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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및 기행문

남경,황상,항주 상해 4박 5일 관광 (01)

남경 , 황산, 항주, 상해 4박 5일 관광





















2005년 11월 18일-11월 22일










남경 , 황산, 항주, 상해 4박 5일 관광(오케이 투어상품)



여행 준비 과정

2005년!

금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다.

내 나이 환갑을 맞는 것이고 아버님이 89세의 일기로 돌아가신 해 이기도 하다.

이른 봄부터 군 동기생이고 친목회원이기도 한 김효배 동기생은 나와 생일이 하루 차이다. 내가 음력 5월 12일(양력은6월 21일)고 그는 5월 13일이다.

하여 먼저 그가 회갑기념으로 캐나다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하여 동행하기로 하였지만

아버님께서 중병(위암 말기)으로 병원 출입이 빈번해 지면서 혹시나 여행 중 돌아가시기라도 하시면 급히 귀국한다 해도 장례 행사에 참석치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고 집안의 장남으로서 불효막급은 불구하고 어머님이 살고 계시는 고향마을에 어찌 얼굴을 들까 싶어 해외여행은 결국 포기하였고 회갑 일을 맞아 김효배 내외 만 해외여행을 출발하였고 우리내외는 집안 형제들의 식사 제안도 있었지만 “아버님이 사경을 헤매시는데 자식들이 모여 식사하고 술 마시며 웃고 즐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라고 사양하고 그렇다고 그냥 집에 있기도 모 하여 이상용 동기생 내외와 같이 유고시 즉시 귀향이 가능한 전라도 지역을 3박 4일 일정으로 둘러 본 적이 있다.


결국 아버님도 3개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극악 상황에서 영양제로 연명하시다가 9월 20일 금요일(음력 8월 20일) 운명 하시면서 집안 친인척들의 도움으로 상례를 원만히 마칠 수 있었다.


아버님을 잃은 슬픔도 얼마만큼 갈아 앉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동기생간에 또 다시 여행바람이 불면서 나 역시 봄에 못간 회갑기념 여행을 다시 계획하기에 이른다.


“중국에서 오악(중국에서 오악은 <동악 태산>, <남악 형산>, <서악 화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을 의미한다.)을 보면 다른 산을 볼 필요가 없고 황산을 보면 오악도 볼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속설도 있고 또 세계 자연 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하여 작년(2004년) 봄에는 장가계 절경을 보았기에 속설대로라면 장가계보다 훨씬 규모 면이나 경치 면에서 월등히 좋을 것 같아 다음 관광목표로 중국의 황산을 일찍이 마음먹은 바 있었다.


신문의 여행사 광고와 인터넷 정보를 열람하며 행선지와 경비. 세부일정들을 비교 분석하며 정보를 수집해 보니 중국의 단풍이 한국만큼은 못되어도 중국의 단풍철에 명산을 관광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여 구채구 코스와 황산 코스를 놓고 경비와 일정을 비교 해 보니 구채구의 경비가 황산의 배에 이르고 일정도 오래 걸려 동기생들과 같이 가려면 황산이 제일 적합 한 것 같아 황산코스를 집중적으로 수집 해 보니 항산 코스도 4박 5일에 경비가 여행사 마다 구구하여 적게는 39만 9천원부터 69만 9천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대한 항공이 중국 황산으로 직항노선을 개설 하면서 황산만 중점적으로 관광하는 코스가 주말(금,토,일) 2박 3일 일정으로 개설되었고 개설기념으로 39만 9천원의 최저가 상품이 출하되었는데 나에게는 가장 경제적인 관광코스로 눈에 들어왔다.


타 여행사 제품은 상해, 소주, 항주로 연결되기도 하고 또는 계림에 장가계 까지 패케이지로 묶다보니 이들 지역을 기 돌아본 나에게는 대부분의 관광지가 중복된다.

내가 보고 싶은 곳은 오직 황산이기에 황산 전문 관광코스만 마음에 들 뿐이다.


