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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및 기행문

성도,구채구,황룡, 낙산대불 관광 기행문(2)

2007년 9월 18일 화요일 맑음.

05:30 모닝콜

06:00 호텔 뷔페식 식사

우리가 일행보다는 조금 일찍 식당에 나려 왔고 빈자리가 상당히 보여 좌석을 잡지 않고 접시를 들고 뷔페식으로 나온 음식을 담으려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식당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나도 음식 담기를 포기하고 먼저 집사람 것 까지 좌석2개를 잡고 앉았다.

우리 식탁에 음식접시를 놓아두고 더 먹을 음식을 가지려 간 사이 그 옆 중국 일행 식탁에 의자가 부족하다고 먹고 있는 자리 의자를 가지고 간다. 나한데 물었지만 못 알아들으니 가만히 있었고 그 자리 주인도 중국 여자인데 돌아오자 그들과 언쟁을 벌린다.

좌석이 식사인원에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자리다툼은 당연한 것이고 , 배식 순서도 줄서는 놈은 바보다 , 언제 음식을 챙길지 답답하다. 또한 만두 같은 음식은 나오자마자 동이 난다. 중국인들의 끼어들기로 질서는 무너지고 메뉴도 부실하고 량도 부족하여 먹을 것이 없다. 일부 서서 먹는 사람도 있고 . 좌석에서 일어나면 그 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식탁 청소도 안 된 상태에서 줄달아 취식해야 했다. 식사분위기 및 식당 운영 방법은 정말 개판이다. 식당 수용인원을 고려하여 각 여행사 별로 식사시간이 할당되었어야 했다.

집사람이 눈치껏 음식을 가져온 바람에 대충 식사를 때운다.


07:10 호텔 출발


10분전에 주차장으로 나오니 작일 그 많던 버스가 다 어디가고 4,5대 정도만 남아 있어 아주 한산 해 보인다. 우리가 묶는 호텔에도 공연장이 있다 하던데 아무래도 공연을 보기 위해 왔던 차들 같다.

영상 4도 인데 추위가 대단하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히터를 틀라 하지만 추위를 주체치 못한다. 옷을 준비 안한 가이드와 울산 아줌마가 개 떨듯 한다.

우리는 기상하여 가이드의 안내대로 초겨울 내복과 등산용 잠바까지 챙겨 입었다. 그래도 추위를 느낄 정도인데 울산 아줌마는 그렇다 치고 가이드는 왜 옷을 준비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울산 아줌마는 집사람이 추가로 준비한 등산 조끼 빌려준다.

버스는 출발하였고 해발 2000고지에 있는 구채구를 향해 계속 고개 길을 나려 간다.

처음 20여 분 정도는 평지 길을 달린다. 고원의 평지 인 셈이다. 도로 옆에 농경지도 있고 향후 발전전망을 보고 새로 짓고 있는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이곳 역시 하천이 있는데 하천 바로 옆에 1미터도 높지 않은 모래밭에 연립주택을 짓고 있다. 비가 100미리만 와도 하천이 넘치며 집을 덮칠 것 같은데 집을 짓다니 , 이런 고지대에 일 년 내내 정말로 비가 오지 않는 단 말인지? 그러하니 집을 짓겠지…….

버스가 내리막 경사를 나려가며 장시간 브레이크를 밟다 보면 열이 발생하기에 이를 냉각시키기 위해 물탱크에 물을 받아 브레이크를 밟을 때 마다 계속 물을 뿌려 주는데(우리나라 차에는 없음) 물을 공급받으려 하니 물이 얼어서 급수가 안 된다 한다. 버스는 그냥 출발 한다. 다음 가수시설이 얼마나 되는지? 그곳까지 브레이크가 파열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10여분을 달려 나려가니 다시 급수장소가 있어 그곳에서 급수하고 나려 간다.

급경사를 계속나려 가는 노면에는 하행 차량들이 뿌린 물이 흥건하다. 저것이 얼어 차가 미끄러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생긴다. 차들의 행령이 왕복 차선 모두 빈번하다. 한국의 명절시 귀성행렬 같다.

이 와중에도 추월차량은 많았고 아주 위험하게 추월한다.

이곳에 관광객이 많기는 많은 가 보다. 하루에 3만 명 정도라니 버스 한 대에 30명이 탄다면 1, 000대 정도인데 왕래 차량으로 봐서는 천대도 넘을 상 싶다.


구채구 방향에도 아홉 굽이 급경사가 있다. 번호가 위에서부터 시작된다. 정상을 기준으로 번호가 부여 된 모양이다.

고원지대이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일부 단풍도 지기 시작하는데 어떤 활엽수와 침엽수는 오뉴월 초봄같이 연둣빛 녹음을 자랑하는 듯 새벽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정말 신기하다.

이정표에 구채 천국이란 표기도 있는 데 반대방향 출구라고 한다.


08:50 구채구 주차장 도착


호텔 , 식탁. 쇼핑센터, 기념품 매장을 비롯한 시설들이 상당하고 주장과 도로가에 정차한 버스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곳에서 매표소까지 10여분 걸어 들어간다. 길이 뻑뻑하게 밀려들어간다.

매표소 앞에 기다리는 관광객이 한 눈에 수 천 명은 될 상 싶다.

20여분을 기다리니 가이드가 입장권을 구입해 왔다. 그 많은 군중 속에서 신기하게 빨리도 구입을 했다. 다행이다.

입구에서는 입장표에 바코드가 있어 전자 체킹을 한다. 많이 개선된 입장이다.

입장 후 셔틀버스를 타기위해 준비된 통로를 따라 군중이 다섯줄로 늘어서서 밀려들어간다.

셔틀 버스도 줄달아 도착하여 탑승시간은 그리 오래 지체되지 않았다.

10월이면 일일 입장객이 4만을 넘는다는데 그때는 어떨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09:30: 11:20 구채구 1,2코스 관광


구채구는 성도에서 북쪽으로 430KM 떨어진 민산산맥 남쪽에 있다. 해발 3000~4000m의 고지에 있는 구채구의 수정같이 맑은 물과 호수, 폭포 그리고 산에서 호수까지 내리 깔리는 운해가 장관이다.

하여 인간 선경이요, 동화의 세계라고 칭송 할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구채구란 명칭은 장족 마을이 아홉 개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이곳에는 바다가 없어 백성들은 파란 바다가 생겨나길 소원 했는데 하늘의 선녀가 이들을 위해 파란 하늘과 구름과 바람으로 바다가 같은 거울을 만들어 놓았는데 산속에 악마가 이를 시기하고 하늘로 올라가 훼방을 놓으며 이 거울을 깨트렸고 이거울이 땅에 떨어져 아홉 개의 바다 같은 호수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계곡 곳곳에 바닷물 같은 호수들이 많다.

또한 평편하면서도 약간의 경사진 곳에서는 물들이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돌아 흐른다. 아울러 절벽 같은 급경사에서는 폭포를 이루며 장관을 이룬다.

버스에서는 중국 가이드가 열심히 설명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우리를 안내하는 한국 가이드와도 동행치도 못하다 보니 저것은 호수, 저것은 폭포 그저 사진만 찍을 뿐이다.


물속에서 어찌 나무가 싹이 트고 뿌리를 나릴 수 있었는지 신기하다.

통로는 나무 송판으로 마루를 깔아 설치되어있고 폭이 2미터 정도에 사람들이 4-5줄로 밀려들어간다.

경치 잠깐 보고 앞사람 머리통보고 넘어지지 않을 만큼 중심 잡으며 밀려간다.

도로 옆에 장족 마을이 보인다.

멀리서 보이는 모습은 중국의 전통 기와집 형태의 가옥이다.

이런 마을이 아홉 개가 있어 구채구라 한다 했는데 이곳을 관광지로 개발 하면서 9개 마을을 이곳에 몰라 놓은 것인지 아니면 당초대로 하나의 마을인지 구분할 수는 없지만 집의 외부 색깔로 보아 극히 최근에 지어 진 듯하다. 시야에 논경지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생활상은 뻔하다. 고랭지에서 옥수수 농사와 산초 그리고 목축으로 연명하였을 것인데 그런 이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것도 좋은 관광코스일 듯 한데 신선들의 놀이터만을 부각하는 듯 하여 아쉽다.


11:20-12:20 중식

당초 3.4코스까지 관광 한 후 중식을 하려 하였으나 시간이 지체되어 중식을 당겨 먹는 다고 하였다.

