적어도 저축한 돈의 10분의 1이라도 펑펑 써보고 죽어야 할 것이 아닌가! 누워서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분노라 솟구친다. 아니 빌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데려갈 모양인데 좀 봐 달라고 빌어야겠다.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하나님에게 애원을 했다 . “ 하나님 제가 무슨 잘못을 하였기에 이렇게 빨리 저를 데려 갈려 하십니까? 제가 병참 장교로서 수많은 보급품을 취급하지만 도둑질을 했습니까? 아이가 없다 해서 바람을 피웠습니까? 누구에게 사기를 쳤습니까? 남을 업신여긴 적도 없습니다. 아들로서 사위로서 형으로서 그들의 가슴에 못을 박은 적이 있습니까? 저를 살려 주세요 70, 80을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 년만 살게 해주세요! 이제 내 나이 39이니 더도 덜도 말고 10년 봐주세요!
인생에 있어 최고의 정점(40대)은 넘어야 하지 않습니까? 기왕에 이 세상에 내보내 주신 것, 단 맛도, 쓴맛도 조금은 봐야 되지 않습니까? 하니 하나님! 꼭 10년만 봐 주세요. 하나님! 하나님 ! “ 기도라기보다 절규를 했다.
집사람이 자다가 일어나 기도하는 나를 보고 당황하면서도 겁도 났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이 왜 죽어, 안 죽어 , 공연한 걱정 말고 마음 놓고 잠이나 자라”고 권하는 바람에 기도는 끝났다. 그리고 약을 복용한 후 약 기운으로 잠에 들었다.
월요일 아침이다. 부대에다가는 간밤에 병세가 다시 악화되어 경희대 부속병원에 가 진찰을 받고 오겠다고 한 후 차를 오라 하여 경희대 부속 병원 내과를 찾아갔다.
운 좋게 내과 과장을 만나 특진을 받게 되었다. 과장은 군의관 소령 출신이라 군대 사정을 잘 안다면서 , 그리고 군 병원에서 치료받았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급성 폐렴인 것 같으니 최소의 경비로 스파크 검사를 하겠다고 했다.
하여 우선 x-ray 촬영과 피검사, 소변 검사 등 몇 가지 진찰과 시료를 채취하더니 내일 결과를 보자고 했다.
관사로 돌아오니 집사람도 천호동에 갔다 왔는데 용한 사람에게 물어보니 “당신은 한약을 먹어야 낳는데.... 동쪽에 있는 한약방에서 한약 두 첩만 지어다 먹으면 낳는데 “라고 했다.
폐렴에는 약이 마이신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쌀밥 보리밥을 가릴 상황이 아니고 밑쩌바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부대 앞에 있는 한약방에 차를 보냈다. 이 한약방은 관사에서는 동쪽에 있고 부대 앞에 있는지라 부대에서 병사들이 운동을 하다가 발을 삐거나 다칠 경우 자주 찾아가 침을 맞기도 하고 부대에서 행사가 있을 경우 내빈으로 초대하곤 해서 안식이 있는 약방이다.
당번병을 보내 한의사를 모셔왔다. 한의사는 나를 보더니 대대장님이 이렇게 많이 편찮으신 줄 몰랐다면서 왜 진작 자기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힐책을 한다. 진맥을 보더니 “한방에 폐렴이란 병은 없습니다. 대대장님은 옘병입니다. 내가 맥을 잘못 짚었는지는 몰라도 분명 옘병입니다. 옘병이 맞는다면 저에게 비방이 있는데 두 첩이면 떨어집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집사람이 말한 것과 일치하는 말이라서 신통스럽고 믿음이 들었다.
“체기도 두 첩 가지고는 안 떨어질 것 같은데 옘병 이라면서 두 첩 가지고 되겠어요?”하니
“그러니까 비방이죠. 쉬운 말로 약제에 비산이 들어갑니다. 옛날에 궁중에서 사약으로 쓰던 원료이지요. 해서 두 첩 이상은 드실 수가 없습니다. 더 먹다가는 사람 죽습니다. 대장님과 내가 운이 맞으면 내가 맥을 바로 짚은 것이고 맥이 맞는다면 분명 두 첩에 대장님 병이 낳을 것입니다.”
차로 모셔다 드리면서 한약 두 첩을 받아왔다.
저녁에 한 첩을 다려 먹었다.