하여 동기생 송상근과 김효배에게 동행 가능여부를 전화로 알아보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 되면서 해당 여행사의 예약이 만료되어 직항노선 여행 상품은 시기를 놓치고 다음일정은 요금이 급등하면서 또 경제적이지 못하여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다시 금 신문광고를 눈여겨 보다보니 다시금 39만 9천 원짜리 상품(오케이 투어)이 나왔다. 이곳은 남경, 황산, 항주, 상해를 관광하는 코스이다. 항주와 상해는 중복되지만 남경과 황산이 처음이고 항주와 상해를 관광한지도 8년이 넘었으니 중복감은 있지만 김효배 동기생이 마음에 들어 하여 10월 말에 출발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여행사에 예약을 하고 출발 일주일 전에 잔액을 입금해야 하는데 집사람에게 문제가 발생하였다.

의치 치료가 지체되면서 여행일 이전에 치료를 마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여행을 가면 당연히 많이 움직이고 음식도 많이 먹어야 되는데 이빨 없이 출발 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 동행자와 합의하여 다시 2주일 뒤인 11월 18일- 11월 22일 일정으로 늦추게 되었다.


여권 복사본과 주민등록증 사본은 전화 예약을 하면서 기 발송한 상황이고 출발 가능성만 확인한 후 11월 9일 여행사에 계약금 20만원을 입금하였고 최종적으로 11일 확정일정표를 접수한 후 15일 잔금(768,000원)을 입금 하면서 현지 소요 경비는 미화로 환전(16만원)하고 17일 최종 여행 준비 쇼핑(김, 안주용 통조림, 팩 소주, 카메라 용 건전지 등)까지 마쳤다.


* 여행 자금 준비 내역

- 여행사 지불 경비

(기본 경비 399,000원 + 단체 비자비 30,000원+ 유류 활증료 55,000원 )× 2명 = 968,000원 지불

- 현지 지불 경비

(현지가이드 팁 50불 + 발마사지 5불 )×2명 = 110불외 현지 추가옵션 관광대비 168달러 준비

- 쇼핑 및 예비비 : 환화 40만원 준비

- 합 계 : 1,528,000원


여행 실행


2005년 11월 18일 (1일차) 금요일


새벽 4시 기상, 식사 후 04: 30 콜택시 불러 04:37분 안산시 버스 터미널 도착.

05:00시 터미널 출발. 06:30 인천공항 도착 3층 만남의 장소에서 여행사 만나 탑승수속.

일행 16명중 환갑을 맞은 우리가 중간 연배이다. 50대 젊은 사람들도 상당하다.


07:30-08:00동기생 김효배가 아침을 산다 해서 탑승수속 후 3층에서 조식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08:30 인천공항(MU580) 이륙. 남경10:40(남경 현지 시각 09:40) 도착.


가이드 안내 미흡 (동행자 인사 소개 안 시키고, 이동 간 지나가는 도시와 도로사정 설명이 없음),


남경은 강소성의 성도이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도청소재지 인 셈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고속도로 주변이나 시가지는 잘 정비되어 있는 듯하다.

초고층 건물은 별로 없지만 남경시의 역사적 배경 보다는 신흥 도시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도로의 교통상황이나 주민들의 움직인 또한 우리나라 도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하여 추가적인 설명은 생략한다.

시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은 참고 자료 #1로 첨부 한다.