대형 식당 한곳인데 급수별로 칸이 나누워 저 있다.

우리는 제일 염가인 40위엔 짜리 뷔페식당으로 들어갔다. 60위엔.80위엔, 800위엔. 900위엔 짜리

식당으로 나눠졌는데 8, 900위엔짜리 식사는 어떤 것이지 궁금하다.

식사를 마치고 가운데 있는 기념품 매장에서 관광홍보용 사계절 사진을 보기위해 CD(25위엔)를 구입했다. 영어가 통용되지 않는다. 한국 돈 , 딸라 , 실랑이 하다 중국 인민폐로 구입했다.

주차장에 나와 담배를 피우려니 주머니에 담배가 없다. 반 갑 이상 남았고 식사 전에 피웠던 담배가 어디 갔는가? 아무래도 CD를 구입할 때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았나 싶다.




12:30-16:30 오후 관광

관광코스가 “Y“자 형이란다. 갈라지는 곳에서 중식을 했고 먼저 좌측 코스 끝까지 버스가 올라가 전망대에서 장해를 본 후 버스를 타고 나려와 중간에서 한 코스(오채지)를 더 구경하고 다시 버스를 탑승하고 식당을 경유 우측 정점까지 올라가서 하차 호수를 관광하고 돌아 내려오면서 두 번 더 바꿔 타고 호수를 관광 한 후 마지막에 진주탄 폭포를 관광한 후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출구까지 나려온다.


중국인과 같이 버스를 탑승하기에 중국 가이드가 중국말로 관광 안내를 하지만 우리에겐 소귀에 경 읽기고 버스에서 나려 현장을 관광하드래도 한국 가이드가 옆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그저 사진 찍기에 바빠 그들과 같이 할 수 없다 보니 이름 모를 호수와 폭포수의 경관에 탄복만 하고 움직일 뿐이다.

이렇게 셔틀버스로 관광을 해도 하루가 걸리는데 걸어서 이곳에서 숙박을 해 가며 휴양과 관광을 겸 한다면 정말 좋을 상 싶다.


<참고 자료4.>

가. 구채구(九寨溝) 풍경구

구채구는 성도에서 북쪽으로 430KM 떨어진 민산산맥 남쪽에 있다. 해발 3000-4000m 의 고지에 있는 인간 선경, 동화의 세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92년 유네스코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구채구는 현재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에게도 가장 선호받고 있는 관광지로 급부상하고 있습니다. 신선이 노는 아름다운 '물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빼어난 연못, 호수, 폭포 등은 이미 많은 영화의 촬영장소로도 그 자태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구채구의 물을 보고나면 다른 물을 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비취빛 영롱한 물은 구채구를 대표하는 미경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계곡입구부터 5km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호수가 연이어 펼쳐진 "수정구"코스

-티베트 어로 웅장하다는 의미의 "낙일랑 폭포"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화화해 (火花海)

-호수 밑에 용이 있다는 와룡해(臥龍海) 등 관광

-수정폭포 , 서우해, 갈대호

▶측차와구코스 : 수심 40m의 구채구에서 가장 큰 호수 "장해 (長海)"

한 호수에서 다섯 가지 영롱한 색이 뿜어 나오는 오채지 관광

▶맑고 깨끗한 각양각색의 호수가 펼쳐지는 "일축구 (日則溝 區段)“코스

-구채구의 산과 하늘이 거울처럼 비치는 "거울호수(鏡海)"

-전죽해, 편더포, 공작새호, 진주탄 폭포 등 관광



17:30 하산 완료.

가이드의 마사지 세일에서 문제의 세 여자들이 전신 마사지 3만원을 1만원에 하자고 흥정을 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민망하다. 어제 발마사지 시 1만원에 전신마사지 하라 할 때는 안하고 오늘 마사지 기술이 그곳보다 좋다는 곳에서 다시 만원에 하자고 억지를 부리는 데는 가히 손을 들어야 할 판이다.

참다못해 내가 “ 아줌마 가이드가 도저히 안 된다고 하잖아요. 하고 싶으면 그냥 하시고 비싸면 안하시면 될 것 아니에요” 라고 한마디 했더니 옆에서 맞는 말씀이시네요 하니 여자들의 극성이 쑥 들어갔다.

의견 종합이 안 되니 희망자만 하기로 최종 결정 났다.


18:00: 하여 결국 3명만 전신 마사지 하고 잔여인원은 휴게실에서 대기하기로 하고 일부 남자들은 마사지 룸까지 가지를 않고 도로가 상점 앞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맥주를 사려 하였으나 냉동된 캔 맥주가 없고 값도 2,000원을 달라 하여 포기하고 준비해온 방배동에서 오신 분의 술을 마셨다.

마사지 하우스까지 오는 길에 기념품 매장에서 나는 담배 한 갑에 20위엔(2,600원)에 구입 했는데 가이드가 나보고 바가지 썼다 한다.

안산 집의 안부를 확인 차 세입자에게 집 전화와 핸드폰 전화를 중식 때부터 통화를 시도해도 연결에 실패한다는 메시지만 뜨고 연결이 되지 않는다. 다른 친구에게 해 보아도 역시 연결 되지 않아 포기 했다. 하여 술을 마시는 동안 방배동에서 오신분의 핸드폰을 빌려 전화를 하니 연결된다. 통화는 집사람이 했고 사용료 2,000원을 드리니 사양하신다. 내 전화만 로빙설정이 제대로 안 된 듯하다. 스위치 작동에 문제가 있다더니 예상대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다. 통화가 안 되면 중국 AS센터에 신고하라고 되어있으나 그곳도 연결되지 않았다. 전화를 걸지도 않았는데 건전지는 모두 소진 되고 만다. 건전지도 빨리 소진 된다고 하더니 사용시간에 관계없이 건전지가 소진되는데 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19:00 석식(중국식)

20:00- 21:20 파라다이스 호텔 부설 장족 민속쇼 관람.

공연장은 구채구 상업지 인근에 있었다. 규모가 대단하다. 무대넓이도 객석도 서울의 세종문화 회관과 비슷하다. 중국 여행 시마다 보는 민속 쇼인지라 쇼 자체에는 흥미가 없다. 이곳 장족들의 민속쇼라 하는데 이들의 문화와 언어를 모르고 그저 무용수들의 춤만을 보다보니 그 쇼가 그쇼 같을 뿐이기 때문이다.


여행객중 일부는 피곤하여 자는 이도 있다. 이곳은 3만원이고 우리가 묶고 있는 민강원 호텔 쇼는 25,000원이라면서 극장도 크고 공연내용도 볼 것이 많다며 가이드는 이곳을 추천하였지만 우리로서는 비교 할 수도 없고 어차피 율동만 볼 바엔 아무것이나 상관이 없을 것이다.

21:30-23:00 이동 호텔 투숙

피곤하다.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서둘러 잠을 청한다.


2007년 9월 19일 수요일 맑음.


05:30 모닝 콜

06:00 아침식사 (메뉴는 전일과 같고 사람들은 그리 분비지 않았다.)

07:10 호텔 출발

오늘도 갈 길이 멀어 새벽부터 설친다. 우리 팀의 팀장인 이사장이 간밤에 몸살이 나서 아침 식사도 못하였다 한다. 그는 어제 민속 쇼를 보지 않고 개인행동을 하였는데 두 내외가 어디서 무엇을 했기에 남자들 중 제일 젊은(회갑) 나이에 몸살이라니.


07:30-08:00 꿀 매장 쇼핑.

여러 일행이 꿀을 산다. 특히 여자들이 깎아 달라고 야단이다. 깎아주지 않고 덤을 준다한다. 여러 명이 경쟁적으로 가는 것 같다. 가이드가 신나는 가 보다. 젊은 이사장은 24만원 세트(꿀. 화분, 로이알제리) 상품을 남이 살 때는 안사고 뒤늦게 나오면서 15만원 팔라하니 안 판다. 19만원 까지 깎아 주겠다. 하는 것을 안 샀다 한다. 그럼 먼저 산 사람들은 어찌 하란 말인가?


08:00-09:00 4050고지 고개를 넘어 황룡 관광구 주차장 까지 이동.


09:00-09:40 매표대기

관광버스가 정차된 수로 봐서 관광객이 그리 많지 않다. 헌데도 표를 끊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여 주변 사진 몇 장 찍고 나서 그냥 대기해야 했다. 승강장까지 걸어가는 길에도 사람들이 없다.