이불을 높게 깔고 비스듬히 누워 TV를 보면서 밤 열 시를 기다린다. 열시 가 되면 체온이 오르기 시작하기 때문에 밤 열 시가 나에게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 같은 선이기도 하다.
어! 열 시가 넘었는데도 열이 오르지 않는다. 열한시를 넘어서는 데도 열이 나지 않는다.
약효가 작용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열두시가 넘어간다. 정말로 열이 나지 않는다.
신기하다 , 고맙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 저를 구해 주시는 군요! 하나님 감사 합니다 ”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꿃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네 번째로 감사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아주 편안히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집사람에게 밥을 지으라고 했다. 입맛이 돋은 것 같다. 두 달 동안 거의 미음으로 살았는데 하룻밤 편히 자고 나니 병이 다 낳은 듯 밥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두 달 만에 먹는 밥이지만 입이 깔깔 하여 몇 수저 들고 말았다. 그래도 기분이 상쾌하다.
병이 완전히 낳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침 식사 후 한 첩을 또 다려 먹었다.
비록 얼굴은 야위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건강을 되찾은 듯 홀가분하다.
어제 의뢰했던 진찰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경희대 부속 병원으로 갔다.
순서가 되어 과장님 방으로 들어서니 내과 과장님을 나를 알라보고 앉으란 말도 없이 군말 필요 없고 빨리 가서 입원 수속을 밟으란다. 급성폐렴이고 상태가 최악이니 일분일초라도 지체할 수 없으니 어서 가서 입원하라는 것이다.
간밤에 열이 삭으러 든 것으로 봐서 병이 다 나았다고 생각하는데 병원에서는 입원을 하라니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할 찌 어떨지를 잠시 망설였으나 입원은 않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입원을 하더라도 며칠 더 한약의 경과를 보고 열이 다시 오르면 그때 입원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기 때문이다.
“과장님! 폐렴에는 마이신이 약인데 입원해서 주사 맞으나 집에서 맞으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 부대에도 군의관이 있으니 부대 군의관에게 시간 맞혀 주사 맞고 약 먹으면 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또 지난주에도 일주일이나 군 병원에 입원을 하였으므로 또 다시 입원을 하게 되면 부대 지휘를 위해 대대장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대령 진급은 생각도 말아야 합니다. 하니 통원 치료를 하겠습니다. 무슨 약을 얼마나 먹고 주사는 몇 대나 맞아야 하는지 처방전만 발급해주세요…….” 라며 입원을 않겠다. 하니 과장님은 어이가 없는 듯 했다. “대령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죽음과 바꾸려고 하느냐” 고 하며 입원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내가 거듭 부탁을 하자 처방을 끊어 주셨다.
마이신 주사 4회 ,마이신 계통 약 4회를 시간 마쳐 맞고 먹을 것을 적어 주셨다.
부대로 돌아오면서 약 방에 들려 주사약과 먹는 약을 구입하고 군의관을 불러 시간 맞혀 주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오랜만에 부대 장교 식당에서 참모들과 점심 식사를 하였다.
저녁에 한약 재탕을 마주 먹었다. 더불어 밤 열시, 열한시가 넘어가도 열이 나지 않았다.
이제 염병은 떨어진가 보다. 참 신기하다. 그리고 고맙다.
3일 후 나는 경희대 부속병원 한방과를 들렸다.
마이신 주사를 하루에 4회씩 일주일 이상 맞았어도 재 발병하였는데 한약 두 첩에 단 하루 만에 폐렴이 치유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하니 한의사는 그래서 한약이 신비의 영약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빨리 몸을 돋워야 한다면서 보약 한 재를 지어준다.
10일 후 내과 과장을 찾아가 한약을 먹고 병세가 가라앉았다 하니 다행이라며 군인들은 정기적으로 신체검사를 받는데 폐결핵으로 오진 될 수 있으니 주사와 약을 계속 복용하여 폐의 고름을 완전히 말려야 한다고 하였다.
군 병원에 입원한 것까지 무려 40일 동안 주사를 맞은 것이다. 아이들 말로 신물이 나도록 주사를 맞고 양약, 한약 그리고 개소주까지 먹었다. 5월이 되면서 정기 신체검사가 있어 검사를 받으니 폐가 깨끗하게 치유되었다. 완전한 정상인 된 것이다.