추가 참고 자료 #1.난징 (南京): 야후 백과사전 자료 인용


중국 장쑤성[江蘇省(강소성)]의 성도(省都). 면적 4718㎢. 인구 235만(1998). 안후이성[安徽省(안휘성)]에서북동으로 흘러나온 양쯔강[揚子江(양자강)]이 동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지점의 우안(右岸)에 위치하고, 배후(背後)는 대지(臺地)를 이루고 있으며, 그 동쪽에는 타이후 평야[太湖平野(태호평야)]가 전개된다. 옛날에는 타이후 동안(東岸)의 쑤저우[蘇州(소주)]가 강남(江南)의 중심지였으나, 삼국(三國)시대 오(吳)나라 때, 종래의 토착 호족(豪族)과 화베이[華北(화북)]에서 들어온 유력자를 타협시키기 위해, 오히려 이 처녀지가 국도(國都)로 선정되었다. 일찍이 금릉(金陵)이라고 불렸으며, 천연의 요새지인 자연조건으로 삼국정립기(鼎立期)에 오(吳)의 국도로서 선정된 것이다. 229년 오도(吳都) 건업(建業)이 탄생된 이래 서진(西晉)시대의 약 40년간을 제외하고는, 동진(東晉)·송(宋)·제(齊)·양(梁)·진(陳)의 국도가 되었다. 건강(建康)으로 개명하여 그 성(城)은 쉬안우호[玄武湖(현무호)]의 남서부를 차지하고, 한 변(邊)의 길이가 약 2.2㎞로 거의 정방형을 이루고, 그 남쪽에는 친화이강[秦淮江(진회강)]이 흘러 그 양안(兩岸)이 상업 지구로서 번영했었다. 수(隋)가 진(陳)을 멸망시키고 건강현(建康縣)을 강녕현(江寧縣)으로 불렀으며, 당(唐)대에는 귀화(歸化)·금릉(金陵)·백하(白下)·강녕(江寧)·상원(上元)으로 빈번히 개명하였다. 당 말에는 상원의 땅을 할양(割讓)하여 강녕을 분치(分置)하고, 그 후 청 말에 이르기까지의 1000년간 상원이 북동부, 강녕이 남서부를 관할하는 체제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당에서는 양주(揚州)·장주(將州)·강녕(江寧)·승주(昇州)의 치소(治所)였으나, 오대(五代)의 오(吳)에서는 금릉부(金陵府)의 치소, 남당(南唐)에서는 강녕부(江寧府)로 개명하고, 그 국도가 되었다. 남송(南宋)에서는 건강부(建康府), 원(元)에서는 초기에는 건강로(建康路), 후에는 집경로(集慶路)의 치소였다. 1356년 명(明)나라 태조(太祖)는 이 곳을 국도로 삼고 응천부(應天部)로 개명하고 둘레에 34㎞의 큰 도성(都城)을 축조하였으나, 3대 영락제(永樂帝) 때 베이징[北京(북경)]으로 천도한 후부터는 부도(副都)로서 행재(行在)라고 불렸고 난징으로 불리게 된 것은 1441년 이후의 일이었다. 청(淸)나라 때에는 강녕부(江寧府)로 고치고 강남 성도(省都)였으나, 1667년 장쑤[江蘇(강소)]·안후이[安徽(안휘)]의 2성(省)으로 나누어진 후부터는 장쑤성으로 되고, 양강(兩江) 총독도 주재하였다. 또 1853년부터 12년간,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이 점령하면서부터 천경(天京)이라고 불렀으며, 1858년 톈진조약[天津條約(천진조약)]에 의해 개항되었다. 중화민국의 시초에 쑨원[孫文(손문)]이 이곳에서 임시총독직에 취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국민정부(國民政府)가 수도로 삼았다. 성내(城內)의 상업구(商業區)는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성남(城南)과 강안(江岸)의 하관(下關)이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 양쯔강의 수운(水運)은 물론, 후닝·닝우[寧蕪(영무)]·진푸[津浦(진포)]의 여러 철도 및 많은 자동차 도로가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고도(古都)로서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쑨원 묘소인 중산릉(中山陵), 명(明)나라 홍무제(洪武帝)의 효릉(孝陵), 링구사[靈谷寺(영곡사)], 쉬안우호[玄武湖(현무호)] 남서쪽의 지밍사[鷄鳴寺(계명사)], 성남(城南)의 위화타이[雨花臺(우화대)] 등 명승고적이 많다.


11:20-12:00 중국요리 중식인데 입장 시 가이드가 9가지 요리가 나올 것이라고 했는데 6가지 요리가 나오면서 써빙 아가씨말로 마지막이라 한다. 하여 가이드에게 통보하니 가이드가 다시 주인과 대화한 후 나머지 요리도 배식되었음. 예약을 어떻게 하였기에 이런 착오가?


12:20-13:20 중산 능원 관광

중식을 마치고 일차 관광지인 중산 능원에 도착 했다.

중산이란 이름은 손문의 아호이기에 중산 능원은 한국말로 하면 손문 선생의 묘지인 셈이다.