시간이 빨라 그런 것 같다. 일일 3만이면 관광버스와 대기자들이 바글바글 해야 하고 어제 오후 들어올 때 본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중국 관광객은 여기를 아마도 오후에 오는 가 보다.

케이블카 탑승입구에도 지체 없이 들어간다. 다행이다.


09:50-10:00 케이블카 탑승


2006년 8월 새롭게 오픈한 황룡 케이블카는 황룡입구에서부터 탑승하여 해발 3000고지까지 약 2000m(운행시간 약 5분)정도를 운행한단다.

앞뒤로 4명씩 8명이 탑승한다. 리프트 식으로 100여 미터 ,1분 간격으로 줄달아 오기 때문에 탑승하기는 수월하다. 집사람은 상승방향에 등을 지고 앉았고 나는 상승방향으로 향해 앉았는데 케이블카 궤도 주변에 별 볼거리가 없어 집사람이 앉은 좌석에서 건너편 산을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은 자리 같다. 탑승시간은 10여분 정도이다. 6,70도의 급경사로 상승하는 산 아래는 나무가 간벌되어 있고 주변에 기암괴석이 없어 타 지역(황석채 ,천자산, 황산, 구향동굴 등)에 비해 너무 단조롭다.




10:00-12:00 황룡 풍경구 관광.

하늘에서 비행기로 나려다 보면 이곳 산세가 황룡을 닮았다 하여 황룡이라 한다고 가이드는 설명했지만 이는 잘못 설명이다.

비행기 이전에 붙여진 지명일 것이고 다만 앞산에서 황룡풍경구의 모습을 보면 노란 석회석 지표면 위에 물이 흐르니 용이 승천하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지명일 것이다.

등, 하산 로가 대부분 나무송판 마루로 시공되어있어 걷는데 불편은 없다. 등산하기는 수월 하지만 자연적인 맛이 없어 조금은 아쉽기도 하다.

나무 송판에 부식방지용 도색이 되어있지 않았다. 일부러 안 한 것인지? 돈과 시간이 없어 그런 것인지? 길만 따라 가면 되니 해외 관광객들에게는 길 잃어버릴 염려는 없겠다.

케이블카 승강장에서 나려 완만한 내리막 경사로 좌측으로 정상에서 나려오는 능선을 끼고 돌아 내려가면서 건너편의 설보정을 바라보고 또한 우측 계곡은 주차장에서 도보로 올라오는 등산로가 보이고 정상으로부터 흘러 나려오는 하천물들이 수반 같은 수많은 작은 연못을 넘어 물이 흐르고 있다. 산위에서 나려다 보는 물의 색깔이 다양하다. 파란색, 노란색, 하얀색 등등이다. 우리는 저 길로 하산한다고 하니

하산하면서 관광이 되겠다.

30여분을 길 따라 내려가니 걸어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고 이곳에서 정상방향으로 황룡 고사 및 오채지에 오르는 길이 “ㅢ“자 모양으로 연결된다. 오채지 까지 거리도 500여 미터로 그리 멀지도 않고 등산로 경사도 완만해 보인다. 유치원생도, 80대 노파도 등산이 가능하겠다. 이곳이 해발 3000여 미터고 오채지는 3300미터라고 하는데 고지대에 있는 호흡곤란 증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관광객 대부분이 산소 통을 사용치 않고 있다. 기관지나 심장이 극히 안 좋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산소통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오채지 형상과 같은 모습이다. 수많은 석회석 수반 모양이다. 꼭 뚝 높이가 사람이 공사를 한 듯 높이가 일정하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하다. 쟁반 같은 호수의 깊이에 의거 깊으면 파란색이고 얕으면 하얀색 내지 배지색이다.

여기에 나뭇잎 이 투영되고 단풍이 들면 더더욱 원색과 반사색이 너무 너무 아름답다. 하여 천국의 선남선녀들의 연령별 개인 별 수영장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지 .......

이곳 역시 풀 장안에 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나무의 수령으로 보아서는 몇 십 년 내외인데 어찌 싹이 터서 자라게 되었는지 신기할 뿐이다.

이곳 해발 3500고산지 제일 상부에 후사, 오채지 옆에 고사 ,하산 길 중간에 중사가 있는데 사찰의 역사나 규모는 타 사찰과 비슷한 수준이나 신도가 없어 그런지 관리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부분 한국의 사찰들은 건물 내 외부를 빈번히 도색을 하여 살아있는 느낌인데 이곳은 도색상태가 오래 되어 낡은 사찰 같은 느낌을 같게 한다.

신도가 적어서인가? 아니면 고찰같이 보이기 위함인가? 대웅전에 예불하는 관광객도 그리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고산지대라 주민도 별로 없을 것이고 멀리서 예불 오는 것도 그리 기대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스님들이 신천지에서 오직 도를 닦기 위해서, 이절들을 창건하였을 것으로 추산되지만 재목외의 건축자제들은 멀리서 이송해 와야 하는데 어찌 창건하였는지 놀라울 뿐이다. 세계도처에서 불가사이 한 인간의 무궁무진 한 창조력에 감탄하지만 이곳에서도 그 작은 일면을 또 대하면서 숙연해 진다.

마지막으로 이곳에도 분산형 폭포가 있다. 구채구의 진주탄 폭포와 유사하니 그만 논하기로 하자.

<참고 자료5.>

가. 황룡(黃龍) 풍경구

황룡(黃龍)은 중국 사천성 3,500m 고산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자연 유산" 입니다.

계곡 입구로 부터 5km에 걸쳐 그 크기와 색채가 다양한 3,400여개의 호수가 관광객들의 경탄을 자아내고 있는 고산 계단식 석회암층 연못입니다

석회암 지대에 에메랄드빛의 물이 층층이 고인 모습은 자연의 신비로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황룡의 채지는 파란색, 노란색, 하얀색을 발하며 층층의 테라스를 이루고 있으며, 이 연못들은 형태가 특이하고 빛깔이 현란해서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풍경구의 복판에 황룡중사(黃龍中寺: 불교 사원), 맨 안쪽에 황룡후사(黃龍後寺: 도교 宮觀) 가 있고, 설보정을 배후로 한 광경은 다 같이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리고 황룡후사의 배후에 펼쳐진 400여의 채지군(彩池群: 색깔을 띤 연못의 무리) 이 전 황룡의 정화(精華)라고도 할 만한 석탑진해(石塔鎭海)이다. 여기까지 줄곧 압도당하여 보아온 온갖 물 구경이 사실은 서막에 지나지 않았다고까지 여겨지는 아름다운 연못가에 '인간요지(人間瑤池: 이승의 선경)'라는 석비(石碑)가 있다. 황룡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은 없다.

구채구와 더불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황룡 풍경구는 구채구 공항에서 약 1시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한 카르스트지형입니다. 에메랄드 빛의 푸르고 투명한 연못이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2006년 8월 황룡케이블카의 완공으로 관광객에게 더욱 편안하고 여유로운 관광일정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절벽에 생성된 석회암동굴 "세신동(洗身洞)"

▶10개의 석회암 연못으로 오래된 나무가 잠겨서 기이한 풍경을 이루는 "분경지(盆景池)"

▶황룡 풍경구의 중심 사원 "황룡고사"

▶5,588m 에 이르는 웅장한 황룡의 주봉 "설보정" 조망

▶에메랄드빛의 환상적인 석회암 연못으로 총 길이가 7.5km, 그 수가 3,400여개나 되는 "오채지"


▶계곡 굽이굽이가 웅장한 "단운협" 협곡 관광 (차창관광)


13:00-14:00 중식

인산, 인해 우리가 일등으로 하산한 터라 뒤처진 일행들을 기다려야 하고 식당의 예약 좌석도 안 비어 있어 식당 내외를 어슬렁거리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커피숍에 빈 의자는 있지만 자릿세를 내야 한다기에 무턱대고 앉아있을 수도 없다. 기다리다 못해 식당에서 맥주 한 병을 10위엔에 구입 혼자 빈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데 일본 가이드가 와서 자기네 예약석이라기에 일어서야 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려 예약석이 났다. 준비해온 반찬이 버스에 실려 있어 중국요리로만 식사를 했다. 습관화 되어 먹을 만하다.


14:12 황룡 출발

오래지 않아 12굽이 급경사 하산 길을 지났다.

그로부터 차는 계곡 한 방향(우측이 강변)으로 굽이굽이 돌고 돌면서 하산한다.