치료가 되고 나서 집사람에게 천호동의 누구에게 물어 보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천호동에 계시는 당숙모님과 같이 처녀 무당 한데 갔었다고 한다. 돌아가신 숙부님이 나를 데려가려고 한다. 신을 달래기 위해 오늘 당장 궂을 해야 한다고 하여 30만원을 주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동쪽에 가서 한약 두 첩을 지워먹으면 씻은 듯이 병이 낳을 것이라고 했다. 한다.
나의 병이 폐렴인지 옘병(장질부사 종류)인지 아니면 정말로 숙부님이 나를 데리고 가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일차적으로 폐렴균을 죽이고 열을 막은 것은 한약이고 두 번째로 허약해진 몸을 회복한 것은 한약(보약) 과 사약(개소주)이며 마지막으로 폐렴균에 의한 상처와 이때 발생한 고름을 양약이 치료해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내가 신세대 사람이라고 양약만을 고집하였다면 훨씬 더 오랜 시간을 병상에 누워있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야 갰다는 나의 의지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운명적 신의 보살핌으로 무당과 한의사가 연결되면서 복합적으로 치유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나는 인생관을 전면 수정했다. 십 년만 살게 해달라고 기도까지 한 마당이라 이제부터는 남은 인생을 즐기면서 살기로 했다. 그래서 더 이상 진급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진급을 위해 바뿐 자리, 스트레스 많이 받는 자리는 피하고 소신껏 근무만 하면 되는 자리를 찾아 최선을 다해 근무하겠지마는 진급을 위해 필요 없는 충성이나 아부는 않기로 한 것이다. 다음은 무조건 저축만 하던 것을 상여금 저축은 해약하여 자가용을 구입했다. 그리고 먹고 싶은 것 먹어보고 입고 싶은 것 입어보고 가보고 싶은 곳 가보면서 살기로 한 것이다.
중병을 앓고 나서 벌써 16년이 지나갔다.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고 내가 절규하며 기도했던 10년에서 6년이나 덤으로 살고 있기에 더 이상 삶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신께 감사하며 살고 있다. 인간의 명은 본인의 노력이나 주의도 한 목을 하겠지마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을 한다.
지금까지는 우리 집안에서 죽을병에 들어 병원에서는 포기한 상태에서 많은 돈 드리지 않고 한약으로 신비스럽게 치유하고 오래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만 예로 들었으나 운명적으로 빨리 돌아가신 사례도 많기에 수명이 운명적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간단히 좀 더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나의 형제 중에도 아주 단명한 사례가 있다. 현재는 내가 3남 4녀의 장남이지만 실제는 4남 5녀로서 내 위로 누님 한 분과 바로 아래 남동생 하나가 젖먹이 때 죽어 호적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명을 마쳤다.
당숙이 세분 계신데 백 당숙께서는 일제 때인 42년에 39세의 나이로 병사하시고 중 당숙님의 큰며느리인 6촌 형수는 61년 24세의 나이로 시집살이가 어렵다고 강물에 뛰어 들어 명을 달리 했다. 나의 큰 매제는 85년 한양대학 병원에서 취장 암이라고 판명 된지 2주 만에 한약 한 첩 못 먹여 보고 39세의 나이로 명을 마쳤는데 이 매제에게는 신혼 때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한 것 같아 가슴이 더 아프다.
매제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 여동생과 연애결혼을 하였다. 결혼 승낙을 받을 때 집안에서는 그가 가난하다고 결혼을 반대했다. 가족회의에서 대부분 반대했으나 나의 설득으로 승낙을 받게 된다. 지금 현재의 재산은 중요하지 않다. 돈은 결혼해서 열심히 벌면 되지만 사람 못된 것은 돈으로는 고칠 수 없으니 먼저 사람을 보아야 하고 사람 됨됨이는 본인이 제일 잘 알 것이니 사람 됨됨이를 모르는 가족이 결혼 문제를 운운 할 것이 아니라 본인(동생)이 결정해야 한다면서 결혼 조건 네 가지를 물었다.
첫째는 서로 사랑하느냐? 둘째로 건강 하냐 ? 셋째로 생활력이 있고 건실하냐? 마지막으로 연애를 했다니 속궁합도 맞느냐? 이 네 가지가 다 충족된다면 결혼하고 그중 충족되지 않는 것이 한가지 만 있어도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이 네 가지가 모두 충족된다고 해서 결국 집안에서 결혼을 승낙했다.