왕권 정치에서 공화 민주정치 체제로 개혁되어 가는 세계적 추세에 부응하여 중국을 혁명하는데 선구자 적 역할을 한 공로로 국민정부에서 국부로 추대 되면서 그의 유해를 성역화 하여 모신 공원인 셈이다.

삼민주의를 제창한 손문선생의 능묘는 시내 중심부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제당안쪽으로 손문의 동상이 있고 그 뒤 별도 묘실에 대리석으로 묘 분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모시고 있다, 야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시내를 나려다 본다. 반대로 시민은 자연적으로 우러러 보아야 할 것이고 넓은 공원 안에는 신성한 이미지를 주기위해 다른 조형물을 일체 시공치 않고 오직 그의 기상을 기리기 위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이 능원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역사적 기념관 입구가 누각 형태인데 비해 이곳은 조각형태의 조형물로 시공되었다는 것이 특이 하다. 그가 제창한 3민 주의를 상징하는 의미로 이렇게 만들었다고는 하나 1929년 북경에서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공사 한 것 같지는 않고 최근에 능원을 성역화 하면서 현대적 건축공법으로 건축된 것 같다.

평일이라 그런지 입장객이 한산 하다.

사진을 찍다보니 가이드는 앞서가고 손문선생의 드높은 기상과 업적에 배해 볼 것은 별로 없어 그의 성장과정이나 역사적 업적을 참고 자료 #2 로 첨부 한다.




추가 참고 자료 #2. 쑨원 (孫文 1866∼1925)


중국 정치가·혁명지도자. 자는 일선(逸仙), 호는 중산(中山). 광둥성[廣東省(광동성)] 샹산[香山(향산);지금의 中山(중산)] 출생. 공화제 창시자로 <국부(國父)>로 추앙되었다. 가난한 농가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하와이에서 살고 있는 형 쑨메이[孫眉(손미)]에게로 건너갔다. 그리스도교 계통의 학교에서 공부하고, 서양문화를 체득하였다. 18세 때 귀국하여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광저우[廣州(광주)]의 의학교(醫學校)에서 삼합회(三合會) 수령인 정사량(鄭士良)과 만났다. 1887∼1892년 홍콩에서 서의서원(西醫書院) 재학중 혁명에 뜻을 두고, 1892년 마카오·광저우에서 개업하였으며, 동시에 반청운동(反淸運動)을 시작하였다. 1894년 청·일 전쟁에 즈음하여 형 쑨메이 등의 지원 아래 하와이에서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여 화교(華僑)·회당(會黨)과도 제휴하고 이듬해 10월 광저우에서 최초의 거병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96년 하와이를 거쳐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청(淸)나라 공사관에게 체포되었으나, 서의서원 재학시의 옛 스승 등에 의해 구출되어 《런던피난기》를 영문으로 발행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영국 체류중에 견문을 넓히고, 유럽 선진국의 사회적 모순에 눈을 떠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착상하였다. 1897년 미국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캉유웨이[康有爲(강유위)] 등과의 제휴 및 필리핀독립원조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1900년에 제2차거병(惠州事件)을 꾀하였지만 역시 실패로 끝났다. 쑨원이 두번째 세계여행을 하는 동안에 일본에 유학한 학생이 증가하여, 그 혁명화가 진척되었는데, 중국 국내에서도 광복회(光復會)와 화흥회(華興會) 등의 혁명조직이 생겼다.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갈 무렵, 도쿄[東京(동경)]에서 여러 혁명세력을 규합하여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하고 삼민주의와 혁명방략(革命方略)을 정하였다. 그 뒤 신해혁명(辛亥革命) 때까지 중국 중·남부 각 지방에서는 10회가 넘는 반청무장봉기(反淸武裝蜂起)가 되풀이되었다. 이 동안 쑨원은 제3·4의 세계여행을 하였는데, 1911년 10월 군자금모집을 위해 미국에 체류하던 중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열강의 원조를 기대하여, 서유럽을 순회하고 귀국하였다.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되어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을 발족시켰으나, 얼마 뒤 남북화의(南北和議)에 의하여 정권을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에게 넘겨주었다. 사회개혁을 지향하였으나 쑹자오런[宋敎仁(송교인)] 암살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제2혁명에 실패하고 또다시 일본으로 망명, 중화혁명당을 창설하였는데 쑹칭링[宋慶齡(송경령)]과 재혼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제3혁명에서 위안스카이가 타도된 뒤 군벌혼전(軍閥混戰) 상태 아래서 호법운동(護法運動)을 일으켰으며, 세번째로 광저우를 중심으로 정권수립에 힘썼다. 1924년 1월 중국국민당을 개편한 뒤 중국공산당과 제휴(國共合作)하고, 노동자·농민의 결속을 도모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11월 북상선언(北上宣言)을 하고, 북상의 길에 올랐으며 도중 일본에 들러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하였고, 국민회의를 개최하기 위하여 베이징[北京(북경)]에 들어갔으나, <혁명은 아직도 이룩되지 않았다>고 하는 유촉(遺囑)을 남긴 채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죽었다. 1929년 그의 유해는 베이징 근교의 시산[西山(서산)]에서 난징[南京(남경)] 교외의 중산릉(中山陵)으로 이장되었다. 쑨원의 정치사상은 민족(民族)·민권(民權)·민생(民生)의 삼민주의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태평천국(太平天國)의 혁명적 전통을 이어받고, 19세기의 자연과학(진화론), 프랑스의 혁명사상(인민주권설), 영국의 사회학설(H. 조지의 單稅論 등)을 도입하여, 중국 현실에 적합하게 한 것이며, 민족독립과 인권존중 및 사회평등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만년에는 연소(聯蘇)·용공(容共)·농공부조(農工扶助)의 3대 정책으로 발전시켰는데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 등이 신민주주의 기본이념으로 이어받았다.