티베트 국경지대에서 성도 방향으로 가는 것이니까 버스는 전체적으로 북서쪽에서 동남쪽으로 달리는 셈이다. 따라서 계곡의 물도 동남쪽으로 흐르는 것일 것이다.

이 길이 단운협 계곡인지는 모르겠으나 다리를 건너는 것도 없고 굴을 통과하거나 작은 고개 길을 넘는 법도 없다. 버스로 네 시간 정도 달리는 긴 계곡이다.

운행방향 좌측이 바위산이고 인도나 대피소가 없는 왕복 2차선 시멘트 포장도로이다. 하여 승차감도 좋지 않고 급커브 길에서 대행 차 와 충돌우려도 있고 승객들의 몸도 많이 흔들려 눈 감고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다.


16:40 일차 휴식

용변이 급해 우리가 요청 하여 20여분을 달려 주유소에 정차하고 아울러 주유까지 했다. 주변의 주거시설이 몇 개 되지 않은데 주유소는 규모가 상당히 크다. 구채구에 왕래하는 관광차량들에게 주유를 하기위한 시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건너편 높은 산 경사면에는 옥수수 밭이 보인다. 그곳까지 맨몸으로 올라가라 해도 죽을 지경일 진데 농사를 짓는다니…….


18:00 2차 휴식

다리를 건너면서 주유소가 있고 물을 급수하기 위해 정차한다. 들어갈 때도 쉬던 곳이다.

이곳에서 부터는 도로가 강변 우측 경사를 따라 달리고 중간에 비포장 구간이 있어 먼지와 털털거림, 추월 시 불안함과 짜증의 연속이다. 운전기사가 그래도 운전을 잘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짜증도 부리지 않고 중국인의 태성일 것이다.


19:30 이백 호텔 도착 석식

구채구에서 이곳 강유까지 270여 킬로를 온 셈이다. 성도까지 180여 키로 남은 가 본데 이곳부터는 평지이고 평야지대를 운행한다.

버섯요리 식사인데 15가지의 요리지만 입에 맞는 몇 가지만 준비해온 고추장과 함께 먹었다.

가이드가 고량주 한 병과 맥주는 무제한 마시라고 한다. 꿀에서 수입이 짭짤했나 보다.


20:30 출발

성도로 가는 고속도로가 공사 중이어서 국도로 돌아간단다. 면양에서 국도로 접어들었는데 이곳도 로면 상태가 엉망이다. 왕복 1차선이고 도로가 파인 부분이 많아 국도상의 정상 속도도 유지 할 수가 없고 대형 화물차들이 서행하다 보니 이들 차를 추월해야 하는데 반대차선에 차가 없으면 앞서 가는 화물차가 추월선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뒤따르던 승용차가 먼저 우리차를 추월하기도 하고 멀리 마주 오는 차의 불이 보이는데도 추월 하다 보니 부듯 칠 듯이 추월이 끝나고 불안해서 문을 감을 수가 없다.

이 와중에도 혼자 온 여자 3명은 자기네끼리 주고받은 유머를 떠올리며 차가 떠나 갈 듯이 웃질 않나 마이클 잡고 노래를 부르자고 선동을 하지 않나 카오디오를 틀고 흔들자고 하지를 않나 가관인데 일행 아무도 그녀들을 제제 하지를 않는다.

바로 내 뒷좌석에 앉아있는데 나는 피곤하여 그냥 조용히 쉬고 싶은데 그녀들은 여기가 그녀들만의 임대 관광차 인 듯 설쳐대는 모습이 속에는 거슬리지만 그녀들도 여행을 왔고 이를 즐기고자 하는 터라 참아 제제하기는 심한 것 같아(집사람의 강한 자제 요청도 있고 해서) 나도 참기로 하였다.


23:30 성도 가든 시티 호텔 도착 투속

각자 운반키로 한 가방들을 벨 보이가 챙겨 싣는다. 가이드의 상이 일그러진다.

벨 보이는 팁을 의식한 것이고 짐이 늦게 배달되면 가이드의 호별 점검시간이 지체되기 때문일 것이다.


2007년 9월 20일 목요일 맑음.


07:00 모닝콜을 하기로 하였는데 모닝콜이 없다.

집사람은 한국에서 하던 습관대로 05:30에 일어나 샤워하고 짐 정리하고 나를 깨웠고 모닝콜에 관계없이 07:10에 식당으로 나려 가 식사를 마쳤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나려 왔더니 일행은 보이지 않고 좌석도 많이 남아 있다.

식사는 첫날과 마찬 가지라 간단히 계란 과 만두 과일 우유와 콘플라이트로 속만 채운다.

08:10 짐을 모두 챙겨 프론트로 나려 가니 가이드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일번이다.

열쇠를 넘기고 밖으로 나왔다. 첫날 보다 늦게 출발 하니 밝은 일조권아래서 성도 도시전경을 촬영하기위해 밖으로 나가니 약간의 안개가 있어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사진 몇 장을 찌고 안으로 들어오니 가이드가 버스에 탑승하란다. 08:30이 지났는데도 3명이 보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온 이사장 부부와 울산 아줌마이다. 모닝콜을 안했다고 해도 이 시간 까지 잠들어 있지는 않을 상 싶은데 혹시나 병이 난 것은 아닌지……. 09:05분 이사장 부부는 탑승하였고 09:10에 울산 아줌마 탑승한다. 자기는 09:10에 출발 하는 줄 알았다나. 정말 뻔뻔하다. 이어서 일행 중 제일 젊은 이사장이 가이드에게 항의를 한다. 왜 모닝콜을 안했냐는 것이다. 호텔에서 컴퓨터의 착오가 있었다고 한다. 식사시간에 미리 와서 자기들이 보이지 않으면 전화를 해야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말이 심하다. 우리가 식사를 하고 다시 룸으로 돌아올 때까지 가이드는 식당에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없는 골방이었다고 하지만 통로에서 사람들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시계는 안 보았는지, 콜만 기다리고……. 습관적으로 모두가 일어났을 시간에 둘이서 무었을 했는지, 30여명이 콜 없이도 다 나왔는데……. 자신의 실수를 가이드의 실수로 몰아붙이는 이사장이 참으로 뻔뻔스럽다. 건축 사업을 한다더니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는데 이력이 난가 보다. 또한 너무 음성을 높여 짜증스럽다. 참다못한 최고참에 그만하라고 일침을 놓아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아침을 못 먹었다기에 각자가 지참했던 아침 밥상에 나왔던 과일, 삶은 계란은 나눠주니 이를 먹으면서 조용해 졌다.


09:10-11:30 성도에서 낙산대불 선착장까지 이동.

성도에서 낙산까지 고속도로이고 로면 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구간 과속 단속 시스템이 설치되어있어 결코 과속을 할 수가 없단다. 톨게이트에 진입한 차와 시간이 인식되고 나갈 때 시간이 체크되어 법정시간 보다 빠르면 과속으로 자동 고발된다고 한다. 한국도 아직 설치가 안 되었는데 이곳 중국 사천성에 설치되었다니 대단한 발전이다. 하여 일부 젊은 층이 과속으로 달리다가 중간 노견(휴식장소)에 정차하여 시간을 맞추기 위해 담배를 피우거나 휴식을 취하며 일부러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우리도 이 시스템이 설치되면 저런 현상이 더더욱 많아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도로주변의 농경지는 평지이고 경지정리작업이 안된 상태임.


11:30- 12:00 유람선 타고 낙산 대불 관광


선착장 강 건너 앞 1.5키로 지점에 야트막한 산이 보인다. 그곳에 낙산대불이 있단다.

선착장에는 소형 관광선이 여러 척이 정박해 있다. 우리가 탄 관광선도 좌석으로 보면 3,40명이 탈 수 있는 배이지만 노랑풍선 관광객만 탄 듯하다. 우리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객실에 앉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배를 타고 5분정도에 이를 거리다. 민강의 물이 급하게 흐른다. 청의강과 대도하강이 건너편에서 합류하여 낙산 대불 바로 앞에서 민강과 합류하는데 그쪽의 물빛은 청색에 가깝고 이곳 민강 물은 황색에 가깝다.

그래도 청색의 강물이 주류를 이루는 듯 황색물이 합수하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다. 청색강의 유속이 더 세기 때문일 것이다.

낙산대불을 조각한 바위는 황토 흙이 바위가 된 암석이다.

이를 깎아서 파내고 조각하는데 90여년이 걸렸다 한다.