결혼 후 매제는 나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연령도 비슷하고 주량도 비슷하여 자주 찾아 왔다.
나로서는 좋지만 올 때마다 술이며 고기를 사들고 오기에 이렇게 마음이 헤퍼 가지고는 그만큼 생활 안정이 늦어지는 지라 독립심과 경쟁심을 유발시킬 목적으로 따끔한 충고를 한 것이다.
“매부 이제 우리 집은 그만 드나들게. 지금까지 왕래한 것으로도 인사는 충분하니 더 이상 시간과 돈을 낭비 할 필요가 없네. 지금부터 이를 악물고 열심히 돈을 모아 나보다 더 부자가 된 다음 찾아오면 내 기꺼이 맞이하겠네!”
그 후 매제는 열심히 살았다. 집안의 애경사에서 가끔씩 만나기는 하지만 나를 보기 위해서 별도로 시간을 내지는 안았다. 죽기 3주일 전 형제 친목계에서 만났을 때 단독주택을 계약했다고 자랑했고 나는 대단한 일을 했다고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건만 그 집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죽은 것이다.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만일 매제가 집을 계약하지 않았다면 발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매제의 운에 자기 집이 없는데 집을 마련하니 명을 달리 한 것이라고. 다행이 생명보험과 그 집으로 여동생과 생질녀 세시는 그런 대로 큰 어려움 없이 생활을 하고 있다.
다음은 집안의 종손이기도 한 재종질(7촌 조카)은 나보다 한 살 위인데 술 중독증에 걸려 87년 44세의 나이에 간 경화로 죽었으니 남은 가족(부인과 딸만 4명)은 불행의 연속이다.
숙부님은 75년 52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재종형 한 분은 98년 61세로 돌아가셨지만 교통사고를 당해 7년간을 병고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말이 칠 년이지 본인에게는 지옥 이였을 것이며 간병하는 가족들의 고통 또한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재종제 하나는 정보통신부의 사무관인데 혈압이 높아 오래 살려면 한직으로 빠져 건강을 돌보는 게 우선 이라고 내가 충고까지 했건만 서기관 진급에 대한 욕심으로 업무에 만 정진하다가 결국 98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벌써 10개월 째 거동을 못하고 병원에 누워 있다. 본인과 가족이 열성적인 불교 신자로서 자신의 소원을 부처님께 수없이 기도했을 것인데 본인의 명은 생각 치를 못했을 것이다. 동생은 그의 종형(위에서 언급)의 부고를 접하고 피곤한 몸으로 장례에 참석한 후 직장 업무 때문에 발인은 못보고 상경하여 출근을 했는데 종형 삼우제 날 쓰러진 것이다. 집안에서는 상문 살이 들었다고 무당 한데 가서 궂을 하고 법당에서는 천도 제를 올리는 등 노력을 다했다. 그 덕인지는 몰라도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숨골에 출혈이 생기면 90%는 죽는다고 한다. 다행인지 몰라도 병원 가까운 곳에서 쓰러져 신속히 입원 응급조치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도 죽지 않은 것이다. 숨골의 지름이 약 3cm 정도인데 거의 피가 찾고 테두리 부분 2mm정도가 남아있었는데 이것으로 목숨이 붙어 있다고 했다. 숨골이기에 수술은 할 수 없고 오직 약으로 서서히 희석시켜 가야 한다고 했는데 10개월이 지난 지금도 식사는 고사하고 말과 거동을 못한다. 한 마디로 의식만 있는 것이다. 동생이 언제 치유될는지는 아무도 예측을 못한다. 동생이야말로 직장 하나만 바라보고 열심히 살았지만 이렇게 쓰러지고 나니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남은 가족에게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동생을 보면 정말로 인생이 허무하다.
지금까지 내 주변의 친족들에 대한 병상일지를 음미해 보면서 나는 정말로 축복 받은 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네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살아났기 때문에 현재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를 아니 할 수 가 없다. 그리고 양약 보다 한약을 더 신뢰한다.
인명은 재천이라 사람이 나고 죽음은 하늘의 뜻이니 생 자체에 연연하지 말고 하루를 살더라도 보람된, 가치 있는. 즐거운 삶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값진 인생을 살아가는 정도라고 주장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1999년 9월 30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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