13:46-14:30 남경 대 학살 현장 관광


1937년 일본군이 중국에 진주하면서 이곳 남경에서 무려 30만이란 양민을 무자비 하게 학살 하였다.

무엇 때문에 그리 많은 양민을 이 한곳에서 살상했는지? 자군 피해에 대한 앙갚음이었는지 아니면 전력약화를 위해 유생역량을 말살 하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국민정부 수비대의 전의를 꺾기 위해 그랬던 지를 막론하고 다시 한 번 일본 놈들의 극악무도한 잔인성에 치가 떨린다.

우리나라도 전국 각처에서 수없이 죽었다. 하여 독립기념관이 있긴 하다. 허지만 왜 그런지 모르지만 생생한 피 끊는 현장은 모두 땅에 묻고 그저 그림으로, 밀 납 조형물로 박물관처럼, 조각 전시장처럼 치장하여 현장을 없애 버렸다. 현재까지 위정자들이 말로는 조국과 민족을 운운하지만 내 좁은 소견으로는 매국노들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장 그대로 보존되어야 진정한 국민교육자료가 되는 것이다.

현장을 없앤다는 것은 놈들의 잔악상에 한 꺼풀 가면을 씌우는 격이다.

자라나는 아이들 교육에 안 좋다는 이유와 국가의, 국민의 수치라는 미명아래. 중국, 일본 등 외침에 대한 상처, 동족상장의 아픈 상처들이 생생한 모든 현장을 없앤 것은 일본 놈, 중국 놈, 코쟁이 놈들에게 크게 공헌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나라가 커서 그런지, 백성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현장을 생생히 보존하고 있다.

총살 현장이며 , 불태워 죽인 현장이며 그들이 맨발로 끌려 간 길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당시에 죽은 해골까지도 기념관 지하전시실에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기념관 위주이니

옛 현장자리는 아스팔트로 포장하여 주차장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다. 해골은 화장하여 국립묘지에 안장하고 글과 사진으로만 전시할 뿐이다. 그만하자.