이곳은 3개강이 합수하는 곳이다. 하여 배들의 침몰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이는 강 속에 있는 용의 장난이기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곳에 불상을 세워야 한다고 한 스님이 생각하고 시주에 전념하면서 많은 돈이 모금 되었는데 이곳 지방행정관이 이 소식을 듣고 이 돈이 탐나서 스님에게 그 돈을 달라고 하였던 바 이 돈은 이곳에 왕래하는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돈이니 자신의 눈을 뽑아 줄지언정 시주 돈은 줄 수 없다고 하자 지방 행정관은 어기장의 심정으로 그렇다면 눈알을 달라고 하자 스님은 거침이 없이 즉석에서 눈을 자신의 손으로 뽑아 행정과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에 감복한 지방행정관은 더 많은 시주 돈을 모아 그 스님에게 헌납하였고 그 스님의 생애30여년에 걸쳐 공사를 하였지만 어깨 위 부분까지만 시공 되었다 한다. 그 후 30여년에 걸쳐 몸통이 시공되고 다시 30여년에 걸쳐 다리와 발까지 시공 될 정도로 장기간에 걸친 공정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역광이라 사진이 잘 나올 것 같지 않아 여러 장을 찍어 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돌아오는 선상에서 낙산대불이 있는 산을 잘 보라고 가이드가 말한다.

저산의 모습이 부처님이 누워계신 모습이라 하여 와불 이라고 한다고 했다.


<참고 자료6.>

가.낙산대불:

- 성도에서 남서쪽으로 162km 민강, 청의강, 대도하 세개의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

- 합수지점의 빈번한 좌초사고를 예방하기위해 당나라 때 713년 해통 스님이 공사 (90년 3대에 걸친 공사, 초대 때 스님의 눈알을 빼 의지를 보였고 초대 때 어깨까지, 2대시 중간 3대째 발 까지 공사)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으로 71m의 세계최대 마애석불.

- 귀 길이가 7m (사람 키의 3배도 더되고) 머리길이가 10m. 어깨넓이가 28m 발의 넓이가 5.5m 로 발위에 100명 올라 설수 있다 한다.

- 공사 당시는 금분으로 채색되었고 이를 보존하기위해 누각까지 시공되었으나 누각은 명나라 말기 불타 없어졌다 한다.


12:00-13:00 선착장 옆 식당에서 중식

13:00-15:30 성도시내로 이동

방배동에서 오신 분이 첫인상은 환자같이 보였는데 뒷좌석에서 앞에 앉은 나에게 와서 자기 노래라며 CD 판 1개를 선물로 주고 다른 하나는 운전수에 부탁 차내에서 틀게 했다. 테너가수이시구나! 헌데 일고의 설침도 없이 조용히 여행을 마치고 계시구나! 이제 곧 귀국하는 입장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구나! 교회음악과 가곡집이다. 내 느낌은 다른 테너 가수에 비해 음색이 조금은 강하다는 느낌이다. 다른 동행자들도 판을 달라고 하여 나눠 준다. 역시 멋진 분이시다. 몇 곡 듣고 나서 내가 마이크 잡고 그에게 감사의 인사로 박수를 보내고 이어 유머 두 마디를 한 후 내 뒤 줄에 앉은 여자들이 어제 밤 마이크 잡고 싶어 안달하는 것을 본 지라 지금부터 노래를 하던지 유머를 하던지 하라고 마이크를 넘기니 사양한다. 남 잘 때는 시끄럽게 야단이더니 막상 멍석 펴 주니 않겠단다. (중간에 주유소 용변 및 휴식)


15:30-16;00 실크 매장 쇼핑

실크는 소주, 항주가 주산지이고 이곳은 대리점이란다. 실크역시 중국을 여러 번 여행한 우리들에게는 관심 밖의 물건이다. 스카프 하나 사고 일행 아무도 안 삼.


17:00- 18:20 무후사 및 인접 금리거리 관광

무후사는 삼국지의 유비현덕과 제갈량의 묘가 안치된 사당이다. 유비를 따르던 장수들의 모습과 유비의 1등 전략가인 제갈량과 그 자손들의 모습들이 전시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임금이었던 유비를 앞세워 모셨으나 제갈량을 더 높이 받들어 후원에 정중히 별도로 모서져있다.

지방 정부의 정책에 의해 유지 관리되는 듯 타 기념관이나 전시관에 비해 규모가 작고 소박하다는 느낌이다. 가이드가 장수들의 전공을 설명하지만 삼국지를 대부분 읽은 우리들에게는 그리 감격스러운 스토리가 못된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대리석에 음각하여 전시되는 것과 수석 몇 점 이외 볼 걸이가 너무 없어 아쉽다.


바로 옆에 삼국시대의 거리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는 “금리거리”가 있다. 음식점과 기념품 상점들이 300여 미터 거리 양쪽에 입점하여 있고 테이블을 펼쳐놓고 장사를 노점 상인들도 보인다. 아직 까지 이번 여행의 기념품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 이곳이 마지막이기에 꼭 사야 하는데 관광 기념품( 제갈량 모습)을 구입하려 하니 한국 돈은 받지 않겠단다. 하여 가이드 불렀더니 중국 돈 100위 엔을 지불한다.

가이드는 내게서 한국 돈 1만원만 받는다. 감사할 뿐이다.


<참고자료 6. >

가. 유비 :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 왕(221∼223). 자는 현덕(玄德). 탁군(河北省) 출신.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이며, 중산왕(中山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귀가 컸으며 또한 손을 내리면 손끝이 무릎까지 닿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멍석을 짜서 생계를 유지했다.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같은 고향의 장비(張飛)와 탁군에 망명한 관우(關羽) 등과 손을 잡고 일어났는데 처음에는 직접 지배하는 영토없이 각지의 호족 공손찬(公孫瓚)·도겸(陶謙)·조조(曹操)·원소(袁紹)들 사이를 전전하였다. 조조 밑에 있을 때 조조가 <천하의 영웅은 그대와 나>라고 하자 마침 벼락이 떨어져서 유비가 젓가락을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의탁한 곳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였다. 유표의 밑에서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비육지탄의 푸념을 하는 한편 제갈량(諸葛亮)과 방통(龐統) 등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제갈량에게는 삼고(三顧)의 예를 갖추어 맞이했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면서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후 제갈량은 유비의 모신(謀臣) 또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208년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남하해 오는 조조를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격파하고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기초를 쌓았다. 전쟁 후에 형주를 오(吳)나라와 양분하고, 손권의 누이를 황후로 맞이하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익주(益州;지금의 四川省)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대립했다. 유비는 211년 익주목(牧) 유장(劉璋)의 요청에 의해 촉나라에 들어가 성도(成都)를 공략하여 익주를 차지했다. 이에 손권은 조조와 손잡고 형주에 남아 있던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해 천하는 삼분되었다. 219년 한중왕(漢中王)이 되었고 221년 후한(後漢)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성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한(漢;蜀漢), 연호를 장무(章武)라고 했다. 그는 먼저 관우의 원수를 갚으려고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으나 전황이 불리해지자 영안(永安;白帝城)까지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병으로 죽었다. 임종 때에 <이 아이(後主劉禪)를 살릴 만한 가치가 없으면 그대가 나라를 차지하라>고 제갈량에게 유언했다. 능(陵)은 성도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제갈량의 무후사(武侯祠)가 더욱 유명하다. 시호는 소열제(昭烈帝).


나. 제갈공명: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승상. 양야양도(山東省沂水縣) 출신. 본명이 양(亮)이어서 제갈량이지만 자(字)인 공명(孔明)으로 더욱 유명하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숙부를 따라 형주(荊州;湖北省)에 살면서 밭을 갈고 독서로 소일하며 생활하였는데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당시 형주목사였던 유표(劉表)를 찾아 온 유비(劉備)는 그의 평판을 듣고 207년 제갈량이 사는 곳을 방문, 세번째에 간신히 회견할 수 있었다. 이른바 <삼고의 예(三顧之禮)>에 응한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말하고, 화베이[華北(화북)]를 제압한 조조(曹操)에 대항하여 한(漢)나라 왕실을 부흥하기 위해 강남에 할거하고 있던 손권(孫權)과 연합, 스스로 형주와 익주(益州;四川省)를 확보하여 독립할 것을 권했다. 유비는 이 계략을 기뻐하고 제갈량과 더욱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그 관계가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되었다. 208년 조조군이 남하하고 있을 때 유표가 병사하고 그 아들인 종(琮)이 항복했기 때문에 제갈량은 즉시 유비의 사자로서 손권에게 달려가 동맹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결국 적벽(赤壁)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천하삼분의 계획을 실현하고자 유비는 형주장관이 되고 제갈량도 창사[長沙(장사)] 등 3군(郡)의 감독을 맡았지만 211년 유비가 익주에 들어가 그 지방 장관인 유장(劉璋)과 대립하자 제갈량도 유비를 도와 촉나라에 들어갔고 214년 유비는 청두[成都(성도)]를 점령, 익주장관이 되었다. 221년 촉한(蜀漢)이 성립되어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보좌하였지만, 223년 위독해진 유비는 후사(後事)를 제갈량에게 부탁하고 죽었다. 제갈량은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좌할 것을 맹세하고 드디어 승상으로서 국사를 주재했다. 위(魏)나라로부터 중위안[中原(중원)]을 다시 빼앗아 유씨의 한나라 왕실을 부흥시키기 위해 오(吳)·촉동맹을 굳히고 남쪽으로는 윈난[雲南(운남)] 지역의 이민족을 평정위무하여 후방의 불안을 제거함으로써 물자 보급을 용이하게 한 뒤, 227년부터 위나라에 대한 북벌에 전력을 다했다. 출진에 앞서 유명한 <출사표(出師表)>를 후주에게 올리고 우국충정을 토로한 뒤 7년간을 전쟁터에서 보내고 이따금 관중(關中)에 진출해서 위나라를 위협하기도 했지만 234년 우장위안 근처에서 위나라 장군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던 중 병으로 죽었다. 위와 싸우기 위해 출진할 때 올린 <출사표>와 마속(馬謖)의 일화는 유명하다. 시호는 충무(忠武)·무후(武侯).


18:30-19:30 석식( 삼겹살 솥뚜껑 구이와 된장국 )

삼겹살인데 고기 맛이 한국과 다르다. 솥뚜껑 구이면 맛이 같을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고기를 식용유에 재웠다가 굿는 것처럼 느끼한 맛이 많이 난다. 고소한 맛이 전혀 없다. 육질 자체가 다를 리도 없을 것이고 사료역시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인데 몇 점 먹다가 된장국과 고추장에 쌈으로 식사를 때운다.

19:30-20:00 차 매장 쇼핑

중국에 여행 할 때 마다 들린지라 새로울 것도 없고 가이드가 들려야 한다니 들린다.

차는 아무도 사지 않았다. 가이드에게 미안하다. 출구 옆 한 테이블에서 참깨, 잣, 버섯 등 토산품도 판다. 귀국해서 식용으로 이용되는 참깨와 잣을 많이 산다. 체면 유지는 된 셈이다.

20:30-22;20 변검쇼 관광


처음부터 변검쇼만 하는 줄 알았더니 변검쇼는 맨 나중에 공연된다. 공연 종목이 바뀔 때 마다 아리따운 여자 해설가가 나와서 중국어와 영어로 설명을 하긴 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으니 무슨 의미의 공연인지는 알 수가 없다. 중국어 발레를, 무용가의 율동을, 서커스 단원들의 묘기를 감상할 뿐이다. 인형 춤, 발로 책상 돌리기, 수건돌리기. 접시돌리기, 해금 독주에 이어 마지막에 변검쇼이다. 변검쇼가 한국에서도 방영된 적이 있기에 새로울 것은 없지만 마치 마술을 보는 듯 신기하다.

고개를 좌로 돌렸다가 정면으로 돌아오기까지 0.5초 사이에 손을 대지도 안는 상황에서 얼굴의 가면이 바뀐다. 가면이 5회 정도 바뀌는 것으로 봐서 5겹의 가면을 썼다는 것인데 벗겨진 가면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얼굴에 썼던 여러 겹을 모두 벗고 나면 맨 얼굴이 나온다. 그러다가 다시 또 가면을 쓴다.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가이드에 의하면, 한국 방송에서도 본바 있지만 한국의 한 학생이 중국에 와 이곳에서 변겸쇼 스승을 5년 동안이나 수발하며 비법을 배우게 되었지만 벗는 정도만 가르쳐 주었을 뿐 쓰는 비법은 전수 하지 않았다 한다. 스승이 변검쇼를 공연하는 동안에는 결코 전 기술을 전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장인들의 밥줄이니까.... 마지막은 여자들의 무용인데 가이드가 시간이 촉박하다며 일어서잔다.

22:20-22:50 공항으로 이동

22:50-24:00 성도 공항 도착/출국 수속.

참깨 도착 짐 재포장.

성도 공항 출국 세관 신고서 작성( 처음 작성함)

각자가 준비 온 남은 술은 나누워 마심.

어제 가이드에게서 얻은 고량주 한 병 중 남은 량은 희망자가 없다. 종이컵 한 컵 분량을 내가 다 마시면 술이 취해 탑승 수속 시 문제가 생길 것 같아 그냥 버림.

면세점에서 원화는 안 된다 하여 그림 책 두 권(이상훈 사장 것 까지)을 카드(200위엔)로 구입함.

티케팅은 정상적으로 진행됨.

일행 중 나만 좌석이 05번 A 석이다. 1개월 전에 예약되어서 그런지 , 아니면 마일리지 손님을 vip로 보아서 그런지……. 좌석모양은 vip석이 아니다. 한 줄에 3석씩 6석이면 보통석 좌석이다. 승객이 없어 좌석이 텅텅 빈 듯하다.

00:30 성도국제 공항 이륙(15분 지연).

이륙하면서 뒤에 있던 집사람이 옆으로 왔다. 허나 뒤 좌석도 비어 있어 뒤로 가 누워서 잠을 청한다. 나는 술이 취해 누우면 흔들릴 것 같아 앉아서 왔다.

01:30 출발 얼마 안 되어 기내식사가 나왔다.

아침식사를 거를 것에 대비 밥과 고기만 먹었다. 스튜어디스가 인천공항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라고 양식들을 내준다. 술도 취하고 잠이 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천천히 집사람 것 까지 작성 상의 주머니에 넣어 놓고 그러고는 눈을 붙이고 잠을 청하였다. 술기운에 어느 만큼은 잠을 잔 것 같다.


04:30 인천공항 도착

소하물 인도 출구가 05번에서 03번으로 이동 되었다.

세관 앞에서 세관신고서를 찾으니 없다. 다시 작성하려다 생각이 나 티셔츠 상의 주머니에서 꺼내 세관에 제출 하였다. 세관에서는 그냥 통과가 된다. 물어보는 일도 없다. 중국 여행객이고 장사꾼으로는 안 보이는 가 보다.

집사람용 아시아나 마일리지 기록 창구(북쪽 끝)를 찾아가 신고하고 다시 SK통신 창구(거의 남쪽)를 찾아가 로딩설정을 해제시켰다.


05:10 경 리무진 버스 정류장으로 나오니 안산행은 06:10에나 있다 한다.

하여 처음이고 버스와 주행시간과 경비를 비교해 볼 겸 또한 한 시간을 절약하는 것이니 지하철을 타기로 하고 가방을 나누워 끌고 지하철역을 찾아가 05:27분 발 김포행 을 탔다.


06:10 김포 역에서 5호선 환승

06:30 신길 역에서 1호선(수원행) 환승

07:15 금정 에서 4호선 환승

07:30 상록수 역 도착

07:45 택시타고 집에 도착 . 아 피곤하다.



총평

지난 9월 16일부터 9월 21까지 5박 6일 동안 버스이동 조건으로 중국의 서천성에 있는 성도/구채구/황룡/낙산대불 관광은 한마디로 피곤한 여행이었습니다.

지루하고 짜증나고 지치는 여행 일정이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한다면


첫날은 인천공항에서 21:10시에 출발 성도공항에 01:10 도착 01:35에 호텔에 도착함으로서 잠을 놓쳤고


둘째 날은 새벽 05시 30분에 일어나. 07:30에 성도를 출발 구채구까지 450여 킬로를 버스로 이동하면서 오전에 이백기념관광(40여분),중식(1시간) 오후 보은사 관광(20분)하고 18:40 천주사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휴식시간 포함 11시간 정도를 이동하는데 노면이 불량하여 털털거리고 급커브가 많아 흔들리다 보니 조금은 지루하고 짜증 스러웠구요.