추가 참고 자료 #3.난징대학살 (南京大虐殺) :


일본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학살.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蘆溝橋(노구교)]사건 후 일본군은 중국에의 전면 침략에 돌입했고, 8월 13일 상하이[上海(상해)]공략에 이어 9월 5일에는 전중국연안의 봉쇄를 선언했으나 중국군의 강한 저항을 받아 계속 대량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제2차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통일전선(抗日統一戰線)이 형성되었다. 11월 20일 국민정부는 충칭[重慶(중경)]으로 천도(遷都)를 발표, 12월 13일 일본군은 수도 난징을 점령하였다. 점령할 때, 난징성[南京城(남경성)] 내외에서 일본군은 중국의 군인·포로·일반시민을 대량으로 학살하였다. 이때 난징에는 《뉴욕 타임스》지의 더딘 기자를 비롯하여 3명의 외국인 기자가 있었고 그 견문기(見聞記)가 전 세계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다음해인 1938년에



《맨체스터 가디언》지의 중국특파원 딘벌리가 편집한 《외국인이 본 일본군의 폭행》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희생자의 수에 대해서 중국 측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43만 명이라고 발표하였고, <일본군이 점령하여 처음 6주 동안 난징과 그 주변에서 살해한 총수는 20만 이상이며 그것이 과장이 아닌 것은 매장된 시체가 15만 5000명에 이른 사실로 증명이 된다.>는 판결이 났다. 학살은 무차별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악한 방법으로 자행되었고,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방화도 횡행하였다. 학살에 이른 배경으로서는 상하이[上海(상해)]작전 이후


중국군의 강한 저항으로 인한 적개심과 보급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결국은 의롭지 못한 침략전쟁을 한 일본군국주의의 소산이다. 당시 일본의 중중국파견군(中中國派遣軍)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송정석근)] 대장은 그 책임으로 인해 전후 사형에 처해졌다.

 

 

 

 

 

 


14:30-21:30 남경출발 황산까지 버스로 7시간 이동. 석식. 화계호텔 투숙


남경에서 황산까지 고속도로로 7시간 정도를 이동하는데 거의 산악지형이었다.

고속도로는 잘 관리되고 차량소통도 심심치 않을 만큼 소통되고 간혹 국산차를 만나면 동포라도 지나 가는 듯 반갑기도 하다. 중간에 휴게소도 없고 휴식시간도 없이 계속 달린다.


강소성에서 북동쪽으로 안휘성 까지 고속버스로 7시간을 달린다면 적어도 500키로 이상의 거리인데 성 간 경계가 산악지형이라 그런지 남경 시내 주변을 빼고는 대부분 산악지형이었고 경작지가 없다 보니

경사가 급한 산악에 화전 밭처럼 농사를 짓는 모습들이 지나간다. 간혹 약간의 평지에는 벼수확이 덜 끝난 들이 보이기도 하고 밭에는 어린채소류가 제절 맞은 듯 진한 녹색으로 자라고 있고 마을에는 현대식 이층 주택들의 신축 현장도 상당수 보인다. 역시 이곳에서도 개발이 활발하게 추진되는 듯하다.


황산 시가지도 산악지형이라고는 하나 분지형태 평지이고 시내는 한국의 춘천 시내를 보는 듯 중심가에 강물도 흐르고 도로도 왕복 8차선 정도로 쭉쭉 뻗어 있고 신호체제도 현대식이라 남의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규모가 상당 한 호텔에는 연못에 휘황찬란한 야간 조명까지 번쩍이고 있어 낙후된 중국이라고 생각했던 선입견이 무색해 지진다. 야간에 황산시내에 도착되다 보니 본 것은 별로 없고 신흥 도시에 도로시설과 위락시설들의 번쩍이는 불 빛 뿐이다. 석식은 별도의 식당에서 중국식으로 하고 호텔로 이동하여 호텔에서는 잠만 잔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그림이며 기념품매장이 있지만 첫날이고 휴대에도 문제가 있고 버스여행에 시달려 처다 보지도 않고 식사 후 곧바로 호텔로 이동 잠을 청한다. 호텔에 들면서 가이드는 동료고려 없이 무작위로 방을 배정한다. 호텔의 등급이 어찌되는지 ? 더운 지방이라 채난 시설이 안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히터 정도는 틀어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추운데서 샤워하다가 감기 걸릴 것 같아 샤워를 생략한다. 또한 냉장고도 없고 마실 물도 없다. 아무래도 아주 싸구려 호텔에 투숙된 듯하다.