셋째 날도 새벽같이 일어나 전 일정을 구채구 관광으로 짜져있지만 구채구 영내에서 구간 코스 이동시 셔틀 버스를 9회나 탑승 하는데 수많은 관광객(1일 3만여 명 입장)이 먼저 타려고 실랑이를 치다보니 가이드는 가이드대로, 관광객은 관광객대로 체면 불구하고 합세해야 하니 양반이 할 짓이 못되는 것 같았습니다. 석식 후 장족 민속 쇼를 관람하고 23:00에 호텔에 도착하고 보니 역시 지치고요


넷째 날 역시 새벽05:30에 일어나 오전에 황룡 관광(2.5시간)을 마치고 14:10 출발 성도에 23:00도착 숙소에 드는 여정도 둘째 날과 꼭 같이 피곤하고 짜증나고 지루한 여정입니다.


다섯째 날은 07:00시에 일어나 08:30 호텔을 출발 두 시간 반 달려 낙산 대불 30분 유람선 관광하고 중식 후 다시 성도로 돌아와 의무 쇼핑 매장 들렸다가, 무후사 관광 (1시간) 마치고 석시 후 변검쑈(1시간 20분)를 끝으로 22:30 공항 도착 24:15 성도 출발.


여섯째 날 04:30 인천도착. 08:30 집 도착.


위와 같이 5일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밤 12시 잠자리에 들기까지 전 일정들이 너무 타이트 하여 수면시간이 부족하고 체력이 달려 대부분 지치게 됩니다. 여행 도중 몸살이 난사람도 있었지만 우리내외는 별 탈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쳤으나 집에 당도하니 입술이 부르트면서 몸살이 나려 합니다. 구채구, 황산, 낙산대불이 세계 자연 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아름다운 경치(대부분 물 구경: 폭포와 호수)이긴 하지만 물 구경을 많이 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소비된 시간과 체력을 감안 한다면 관광성과는 다소 미흡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행 중 한분이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귀국하면 친한 친구에게는 소개해선 안 될 코스이고 미운 친구에게 소개하여 미운만큼 고생 좀 시켜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며칠 푹 쉬어야 피로가 회복될 것 같습니다.

경비사용 내역

일 자 별

구분

달 라($)

위 엔(元)

원 화(원)

07년 08월 17일

마일리지 왕복 항공권 구입

89,700

89,700

08월 20일

예약금

200,000

200,000

07년 09월 12일

잔금입금

809,000

809,000

09월 16일

담 배

2,000

2,000

택 시

5,400

5,400

공항버스

22,000

22,000

09월 17일

침대팁

2,000

2,000

가이드 팁

110

110,000

노루궁댕이

20,000

20,000

전신마사지(2만)

240

20,000

고산약(2만)

20,000

20,000

민속쇼(6만)

70

60,000

09월 18일

침대 팁

1,000

1,000

CD 구입

25

3,350

담배

20

2,600

09월 19일

침대 팁

1,000

1,000

맥 주 한병

10

1,300

실크 앞 팁

1,000

1,000

무후사 기념품

10,000

10,000

참 깨 및 잣

70,000

70,000

그림 책

23(카드)

26,000

09월 20일

택시 요금

2,100

2,100

203

295

1,253,100

1,450,350



<추가 참고 자료 >

가. 이백 (李白 701∼762) :중국 당나라 시인. 자는 태백, 호는 청련거사.

중국 당(唐)나라 시인.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농서군 성기현(成紀縣;지금의 甘肅省 秦安縣 부근) 출신. 두보(杜甫)와 함께 <이두(李杜)>라고 일컬어진다. 두보를 <시성(詩聖)>, 왕유(王維)를 <시불(詩佛)>, 이백은 <시선(詩仙)>이라고 한다. 이 밖에 적선인(謫仙人) 또는 벼슬이름을 따서 이한림(李翰林)이라고도 한다. 25세 때 촉(蜀)나라를 떠나 양쯔강[楊子江(양자강)]을 따라 나와 평생 유랑생활을 했다. 이백은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천재성을 발휘하는 한편 검술을 좋아했다. 젊었을 때 도교(道敎)에 심취하여 선계(仙界)에 대한 동경심을 가졌으며 산 속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환상성(幻想性)은 대부분 도교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며, 산은 그의 시세계의 주요 무대의 하나였다. 촉나라에서 나온 뒤 둥팅호[洞庭湖(동정호)] 주변에서 오(吳)·월(越)나라(지금의 南京·杭州 일대) 등을 주유했고 안육(安陸;지금의 湖北省)에서 원(元)나라 재상 허어사의 손녀딸과 혼인하여 10년간의 세월을 보냈으나, 그 사이에도 가정에 정착하지 못하고 맹호연(孟浩然)·원단구(元丹丘) 등의 시인·도사와 전국을 여행했다. 그 뒤 임성(任城;지금의 山東省)과 남릉(南陵;지금의 安徽省)에 집을 장만했다. 임성에서는 공소부(孔巢父) 등과 추라이산에 은거하면서 <죽계(竹溪)의 육일(六逸)>이라고 하였다. 아내 허씨(許氏)가 죽은 뒤 유씨(劉氏)·송씨(宋氏)와 혼인했으며, 딸 평양(平陽)과 아들 백금(伯禽)을 두었다. 이백은 과거를 보지 않았으나, 현종(玄宗)의 부름을 받아 장안(長安)에 가서 환대를 받고 한림공봉(翰林供奉)이 되었다. 이 1∼2년 동안이 그의 생애 가운데 유일한 영광의 시절이었다. 두보가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서 <이백일두(李白一斗) 시백편(詩百篇), 장안의 저자거리 술집에서 잠이 든다. 천자가 불러도 배에 타지 아니하고 스스로 칭하기를 신(臣)이 이 주중(酒中)의 선(仙)>이라고 한 것은 그 무렵 이백의 모습을 전해 준 것이다. 그러나 이백의 불기(不羈)의 성격이 현종 측근들의 참언(讒言)을 자초하게 되었고 마침내 궁중에서 떠나게 되었다. 장안을 떠난 이백은 뤄양[洛陽(낙양)]에서 11살 아래의 두보와 만나 친교를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지만 우정은 평생 유지되었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현종은 쓰촨[四川(사천)]으로 도망하고 숙종(肅宗)이 즉위했다. 55살의 이백은 이때 루산[廬山(여산);江西省(강서성)]에서 숙종의 동생 영왕(永王)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반란에 가담했다. 영왕이 숙종의 토벌을 받자 이백은 체포당하여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감형되었다. 야랑(夜郎;지금의 貴州省)으로 유배되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싼샤[三峽(삼협)]까지 왔을 때 사면되었다. 말년에는 강남을 주유했으며, 당도현(當塗縣;지금의 安徽省) 현령 이양빙 곁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백의 시는 두보의 시가 조탁(彫琢)이 극에 이르는 데 대하여, 흘러나오는 말이 그대로 시가 되는 시풍이며 두보의 오언율시(五言律詩)에 반하여 악부(樂府)와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했다. 예를 들어 <양인대작산화개(兩人對酌山花開)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 등은 규범에 관계없이 자유스러운 발상과 리듬을 구사한 좋은 보기이다. 또 성당(盛唐)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의 이백은 인간·시대·자기에 대한 큰 기개·자부심을 시로 노래했다. 가령 《고풍(古風)》 가운데의 한 구절인 <대아(大雅) 오래 생기지 아니하고 내가 쇠하면 마침내는 누가 말할 것이다>, 《장진주(將進酒)》 가운데 한 구절인 <하늘이 나에게 재능을 준 것은 반드시 유용하게 쓰라고 그랬을 것이다> 등이 있다. 그러나 그 기개와 자부심의 시대는 개원(開元)에서 천보(天寶)로 이행되어감에 따라 전제 독재 밑에서 심해지는 부패한 현실로 인해서 깨졌다. 그는 《장진주》에서 <인생에서 뜻을 얻으려면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야 하느니>라고 했듯이 산다는 기쁨에 정면으로 대결하였으며, 동시에 그가 말하는 <만고지수(萬古之愁)>, 즉 살기 위해 생기는 걱정을 항상 마음에 지니고 살았다. 또한 즐겨 술·달·산을 노래했고, 여정(旅情)·이별·규정(閨情)을 노래했으며, 수심을 격조높게, 때로는 잔잔하게 펼쳐보였다. 한편 이백의 시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것이 많다.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 걱정으로 이처럼 길어지고(秋浦歌)>, <장안일편월(長安一片月)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子夜吳歌)>, <고인(故人) 황학루(黃鶴樓)를 떠나 연화삼월(煙花三月) 양주(揚州)로 내려간다(황학루에서 맹호연을 보내고)>, <촉도(蜀道)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렵고(蜀道雖)>, <왜 벽산(碧山)에서 사느냐고 나에게 묻는데, 웃기만 하고 대답을 아니하니 마음은 절로 한가롭다(山中問答)>, <칼을 뽑아 물을 베어도 물은 여전히 그냥 흐르고 술잔을 들어 걱정을 지우지만 걱정은 여전히 걱정으로 남아 있다(宣州 謝眺樓에서 校書 叔雲과 전별하며)> 등은 잘 알려진 명구들이다. 이 밖에 《월하독작(月下獨酌)》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증왕륜(贈王倫)》 《파릉행》 《청평조사(淸平調詞)》 등 걸작이 많다. 이백에 대한 전설과 삽화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데 어머니가 태백성(太白星;금성)이 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그 이름이 생겼다는 출생이야기부터, 흐르는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떠내려고 하다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에 이르기까지 그가 장안에 있을 때 현종이 불렀는데 크게 취한 상태에서 환관 고역사(高力士)에게 신을 신기게 하며 즉석에서 시를 지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백 시문의 텍스트로는 당나라 위호(魏顥)가 편찬한 《이한림집(李翰林集)》과 이양빙의 《초당집(草堂集)》이 있으나 지금은 없다.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북송(北宋)시대 악사(樂史)가 편찬한 《이한림집(李翰林集, 30권)》과 북송의 송민구(宋敏求)가 편찬한 《이태백집(30권)》이 있다. 주석본(註釋本)으로는 남송의 양제현주(楊齊賢註), 원(元)나라의 소사빈(蕭士贇) 보주(補註) 외 《분류보주이태백집(分類補註李太白集)》과 청(淸)나라 왕기주(王琦註)의 《이태백문집》이 있다.


나 .두보 (杜甫 712∼770) : 중국 당나라 시인. 자는 자미, 호는 소릉.
중국 당(唐)나라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長安) 남쪽 근교의 소릉(小陵)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허난성[河南省(하남성)] 궁현[鞏縣(공현)]을 본거지로 하는 소호족(小豪族) 출신.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뜻에서 <시성(詩聖)>, 이백(李白)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 <이두(李杜)>, 당나라 말기의 두목(杜牧)에 견줄 때는 <노두(老杜)·대두(大杜)>라 불린다. 먼 조상에 진(晉)나라 초기의 위인 두예(杜預)가 있고 당(唐)의 초기 시인 두심언(杜審言)은 조부이다.

1)생애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20대 전반은 장쑤[江蘇(강소)]·저장[浙江(절강)]에서,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는 허난[河南(하남)]·산둥[山東(산동)]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이백(李白)·고적(高適)과 친교를 맺었다.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玄宗)에게 부(賦)를 바쳤으나,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해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다. 755년 44세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만나 적군(賊軍)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쯤 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이 있던 펑샹[鳳翔(봉상);장안 서쪽] 행재소(行在所)로 급히 달려가, 그 공으로 좌습유(左拾遺)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임관되자마자 곧 실각된 재상 방관(房琯)의 죄를 변호하다 숙종의 미움을 사서 휴직처분을 받았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저우[華州(화주);장안 서쪽] 지방관으로 좌천된 뒤 다음 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간쑤[甘肅(감숙)]의 친저우[秦州(진주):天水市(천수시)]로 갔다. 친저우에서도 겨우 4개월 머물고 다시 남쪽의 퉁쿠[同谷(동곡):成縣(성현)]로 옮기고, 그해 말 쓰촨[四川(사천)]의 청두[成都(성도)]에 정착했는데 이때 나이 48세였다. 다음해 봄 청두 교외의 환화시[浣花溪(완화계)] 언저리에 환화초당[浣花草堂(완화초당)]을 짓고 살았다. 지방 군벌의 반란 때문에 동쪽 쓰촨의 재주(梓州)·낭주 등에 잠시 피난한 적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친구 엄무(嚴武)의 막부(幕府)에 절도사 참모로 출사해, 그의 추천으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54세에 귀향하기 위해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양자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 곳을 전전한 뒤, 쓰촨 동쪽 끝의 쿠이저우[夔州(기주);奉節縣(봉절현)]에 이르러 강 연안의 서각(西閣)에 거주했는데, 얼마 뒤 도독(都督) 백무림(栢茂林)의 도움으로 교외의 양서·동둔(東屯)에서 관전(官田)을 빌려 농원을 경영했다. 57세에 처음으로 양쓰강에 배를 띄워 싼샤[三峽(삼협)]를 따라 내려가면서 2년 동안 후베이[湖北(호북)]·후난[湖南(호남)] 등의 물 위를 떠돌다 후난의 뇌양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쇠고기와 술에 의한 중독이 사인(死因)이라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 낸 이야기로 신빙성이 낮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둥팅호(洞庭湖)에서 숨졌다고도 한다.


2)시풍의 변화성장

두보 자신의 말에 따르면,이미 소년시절에 1000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30세 이후에 쓴 1400여 편의 시와 몇몇 산문뿐이다. 30세 이후의 시는 뚜렷한 시풍의 변화성장에 따라 4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44세까지로, 이 시기의 두보는 외부세계로 눈을 돌려 대상의 충실한 묘사와 여러 가지 사회악 고발에 열중했다. 제2기는 48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안녹산의 난 동안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으로 종래의 외부세계로 향하던 눈길을 내부로 돌려 마음속의 우수(憂愁)를 노래함과 동시에 자신의 우수를 다른 사람들의 우수와 일치시켜 다루었다. 제3기는 54세까지 청두에 살던 몇 년 동안으로 또 한번의 전환을 이룬다. 이 때 그의 시풍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선의(善意)로 향한다. 제4기는 죽기 전인 59세까지의 시기로서, 특히 쿠이저우에 머문 2년 동안은 원숙의 경지에 이른 작품을 많이 썼다. 《추흥팔수(秋興八首)》 《영회고적오수(詠懷古跡五首)》 등 칠언율시의 명작을 남겼다. 이 시기의 시세계는 많은 모순을 포함하면서도 영원히 지속한다는 새로운 철학을 확립한 진지함과 따스함이 스며 있다.


3)두시(杜詩)의 특색

두보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실성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성실해야만 한다는 중국문학정신은, 두보의 시 속에서도 아주 활발히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성실이 만들어 낸 우수를 근간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재를 취해, 인간의 생활상과 심리, 자연풍경 속에서 그 때까지 다른 시인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널리 발굴하여 자유자재로 읊었으며, 표현에 정성을 기울였다. 《경(京)에서 봉선현(奉先縣)으로 부임할 때의 영회(詠懷), 오백자》 《북정(北征)》의 2대 걸작을 포함한 장편 고체(古體)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해 시로 지은 역사라는 의미에서 <시사(詩史)>라 일컬어지며, 단시(短詩)가 정형(定型)인 금체(今體)에서는 특히 율시를 잘 지었으며, 엄격한 형식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읊어 이 시형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육조(六朝), 당 초기의 시가 정신을 상실한 장식으로 떨어지고,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데 비해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되찾으면서도 그것을 성숙한 기교로 표현해 중국 시사 상 한 획을 그었다.


후대의4)영향

그의 시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9세기 당나라 사람 원진으로, 그는 두보를 위해 묘지명을 썼다. 백거이(白居易)도 두보의 숭배자로, 그의 사회비판적 시는 두보에게 배운 것이다. 두보에 대한 평가가 시단에서 확정된 것은 11세기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 등의 칭송에 의해서이다. 시성(詩聖)이란 말도 이즈음 생긴 듯하며, 그 뒤 계속해서 중국시의 전형으로 평가되었다. 중국에서 문화혁명 이후 직접적인 조술(祖述)은 사라졌으나, 중국 최고 시인으로서의 위치는 문화대혁명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 중국에서도 확고하다. 《구당서(舊唐書)》에서 말하는 집(集) 60권은 전해지지 않고, 후세에 두집(杜集)의 원전이 된 것은 11세기 북송의 왕수(王洙)가 편집한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으로 그것의 남송간행본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가운데 송나라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에 뛰어나고, 청(淸)나라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註)》는 사실(史實)에 정통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된 것으로서 편리하다. 전집색인으로는 연경(燕京)대학이 편찬한 《두시인득(杜詩引得)》이 있고, 전기로는 타이완 원이둬[聞一多(문일다)]의 《두소릉선생연보회전(杜少陵先生年譜會箋)》이 뛰어나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